14장
나중에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다.
끊임없이 아래로 굴렀다. 눈이 온몸에 달라붙었다. 눈앞의 세상이 자꾸만 돌아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옷을 너무 빵빵하게 껴입은 탓에 이렇게 몸을 혹사하는 와중에도 아픈 곳 하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옷이 너무 두꺼워 그 어떤 타격도 목린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데굴데굴데굴.
그러다 쿵 하고 굉장히 줄기가 굵은 나무에 부딪혔다. 그대로 비켜 나가기엔 너무 정통으로 맞았다. 더 이어서 굴러가는 대신 그 나무에 단단히 길이 막혔다. 덕분에 잎에 쌓여 있던 눈이 순식간에 곰처럼 변한 목린의 몸에 후드득 떨어졌다.
“으윽!”
얼굴에 약간 얻어맞은 목린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꽉 묶인 육신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애벌레처럼 몸통을 형편없이 빠르게 꿈틀거렸다. 있는 힘껏 다리를 흔들고 허리를 튕겨도 두툼하게 껴입은 옷으로는 하등 티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이것밖에 할 게 없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발견하고 풀어 주지 않는 이상.
“살려 주세요!”
목린이 불편하게 꿈틀거리며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시 올라갈 수 있게 이 끈이라도 풀어 주세요!”
초저녁의 숲은 스산했다. 이대로 밤이 오면 얼마나 무서울지, 얼마나 추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사방이 숲이었다. 이대로 여기서 얼어 죽어도 이상할 일 없었다. 목린은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때 저편에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봄비? 봄비니?”
목린이 절박하게 물었다. 봄비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일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낯선 이의 마필이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나무 사이에서 시꺼멓고 커다란 게 튀어나왔다.
“륭아.”
목린이 안도하여 속삭였다. 륭은 목린을 발견하고 반가운 듯 울었다. 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앞으로 달려왔다. 목을 최대한 아래로 내리고 그녀의 등 뒤에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를 아래에서 위로 당겨 올려주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반복되었다. 균형을 잃고 다시 뒤로 넘어지는 일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반 정도 올라간 목린이 놀라서 허우적거리면 륭이 얼른 자세를 약간 틀어 무너지는 그녀를 다시 고쳐 잡았다. 그러면 목린은 곧게 뻗어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대며 어떻게든 혼자 일어서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해님이 거의 종적을 감췄을 때 드디어 해냈다. 목린은 나무에 기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마음을 편히 하기엔 일렀다.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굴러떨어진 험한 산길을 올려다보며 목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륭도 우울하게 울었다. 쌀쌀한 공기가 그들을 휘감았다.
륭의 울음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까마귀의 소름 끼치는 괴성이 하늘을 누볐다. 목린은 어깨를 움츠리며 자신의 옆에 바짝 서 있던 륭과 몸을 더 가까이 맞댔다. 밤이 찾아오니 밤하늘과 륭이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마치 륭이 점점 어둠에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떡해…….”
그리고 또 때마침 목린의 배에서 꾸룩꾸룩하는 소리가 났다. 두꺼운 옷을 입고도 참 잘도 들렸다. 듣는 사람 하나 없다지만 목린의 뺨이 새빨개졌다. 륭이 목을 숙여 그녀의 배 쪽에 얼굴을 들이댔을 땐 화들짝 놀라 기겁했다.
“어, 륭아! 어디 가! 잠시만!”
다시 금방 목을 편 륭은 목린을 혼자 버려두고 암흑 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검은 몸체는 이내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목린이 긴박하게 팔을 뻗어도 이미 시야에서 지워진 륭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암흑의 먹이가 된 것처럼.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겨울 숲은 으스스했다. 목린은 울음을 삼키며 우왕좌왕 팔을 휘저었다. 륭이 떠나 버린 방향으로 용기를 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제대로 시도도 못 해 본 채 다시 옆으로 풀썩 넘어졌다. 그동안 노력했던 시간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안 돼!”
성심껏 물장구치듯 발을 파닥거리고 몸통을 들썩거려도 도저히 혼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산 정상보다 훨씬 편안해진 날씨 탓에 금방 얼굴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숨이 차고 몸에서 힘이 축 빠졌다. 어두컴컴한 숲에서 홀로 잠드는 건 죽음으로 자신을 내모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륭아!”
마지막 힘을 모아 흑마를 불렀다. 그때. 갑작스러운 힘이 목린의 몸을 바로 세워 주었다.
“어어!”
“괜찮습니까?”
그녀의 얼굴보다 좀 더 낮은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음색이다.
목린이 애써 고개를 돌리려고 노력하기 전에 그녀의 옷차림이 불편한 것을 알았는지 상대가 직접 걸어와 앞에 모습을 내보였다.
“누구십니까? 처음 보는 사람인데. 허허허허.”
하얗고 가는 수염이 턱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정수리가 목린의 가슴께 오는 노인이었다. 의심과 동정이 반반 섞인 눈으로 목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갈색 갖옷을 걸치고 있는 그는 오른손엔 지팡이를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진 채였다.
목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게 솔직히 어느 마을의 무슨 부족 출신임을 밝혀도 될지 의문이 앞섰다. 아예 처음 보는 이임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일지 아닐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서방님과 산을 오르다가 실수로 헛디뎌서 그만…….”
그래서 적당히 필요한 말만 둘러말했다.
노인은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끈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무척 더워 보이는데, 끈이라도 풀어 드려도 될는지요. 허허허허.”
“네, 부탁드립니다!”
노인이 빠른 손으로 얼른 매듭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안에 꽉꽉 조여 있던 옷이 대번에 옆으로 터지듯 떨어졌다. 목린은 가장 따뜻한 옷 하나를 걸치고 나머지는 손에 들어 올렸다. 옆에서 노인도 도왔다.
“아내가 산을 굴러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남편이라니……. 보지 않아도 뻔하구려.”
“그래도 서방님이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에요! 마침 자리에 계시지 않으셔서…….”
“보아하니 몸도 비실비실하시지 않습니까. 아내를 두고 자리를 비웠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사정이 있으셨어요!”
목린은 열심히 언영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목린의 옷을 매우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쯧, 어릴 때 누구에게 훈육을 받았길래…….”
“네?”
“부인의 부군 되시는 분 말입니다. 보통 이러면 어린 시절 잘못된 스승을 만나 뻔뻔한 마음씨를 그대로 짊어지고 가는 경우가 대개요. 제 아래에서 지낸 연놈들이라면 결코 그런 우매한 실수는 없었을 터인데.”
“아, 가르치는 일을 하시나요?”
노인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의 어둠을 가만히 서서 쏘아보았다. 목린도 의아해하며 그쪽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려 입술을 뗐을 때, 갑자기 시꺼먼 게 시야에 불쑥 나타났다.
노인은 팔을 뻗어 목린을 자신의 뒤에 세웠다. 그 간단한 동작에도 그가 어지간한 실력자임이 분명한 것이 느껴졌다. 잽싸면서 안정적이었다. 이방인을 향한 경계가 명확한 그 행위는 목린의 반가운 목소리와 대조되었다.
“돌아왔구나!”
륭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입에는 열매가 가득 매달린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다. 목린이 배고파 하길래 얼른 배를 채울 끼니를 찾아서 왔다. 호숫가를 찾기라도 했는지, 거기에 열매를 담그고 와서 아래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노인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륭은 목린을 보고 함께 반가워하기 전에 노인의 존재를 깨닫고 경직했다. 봄비를 보며 흐느적거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눈빛과 덩치로 상대를 압살하는 검은 명마가 여기 있었다. 그는 단순히 언영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 아니었다.
목린이 해명하려 애썼다.
“아니야. 이분은…….”
그런데 무서운 눈으로 노인을 째려보던 륭은 갑자기 상대 앞에 세웠던 벽을 허물어 버렸다.
“히히히힝!”
발을 신나게 다그닥거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눈이 노인을 바라보며 초롱초롱 빛났다.
목린이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 그녀의 앞에 있는 노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혹시…… 륭이냐?”
목린은 한 번도 륭의 이름을 말해 준 적이 없는데, 노인의 입에서 참 자연스럽게 그 한 음절이 흘러나왔다.
* * *
“목린아! 스승님! 목린아!”
오랜 옛 스승의 집 지붕이 이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언영은 목이 터져라 내질렀다. 이른 아침 공기가 그의 입으로 훅 들어왔다.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회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언영아…….’
‘목린이는?’
길을 확인하고 되돌아온 언영은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를 떨떠름하게 받아들였다. 일단 제일 걱정되는 목린의 이름을 내뱉긴 했지만 다인도, 다인의 말도, 봄비도, 륭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현오는 죽었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언영아, 그게.’
‘목린이 어딨어.’
‘일단 침착해. 그러니까…….’
한편 은평 또한 마찬가지로 길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갑자기 들리는 괴성 때문에 그가 고개를 들고 확인해 보니 푸른 하늘 위에서 현오의 몸이 무지개처럼 둥근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은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이런 일을 수백 번도 겪었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현오를 줍기 위해 말을 몰기 시작했다.
언영은 목린이 굴러떨어졌다는 길을 미친 듯이 내려갔다. 함께하는 봄비 또한 목린이 걱정되는지 도도함이 깨지고 불안정한 표정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그의 불안감도 팽창했다. 한겨울에 몸이 걱정으로 후끈해졌다.
인기척을 느껴서 그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을 땐, 오직 다인과 다인의 말만 발견되었다. 언영은 무너지는 정신을 겨우 붙들어 잡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륭은 여기 없었다. 다인의 말에 의하면 그 둘은 훨씬 더 내려갔다고 했다.
가장 실력 있는 마필이니 아마 목린을 따라잡았으리라. 따라잡았어야만 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영 안도할 수가 없으니. 결국 그도 흔적 없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다시 고삐를 부여잡았을 때, 마치 하늘을 가르던 독수리가 갑자기 언영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어디서 본 듯 익숙한 독수리는 입에 종이를 물고 있었다.
언영은 서둘러 그것을 펼쳤다.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이 산 중턱에 사는 언영의 옛 스승이었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건조하게 목린을 데리고 있다는 소식 하나만을 건넸다. 하나 언영에겐 이보다 더 희망찬 글이 없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달려왔다. 나머지 일행에게는 다시 산을 올라 설족의 마을에 가 있으라고 일렀다. 조만간 그들에게 방문하겠다고 일렀기 때문에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목린이 크게 힘들어하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최대한 빨리 위로 올라가 마을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목린아!”
스승의 커다란 초가집 앞에 봄비를 세우고 언영이 울부짖었다. 말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다섯 명 정도가 살기 좋은 이 집은 바로 옆에 콸콸 터지는 커다란 폭포를 두고 있었다. 벌 받을 때 저 시린 얼음물 안에 자주 빠져 봤기 때문에 언영의 눈엔 그리 아름답게 와닿지는 않는 자연 경관이었다.
목린의 신이 아래 놓인 방의 문이 덜커덩 열렸다. 그리고 언영이 찾고 또 찾던 그 여인이 두 팔을 벌리며 달려 나왔다.
“서방님! 봄비야!”
“목린아!”
언영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목린의 앞에 섰다. 너무 소중해서 감히 그녀의 몸에 손도 댈 수 없었다. 두 팔을 어색하게 흔들다가 결국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와락 감싸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입에서 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다친 덴 없어?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아팠지? 머리는 아프지 않고? 이렇게 달려도 괜찮은 거야? 서 있는 건 힘들지 않아? 내가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괜찮아요! 옷을 너무 많이 입어서 아픈 데 하나 없었어요.”
“밥은? 배고프지 않아? 목린이 밥 좋아하잖아.”
“스승님께서 맛있는 반찬 해 주셔서 괜찮아요.”
목린이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언영의 얼굴에 그제야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다행이야. 원래 뵙고 가려고 했었어. 네 얼굴 한 번 보여 드리기로 약조했었거든.”
그렇게 말한 언영은 앞에서 들리는 인기척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끼기긱 천천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목린이 있던 방 옆에서 노인이 모습을 비추었다. 언영은 목린을 놔주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
“하하하!”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허허허허 우리 강아지 왔냐고 웃으며 맞이해 주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노인은 엄격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은 산 정상에서 맞이한 칼바람보다 매정했다.
언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 * *
“구백구십…… 육…….”
아무리 실내라지만 한겨울의 날씨는 서늘했다. 하지만 목린이 들기 일천 번에 도전 중인 언영의 벌거벗은 상체에서는 땀이 번들거리다 못해 바닥에 떨어졌다. 열려 있는 창문에서 날아드는 겨울바람을 팔 벌려 환영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구백구십칠…….”
그의 바로 앞에선 스승이 흉흉한 눈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곧게 선 노인은 두 손을 뒷짐 진 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흰 수염이 바람에 살랑살랑 휘날렸다.
“구백구십팔…….”
언영의 불끈거리는 두 팔이 목린을 천장으로 번쩍 치켜든 게 이번에 998번째였다. 위에서 목린이 격려의 한마디를 던졌다.
“서방님, 거의 다 왔어요!”
“구백구십구…….”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다.
“일천!”
마지막 외침과 함께 언영이 바로 목린을 땅에 내려놓은 후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튼튼한 복근이 땅과 찰싹 달라붙었다.
목린은 얼른 제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품에 있었던 영견을 꺼내 자리에 앉아 몸을 숙였다. 언영은 옆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는 목린의 손길을 편안히 느꼈다.
“이다음에도 네 부인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일천 번이 뭐냐, 일만 번, 아니, 파경이다!”
위에서 들려오는 스승의 외침에 언영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내 아래에서 배운 놈이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이건 큰 수치다! 아무 데도 말 못 할 치욕적인 일이야!”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언영은 정신없이 바닥에 이마를 쿵쿵 박으며 사죄했다.
스승님은 그대로 매몰차게 밖으로 나가 버렸고 언영은 여전히 누운 상태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우둘투둘 성난 등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방님……. 여기 물이에요.”
“고마워.”
언영은 황급히 자리에 일어나 앉아, 목을 완전히 젖히고 며칠간 아무것도 못 마신 사람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목린은 그 모습을 옆에서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다 입술을 천천히 뗐다.
“분명 제게는 무척 다정하신 분이셨는데……. 사실 다친 곳도 없는데 너무 가혹하신 것 같아요.”
입가에 묻은 물을 팔로 거칠게 닦으며 언영이 덤덤히 말했다.
“아니야. 널 못 지킨 건 내 잘못이 맞아.”
“그저 사고였는걸요. 저 때문에 서방님께서 너무 고생하셨어요.”
목린은 온통 땀으로 젖은 언영의 상체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울퉁불퉁 두꺼운 근육들이 이전보다 더 무섭게 보였다. 가슴골과 복근 사이사이로 땀방울들이 줄줄 내려가고 있었다.
언영의 커다란 흉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목린은 갑자기 그가 마치 수줍은 양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리길래 화들짝 놀랐다. 언영은 두 팔을 엇갈리게 겹쳐 가슴을 손바닥으로 다소곳하게 덮었다. 하지만 손에 다 차지 않아 오히려 보기 더 민망한, 더 커 보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언영이 그 상태에서 물었다.
“……정말 그날,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뭐가요?”
“기억 안 나면 됐고.”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린 상태에서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귀를 붉혔다. 그 자태가 굉장히 농염하여 목린도 어색하게 반대 방향을 흘겨보며 딴청을 부렸다.
언영이 도망치듯 씻으러 나가고, 목린은 봄비와 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 말은 집 앞에 느슨하고 긴 밧줄로 각자 거리를 두고 묶여 있었다.
목린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봄비가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울었다. 늘 도도하던 봄비에게서 발견한 의외의 모습이었다.
“걱정 많이 했구나, 우리 봄비.”
목린의 마음이 감동으로 울렸다. 그녀의 손이 애정을 담아 봄비의 목을 쓰다듬었다. 봄비의 꼬리가 활발하게 위에서 흔들렸다.
목린은 륭이 있는 방향을 힐끔 곁눈질하다 이내 봄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륭이가 구해 줬어.”
그러고는 슬며시 웃었다.
봄비는 여전히 무심한 편이었다. 륭의 이름을 듣고 목린과 한 번 눈을 맞췄다가 저쪽에 있는 그를 잠깐 힐끔 노려보았다. 그게 끝이었다.
하나 그마저도 엄청난 변화였다. 원체 봄비는 륭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목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계속 속삭였다.
“어두운 저녁에 나를 구해 주려고 몸을 던졌는데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 덕분에 나를 잡아먹으려던 곰이 깨갱거리고 물러섰어.”
허풍도 빼먹지 않았다.
봄비는 여전히 무심한 척 휙 외면 중이었다. 하지만 저 태도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목린이 봄비를 모르지는 않았다.
목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싱긋 웃어 주며 자리를 떴다. 다시 방으로 들어오니 다 씻고 나온 언영이 얇은 옷을 걸치고 와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이곳에 대해선 얼마만큼 들었어?”
“어릴 때 서방님께서 이곳에서 수련을 받으셨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가로로 넓게 뻗은 벽을 한가득 차지하는 창밖으로 겨울의 자연이 모습을 펼쳤다. 얼어붙을락 말락 하는 폭포가 우아하게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차가운 바람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되레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풍경이었다.
언영은 밖을 빤히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그렇지……. 벌써 십오 년 정도 전의 일이네.”
“십오 년이요? 그럼 그 어린 나이에 이런 곳까지 오신 거예요?”
똥그래진 목린의 눈은 곧 금방 다시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녀가 두 손을 모으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많이 걱정하셨겠어요…….”
“음…….”
언영의 기억 속에는 얼른 가서 조금이라도 철들고 오라며 엉덩이를 팡팡 때려 주던 어머니밖에 없었다. 과연 그 행동에 약간의 걱정이라도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애당초 귀혈족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족에서 아이가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수련을 보냈기 때문에, 그리 위험한 것이란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때 언영의 스승이 저벅저벅 들어왔다. 언영은 흠칫 놀라며 눈치를 보았지만, 스승은 못 본 척하며 목린을 향해 웃어주었다.
“언영이 어린 시절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시겠지요, 허허허허.”
뭔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언영은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과 함께 방석 세 개를 바른 자리에 내려놓았다. 언영과 목린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스승이 자리를 잡았다.
스승은 부부가 함께 어깨를 가까이 두고 앉은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두 사람이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까 보여 주었던 분노는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그가 목린을 보며 웃었다.
“언영이는 매우 괜찮은 제자였지요. 허허허허.”
“하하, 아닙니다!”
언영은 뒷머리를 긁으며 호탕하게 답했다.
“물론 아닐 때도 있었습니다. 허허허허.”
“아…….”
부러 겸손하게 받아쳤던 언영은 스승이 뜻밖의 답을 하자 어색하게 굳었다. 스승은 목린 쪽으로 허리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부인께서 궁금하시다면 그 시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허허허허. 언영이 이 녀석의 업보가 워낙에 휘황찬란해서…….”
“맹세하건대 그중에 절반 이상은 사실 은도 짓입니다.”
언영이 끼어들었다. 스승은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대응했다. 등을 뒤로 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자를 못미덥게 흘겨보았다.
“흐으으음.”
“그리고 자면서 요에 실수한 건 절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요 녀석아, 인제 와서 아니라고 해도 근거가…….”
“저는 그 전날 밤에 비우고 왔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별로 알아듣고 싶지도 않은 대화의 향연에 목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스승이 그녀를 보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 끝을 올렸다.
“언영이 어린 시절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허허허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쎄요, 저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언영이 어딘가 불안한 듯 손가락으로 무릎을 탁탁 쳤다. 그래도 절박하게 스승을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는 은근한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두 남자의 강렬한 시선 사이에서 목린이 커다란 두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방님께선 그때도 키가 크셨나요?”
씰룩거리던 언영의 입술이 조용히 멈췄다.
“정말이야?”
“네?”
“어린 시절 나에 대해 제일 궁금한 게 그런 거야? 뭐, 다른 다양한 게 훨씬 많잖아.”
목린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저는 그저…….”
물론 그 외에도 궁금한 게 더 있냐고 묻는다면, 많았다. 언영이 어릴 때도 이렇게 마냥 쾌활한 소년이었는지. 그가 무얼 가장 잘했는지. 어릴 때 자주 울지는 않았는지. 장난은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에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진 않았는지, 등등. 끊임없이 궁금증은 부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나는 질문이…… 그거뿐이라서요.”
보아하니 부끄러운 질문을 하면 언영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목린은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그런 게 궁금하실 수도 있지!”
스승이 언영을 보며 가볍게 타일렀다. 그리고서 목린을 향해 미소 지었다.
“키야 그때도 컸지요, 허허허허. 오죽하면 밤에 잘 때 귀신이 머리를 잡아당겨서 커지는 게 분명하다고 하면서 세상이 떠나가라 오열했으니…….”
“은도 그 자식이 정말 그럴싸하게 말했단 말입니다!”
“언제까지 은도 타령만 할 거냐! 그렇게 치면 늘 함께 있던 호민이는 대체 뭐냐!”
“호민이는 똑똑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티격태격 싸웠고 목린은 얌전히 앉아 두 사람의 대거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무슨 말인지 절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두 남자가 서로에게 느끼는 친밀함이 가까이서 느껴졌기에 목린도 즐겁게 함께할 수 있었다.
스승은 설족의 마을로 새를 보내, 그곳에 있을 나머지 일행에게 목린 부부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다시 산에 올라가기엔 시간이 촉박하니, 산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마주할 수 있는 부족의 마을에서 합치자고 적어 보냈다.
스승이 반가운 것과 별개로, 갑자기 찾아온 주제에 오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내일 아침 바로 떠날 생각으로 든든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스승은 부부를 위해 갖가지 다양한 반찬들을 내왔고 행복하게 식사하는 목린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볼이 잔뜩 부풀었다.
신나게 음식을 입에 집어넣던 목린은 스승이 껄껄 웃으며 많이 싸 줘야겠다고 했을 때 정신을 번뜩 차리고 얼른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언영이 옆에서 그녀를 꼬옥 끌어안으며 스승께 고맙다고 말해 소용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언영은 먼저 밖에 나가 말을 준비시키기로 했고, 목린은 창고에서 스승으로부터 갖가지 반찬을 얼떨결에 받아 들고 있었다. 팔에 쌓이는 반찬이 하나씩 늘 때마다 목린은 머리를 꾸벅거리며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스승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좀 더 언영이에게 솔직해져도 괜찮을 텐데요, 허허허허.”
“네?”
“부인을 매우 힘들게 합니까? 그럴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허허허허.”
목린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서방님께선 제게 정말 잘해 주셔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 다행이나, 왠지 어제 부인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을 속에 꼭꼭 숨겨 놓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건…… 별것도 아니었어요. 대화는 중요하지만 그래도, 아무 말이나 다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목린은 저도 모르게 씁쓸히 웃었다.
“제가 궁금했던 건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자칫하면 서로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어차피 저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테고요.”
그랬다.
지난 봄비가 내리던 날. 언영에게 다양한 고백을 털어놓았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던 것, 그리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인 것이 하나 있었다.
모두 드러내는 솔직함을 추구하는 그를 보면서, 두 사람 사이에 영원히 허물어질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느꼈다는 사실.
뭔가, 그때의 충격은 다른 때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잠깐의 대화가 틀어져서 생긴 갈등이 아니었다. 자라온 배경, 수년의 세월이 각자를 그렇게 다르게 만들었다. 언영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도록 노력해 보겠다 말은 했어도,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다.
목린은 완전히 언영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얼굴에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언영을 보며, 아무리 그가 다정하더라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서로를 못 받아들일 텐데.
목린은 솔직해지되, 최대한 그의 마음에 들 말만 골라 하고 싶었다. 물론 그거야말로 진실된 솔직함과는 거리가 멀겠지. 하나 그에게 버려지는 것, 그가 그녀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는 것보다야 이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때, 스승이 말했다.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게 당연하지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요.”
“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났는데 어떻게 늘 행복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보고 자란 것과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텐데, 소통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저 무작정 나와 같길 바란다는 것은 어린애다운 투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신을 고립시키는, 후에 끔찍하게 후회할 행동일 뿐이지요.”
“…….”
“물론 위험할 겁니다. 상처도 있을 테지요. 실패도 잇따를 겁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맺어지지 못할 인연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함께 이겨 내고, 걸어 나가면서, 마침내 싹을 피우는 데 성공한다면……. 마치 나를 위해 태어난 듯한 인연을 만난다면……. 그거야말로 벅찬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럴 때 제가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스승은 한 손으로 자신의 수염을 천천히 쓸었다.
“제 제자여서가 아니라, 언영이는 원래 그런 쪽에 꽤 능통한 녀석입니다. 성격이 둥글둥글 호탕한 편이라, 누구와도 잘 맞지요. 모두 녀석을 좋아합니다. 제게 제일 많이 혼나긴 했지만 그만큼 제가 제일 아끼기도 하지요. 그럴 만한 녀석이니까요. 허허허허. 명석한 놈은 아니라서 자기가 잘 모르는 상황에 대해선 이렇게 하자 콕 짚어 주기 전까진 잘 모를 테지만 그래도…….”
스승은 미묘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언영이와는 앞서 말한 갈등을 몇 번 맞닥뜨려도 괜찮을 겁니다. 허허허허.”
스승은 수년 전 기억을 머릿속으로 훑었다.
‘스승님.’
‘오냐, 우리 강아지. 허허허허.’
‘여쭈어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오늘은 또 무어가 궁금하더냐, 허허허허.’
폭포 앞에 서서 경치를 완상하는 노인의 앞으로 한 어린 소년이 걸어왔다.
아이들은 모두 각각의 개성이 있지만, 특히나 그해에 맡았던 세 명의 제자들은 특히나 더 특이했다. 각자 너무나도 달라 개인의 성격이 유독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명족에서 온 호민은 매우 똘똘하고 선한 아이였다. 타고나길 공부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 물어보는 질문마다 학문적으로 흥미로운 핵심을 콕콕 짚고 넘어가는 슬기로움을 지녔다. 가르치는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편한 녀석이었다.
해야족에서 온 은도는 좀 달랐다. 머리가 영특한데, 자기가 영특하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눈빛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래도 마냥 귀여운 정도고, 저 정도의 오만함은 사내가 가질 수 있는 매력이기도 한 법인지라, 스승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지금 질문을 하러 온 소년, 귀혈족에서 온 언영이 있었다.
‘스승님께선 키가 작지 않으십니까.’
‘예끼, 네가 더 작다.’
언영이 던지는 말은 늘 그의 예상을 깼다. 대개 황당한 것들이었다. 똘똘한 호민이라면 절대 묻지 않을 질문이었고, 은도라면 바보 같아 보이기 싫어서라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영은 전혀 서슴지 않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부끄러움 없이 물어보고, 웃을 일이 생기면 바로 쾌활하게 웃었다.
언영과 대화를 나누면 즐거웠다.
처음에는 황당해했던 스승도 이젠, 이 꼬마 소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늘 기대하게 되었다.
‘그래도 저는 계속 자랄 거 아닙니까. 호민이가 그러던데 제가 우리 셋 중에 가장 클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냐, 이 녀석아.’
언영은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키가 크고 싶지 않습니다.’
‘뭐어?’
스승의 눈썹이 격하게 휘었다.
아이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어차피 은도 녀석이 키 컸다고 자랑하면, 곧바로 자기도 키 크고 싶다고 도와 달라고 떼를 쓸 게 뻔했다. 언영을 그만큼 잘 알았다.
그래도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째서? 네 어머니는 대륙 전체에서 손꼽힐 정도로 크신 분이 아니더냐? 아마 너도 그렇게 될 게다.’
‘그러니까 그게 싫습니다!’
‘왜? 분명 덩치가 클수록 더 삶에 이득이 많을 터인데.’
‘제 말이 그겁니다!’
언영이 속상한 듯 울상을 지었다.
‘지금은 손에 닿지 않는 것도 너무 많고…… 동네 형님, 누님들이 작다고 놀리고…… 불편한 것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머니만큼 커 버리면 다 달라질 텐데…….’
소년의 안면에 근심이 가득했다.
‘저는 나중에 제 마을을 이끌어 가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잊게 될까 봐 걱정됩니다.’
너무도 뜻밖의 말인지라 스승은 할 말을 잠시 잃었다.
‘…….’
스승은 대답 없이 푸른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슬슬 입이 근질근질해진 언영은 발목을 돌리며 눈치를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당연히 잊겠지.’
‘예에?’
언영이 울듯이 외쳤다. 반면 소년을 흘겨보는 스승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저번 주에 먹은 것도 기억 안 나는데 꼬맹이 시절을 어찌 기억하누. 애초에 모든 걸 기억한다면 인간이 그리 악독할 리도 없잖느냐.’
‘안 되는데…….’
언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스승은 그 모습을 또 힐끔 보며 물었다.
‘그것이 그렇게 신경 쓰이냐?’
‘예…….’
‘지금의 기억도 언젠가 저 너머로 사그라들 테지. 이런 날도 있었다고 말하면 훗날의 네가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쩌겠느냐. 인간이 타고난 망각의 동물일진데.’
그리고 스승은 갑자기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덧붙이기라도 할 듯이, 몸을 불쑥 언영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끝까지 남는 게 뭔지 아느냐?’
깜짝 놀란 언영은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그러자 스승의 검지가 그 어린 소년의 콧방울을 톡, 톡, 톡 가볍게 두드렸다. 언영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코요?’
‘냄새다.’
처음 부모 곁을 떠나 이 산에 당도했을 당시, 다 큰 것 같은 기분이었겠지. 하지만 훗날 일생을 돌이켜 봤을 때, 이 어린애들에게 지금의 기억은 희미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옛날에 키 작은 스승을 한번 뵈었다고, 그리 기억하고 끝일지도 모른다. 하나 어린아이들의 기억하는 힘이 무슨 죄인가. 그러므로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쳐 왔으면서도 스승의 목표는 아이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저.
‘난 오늘날의 추억이 흐릿한 잔상으로나마 너희에게 좋은 느낌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구나.’
‘…….’
‘너희가 나보다 훌쩍 자라, 나를 잊고, 이곳을 잊고, 나 또한 이 자리에서 사라졌을 때, 그래서 모두가 오늘을 잊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서의 향을 맡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너희들의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것. 내 소망은 그뿐이다. 나이를 먹은 너희의 삶이 지치고 고달파질 때도, 생각만 하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피난처를 하나라도 마련해 주는 것.’
‘…….’
‘그 이상은 바랄 게 없다.’
뭐, 비록 바로 그다음 날…….
‘내가 이제 너보다 크다!’
‘으앙, 스승니이이이임! 키 크고 싶습니다아아아!’
은도의 키가 살짝 더 크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로 언영이 울면서 저리 외치곤 했지만.
‘잊게 된다고 했지만, 너무 빨리 잊었군.’
스승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작고 싶다고 한 건 언제고?’
스승은 언영의 발 근처를 지팡이로 콕 찌르며 물었다. 언영은 팔을 붕붕 저으며 빙글빙글 달렸다.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크면 됩니다!’
‘이놈아!’
그래도.
언영은 특이한 소년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 즐거웠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시도 때도 없이 녀석이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 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고는 했다. 황당한 일 때문에 혼냈던 경우도 많았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수련을 끝마치기 하루 전날.
‘예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아, 스승님!’
호민과 은도는 짐을 싸느라 바쁜데, 언영은 정원에 나와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스승이 다가가자 아이가 반갑게 맞이했다.
‘이 꽃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네가 그런 거에 관심이 많았더냐?’
‘이전에 사람은 냄새를 잘 기억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아이의 눈이 천진난만하게 반짝였다.
‘이곳의 냄새를 최대한 많이 알아가서 저희 마을, 저희 집 가까이에 두고 싶습니다.’
스승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움을 겉으로 드러냈다.
언영은 그날 이후로 키가 작아지고 싶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하여 또 하나의 명멸하는 기억으로 자리 잡으리라 믿었거늘.
‘소중한 사람들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제가 약조합니다!’
언영은 이를 드러내며 개구지게 웃었다.
‘아, 그리고 스승님. 애들이랑 같이 자주 놀러 와도 되지요?’
과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스승의 얼굴에 행복에 찬 미소가 듬뿍 떠올랐다. 목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늙은이와 달리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은 부인께선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더욱 즐겁게, 많이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
목린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답했다.
목린이 그 자리에 붙박이고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스승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아까 언영이에게 깜박하고 말을 못 했는데.”
그는 창고 내부를 더 뒤적이더니 구석진 곳에서 큰 함을 꺼냈다. 작은 팔을 길게 뻗어야 할 정도로 크기가 상당했다.
“언영이가 코피가 날 때마다 마시는 약을 전에 구해 갔는데, 혹시라도 더 필요할까 싶어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걸 언영이에게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약……이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목린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그녀의 눈이 위아래로 크게 벌어졌다. 스승을 향해 묻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서방님께서…… 복용하는 약이 있으시다고요?”
* * *
륭과 봄비는 집 바로 앞에 거리를 두고 함께 있었다. 추운 날씨는 퍽 견딜 만했다.
륭은 제 검은 몸을 곧게 폈다. 최대한 우아한 자세로 목을 뻗었다. 타고나길 늠름한 몸이었기 때문에 멋진 자태를 꾸미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엄한 모습에서 오는 기상은 부족의 지도자가 끌고 다니는 흑마에 매우 걸맞았다.
륭이 갑자기 이렇게 자신의 외적인 모습에 신경 쓰는 이유가 있었다.
저쪽에서 봄비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륭은 흥분해서 벌렁거리려는 콧구멍을 힘을 주어 억제했다. 봄비가 그를 이렇게 쳐다보는 건 오늘이 난생처음이었다. 그녀는 같이 단둘이 마구간에서 지내는 수개월 동안에도 쭉 매정하기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목린을 구해 줬던 상황이 처음으로 좋은 인상을 심어 준 것이다.
륭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모른 척 딴청 부리던 자세를 그만두고 힐끔 봄비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 즉시 봄비가 새침하게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래도 륭은 괜찮았다. 봄비가 그를 쳐다본 건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아닌 척 도도하게 굴어도 언젠가 희망이 오리라.
한편 나갈 채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던 언영도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륭에게 다가갔다. 들고 있던 짐을 륭의 몸에 든든히 설치하며 봄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역시 내 아우다. 자랑스럽다.”
언영이 손바닥을 척 내보이자 륭은 앞발을 모두 들며 활기차게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언영의 손과 짝 하고 부딪혔다. 언영은 뿌듯해하며 륭의 갈기를 마음껏 쓰다듬었다.
“이제 이대로 계속 멋진 모습을 보이면 되는 거야. 넌 이 형님 말만 조용히 따르면 된다. 알겠지?”
륭이 신나게 울었다.
“내가 너 나이 두 자릿수 되기 전에 꼭 장가보내 줄게.”
기분이 좋은 륭은 짐이 무거워도 평소와 달리 불평이 없었다. 오히려 봄비의 것까지 마저 들어주겠다는 듯 활발하게 울었다. 언영은 그러다가 너 탈진한다고 계속 경고하며 륭의 발랄함을 통제해야 했다.
단단히 끈으로 짐을 묶고 있는 언영의 뒤로 문이 삐걱대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린이 나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왔어? 이제 갈까?”
언영은 목린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륭을 마주하며 끈을 마저 묶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봤던 것의 잔상이 자꾸 머릿속에 남아 미간을 팍 찡그렸다.
아까 제대로 본 게 맞나? 분명……. 다시 확인차 목린을 휙 바라보았다.
“응?”
“서방님.”
목린의 초췌한 낯빛을 본 언영이 크게 주춤거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목린의 안색은 아픈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눈에 생기가 사라지고 끝이 내려간 입술에 서글픔이 가득했다. 얼굴 전체에 핏기가 없었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목린아, 왜 그래? 그게 무슨 뜻이야? 어디 아파?”
“제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숨기셨어요?”
고개만 돌리고 있던 언영은 몸까지 목린이 서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저기, 목린아.”
“코에서 피가 얼마나 많이 나길래 약까지 먹어야 하실 정도인 거예요?”
안타까움을 토해내는 목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언영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다.
“아, 있잖아. 그건…….”
언영은 순식간에 땀이 찬 손을 잡았다가 폈다 반복했다. 입 안이 메말랐다. 당장 울기 직전인 목린의 표정을 보니 미안함과 난감함이 함께 교차했다.
“대체 무슨 병에 걸리셨길래 그래요? 스승님께서도 모르신다고만 하시고…….”
그야 스승님께 아내를 보면 흥분되어 코피가 나오니 해결책을 원한다 털어놓을 수는 없어서 아닌가. 그는 이상한 남편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물론 목린은 이미 그가 이상하다고 자주 생각했지만 언영은 알지 못했다.)
언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안심시키듯 두 팔을 뻗었다.
“목린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진짜 별거 아니야.”
“허리에 차고 계신 게 그 약 맞지요?”
목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영은 뜨끔 놀라며 허리춤에 달린 호리병들을 엉거주춤 한 손으로 가렸다. 어설픈 해명이 나왔다.
“맞긴 하는데, 그러니까 이건…….”
“저랑 있으실 때마다 틈만 나면 드시잖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너랑 있을 때만 필요한 거지. 네 생각만큼 그렇게 자주 마시는 건 아니…….”
“보통의 사람에겐 그런 약이 아예 필요하지도 않잖아요!”
“그러게 말이야.”
언영이야말로 억울했다.
“코피는 병의 증상일 것 아녜요. 병을 고쳐야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 숨기면 어떡해요!”
“그게, 도무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언영은 목린의 표정이 위태롭게 무너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다. 목린이 아련한 눈으로 속삭였다.
“……불치병이에요?”
“아니야!”
언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목린아, 너무 당황하지 말고 들어. 코피가 나는 이유는…….”
이 이상 숨기는 것은 무리였다. 이상한 변태 취급 받을까 봐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대로 가다간 그 전에 목린이 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언영은 제지하는 듯한 자세로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목린 쪽으로 걸어갔다.
두세 발자국 정도 걸어갔을까.
“이유는……. 어…….”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어…….”
“서방님?”
분명 가까이에 있는데, 목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갑자기 땅이 시야를 덮쳤다. 그의 다리가 균형을 잃고 무너진 것이다. 달려오는 소리와 비명이 함께 그의 고막을 때렸다.
“서방님!”
언영이 이를 악물었다. 목린이한테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걱정할 텐데. 입을 벌려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쑤셨다.
그의 의식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