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3권) (13/25)

13장

그날도 목린은 평소와 같은 시각에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편안해진 사람들의 얼굴이 똑같이 그녀를 반겼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그들의 중심에 놓인 술과 음식이었다.

“이게 뭐예요?”

목린의 눈이 반짝거렸다.

듣자 하니, 이 모임의 대장 역할을 도맡아 하는 분의 생일이었다. 기실 훈련 때문에 피할 뿐이지 술을 워낙 좋아하는 분이고, 하여 오늘만 잠시 본인에게 나태를 허락한 것이다.

다인은 술잔을 가슴높이로 잡아 들며 발랄하게 물었다.

“목린 님 잘 마시는 편이세요?”

“먹는 거는 다 좋아해요.”

목린이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여인들이 까르르 폭소를 터뜨렸다. 음식에서 눈을 못 떼는 목린을 향해 손짓하며 소란을 떨었다.

“뭐해. 목린 님 눈 빠지시겠다. 얼른 먹자고.”

얼마 뒤, 날씨 좋은 여름날 바닥에 사이좋게 둘러앉은 여인들에게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 가져왔던 술은 이미 다 떨어져 다시 새 걸 잔뜩 들고 왔다. 그마저도 모두 벌써 바닥이 보이기 시작해 다시 가져와야 할 지경이 되었다.

“목린 님, 목린 님.”

누군가가 혀 꼬인 목소리로 목린을 불렀다.

처음엔 제일 구석에서 조금만 얻어먹겠다, 맛만 보겠다 했던 목린은 어느새 가장 가운데에 앉아 귀혈족 여인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있었다.

“네?”

대답하는 목린의 눈동자 또한 흐리멍덩했다. 순진한 그녀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귀혈족을 눈치채기엔 너무 취해 있었다.

“초야 때 한 달 동안 집에서 안 나왔잖아요. 그때 얘기 좀 해 주세요.”

“맞아. 그때 주언영이 얼마나 못살게 굴었어요?”

사방에서 여인들이 키득거렸다. 목린이 부끄러워할 것 같아 물어본 적은 없지만 단언컨대 마을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주언영이랑 각방 쓴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에요?”

“언영이 요즘 표정이 끔찍하던데 알고 계시나요?”

사방에서 날아오는 질문을 귀로 주워 담으며 목린은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저……느은……”

“천천히 하나하나 답해 줘요.”

“그래요. 우선 한 달 동안 초야부터.”

모두가 목린이 풀어 줄 이야기보따리를 보다 더 가까이서 듣기위해 몸을 그녀 가까이로 기울였다. 목린은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인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네? 목린 님?”

“벌써 쓰러지면 안 돼요!”

“주언영이 그때 뭘 했나요?”

갑자기 목린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시뻘게 진지 오래인 볼을 부풀렸다. 바닥을 한 번 탕 내려치며 살짝 혀가 꼬인 말투로 외쳤다. 그리고 뭐가 그리 짜증 났는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서방님은 한 거 없어요!”

그렇게 외치고는 자신 있게 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다소 거만한 투로 내뱉었다.

“다. 전부 다아. 제가.”

물론 눈이 다 풀려서 의도한 당당함이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자신 있게 주변 사람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귀혈족 여인들은 충격을 받아 잠시 몸을 굳혔다.

“……와하하하!”

그리고 한꺼번에 등을 젖히며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목린 님 밤에 그런 분이셨어요?”

“너무 멋있다!”

“주언영이 못 헤어 나올 만하네.”

환호성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히히…….”

목린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또 한 잔을 목을 뒤로 젖히고 한 번에 들이켰다. 끝내주는 맛이었다.

“그러면 각방은 어쩌다가 쓰게 된 거예요?”

“각방이요오?”

“네. 그건 단지 소문인가요?”

“맞아요. 소문 아니에요. 서방님이 자꾸 제 발가락 빨아서……. 더러운 지지라서 제가 싫다고 했어요.”

“맙소사.”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목린은 이제 병째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거만한 손짓으로 관중을 압도했다.

“그래서 서방님으은, 각방 쓰면서도 밤에 날마다 와서 발가락 하나만 빨게 해 달라고 계속 졸라요.”

“어머나…….”

“그러면 제가 문만 빼꼼 열고, 엄지발가락을 내밀어요. 그러면 서방님이, 그걸, 막, 빨아요. 더럽게에.”

“에구머니나…….”

아무도 목린이 술에 취하면 허풍을 떤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언영이 소식을 듣고 찾아간 훈련장은 엉망이었다. 이제 막 해가 모습을 감춘 상태에서, 스무 명 남짓 되는 여인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주저앉았고, 그 주변에 빈 술병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현장을 바라보던 언영은 그 틈에서 가장 익숙한 사람을 찾아냈다.

“야.”

언영은 엎어져 있는 이들 중에 가장 친한 사람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일어나.”

“뭐야!”

“아악!”

누군가에게 몸이 잡히자 다인은 반사적으로 다리를 뻗어 가장 가까이 있는 남성의 사타구니를 후려쳤다. 언영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현오가 대신 맞았다. 단단한 갑옷도 무용하게 만드는 그 힘에 현오는 비명을 내질렀다. 제 소중한 곳을 붙잡고 사방팔방을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그 소리에 다인은 반쯤 정신을 차렸다.

다인은 언영을 빤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어……. 발가락.”

“내가 발가락으로 보이냐?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그래.”

“발가락, 색시 찾으러 왔어?”

다인이 음흉하게 웃으며 물었다.

“목린이가 여기 있어?”

언영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목린이 언영을 마주하기 무섭다는 이유로 각방을 쓰게 된지 며칠이 지났다. 그녀는 언영의 사과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날의 기억 때문에,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는 각방을 제안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목린에게 언영은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목린이를 또 겁먹게 할까 봐 언영은 목린과의 대면을 최대한으로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고, 주변에서도 그의 낯빛을 보고 무슨 일이 있냐고 자주 물어왔다. 그는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중인데 목린은 여전히 마음이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늦은 밤에 목린이를 마주하기는 아무래도 껄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있어?”

“음…….”

허둥대는 언영과는 달리 다인은 느긋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목린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서 어떤 조그만 여인이 두 팔을 수평으로 옆에 곧게 뻗고, 같은 자리에서 빙빙 귀엽게 돌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고 있는 땋은 머리 덕분에 어두운 시간에도 누군지 쉽게 판별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목린을 발견했다. 다인이 저기 하고 손으로 가리킴과 동시에 언영의 몸이 날아가듯 움직였다.

“목린아!”

“와아아.”

언영은 발바닥에 불이 붙은 양 뛰어갔다.

목린은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면서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속 도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와아아아.”

“목린아! 목린아. 집에 가자.”

“와아아.”

언영이 다급히 목린의 몸을 안고 들어 올리려고 해도 실패했다. 멀리서는 마냥 사랑스럽게만 보였던 그 자세가, 가까이 달라붙으니 위협적으로 변했다. 조금만 다가가면 즉각 팔을 몸통에 얻어맞았다. 언영은 등을 뒤로 빼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많이 마신 거야.”

“어!”

빙글빙글 돌던 목린은 언영의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췄다. 팔을 양쪽에 벌린 채로, 목린이 언영을 올려다보며 눈부신 햇살과 진배없이 웃었다. 언영이 숨을 들이켰다.

“서방님이다!”

더한 일은 그 이후에 연속되었다. 목린은 한껏 벌린 팔을 언영의 허리에 두르고 그의 가슴팍에 자진해서 폭삭 안겼다. 눈만 위로 빼꼼 내밀고 나 잘했냐는 듯 초롱초롱하게 올려다보았다.

“아…….”

언영의 목 뒤에서 긁는 듯한 신음이 터졌다. 며칠 동안 삼켜 왔던 욕정이 한꺼번에 터졌다.

“서방니이이임…….”

목린이 간드러지게 칭얼거리며 엉겼다. 언영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호리병을 움켜쥐었다. 몇 번이나 놓칠 뻔했다. 제대로 꽉 쥐고 난 뒤에는 목을 뒤로 젖히고 한 번에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 와중에도 자연스럽게 기대오는 목린을 느끼며 그는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을…… 집으로 보내야…….”

언영은 차마 목린을 내려다보지 못하고 정면만 보며 얼간이 같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현오가 마지못해 다가와 선행을 자처했다. 그가 한 손을 들며 말했다.

“야, 내가 할게.”

“그래도…… 그래도 되냐?”

“그래. 너 지금 좀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정말 고맙다. 잊지 않을게.”

언영은 현오의 말에 부정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목린을 마주 안았다가 몸을 숙여 그녀를 그의 어깨 위에 둘러업었다.

“어어어?”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목린이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언영은 그런 그녀를 어화둥둥 토닥여 주며 발걸음을 뗐다. 목린의 몸에 잔뜩 밴 술 냄새마저도 지금은 황홀하게만 느껴졌다.

* * *

“몸이 떠다니는 것 같아요, 서방님…….”

“그래, 그래.”

방에 들어와서도 목린은 몽롱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언영은 대롱거리는 목린의 몸을 토닥이며 호응했다.

“저 하늘을 날고 있어요. 기분이 정말 좋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 기분도 좋아.”

언영은 목린을 침상 위에 바르게 눕혔다. 옷을 하나하나 벗겨 주니 목린이 귀엽게 히죽거렸다. 앞니를 드러내며 실실 웃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언영의 얼굴에도 편한 웃음이 잡혔다.

쪽.

갑자기 목린이 상체를 들어 언영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

난생처음 벌어진 일에 언영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돌덩이 같은 전신에 소름이 사아악 돋아났다.

본인이 한 짓의 정도를 알고는 있는지 다시 몸을 눕힌 목린은 언영을 올려다보며 순진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언영은 허겁지겁 거칠게 목린에게 입술을 부딪쳤다. 각방 같은 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어떻게든 입술을 떼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는 자신의 옷을 먼저 벗어 던졌다. 너무도 급하여 찢어 뜯듯 탈의했다. 그렇게 벗겨진 옷은 아무 데나 뒤에 툭 던져 버렸다.

함께 서로를 끌어안고 반 바퀴를 돌았다. 목린이 계속 헤헤 웃으며 언영의 품에 달라붙었다. 언영에게 더 오라고, 더 가까이 붙어 달라고 앙탈을 부리듯 팔을 뻗었다. 언영은 진심으로 기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목린이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워, 응? 이렇게 귀여우면 어떡해?”

그는 목린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고 얼굴 전체에 입술을 끊임없이 찍었다. 목린은 언영의 등을 더듬더듬 만지다가 아내 그의 근육으로 꽉 조여진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언영은 기분이 미칠 것같이 좋아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에서 절로 탁한 신음이 터졌다. 목린의 옷을 벗기며 작고 하얀 몸을 더듬고 주물렀다. 귀여운 소리를 내며 목린이 적극적으로 응했다.

“조절…… 안 될 것 같은데, 목린아.”

언영은 목린과 이마를 맞대고 발정 난 짐승처럼 헐떡이며 말했다. 언제는 조절이 됐겠느냐마는 이번엔 정말 실수로 관계 중에 목린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뻗어 나갔다.

그러나 목린이 지금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언영의 이성을 붙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목린을 굳이 품는 건 딱히 마음이 가는 행동은 아니었다. 제정신일 땐 그가 무섭다고 피해 오던 목린이 아니던가.

언영은 목린을 내려다보며 꼴깍 침을 삼켰다. 그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지금의 목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극적이었다. 배시시 웃고 있는 얼굴은 볼을 아작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어여뻤고, 조금 전 물고 빨아서 그런지 입술 색은 야릇하게 불긋했다. 머리카락은 황홀한 모양으로 풀리기 직전이었으며, 반쯤 벗겨진 옷 틈으로 통통하고 맛있는 젖꼭지가 모습을 봉긋 내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좋다고 실실 웃었다. 언영의 성기는 이미 일어서서 저 위에 듬뿍 싸게 해 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언영이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하아.”

짧은 인생 동안 이 정도의 고뇌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목린아.”

“네에?”

결국.

“……목린아. 힘들었으니까 이제 자자.”

결국, 이성이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당장이라도 넣고 금수처럼 흔들고 싶은데 저 몽롱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 너무 미안했다. 우리 목린이 정신 멀쩡할 때 많이 예뻐해 주고 사랑한다 해 줘야지. 이건 아니었다.

언영은 벗겨지다 만 목린의 옷을 다시 천천히 인내심을 갖고 입혀 주었다. 더러운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려 하니, 눈을 질끈 감고 애써 그녀의 몸을 쳐다보지 않았다. 목린은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 됐다.”

조금 전에 보았던 목린의 봉긋한 가슴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나중을 생각했을 때 이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나을 것이다. 언영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새기며 다시 옷을 입은 목린을 편한 자세로 눕혔다. 그는 팔을 쭉 뻗고 목린의 머리를 그 위에 편하게 대 주었다. 그녀의 옆에 따라 누웠다.

“너 잠들면 바로 나갈게.”

“…….”

목린은 천장을 바라보고 멀뚱히 누웠다. 언영은 목린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그녀의 몸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목린의 눈이 아까보다 훨씬 초롱초롱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런 건지 언영은 궁금해졌다. 그때 마침 목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서방님.”

“응?”

“서방님 가슴 큰 여자가 좋아요?”

머리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언영의 정신이 맑아졌다. 오늘 밤엔 잠 다 잤다. 눈을 번뜩 뜨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건 또 무슨…….”

“단월도에 있을 땐 제 가슴이 꽤 크다고 느꼈는데 여기 오니까 아니에요. 여기 있는 모든 남자들 가슴이 다 제 것보다 큰 것 같아요.”

옆에 누운 목린은 덮고 있는 이불을 쓰다듬으며 시무룩하게 털어놓았다. 말을 마친 그녀의 귀여운 입술이 우울하게 삐죽 내밀어졌다. 넋 놓고 구경하던 언영의 입술이 떨떠름하게 벌어졌다.

“왜 갑자기……. 아니, 잠깐만.”

너무 어이가 없어 혼을 놓고 있었는데 덕분에 언영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지나갈 뻔했다. 뒤늦게 예리하게 치고 들어가 추궁하듯 물었다.

“그런데 다른 놈들 가슴은 왜 보고 있어?”

“모두 덥다고 웃통을 벗고 있는데 어떻게 안 봐요…….”

목린은 여전히 뽀로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언영에겐 그다지 만족스러운 답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그쪽으로 고개를 안 돌리면 되잖아? 다른 놈들 걸 왜 보고 있어. 내 게 있잖아. 내 거만 마음껏 봐.”

언영은 근육밖에 없는 제 커다랗고 불뚝한 가슴을 목린의 눈앞에 바로 갖다 댔다. 시야가 전부 그의 가슴으로 꽉 찼는데도 목린의 반응은 크지 않았다. 초조해진 언영은 더 이를 악물고 목린의 눈앞에서 구애하듯 가슴을 살짝 흔들었다. 코가 언영의 뚜렷한 가슴골에 짓눌려도 목린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외려 술에 취해 멍한 눈과 함께 조곤조곤 이은 말 한마디가 언영의 이성을 무참히 잡아 뜯어갔다.

“하지만 서방님 가슴은 다른 남자들 것보다도 커서 제가 보면 주눅 들어요…….”

언영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주눅 들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커다란 가슴은 언영에게 성실과 근면의 상징이었다. 한 번도 흉부에 대해 안 좋은 소리 하나 들어 본 적 없었다. 늘 자랑스러웠다.

“미, 미안해, 나는…….”

언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번도 그런 관점에서 상상해 보지 못했던 탓이다.

술에 취한 목린은 이제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몸통 아래에서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쓱쓱 닦고 있었다.

“흐윽…….”

“미안해. 가슴이 너무 커서…… 미안해. 응?”

언영이 목린을 다정히 안으며 말했다. 팔이 모이는 과정에서 언영의 커다란 양쪽 가슴이 모여 무척 선명한 골이 잡혔다. 목린은 겨드랑이 아래부터 어떻게든 끌어모아야만 저 모양이 가능했다. 훨씬 서글픈 얼굴로 언영의 가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언영은 어색하게 몸을 살짝 뒤로 뺐다. 하지만 벌거벗은 가슴은 가려지지 않았다.

“흐윽, 서방님.”

“으, 응?”

목린이 언영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방님 가슴이 제 가슴보다 큰 게 확실해요.”

“……뭐?”

언영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것 봐요. 제 가슴은 이만큼 잡히는데 서방님 가슴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행복에 심취해 있던 목린은, 어느새 깊게 시무룩해졌다. 술에 취해 눈에 힘이 풀린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본인의 말랑한 가슴을 쥐었다.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그리 음탕하게 구는 행위는 사내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 모습을 멀거니 정신이 빼앗긴 채 구경하느라, 언영은 잽싸게 날아오는 그녀의 손을 막지 못했다. 탁, 하고 목린이 언영의 한쪽 가슴을 쥐었다.

사실 쥐었다는 표현이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언영의 가슴은 목린의 손에 다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할 새도 없이 당해 버린 언영의 얼굴이 순진한 소년처럼 벌겋게 익었다.

“봐요. 훨씬 커요.”

“자, 목린아. 진정하고…….”

언영은 목린을 급하게 떼어 내 다시 제자리에 바르게 눕혔다. 목린이 스스로 제 가슴을 쥔 자극적인 모습을 애써 머릿속에서 도려내며 최대한 차분한 척 말을 이었다.

“그, 그건 네가 정면으로 누워 있고 난 아니라서 그런 거야. 이제 자야지, 목린아.”

언영은 다시 목린의 자세를 제대로 잡아 주고, 이불도 입까지 덮어 주었다. 흐느적거리는 목린은 다행히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 아니, 따르는 듯했다.

“다음 날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거야.”

“…….”

“그런 고민 하지 않아도 돼. 내 눈엔 내 색시 가슴이 제일 예뻐. 알았지?”

“네…….”

목린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며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언영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래, 목린아. 그러면 이제 자자. 내일 만나자, 알았지?”

눈과 코만 빼꼼 밖으로 내민 목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언영은 몰래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손으로 닦았다. 그런 다음 목린과 뺨을 맞대며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녀의 손을 조물조물하며 귓가에 계속 잘 자라고 속삭여주었다.

목린의 닫힌 눈꺼풀은 오랜 시간 다시 열리지 않았다. 목린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옆에 누워 있던 언영은 이제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지, 아니면 욕심대로 조금만 더 여기에서 목린의 자는 모습을 구경할지 고민에 빠졌다. 새근새근 잠든 목린만 봐도 가슴이 뻐근해지고 사타구니가 절로 찌릿찌릿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목린의 눈이 번뜩 무섭게 뜨였다. 언영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너무 당황한 언영이 그대로 휩쓸렸다.

목린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닌 것 같아요. 저도 한 번 옆으로 누워 볼 테니 다시 가슴 잡아 봐요.”

그녀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됐어! 이게 뭐 중요하다고…….”

언영은 목린의 어깨를 꾹꾹 누르며 다시 침상에 눕히려 애썼다.

“이 마을 통틀어서 서방님 가슴이 제일 큰 것 같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 목린아!”

목린은 언영이 정성껏 입혀 줬던 유(저고리)를 다시 뜯어 버리듯 벗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목린의 탱글탱글한 하얀 젖가슴이 바깥으로 해방되고 언영은 멍하니 그 모습을 누워서 바라보았다.

목린은 헐레벌떡 일어나 앉더니 언영의 허리에 올라타 앉았다. 언영이 경악하며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린의 부드러운 엉덩이가 그의 물건 위에 앉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고샅 아래에 파묻힌 그의 성기가 울컥 반응했다.

“목린아, 거기 앉으면 안…… 아아!”

그가 목을 뒤로 꺾으며 야릇한 신음을 토해냈다. 흥분한 그의 허벅지가 달달달 떨렸다.

“흐흑, 흑.”

이어서 목린이 울면서 자기 가슴을 두 손으로 열심히 주무르기 시작했을 때 언영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나 싶었다.

“흐윽…….”

목린은 가는 허리를 나긋나긋하게 흔들면서 복숭아 같은 뽀얀 가슴을 귀엽게 주물럭거렸다. 언영의 숨이 거칠었다. 뇌가 터질 것 같았다. 몸이 아픈 사람처럼 떨렸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사실 매우 잘 알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방심하고 황홀한 모습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목린의 손이 그의 가슴으로 착 내려왔다.

“……?”

“흐윽.”

언영의 가슴 양쪽에 목린의 두 손바닥이 안정적으로 안착했다. 그리고 목린은 그의 가슴을 성실하게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목린아……!”

가슴 위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커……. 확실히 더 커…….”

“목린아! 아!”

“나쁜 서방님.”

흐느끼는 목린은 점점 더 손가락의 움직임을 빠르게 했다. 언영은 목을 뒤로 젖히고 헐떡였다. 입에서 부끄러운 신음이 마구 쏟아져 나갔다. 목부터 이마까지 전부 피가 쏠려 새빨개졌다.

“아, 목린아, 그만! 아아!”

신호가 오고 있다. 언영은 곧장 알았다. 코에 느낌이 온다.

언영은 절박하게 옆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닿는 호리병이 없다. 안 돼, 안 돼! 언영은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헐떡거렸다.

“목린아, 하아아, 그만……!”

“정말, 커……. 손에도 안 들어가.”

목린은 그녀의 아담한 손에 다 들어가지 않는 불룩한 가슴을 원망스럽게 보며 울었다. 입술을 앙다물고 그것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눈물로 젖은 그녀의 눈이 이어서 그 위의 젖꼭지로 향했다.

“목린아, 안 돼!”

목린이 입을 살짝 벌리고 천천히 얼굴을 숙이기 시작했다. 언영이 기겁하며 상체를 약간 틀었다. 하지만 목린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손으로 그의 몸을 더 짓누르고 혀끝을 밖으로 살짝 내밀었다. 언영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가 처절하게 외쳤다.

“안 돼!”

뽈록 튀어나온 언영의 젖꼭지 위에 목린의 혀가 닿았다. 괴성과 함께 언영의 코에서 검붉은 폭포가 콸콸 터졌다.

* * *

누군가가 머리를 양쪽에서 쥐고 벌려 찢는 느낌이었다.

언영의 맨가슴에 엎드린 채 잠이 든 목린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이목구비를 그의 몸에 비볐다.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해 마음이 편해지게 해 주는 그의 체향이 의지가 되었다. 각방을 쓴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머리가 많이 아팠다. 어제 분명히 많이 마시기는 했는데, 얼마나 마셨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마셨는지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사람들이 뭔가를 물어봐서 열심히 답해 주기도 했는데, 모두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좋은 아침이에요, 서방님…….”

그렇게 이마에 손을 짚으며,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을 날을 예상하고 목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언영의 얼굴을 눈에 담은 목린의 입에서 바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방님! 서방님! 어떡해! 서방님!”

잠든 언영의 인중과 입, 턱, 그리고 양쪽 뺨이 모두 시뻘건 피로 가득 젖어 있었다. 코에서부터 목까지 온통 시뻘겋다. 그가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젓는 과정에서 피가 아무 방향으로나 주룩주룩 흘러내린 것이다.

목린은 울부짖으며 쥐죽은 듯 자고 있는 언영의 몸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겐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참혹한 사고였다.

다행히 언영은 금방 깨어났다. 그는 목린의 얼굴을 눈에 담자마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바로 볼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코 아래 얼굴이 전부 피로 젖어 있다는, 당사자에겐 분명 끔찍할 말에도 딱히 큰 반응이 없었다.

목린은 언영이 극구 만류했음에도 얼굴을 닦을 물을 퍼 왔다. 그리고 벅벅 얼굴을 문질러 닦는 그의 모습을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많이 흘리면서도 왜 그냥 누워 계신 거예요’라고 물었지만 언영은 멋쩍게 눈을 피할 뿐 답을 주지 않았다.

그가 물어본 것은 딱 하나였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목린은 못한다고 답했고, 언영은 ‘그러면 됐어.’라고 바로 대화를 끝맺었다.

갑작스러운 사고 탓에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세워져 있던 벽이 모두 허물어졌다. 목린은 언제부터 각방을 썼냐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옆에서 언영의 팔을 잡았다. 오히려 그가 움찔 놀랐다.

“서방님, 진짜 어디 크게 아픈 거 아니에요? 의원님은 찾아가 보셨나요?”

“…….”

답 없이 바닥만 내려다보는 언영 때문에 목린은 초조했다. 무슨 생각에 푹 빠져 있는지 그의 낯빛이 심각함에 잠식되어 있었다. 목린은 가만히 앉아 입술을 뻐끔거렸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서방…….”

“추운 지방에 가자.”

참다못해 목린이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 난데없이 언영이 비장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곧게 편 허리와 딱딱한 낯빛을 보면,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도 이보다 심각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너무도 뜬금없는 발언에 목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추운 지방이요?”

“응. 남자들이 옷을 다 갖춰 입는 그런 곳. 그래서 가슴을 보일 리 없는 그런 곳. 앞으로 매해 여름마다 나갔다 오자. 다음 주에 당장 가자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목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언영을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그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핑계나 변명을 급하게 나열하는 투와 같았다.

“어디든 데려다주겠다고 내가 약속했잖아. 그래서 그래. 정말이야!”

목린은 눈을 깜박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언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심각하게 쳐다봤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또 무슨 변명을 대야 할지 고민하느라 턱이 빳빳하게 굳었다.

마침내 목린이 입을 열었다. 땡글땡글한 그녀의 얼굴에는 다행히 긍정적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도 맛있는 음식 많아요?”

“물론이지!”

언영은 고민도 하지 않고 몸을 들썩이며 답했다. 목린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는 좋아요.”

언영은 당장이라도 목린을 끌어안으며 고맙다고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목린의 표정이 다시 급격히 어두워졌을 때는 쓰디쓴 참담함을 맛보았다.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요양으로…….”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언영은 팔을 흔들어 대면서까지 전신을 사용하여 목린을 설득했다.

목린의 얼굴에 찝찝함의 여흔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하나 완전히 의심을 거두게 하는 건 언영이 진작에 포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네 얼굴만 보면 몸이 흥분되고 번식 욕구가 자극되며 그게 코에서 증명된다는 사실을 목린에게 덤덤히 털어놓기에도 민망했다. 무엇보다 귀혈족인데 너무 허약한 거 아니냐며 목린이 실망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런데 얼마나 추운 곳이에요?”

“음, 일단…….”

데려가고 싶은 곳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함께 가고픈 장소가 있었다. 그곳과 여기를 왕복하는 과정에서 또 작고 인심 좋은 마을 몇 군데를 거쳐 갈 수 있고……. 기간을 고려해도, 분위기를 고려해도 딱 알맞았다. 언영의 얼굴에 들뜬 미소가 자리 잡았다.

“따라와 봐.”

아직 겨울옷을 입으려면 멀었기 때문에, 안 쓰는 방에 있는 궤에 고이 보관해 놓았다. 언영이 그 무거운 상자를 들어다가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대충 훑어만 봐도 안에 의복이 굉장히 많이 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꼭 걸쳐야겠고.”

언영이 가장 위에 있던 옷을 펼쳐 들었다. 지금 보기엔 무척 더워 보이는, 털이 북슬북슬한 검은 갖옷이었다. 목린은 그의 살짝 뒤에 앉아 얌전히 건네받았다.

“이것도. 아, 이것도 입어야 해.”

그 아래에 차례로 개어진 옷 두 벌을 보자마자 언영이 말했다. 목린을 힐끔 쳐다보며 바로 내어주고, 계속 궤의 내부를 탐색했다.

“추울 테니까 얘도 꼭 필요해.”

토시를 발견하자마자 또 뒤로 건넸다. 여전히 궤 안에 수북이 쌓인 게 많아서 목린을 보지 않고 손으로만 전해 주기 시작했다.

“얘도 필수야. 동상 걸리고 싶지 않으면. 그리고 이것도.”

“서방님…….”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어느 순간부터 언영은 옷을 뒤로 휙휙 던져 주고 있었다. 마지막 미세한 부름을 끝으로 목린은 말이 없었다. 얌전히 잘 받고 있겠거니 하고 언영은 편하게 생각했다. 안에 든 건 모조리 빼냈다. 모든 게 다 목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목린에게 뭐든지 다 퍼 주고 싶었다.

언영조차도 두 팔로 들기 버거웠던 묵직한 궤가 어느새 텅텅 비었다.

언영은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손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목린을 향해 마침내 몸을 틀었다.

“됐다. 이제 한 번 입어 볼…….”

목린은 보이지 않고, 커다랗고 시커먼 게 옆에 눌러앉아 있음을 확인한 언영이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뭐, 뭐야.”

“…….”

언영이 돌아보지도 않고 휭휭 던져 준 옷을 몸으로 받은 목린은 어느새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언덕이 되어 있었다. 굽힌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손가락만 두꺼운 옷들 사이에서 빼꼼 드러났다. 살아 있는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목린의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언영이 얼른 옷을 허겁지겁 파헤쳤다. 양손을 이용해 찢어 벌리듯 움직이자 목린의 눈 한쪽이 보였다.

“목린아!”

“서방님……. 계속 불렀는데…….”

“미안해!”

언영이 더 넓게 벌리자 나머지 눈 한 짝과 귀여운 코도 간신히 바깥 공기를 받았다. 목린의 두 눈이 언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흠칫 놀란 언영이 등을 약간 뒤로 빼냈다.

그리고…….

“너무 귀여워!”

언영은 목린의 양쪽 뺨을 쥐고 잡아당겼다. 목린의 머리 위에 얹어진 올 여러 벌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언영의 입술이 뽈록 튀어나온 목린의 콧방울을 쉬지 않고 쪽쪽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빨아 댄 뒤 그는 목린과 눈을 맞추며 행복하게 외쳤다.

“이러고 가면 따뜻하겠다!”

* * *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밖에 나가는 일이 잦은 언영에게 여행이란 전혀 어렵거나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짐을 싸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목린을 옆에서 도와주고, 어디에 가서 뭘 할지, 어떤 재미난 걸 볼 수 있을지 틈만 나면 들려주며 목린의 기대를 높였다. 설명을 들으며 어느새 두 눈을 반짝이는 목린을 보면 주체할 수가 없어 중간중간 호리병을 비워 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동나는 것 같아서 언영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월진에게도 허락을 맡았고, 떠나기에 앞서 처리해야 하는 일은 말끔하게 끝낸 뒤였다. 모든 과정이 완벽했다. 더는 커질 일이 없을 것 같은 그의 가슴은 뿌듯함으로 인해 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어제 오후에 모든 것이 변했다.

“나하고 목린이 여행에 네가 왜 같이 끼어드는데.”

“그 좋은 곳 두 사람만 누릴 수 있게 내가 가만히 놔둘쏘냐. 네가 저번에 목린 님 취하신 날에 말했잖아,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기회를 써먹는 거지.”

이른 아침부터 목린과 언영의 기와집 앞에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가 둘 있었으니. 바로 언영의 두 친우 현오와 은평이었다. 현오는 어제 갑자기 나타나 이번 유랑에 끼겠다고 난데없이 주장했다. 그래도 설마설마했는데 이렇게 당당히 집 앞에 나타날 줄은 언영도 몰랐던 차다. 게다가.

“그러면 은평이는 왜 따라오는 건데.”

현오뿐만이 아니라 조용하고 자리를 알아서 피할 줄 아는 은평마저도 합세했다. 그 또한 이해되지 않았다.

“나랑 너, 목린 님 이렇게 셋이서 가면 나만 무안해질 일이 많을 거 아냐? 나도 내 편이 있어야지.”

말에 올라타 있는 현오는 팔을 최대한으로 뻗어 정답게 은평의 등을 때리며 말했다. 언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무안해질 것 같으면 아예…….”

따라오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언영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왜 멀쩡히 서로 사랑하는 부부를 따라오느냐 이 말이다. 더군다나 현오는 여인에 대해 꽤 잘 아는 편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렇게 눈치 없이 훼방 놓을 짓을 할 수 있다는 건가.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고서야.

하지만 머리를 굴려 봐도 언영은 딱히 현오에게 미움 살 일을…… 많이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귀혈족 기준으로도 이건 좀 심했다고 생각되는 짓까지 가지는 않았다.

“은평이 너 따라오고 싶어서 오는 거 맞아? 현오가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아니지?”

어제 갑작스레 현오가 따라가겠다고 선포했을 때, 은평은 단지 가만히 옆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어 언영이 물었다. 은평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춤을 연습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여기도 안 되는 건 아니잖아.”

“여긴 머지않아 너무 더워질 테니 따라가고 싶다.”

“……알았어.”

이전에 부족 사람 중 한 명이 은평의 연습을 막다가, 사지가 모두 절단당할 뻔했다. 귀혈족 중 언영과 월진만이 간신히 막을 수 있었던 은평의 분노를 선명히 기억하는 언영은 금방 뒤로 물러섰다.

언영의 상한 기분을 모르는 건지 뭔지 현오는 돌담 너머를 기웃거리며 태평하게 물었다.

“그런데 목린 님께선 왜 나오지 않으시는 거야?”

“아니야. 만나기로 한 장소가 여기야. 갈 곳이 있다면서 봄비랑 함께 새벽부터 어디론가 떠났어. 이제 곧 돌아올 거야.”

“이른 새벽서부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부지런하시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이지 않는 골목 쪽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들린다.”

은평이 중얼거렸다.

하나의 말과 하나의 사람뿐이라 하기엔 다소 시끄러운 소리였다. 언영은 의아해하며 몸을 틀었다. 이윽고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현오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고삐를 꽉 붙들어야 했다.

“뭐야.”

현오의 등이 뻣뻣이 굳었다.

“쟤, 쟤가 여기 왜 와.”

목린과 봄비의 옆에는 예상치 못한 동행이 함께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다인은 단순히 배웅하러 온 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인이 따로 타고 오는 말이나, 옆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짐 보따리를 보면 금방 무슨 상황인지 예측이 갔다.

“어?”

신나게 말을 몰고 오던 다인 또한 현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섰다.

두 사람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서로를 주시했다. 그 사이에서 싱글벙글한 자는 오로지 목린뿐이었다. 그녀는 이제 꽤 능숙한 자세로 봄비를 언영의 앞까지 몰고 왔다.

“서방님, 다인 님도 함께 가도 될까요?”

“……뭐?”

믿었던 목린이마저 언영의 심장을 쿵 떨어뜨렸다.

무너지는 낯빛을 띤 언영의 머릿속에서, 어젯밤 두 사람이 자기 전 나눈 대화가 새록새록 다시 피어났다.

‘그, 우리가 함께 가기로 한 여행 있잖아. 갑자기 현오도 같이 가자고 하더라.’

언영은 누운 상태에서 목린의 어깨를 안고 미안한 표정으로 고백했다.

‘그래요?’

‘응. 뭐, 왁자지껄하고…… 좋겠지.’

언영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천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래서 반짝이는 목린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왁자지껄한 걸 좋아하시는군요…….’

‘그렇지. 좋아하기야 하지……. 우리 부족이 원래 그렇지.’

‘저는 잘 몰랐어요.’

설마, 그래서…….

“귀혈족은 왁자지껄한 걸 좋아하잖아요.”

목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면에 순수한 뿌듯함이 감돌았다.

“그렇지…….”

언영은 넋 놓고 먼 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차마 그를 생각해 준 목린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있잖아.”

한편 아까까지 부득불 따라오겠다고 고집하던 현오의 낯빛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

“나 갑자기 몸이 좋지 않…….”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인이 품에 달려 있던 단검을 현오의 얼굴 쪽으로 날렸다. 현오는 당황하면서도 잽싸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다인은 나무에 박혀 버린 칼을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아프긴. 멀쩡하네.”

“가자. 목린아, 내 뒤에 붙어서 잘 따라와.”

“봄비는 잘 할 거예요!”

목린은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봄비의 얼굴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봄비는 응답의 표시로 작게 울었다.

결국 두 사람만의 알콩달콩한 여행은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타격을 받았다.

말을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가는 다섯 명은 퍽 시선을 끌어모았다. 월진도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고,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즐거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언영은 제일 선두에서 그들에게 일일이 쾌활하게 답해 주었다.

웃통을 까고 줄을 맞춰 뛰고 있던 열댓 명의 남자들 또한 우르르 몰려들었다. 두 팔을 번쩍 들고 시끌벅적하게 내질렀다. 누가 더 크게 말하나 내기를 거는 것처럼 소리 질러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다녀오십시오!”

남자들의 벌거벗은 근육질 상체가 목린의 시야에 우두두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목린은 얼굴을 수줍게 붉히며 그들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 목린을 돌아보고 있던 언영은 그녀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보며 억장이 무너졌다. 그가 어떻게든 목린의 관심을 얻기 위해 절박하게 외쳤다.

“목린아! 이걸 봐!”

“네?”

언영은 두 팔을 수평으로 넓게 뻗은 뒤에 안으로 굽혔다. 팔뚝 근육이 터질 것 같이 바람직하게 불어났다.

“아아…….”

저런 걸 왜 보여 주는 거지? 언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목린은 입을 한참 동안 벌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끝내 답이 나오지 않자, 머쓱할 때마다 보이는 영혼 없는 미소를 내보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봤어요!”

그것이 끝이었다.

언영의 기분이 처참해졌다.

얼굴을 붉힌다거나, 멋있다는 말이라든가. 기대하던 반응이 하나도 오지 않자 무안해진 그는 얼른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붉게 변한 귀는 숨기지 못했다.

륭이 그의 아래에서 마치 사람같이 피식거렸다. 언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시끄러워.”

륭이 반항하듯 울었다. 언영은 고개를 바짝 숙이고 투덜거렸다.

“시끄러워. 같은 마구간에 단둘이 살면서 아무것도 못 해 본 너보다 내가 낫지.”

륭은 순식간에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해진 마음을 드러냈다.

* * *

날씨는 적당히 더웠고 지저귀는 새들은 용감한 여행자들을 반겼다.

새 소리도, 쪼르르 흐르는 냇물 소리도, 요란하게 우는 곤충 소리도 목린의 귀에 편안하게 감겨왔다. 일주일 동안 계속된 여정은 그녀의 몸을 살짝 지치게 했지만 큰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언영을 비롯한 귀혈족 일행들은 모두 그녀의 상황을 고려하여 느긋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맛있는 음식도 풍족하게 먹고, 잠도 잘 잤다.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자, 우리 모두 어깨를 펴고! 드넓은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저 높은 강산 위 용의 아가리! 다 같이 힘을 합쳐 찢어 버리자!”

귀혈족이 연이어 합창하는 저 무서운 가사의 노래도 이제 퍽 익숙해져서, 목린 역시 따라 부르진 못해도 옆에서 박자에 맞춰 얼굴을 까딱거릴 정도는 되었다.

“힘들진 않지?”

목린은 틈틈이 봄비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면 봄비는 언제나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울었다.

하도 시도 때도 없이 봄비의 건강을 신경 써서인지, 한 번은 언영이 다가와 웃으며 봄비에 대해 하등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해 주었다. 그래서 목린은 활짝 웃으며, 그래도 봄비가 아플 걸 상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 어쩔 수 없다고 답해 주었다. 언영은 오랜 시간 그녀를 홀린 듯 쳐다보더니 허리춤에 달린 호리병을 다시 새로 따서 벌컥벌컥 마시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제 목린은 언영이 틈만 나면 마시는 저게 뭔지 알아내기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근처에 냇가를 발견한 그들은 잠시 여기서 쉬고 가기로 했다.

다인은 빈 물통에 물을 채웠고, 현오는 의도적으로 그녀와 거리를 두며 더러워진 손을 씻었다. 은평은 구석에서 뻣뻣해진 몸을 풀고 있었다.

목린은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봄비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머리를 숙여 투명한 냇물을 뻐끔뻐끔 마시는 봄비의 목을 옆에서 쉬지 않고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주변에 위험한 게 있는지 살피고 온 언영이 돌아왔다. 그는 목린의 옆으로 와 그녀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그리고 머리 위에 기대며 입술로 쉬지 않고 쪽쪽거렸다. 목린은 수줍게 웃으며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륭은 두 사람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의 흥미를 돋우는 이는 오로지 봄비뿐이었다. 목을 쭈욱 내밀어 봄비가 물 마시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했다.

“야.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지 말고, 멋진 모습을 좀 드러내 봐.”

언영이 륭의 몸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리고 그와 목린의 행복한 모습을 일부러 과시하듯 목린의 허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륭은 얼굴을 틀어 언영을 쏘아보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충고를 아예 무시하진 않을 생각인 듯했다. 비장한 각오를 띤 표정으로 봄비를 향해 다시 얼굴을 튼 것이다. 성격은 그렇지 않지만, 본판은 매섭게 생긴 이 흑마가 아주 잠깐이나마 위압감을 드러냈다.

륭은 봄비의 관심을 얻어낼 생각으로 계속 앞발을 앞으로 쿵쿵 굴렀다. 흙이 막 튀겼다. 언영이 먼저 얼굴을 찌푸렸고 목린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관찰했다. 다인과 은평, 그리고 다인을 피해서 멀찍이 서 있는 현오와 그들의 말까지 깜짝 놀라 돌아볼 정도로 요란하게 난리 쳤다. 쿵쿵쿵.

제일 마지막으로 시선을 준 건 역시나 봄비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변화도 륭에게 기꺼웠다. 앞에서 륭이 발을 구르든 쓰러지든 무심함을 일관해도 이상할 것 없었던 그 은마는, 결국 저렇게나 노력하는 게 안쓰러워 보였는지 물을 마시다 말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륭이 무슨 꿍꿍이였는지는 본인만이 알았을 것이다. 봄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륭은 다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묘기를 준비하던 발이 엉성하게 멈췄다. 뭘 하려고 했는지 다 까먹었다.

륭은 눈을 크게 뜨고 거칠게 숨을 쉬며 봄비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봄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은마는 고개를 휙 돌리고 목린의 머리에 목을 기댔다.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언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뭐 하냐? 끝난 거야?”

“히히힝…….”

“이상한 숨소리 좀 내지 마. 부끄럽게 그게 뭐야.”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섞인 언영의 잔소리를 듣고 륭은 머리를 푹 수그렸다. 한편 앞에서 상황을 쭉 지켜보던 목린은 봄비의 털을 쓰다듬으며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서방님이랑 똑같다…….”

“응?”

“아니에요!”

목린은 허리를 쫙 펴고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며 일부러 시선을 회피했다.

“슬슬 추워지는데 이제 옷을 챙겨 입는 게 어때?”

손에 묻은 물을 털면서 다인이 언영에게 다가와 의견을 물었다. 언영은 눈썹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가, 그들의 목적지가 분명한 산을 힐끔 살폈다. 확실히 산은 나날이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슬슬 옷을 입자.”

“저, 옷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목린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안 그래도 목린의 옷이 너무 많아서 륭과 봄비가 함께 나눠 들었다. 봄비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음에도, 목린은 그녀 혼자만 너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것 같아서 오는 길에 쭉 미안했다. 언영과 다른 이들도 추운 날씨에 대비한 갖옷을 가지고 오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렇게 많이 입을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목린이 말문을 열었을 땐, 이미 언영이 봄비에게 다가가 짐 보따리를 풀고 목린의 옷을 꺼내고 있었다.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서방님도 동의하시잖아요.”

“저번에 내가 눈사람 안에 있었던 추운 겨울에 네가 기절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해. 그날 일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져.”

“그건 추워서 기절한 게 아닌데…….”

“응?”

“아니에요!”

언영은 목린의 몸에 두꺼운 갖옷을 입히고, 또 그 위에 새로운 갖옷을 덮었다. 털이 수북한 세 번째 옷부터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자, 미리 준비해 온 밧줄을 이용하여 그 옷을 몸에 두르게 하고 그 줄로 고정했다.

“단월도의 겨울은…….”

매듭 끈을 단단히 묶으며 언영이 중얼거렸다.

“그건 겨울도 아니야.”

* * *

비수처럼 날아드는 칼바람을 눈으로 맞으며 목린은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입지 않았더라면 이미 죽은 지 오래였을 거라고.

그녀의 몸에서 바깥으로 나와 있는 부분은 커다란 두 눈과 코뿐이었다. 나머지 모든 곳은 밧줄로 칭칭 감긴 옷 수 벌에 휩싸여 파묻혀 있었다.

고개를 숙이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여러 겹을 입었고, 꽉 묶인 것 때문에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래서는 말을 탈 수가 없었으므로, 언영과 함께 륭의 위에 앉게 되었다. 대신 봄비가 륭이 들고 있던 짐을 함께 나누었다.

언영이 뒤에서 팔로 든든하게 잡아 주고 있었지만 뭔가 짐 보따리가 된 것 같은 상황 때문에 기분이 오묘해졌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까딱까딱 흔들 수 있는 발목이 전부였다.

콧구멍 앞으로 눈송이가 하나 똑 떨어졌다. 추운 날씨라 자연스럽게 녹지도 못하고 계속 그녀의 코를 간지럼 태웠다. 마침 바람이 약해져서 날아가지도 않았다.

손을 뻗어서 치울 수가 없는 상황인지라 목린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콧김을 뿌우뿌우 내면서 멀리 날려 버리는 것뿐이었다. 조그만 애벌레처럼 변한 몸의 상체를 위아래로 뻣뻣하게 움직이며 흐응! 흐응! 코로 바람을 냈다. 그러나 코에 달라붙은 눈송이는 흔들거리기만 할 뿐 도무지 떨어져 나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간지러웠다. 쓸데없이 발목까지 파닥거리며 목린은 계속 콧김을 내뿜었다.

“흐응! 흐으으응!”

“목린아, 왜 그래?”

뒤에서 그녀를 바짝 안고 있던 언영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얼굴을 내밀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언영 또한 복면으로 눈 아래를 가리고 두꺼운 갖옷과 토시를 갖춰 입었지만 그래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충분했다. 그는 목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코에 달라붙은 눈을 문질러서 떼 주었다.

“…….”

간단히 소멸하는 눈을 보며 목린은 할 말을 잃었다. 허무함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파닥거리던 발이 축 처졌다.

그런데도, 그녀가 한 마디의 불평 없이 묵묵히 일행과 함께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목린은 다시 똑바로 앞을 보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열심히 주변을 구경하며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정말 아름다워.’

이렇게 묶인 채 이동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순백의 향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상이었다.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작았는지 깨달을 정도였다. 자연은 인간의 상상력을 압살했다. 목린은 그 점에 경외심을 가지는 중이었다.

나무들도 모두 하얀 옷을 예쁘게 갖춰 입었고, 뭉실뭉실 커다란 구름이 하늘을 유랑하고 있었다.

“어어!”

눈앞에 넘실대는 순백의 땅이 비틀려 있는 것 같아서 자세히 봤더니, 하얀 늑대였다. 당황한 목린이 몸을 들썩이자 언영이 뒤에서 다급하게 잡아 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나무 밑으로 지나가는 늑대의 검은 눈이 무심하게 목린 일행을 쓱 흘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며 가던 길로 마저 향했다. 눈 위에 뽀득뽀득 작은 발자국이 길을 이었다.

“우리가 건들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아.”

연이어 하얀 새 떼들이 하늘을 누비고 겨울의 노래를 지저귀었다. 그들을 올려다보는 기다란 목린의 속눈썹에 계속 작은 눈꽃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목린 일행은 운치를 즐기며 천천히 산에 올라갔다. 거의 정상에 다다르자 말이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길도 바위로 험난했다. 고지가 바로 코에 있었기 때문에 목린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 정도 올라온 것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영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정상까지 가 보자. 여기서 몇 걸음만 가면 돼.”

코까지 올라오는 복면 탓에 목소리가 살짝 뭉쳐지긴 했지만 목린은 똑바로 들었다.

언영은 가뿐히 땅으로 풀썩 내려갔다. 그가 바닥을 밟자 뒤따르던 나머지 이들도 별 항의 없이 묵묵히 따라 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이는 이제 목린뿐이었다.

팔을 쓸 수 없는 목린은 곰처럼 퍼진 몸을 불안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때 언영이 목린에게 가까이 와 그녀를 안았다. 떨어트리지 않으려는 듯 매우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두 팔을 넓게 벌려 품에 꽁꽁 가뒀다.

이어서 목린을 옆구리에 꼈다. 놀란 목린의 눈이 동글동글해졌다. 언영은 그 자세로 편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람이 너무 심해져서 목린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언영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발은 그 상태에서도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언영이 멈췄다. 목린이 다시 눈꺼풀을 들기 전에 언영이 두 팔로 목린을 뒤에서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높이 들어 올렸다.

“어때, 목린아? 예쁘지?”

바람이 그쳤기 때문에 목린은 천천히 눈앞의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입에서 탄식이 절로 삐져나왔다.

땅이 보였다. 그 뒤에도 땅이 보이고, 그 뒤에도 또 땅이 보였다……. 강이 보이고, 저기 끝엔 마을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또 땅이 보였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땅. 평생 눈에 담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세상. 모두 목린에게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목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두근거려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몰랐던 문, 숨겨져 있던 비밀의 문을 찾아서 처음으로 열게 된 기분이었다. 세상이 이토록 넓었구나. 이 세상엔 아름다운 곳이 이리도 많구나.

겨울의 추위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온몸이 전율로 뜨거워졌다.

“네!”

목린은 행복하게 눈웃음치며 긍정의 뜻으로 발을 휘휘 저었다.

“하하!”

언영이 그의 복면을 살짝 내리고, 목린의 눈가에 수도 없이 쪽쪽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하는 목린이 그의 품에서 더욱더 해맑게 미소 지었다.

언영은 자리에 편하게 철퍼덕 앉아 목린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녀와 뺨을 맞댄 자세에서 보이는 땅을 일일이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저긴 어떤 부족이 살고 있고 저쪽엔 어떤 부족이 살고 있고……. 저쪽은 우리가 이번에 가 볼 곳이고, 저쪽은 안타깝게도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고. 저쪽엔 예쁜 꽃이 정말 많아서 목린이 네가 매우 좋아할 거라고…….

산에서 내려오는 과정도 올라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신 올라왔던 길이 아닌 다른 경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바람이 어느 정도 그치고, 새하얗고 끝없는 평지가 펼쳐지는 장소에 오자 목린은 속으로 감탄했다. 눈바람은 그치고 뜨거운 태양이 그들의 중앙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전히 서늘하지만 귀혈족이 무리 없이 움직이고 소통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선두로 가던 언영이 멈춰 서자 뒤따르던 이들도 자연스레 자리에 섰다.

언영이 먼저 자신 있게 풀썩 몸을 던져 안착했다. 그리고 두 팔을 위로 뻗어 목린을 안고 그녀도 땅에 안전히 내려오게 했다. 완전히 균형을 잡고 두 발로 설 때까지 놔주지 않았다.

나머지 일행도 땅으로 내려왔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경치를 살피거나 말에 달라붙은 눈을 털어 주었다. 다인은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하늘에 우뚝 솟아선 해를 구경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

언영이 친우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점잖게 말했다.

이따금 들을 수 있는, 족장다울 때의 낮고 평온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근처에 설족이 살고 있어. 설족의 마을로 가는 데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는데, 어디가 더 목린이한테 편할지 모르겠어. 바위가 많고 길이 험난하고, 또 지형이 좀 자주 바뀌는 편이거든.”

언영은 목린을 바라보다가 은평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니까 내가 오른쪽 길을 둘러보고, 은평이 너는 왼쪽 길을 확인하는 거 어때. 그동안 너희 둘은 목린이랑 함께 여기서 기다려.”

“…….”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현오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려 했을 때, 다인이 얼른 한쪽 손을 들며 치고 들어왔다.

“동의해. 두 사람의 말이 가장 뛰어나니까.”

현오의 입이 꾹 다물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낯빛이 착잡하기만 했다.

“그래. 목린아,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네!”

“륭아, 가자…….”

익숙하게 륭에게 손짓하던 언영의 말끝이 흐려졌다.

봄비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말이었고, 자신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인지하고 있었다. 다시 내리쬐게 된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은마는 부러 꼿꼿하게 목을 폈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자신의 털을 응시하며 뿌듯하게 울었다. 주변에 있는 말들이 넋 놓고 한결같은 눈빛으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단언컨대 륭의 상태가 가장 좋지 않았다.

“잠깐 네 말 좀 빌릴게.”

“그래.”

당장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으로 보이는 륭을 뒤로하고, 언영은 그나마 제일 멀쩡해 보이는 현오의 말을 잡았다.

“금방 올게!”

언영과 은평은 각자의 길로 갈라졌다.

두 사람이 빠지니 분위기는 눈에 띄게 어색해졌다. 현오와 다인은 서로를 멀리 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현오가 다인을 멀리했다. 그는 일부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지겹도록 맑은 하늘만 구경하고 있었다. 다인은 한 번 그를 힐끔 노려본 후에, 언영이 말을 빌려가면서 땅에 내려놓은 짐을 열어 내부에 남아 있는 식량을 확인했다.

목린은 발아래에서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을 신기해하며 내려다보았다. 단월도에도 종종 폭설은 왔지만 새로운 세상의 땅은 어딘가 달랐다. 발을 개구쟁이처럼 땅에 비비며 눈을 즐겼다. 그러다가 실수로 옆으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옷이 두꺼워서 하나도 아프진 않았다. 당황한 목린은 애벌레처럼 몸통을 꾸물꾸물 흔들었다. 온몸이 칭칭 묶여서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혼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다인이 얼른 달려와 목린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고맙습니다……!”

“목린 님은 오늘도 너무 귀여우셔요.”

“아니에요! 귀엽지 않아요.”

다인의 칭찬에 목린은 눈을 아래로 깔았다. 입도 단단히 옷에 둘러싸여 말이 약간 뭉개져 나왔다.

“괜찮으세요?”

뒤늦게 현오도 목린을 앞으로 부랴부랴 달려왔다.

“네. 저는 괜찮아요. 저, 그렇게 입고도 다인 님이랑 현오 님은 춥지 않으셔요?”

목린이 다인과 현오를 번갈아 올려다보는데 목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다인은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는 괜찮은데 현오 저 녀석은 좀 추울 거예요. 추위를 많이 타거든요.”

“하하.”

다인이 엄지로 현오를 가리켰고 현오는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자꾸만 제 팔을 쓰다듬는 움직임이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음은 분명했다.

목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하셔요. 저는 저렇게만 입고 나왔으면 아마 못 버텼을 거예요.”

“하하, 감사합니…… 춥지 않다니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던 현오가 늦게 제 실수를 깨닫고 말을 바로잡았다. 기실 그의 목성이 높아진 건 아니면서도 다인은 부러 과장해서 반응했다. 둥글둥글해진 목린의 몸을 제게 당기며 안는 시늉을 했다.

“지금 누구한테 목소리를 높이는 거야? 목린 님, 괜찮으세요?”

“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목린이 멀뚱거리며 답했다.

그러는 와중 다인은 목린을 놓아주었다. 평소에 쓰는 힘만큼 썼다. 평소에 쓰는 힘이라 하면 귀혈족을 대할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목린은 다인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하게 밀려났다.

“어어……?”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한 목린의 몸이 기우뚱하면서 눕혀졌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밀려난 만큼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한편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며 눈에서 불을 튀기는 중인 현오와 다인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현오는 팔짱을 끼고 다인에게 캐물었다. 여행을 온 이래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너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나를 괴롭히는 거야?”

다인이 어이없다는 듯 조소했다.

“따라오긴 누굴 따라와. 목린 님께서 여행이 낯설어서 같은 여자가 함께해 주면 좋을 것 같다 하셔서 온 것뿐이야. 난 너나 은평이도 함께할 줄은 몰랐다고.”

그리고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똑바로 말해야지. 내가 따라오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피하는 거겠지.”

현오는 흠칫 놀랐다.

“허현오, 나를 똑바로 봐.”

“……크흠.”

“똑바로 봐. 똑바로 보고 대답해.”

현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방황했다.

“내가 그렇게 별로였냐?”

“뭐?”

예상치 못한 질문에 현오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하지만 적어도 눈을 마주치기 위한 방법으로는 통했다. 그는 이제 다인 쪽으로 시선을 바로 하며 묻고 있었다.

“무슨 질문이 그래?”

“그러면 대체 왜 피하는 건데?”

“너야말로……! 너야말로 왜 내가 그런 이유로 널 피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너무 오래 알고 지내서. 갑자기 술에 취해 벌어진 일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뭐 이런 것 때문이라 추측하는 게 보통 반응 아니겠냐고!”

“그러면 내가 그렇게 형편없진 않았다는 거냐?”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 왜 당당하게 말을 못 하냐!”

다인이 우렁차게 외쳤다. 옆에 있는 나무가 떨리며 잎에 붙어 있던 눈송이를 탈탈 털어냈다.

“너와 함께 보낸 밤이 좋았다, 우리의 궁합이 좋다, 너와 질펀하게 또 하고 싶다 왜 말을 못 해!”

“미쳤냐! 조용히 안 해? 목린 님, 그러니까 말입니다…….”

현오는 아직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냥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면서도 가까운 이들에 관한 일이라면 으레 신중해졌다. 목린이 이곳저곳 소문낼 자는 아님을 알지만, 그와 별개로 난감함이 확 끼쳐 들었다.

현오는 목린이 서 있던 방향을 바라보며 해명하려 했다.

“목린 님?”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둥글둥글하게 서 있었던 목린이 없었다.

다인도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어?”

“아아아아아아-!”

“목린 님!”

목린의 몸이 멀리서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평지를 굴러갈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현오와 다인이 목린을 발견했을 즈음엔 이미 완만한 길이 끝나고 가파른 경사로가 목린을 맞이하고 있었다.

두 귀혈족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며들었다. 몸을 던졌으나 이미 늦었다. 목린의 몸은 이미 저 멀리 떨어지는 중이었다. 데굴데굴 굴러간 평지를 지나 내리막길을 만났다. 그러자 속도가 급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굴러떨어지는 목린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아아아아아아-!”

“목린 님! 저희가 가고 있어요!”

망했다! 다인과 현오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몸을 던졌다.

한편 구석에서 예쁜 모습을 도도하게 자랑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봄비 또한 그들의 비명을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부러 몽환적인 눈으로 무슨 일인지 살폈다가 경악하여 입을 해괴망측하게 벌렸다. 시끄럽게 울면서 바로 목린을 구하러 달려갔다.

봄비가 정신을 차리니 봄비를 구경하던 다른 말들 또한 주변을 챙겨 볼 이성이 생겼다. 그들도 모두 한결같이 당황한 얼굴로 내리막길을 향해 다그닥다그닥 질주했다. 다인은 자신의 말을, 현오는 봄비를 보이는 대로 잡아탔다.

“아아아아아아-!”

“너는 여기 있어. 누군가는 주언영한테 상황을 말해 줘야 하니까.”

다인이 현오에게 외쳤다. 현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현오가 봄비를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봄비가 거칠게 저항했다. 굴러가는 목린을 향해 슬프게 울었다. 다인이 아무리 달려 내려가도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

현오의 머리 위로 검고 웅장한 것이 날아올라 태양을 아주 잠깐 가렸다.

륭은 거침없이 하늘을 향해 튀어 올라 봄비와 현오를 앞질렀다. 그리고 거센 돌풍과도 같이 달렸다. 검은 네 다리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표정에는 냉정한 집요함만이 가득했다.

“목린 님!”

아무리 절박하게 내달려도 멀어지는 목린을 향해 다인이 절박하게 울었다. 그러다 그녀 또한 자신의 머리 위로 튀어 오른 륭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쿠르릉 울면서 륭은 가장 선두에서 달렸다. 다인과 륭의 격차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어느새 날쌘 검은 흑마마저도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