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그럼 난 나갈게!”
“오늘 하루도 수고하세요, 서방님.”
목린은 대문 앞까지 쪼르르 걸어가 언영을 배웅 나왔다. 머리를 땋고 있던 도중에 급하게 나온 터라 꼬여 있던 타래는 달리는 과정에서 사르르 풀렸다. 언영이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가려다가도, 언영은 마지막 순간에 등을 돌려 목린을 또 눈에 담았다. 그러기를 계속 반복. 한 세 번쯤 번뇌하다가 끝내 마음을 다잡고 목린의 앞으로 곧장 다가왔다. 멀뚱히 서 있는 목린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아침부터 격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목린아. 한 번만…… 하고 가자.”
언영이 끙끙거리며 간절하게 속삭이고, 목린은 그런 그의 팔을 잡으며 눈을 크게 떴다.
“저희 어젯밤에 많이 했는데요……!”
“그건 그거고.”
“서방님 회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어서. 빨리 끝내게. 오늘 목린이 너무 예뻐.”
“어제랑 다를 게 없는데요?”
“목린이는 매일 너무 예쁘니까 그렇지. 어서 가자.”
언영은 목린의 겨드랑이 아래에 놓았던 손을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옮기며 목린을 안정감 있게 들었다. 일단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언영의 허리에 다리에 두른 목린이 쩔쩔맸다.
“서방니임!”
언영은 목린의 등을 안고 부랴부랴 가장 가까운 방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목린의 발목이 힘없이 흔들거렸다. 언영의 어깨를 콩콩 내려치던 목린의 움직임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잠시 뒤 그 자리를 뜨거운 신음과 달콤한 속삭임이 대신했다.
맴- 맴-
나무에 매달린 매미 소리가 그들이 서로를 침범하는 소리를 절묘하게 덮어주었다.
여름이 왔다.
* * *
미리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갑옷 얘기를 털어놓자마자 언영은 훨씬 가벼운 재질로 바꿔 주었다. 이제 목린도 무리 없이 몸에 걸칠 수 있었다. 극심한 무더위가 오기 전까지는 쭉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족 의복 중에는 가장 아끼는 색만 꺼내 놓고, 나머지는 모두 일단 보따리에 집어넣기로 했다. 목린은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가, 단월도를 떠나면서 가져왔던 유일한 짐을 다시 열려고 했다.
“…….”
그러나 그 보따리 바로 옆에 누워 있는 것이 목린의 관심을 빼앗아 갔다.
섬에서 갖고 온 물건은 최대한으로 간소화했는데, 그 와중에도 직접 들고 온 것이 바로 언영이 선물해 준 창이었다. 길이만 길고 자리만 차지하는 그것은 초족 모두가 가지고 간다 했을 때 막았던 물건이나, 목린은 차마 창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놓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 와서 써먹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목린은 검은 창을 두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그녀와 언영의 이름을 살살 쓰다듬었다.
목린은 제 실력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당시에 부서진 노를 던져 괴물을 죽인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현실은, 그녀에겐 실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놓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따뜻해.”
차가운 창을 쓰다듬으며 목린은 중얼거렸다.
겉은 차가울지 몰라도 그것이 주는 감정은 뜨거웠다.
잠시 후 보따리를 다시 정리하고 창을 깔끔하게 씻어 낸 뒤, 목린은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푸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공기가 슬슬 뜨거워지고 있었으나 아직까진 충분히 버틸 만하다.
마당에서 진짜 창을 던지려는 게 아니라 시늉만 잠깐 해 봤다. 창을 쥐고 제자리에서 팔만 엉성하게 뒤로 젖혔다. 목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영 몸에 익지 않은 자세였다. 언영이 자세를 잡아 준 것도 몇 년 전의 일이고, 그 이후로 제대로 연습을 한 날도 손에 꼽으니 실력은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목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귀엽게 흔들거렸다.
“…….”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켜보는 사람도 없겠다, 여기서라면 몇 번 추억을 꺼내 볼 수 있으리라고.
여름 곤충들은 목린이 허락한 유일한 관중이었다. 목린은 얌전히 뒷걸음질 치며 달려 나갈 거리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팔을 들었다.
그 상태에서 앞으로 발을 디뎠다.
탁- 탁-
상쾌한 바람이 목린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자고 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모습을 숨기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기억했다.
목린의 입이 절로 환하게 벌어졌다. 점점 속도가 빠르게 붙고 자신감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뒤로 땋은 머리가 시원하게 펄럭거린다. 옆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도 요란하게 춤을 춘다.
달린다. 계속 달린다. 목표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밟았다.
이제 희미한 기억이 가르쳐 주는 대로 팔을 뒤로 빼고, 허리를 틀고…….
“주언영! 집에 있냐?”
걸걸한 목소리의 여인이 돌담 위로 예기치 않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어, 목린 님!”
당황한 목린의 발이 꼬였다.
여인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언영의 집 앞을 탐색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목린을 발견한 건 꽤 뒤늦은 후였다.
“거기 누워서 뭐 하세요? 땅이 뜨겁지 않으신가요? 초족의 문화 중 하나인가요? 저도 해 볼래요!”
호기심 넘치는 목소리로 발랄하게 묻는 여인의 머리카락 끝이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
“안녕하세요……!”
목린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못 들었다. 옷을 대충 털고 등 뒤로 창을 애매하게 가렸다.
“들어가도 되나요?”
“네! 들어오세요……!”
여인은 굳이 대문을 통하지 않고 그냥 제 어깨높이까지 오는 돌담을 훌쩍 넘어 들어왔다. 목린이 숨을 들이켰다.
여인은 목린의 앞에 신나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긴장하고 있는 목린의 하얗고 작은 얼굴 앞에 곧바로 서 손가락으로 저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반가워요! 저 기억하시죠?”
“네……. 다인 님이라 하셨죠?”
“맞아요!”
목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바로 기억났다. 언영과 가까이 지내는 여자의 이름은 잘 외워졌다.
다인과 은평, 그리고 현오. 언영의 가장 친한 친우들로 이 넷은 마을 순찰을 할 때도, 평소에 일을 할 때도 부지런히 붙어서 돌아다녔다. 보통 친한 게 아닌 듯했다.
“저, 서방님은 안 계시는데 무슨 일로 찾으세요?”
목린은 가슴께에 두 손을 꼬옥 모으며 물었고 다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소 털털한 자세로 머리를 넘겼다. 다인이 입고 있는 갑옷은 목린의 것에 비하면 매우 화려하고 단단해 보였다.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목린의 갑옷은 다소 소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여인은 저 정도 무게는 거뜬히 견딜 수 있는 듯했다.
“그냥 심심해서, 언영이 하는 일에 도움을 좀 줄까 해서요. 어, 근데 뒤에 그건 뭐예요?”
다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목린의 등 뒤에 삐죽 솟아오른 것을 가리켰다. 언영의 손처럼 그녀의 손 또한 오랜 훈련으로 인해 단단한 살이 잔뜩 배겨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린은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썼으나 등에 완전히 가려질 수 있도록 창을 다잡질 못했다.
다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오래전에 알던 벗을 재회한 양 눈에 반가움이 굽이쳤다. 귀혈족 특유의 무기를 향한 열정이 후광처럼 그녀의 몸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거 창 아니에요?”
“배우고 싶었다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아니, 배우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오랜만에 보이니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목린은 얼떨결에 다인을 따라 움직이는 중이었다. 싱그러운 여름 냄새가 주변을 누볐다.
골목을 누비는 씩씩한 다인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서 목린은 약간 뛰다시피 움직여야 했다. 그때 목린은 평소에 언영이 일부러 그녀의 느린 걸음에 맞춰 주는 중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희 부모님께서 무기를 만드시거든요. 그 창은 몇 년 전에 주언영 그 자식이 도와 달라고 내내 부탁했던 거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어요.”
그 당시 일이 어제처럼 생생해서, 다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목린 님 주는 거니까 엄청나게 뛰어나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하던지.”
“서방님이랑 오래 친하셨나 봐요…….”
“그렇죠! 아기 때부터 같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래요?”
목린은 어색한 투로 되물었지만, 추억에 빠진 다인은 그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느긋한 투로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저는 그 시절이 기억에 없지만요. 하지만 제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주언영 그 자식은 시도 때도 없이 울고 꽥꽥거려서, 그 자식이 울면 옆에 있던 저도 울고, 제가 울면 현오도 울고 난장판이 따로 없었대요. 은평이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조용했지만.”
“귀여워요…….”
“귀엽긴요! 어쩜 그 자식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지. 물론 목린 님 눈엔 마냥 귀엽겠지만요.”
목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인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언영을 그렇게 편히 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목린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다인과 언영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추억이 드러났다. 목린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질투심이 일었다.
“아무튼, 마침 제가 그때 지나가서 다행이에요. 잘못된 자세가 버릇되면 고치기 힘들거든요.”
“버릇될 정도로 오래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그저?”
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목린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목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게 말했다.
“저도 이제 여기 사람인데……. 비슷하게 뭐라도 할 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귀혈족을 무서워하면 무서워했지, 그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한 적은 없었다. 어쩌다 이런 변화가 온 건지 혼란스러웠다. 다인의 자신감 넘치는 생기 있는 눈이 계속 잔상으로 남았다. 그런 눈을 갖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한편 목린의 말에 순수하게 감탄한 다인은 더욱 신나게 말했다.
“그러니까 특히 더 여기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곧 도착해요!”
몇 번 더 골목을 꺾어 들어가니 넓은 평지가 나왔다.
미리 그곳에 와 있던 20명 정도의 여인들이 새로 도착한 두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확히는 목린을 보고 그랬다. 땀을 닦고 있거나, 몸을 풀고 있거나, 수다를 떨고 있던 이들 모두 동작을 일제히 멈추었다. 쿵- 하고 뒤쪽에서 누가 들고 있던 물건을 떨구는 소음이 났다.
목린 또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여인들이 모이는 훈련장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그 근처로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 사람들의 사나운 고함이 가득하고, 무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징그럽게 들렸다.
“여기 있는 우리 목린 님께서 하고 싶은 게 있으시대요.”
다인이 목린의 어깨를 친근하게 옆에서 안았다.
사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역시나 덩치가 우락부락한 귀혈족 여인들은 목린을 기죽게 했다. 훈련 중이라 갑옷이 아닌 편한 걸 걸치고 있어도 덩치가 완악해 보이는 이들이었다. 몇몇은 특히나 눈빛이 매우 살벌하였다. 목린은 창을 매만지며 서툴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백목린이라고 합니다.”
“목린 님!”
이름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두세 명의 여인들이 신나게 팔을 흔들고 있었다. 목린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이전에 한 번 오랜 대화를 나눈 적 있는 같은 또래였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조금 용기가 생겼다. 목린은 아까보다 훨씬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창을 던지는 자세를 제대로 잡고 싶어요. 서방님께는…… 될 수 있으면 비밀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뒷말을 들은 여인들이 모두 부드럽게 웃었다.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껄껄 웃으며 다 안다는 듯 눈길을 보냈다.
“놀라게 해 드리려고요?”
“엄청나게 좋아하시겠어요.”
“그렇죠! 엄청 좋아하시겠지요. 아무래도, 귀혈족에선 이런 걸 잘하는 게 더…….”
멋있어 보일 테니까.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언영에게는 특히나 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유 모를 우울함이 치솟았다. 왜 그럴까 고민하려는데 목린에게는 엄마뻘인 여인이 나무에 기대앉은 채 시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한 번 자세를 보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네!”
목린은 애써 당차게 말했다. 창을 한 손으로 꽉 붙들고 뛰어가기 적합한 위치로 발을 디뎠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목린을 구경하러 왔다. 두렵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 떠 있는 미소에서 악의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목린은 조금 마음이 편했다.
목린이 달리자 그들은 환호성을 날렸다. 이대로 가면 잘될 것 같았다. 가볍게 움직이는 다리를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멈춰서 창을 날리려고 하니 숨이 막혔다. 이 동작이 맞는지,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엔 얼마나 엉성하게 보일지 생각하니 금세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실망스러워하고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금세 발이 꼬이고, 팔이 제대로 위로 들려지지 않고, 눈빛이 흔들렸다.
계속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창을 던지기는 했다. 활발하게 움직인 건 양옆으로 땋은 머리뿐이지, 팔의 움직임이며 목소리 모두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에잇!”
창은 얼마 날지 못하고 거의 곧바로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졌다. 목린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리 진 귀혈족 여인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들의 눈은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아기 새를 발견한 양 촉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 *
“아아아아아아악!”
“목린 님! 할 수 있어요!”
“목린 님! 힘내요!”
“조금만 더 버텨요!”
머리만 한 돌덩이를 위로 들고 있는 목린의 팔이 위태롭게 후들거렸다. 비명과 가까운 목소리로 목린이 괴로워하며 내질렀다.
“죽을 것 같아요!”
“안 죽어요, 목린 님! 목린 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근력이에요! 조금만 더! 더! 더! 됐다!”
다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목린은 돌덩이를 바로 옆에 내던지고 그대로 맨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머리카락에 흙이 달라붙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팔을 양쪽에 벌리고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골랐다. 오늘 하늘이 참 푸르고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불쑥 다가온 여인들의 얼굴이 시야를 가렸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우르르 몰려와서 그녀에게 어떤 동작이 가장 처음 시도하기 쉬울지, 무슨 음식을 먹으면 좋을지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정작 지친 목린이 귀담아들은 건 손에 꼽았다. 정성스럽게 땀을 닦아 주는 누군가의 손길을 눈을 감으며 받아 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근육밖에 없는 돌덩이 같은 서방님의 육체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 오늘이었다.
다음에 다시 생각나면 오겠다는, 기약 없는 인사를 던지고 집에 돌아와 바로 몸을 물에 담갔다. 모두 손을 흔들며 꼭 다시 오라고 했지만 목린은 가짜로라도 그 말에 웃으며 답할 수 없었다.
머리를 풀고, 땀으로 젖은 옷을 벗고 바로 물에 나신을 맡겼다. 처음엔 어깨까지 물속에 잠겼는데, 두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다가 실수로 몇 번 코나 입으로 물이 들어갔다. 그래도 몸을 늘어뜨리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목린아!”
“서방님 오셨어요!”
젖은 몸을 닦고, 마침 딱히 하는 것 없이 쉬면서 오늘 밤에는 뭘 먹을까 고민 중이었던 목린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언영이 두 팔 벌려 목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상체를 쓰다듬으며 안아 주고 정수리 위를 쪽쪽거렸다.
“어, 안색이 왜 그래?”
“네?”
언영은 목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안고 다정하게 모았다. 볼살이 눌리며 입술이 살짝 삐죽 튀어나왔다.
“조금 달라 보이는데.”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그래요!”
처음으로 무리하게 몸을 쓴 것이 티가 났던 것 같다. 언영은 그것을 예리하게 잡아냈다. 대신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허리를 굽혀 쪽 입을 맞추며 떨어졌다.
과연 언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발상이었는가 생각하며 목린은 부엌으로 향했다.
언영이 씻고 나오는 동안 목린은 저녁을 준비해 내왔다. 맛난 장아찌와 맥적(貊炙), 물고기 반찬 등이 가득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수저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언영이 먼저 싱긋 웃었다. 목린도 수줍게나마 그 미소에 답했다. 그리고 잡곡밥을 먹기 위해 입에 갖다 댔다.
“아…….”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게 분명했다. 어지러움이 잠깐 몰려왔다. 그렇게 좋아하던 밥도 못 먹고 내려놓았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언영이 내질렀다.
“아기다!”
언영이 두 팔을 천장을 향해 번쩍 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그의 수저가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의 눈이 광란적으로 반짝거렸다.
“아기 생겼다아아!”
목린은 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아니에요, 서방님! 제 생각엔…….”
언영이 감격에 겨워 입을 맞추는 탓에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그는 목린과 그 사이를 가로막던 상을 아예 옆으로 뒤집어 던져 버렸다.(밥이 엎어지는 모습은 목린에게 극심한 공포를 초래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와 상체를 끌어안고 격렬하게 입맞춤을 날렸다. 목린의 얼굴이 뒤로 확 꺾였다. 흥분을 가다듬지 못하는 언영의 듬직한 몸이 벌벌 떨리고 호흡이 불안정했다.
진하게 혀를 섞고 나서도, 언영은 목린의 코, 뺨, 입술에 스무 번은 넘게 쪽쪽거렸다. 그러고 나서도 진정을 못 해 또다시 진하게 혀를 섞었다. 찐득거리는 소리가 나며 입술이 떼어지고, 언영의 입꼬리가 광대를 찢을 정도로 징그럽게 올라갔다.
“아기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언영은 목린의 등과 무릎 뒤에 팔을 끼워 넣고 그녀를 불쑥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통을 들이박아 문을 부숴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의원댁을 향해 그 상태로 저돌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기다아아아아!”
“그, 그저 잠깐 어지러웠…….”
“아기다아아아아아아아!”
목린의 설명은 언영의 고성에 처참하게 묻혔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 언영의 외침이 부지런하게 돌아다녔다. 사방에서 대문이 덜커덩 열렸다.
“아기?”
“족장님 아들댁이 드디어!”
“경사 났네!”
낭보를 들은 귀혈족 사람들은 즉각 거리에 나왔다. 모두 등불을 들고 나와 시야가 환해졌다.
한밤중에 잔치가 벌어졌다. 거리에 나온 이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남의 일에 감동하여 서로를 끌어안고 울기도 했다. 제집의 지붕에 올라가 방방 뛰는 어르신도 계셨다. 팔과 다리를 열심히 꺾고 있는 은평의 그림자도 얼핏 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언영만큼 흥분한 이는 없었다.
“아기다아아아아!”
“서방님, 아니에요!”
“아기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니라니까요오오!”
* * *
“아닙니다.”
목린의 눈엔 의원보다 산적에 어울릴 법한 생김새의 우람한 남성이 물러서며 말했다. 고향에 계신 의원 아저씨와는 너무도 다른 생김새의 사람이었다.
목린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옆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는 언영을 쳐다보기 조금 미안했다. 결코 그녀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가 이 정도로 아기를 좋아하고 기다렸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목린은 아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확실합니까? 아무래도 지금쯤이면 소식이 와야 정상인 것 같은데…….”
언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의원에게 물었다. 그의 넓고 당당하던 어깨가 축 처졌다. 돌아온 답도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못했다.
“두 분께서는 아직 혼인한 지 석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미리 걱정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관계를 활발히 갖는다고 꼭 아이가 일찍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열다섯 명 낳으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언영은 목린을 옆에서 껴안았다. 그녀를 쓰다듬으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목린은 그 말에 조용히 움찔거릴 뿐이었다.
의원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솔직히 충고하자면, 지금 걱정할 것은 몇 명을 낳느냐가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살면서 이렇게 허약한 체질은 처음 봅니다. 부인께서 어떻게 걸어 다니는지조차 제겐 의문입니다.”
기실 귀혈족 사람들 눈에 초족 사람들은 나무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목린은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초리로 그녀를 보고 있는 의원에게 약간 당당하게 말했다. 억울하단 투도 섞여 있었다.
“저, 제 고향에선 튼튼한 축에 속했어요. 또래 애들 중에 키도 제일 컸고요.”
하지만 가슴이 목린의 것보다 훨씬 근육으로 빵빵한 두 남자 사이에서 그녀의 주장은 힘없이 묻혔다. 고려할 거리가 못 되었다.
의원은 흉터가 가득한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열다섯 명은커녕…… 다섯 명조차 꿈도 못 꾸고, 그나마 많으면 최대 두 명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도 기적인 축에 속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한 명 낳는 것도 부인에겐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영과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라면 지금 상황엔 수태를 막는 약초를 규칙적으로 복용해 부인의 회임을 미룰 것입니다. 몸이 훨씬 더 좋아지고 난 후에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목린이가 얼마나 멋지고 강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언영은 목린을 꽉 안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차분히 말했다.
“저도 알고 있지만, 이건 그 문제와는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언영은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목린이는 강한 사람입니다! 뭐든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야, 이 새끼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얌전히 있던 목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열다섯 명 낳고 싶으면 네가 낳아.”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랬을 겁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어린 시절 이후 말을 놓아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언영이 털털하게 웃자 의원은 답답한지 가슴을 팍팍 내려쳤다.
“네 부인이 넌 줄 아냐! 난 네놈을 받아 준 여자가 있다는 게 가장 신기해! 아 물론 부인, 그렇다고 부인께서 경솔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네…….”
목린이 어색하게 답했다. 옆에서 언영은 뜨거운 눈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주장했다.
“목린이와 저는 운명이 맺어 준 사이입니다.”
“운명이 말하는데 네 부인은 열다섯 명 낳을 몸이 못 된다. 임신 자체가 힘들 수도 있어.”
“목린이를 얕보지 마십시오!”
“얕보는 게 아니라! 너는 가슴 키울 시간에 뇌 좀 키워라!”
두 사람은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였다. 가운데에 낀 목린만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보았다. 오늘 못 먹은 밥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슬퍼졌다.
* * *
훈련장에 다시 가는 미친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쉽게 흔들렸다.
그녀의 몸이 좋아지고, 훌륭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그리고 비로소 건강한 아이를 가졌을 때 언영이 보일 해맑은 웃음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다정한 미소를 상상해 보니 의외로 금방 힘이 생기고 용기가 났다. 집 안을 청소하고, 여러 가지 잡일을 해도 시간이 남아돈다는 사실을 운운하며 훈련장을 찾아갔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저게 맞았다.
그리고 둘째 날은 첫날보다, 셋째 날은 둘째 날보다 나았다. 처음엔 너무 갑작스럽게 받아들이느라 몸이 놀랐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되는 날에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이는 그녀를 맞이하는 귀혈족 여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충 목린의 힘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얼추 눈치챈 그들은 과도한 제안을 내던지지 않았다. 목린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선에 맞춰 주려고 노력했다. 또한, 가까이 밀착하여 다니니 말이 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치 있고 편한 농담이 오갔다.
셋째 날이 되는 날에는 훈련장에서 언영의 모친인 월진과의 조우가 있었다. 월진은 훈련장에서 뛰고 있는 목린을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며느리를 안아 주며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한 대로 언영 앞에서는 말을 않겠다고 반복해서 맹세했다. 처음엔 당황하고 무서웠던 목린은 진심 어린 응원에 마음이 따스하게 녹았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연습 시간이 노출될수록, 언영에게 들키는 시점이 앞당겨지리라는 사실이었다. 귀혈족과 보다 잘 어울리기 위하여, 훨씬 건강한 모습의 아내가 되고자 훈련을 한다는 건 하등 괴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언영에게 밝히려니 이리도 낯부끄러워지는지 모르겠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쿵 춤을 춘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되는 하루였다.
“주언영이 온다! 목린 님! 언영이가 오고 있어요!”
목린의 반대쪽에서 활을 연습하고 있던 다인이 달려오며 외쳤다. 목린은 창을 내려놓고 가장 키가 큰 여인의 뒤에 부리나케 달려가 숨었다. 혹시라도 언영의 눈에 띌까 봐 그렇다. 아직은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목린을 비롯한 여인들이 모두 제 일인 양 놀라며 다인에게 급하게 물었다.
“들킨 거야?”
“어디까지 왔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쪽에 있어요!”
요즘 언영은 마을에서 처음으로 짓는 천문대의 책임자 중 하나가 되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목린도 몇 번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다.
멀리서 언덕을 내려오고 있는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스물이 좀 넘는 사람들이 동반했다. 평소에도 자랑하듯 늘 입고 다니는 현란한 갑옷이 아니라 편한 의복을 입은 모습이며, 땀을 닦는 친숙한 행동을 보아하니 막 오전 작업을 마치고 쉬러 내려오는 길이 분명했다. 평소에는 이쪽이 아닌 다른 경로로 이동하던 무리라서 이렇게 마주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목린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목린 님, 저쪽으로 나가세요! 저쪽으로!”
창을 던지는 자세를 가까이서 자주 잡아준 고마운 분이 목린에게 언영이 오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라서 무작정 뛰어들기는 겁나는 장소였지만 지금 그런 상황을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목린은 짧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던지며 쫑쫑 달려 나갔다. 뒤로 땋은 머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자유롭게 하느작거렸다.
목린이 사라지고 남은 여인들은 애써 평소와 같은 자세를 잡고 딴청을 부렸다. 언영 일행이 지척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뻔뻔한 가면을 쓰고, 무슨 일이냐는 듯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인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며 언영과 사람들을 마주했다.
“여긴 왜 왔냐?”
“일부러 온 건 아니고 지나가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어. 훈련하면서 뭐 불편한 점은 없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불편한 건 없는지, 개선되길 염원하는 사항은 없는지 묻는 건 족장의 의무와 다름없었다.
“그그그그런 걸 왜 나나나한테 묻냐냐냐냐?”
다인의 눈가 주변이 벌벌 떨렸다. 언영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인을 빤히 내려다봤다.
한편 목린은 허둥지둥 뛰쳐나가던 도중 너무 급한 나머지 창을 놓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다시 가지러 갔다간 언영과 맞닥뜨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이대로 도망치자니, 훈련장에 있는 창을 언영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목린은 입술을 아그작 깨물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응?”
그런데 숲에 있는 사람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작 한두 명이 아니었다. 기합을 넣는 소리와 함께 단체로 동작을 맞추는 낌새가 났다.
목린은 거의 제 허리까지 자라난 풀을 옆으로 치우며 길을 개척해 갔다. 본래 사람이 자주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라 그런지 다소 너저분했다.
그렇게 한 손으로 나무를 짚으며 모퉁이를 돌았다.
“……?”
이미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성인 남자와 몸이 툭 부딪쳤다. 당황한 목린은 얼른 사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숨이 턱 막혔다.
남자는 웃통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 옆의 남자도, 또 그 뒤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무더운 여름의 시작이라 갑옷을 완전히 갖춰 입고 훈련을 하긴 너무 고됐다. 모두의 불룩한 흉부가 적나라하게 튀어나와 목린을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목린은 바로 코앞에 있는 낯선 남자의 가슴팍 탓에 충격에 빠졌다.
한편 숲 바깥에서는 언영이 팔짱을 끼고 다인을 주시했다.
“너 왜 그래?”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다다다.”
다인의 눈 밑 살이 격동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치 없는 나도 이상하게 느낄 정도면 얼마나 네가 어색한지…….”
그때 언영의 눈이 위아래로 넓게 뜨이며 번득였다.
“목린아!”
날카로운 비명이 터진 곳으로 언영이 정신없이 뛰어갔다.
예감이 맞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목린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숲에서 콩콩 뛰어오고 있었다. 많이 불안정해 보였다. 언영은 목린의 앞을 가로막고, 달려오는 그녀를 두 팔로 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이 부딪친 목린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가 그가 제 남편임을 확인하고 입술을 급히 오므렸다.
“목린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아까 비명은 뭐 때문에 그래?”
“서방님, 그게…….”
목린은 눈을 꾹 감고 머리를 휘저었다. 머릿속에 남은 생판 모르는 남자의 두둑한 흉부를 애써 지워 냈다. 위에서 언영은 더욱 혼란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목린은 눈치를 보며 주변을 살폈다. 그동안 잠깐이나마 우애를 쌓았던 여인들은 목린이 뭐라고 대답할지 두근두근 지켜보고 있었고, 언영과 함께 온 이들 또한 이쪽에 큰 관심을 보냈다.
보아하니 머지않아 탄로 날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허접한 변명을 늘어놔 봤자 소용없었다.
“저 창 기억하시죠. 이걸로 창 던지기를 연습하고 있었어요…….”
목린은 팔을 뻗어 커다란 돌에 기대진 제 창을 가리켰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언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
“네. 다인 님께서 정말 열심히 가르쳐 주시고…….”
“한번 보자!”
언영은 근처에 함께하는 이들을 향해 가운데서 쾌활하게 외쳤다.
“모두 자리 잡아!”
목린이 제지할 기회도 없었다. 귀혈족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열을 맞추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흉포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초롱초롱한 눈길을 보내며 서른 명 정도의 귀혈족이 집중을 보였다.
목린은 창을 어색하게 쓸며 물었다.
“언제 할까요?”
“그냥 준비되면 해! 계속 기다릴게!”
언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일주일 동안 저렇게 기다리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목린은 머리를 숙이며 작게 대답했다. 가운데에서 실실 웃는 언영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
망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목린 님, 할 수 있어요!”
“그동안 노력한 걸 보여 주자고요!”
목린을 향해 여인들이 모두 응원의 한마디를 던졌다. 궁싯궁싯하던 목린은 조금 용기를 얻었다. 적절한 시작점으로 걸어 나가며 언영에게 한 마디 던졌다.
“저, 잘하진 못할 거예요.”
“괜찮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한 언영은 본격적으로 목린이 달려 나갈 준비를 하자 두 팔을 쳐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다인이 시끄럽다고 뒤에서 한 대 머리를 갈기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조용해졌다고 해서 언영의 존재가 마모된 것은 아니었다. 목린은 언제부턴가 그를 굉장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다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뜨거운 눈빛이나 다정한 미소는 여전히 함께였다.
“에잇!”
그래서일까, 목린은 완전히 실패했다.
“아아…….”
발과 손이 반대로 꼬이고 정신이 흔들렸다. 결국 창을 던지기보단 그냥 바닥에 떨구었다. 오히려 휘청이는 목린의 몸이 더 멀리 떠났다. 한 발로 몇 번 뛰며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의 얼굴에 참담함이 빗발쳤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소하게나마 있었던 목린의 발전을 곁에서 바라봐 온 여인들도 마찬가지로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목린을 생각해서 얼른 감정을 은폐했다.
다인이 재빨리 말을 던졌다.
“야. 목린 님 이것보다 훨씬 잘하시니까…….”
“우워어어어어어어!”
언영이 쿵쿵 목린을 향해 질주했다. 기겁하는 목린을 두 팔에 꽉 가두고 번쩍 들어 올렸다. 목린의 볼살이 완전히 눌려서 뭉개졌다.
“목린이 대단해! 너무 대단해!”
이러다가 목린 님 숨 막혀 죽거나 압사당하겠다고, 얼른 놔주는 게 좋겠다고 주변에서 끊임없이 말해 주고 나서야 언영은 아쉬운 듯 목린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끝까지 감탄이 빛을 냈다.
* * *
언영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목린은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녀의 솜씨가 일취월장했다면 이해가 갔을 터인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있던 감동도 죽이는 실력이었다. 도대체 뭐에 감동하고 뭐가 그리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오늘은 훈련이 아침 일찍 있는 목린이 어쩔 수 없이 새벽부터 기상해 부지런히 머리를 땋고 있는데, 언영이 홀린 표정으로 저만치서 구경하고 있었다.
귀혈족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는 게 그리도 즐거운 걸까. 저렇게 침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면, 목린도 힘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좋아해 주니 뿌듯했다.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남아 있던 피곤함이 가볍게 날아갔다.
“할 말 있으세요?”
목린이 머리를 땋다 말고 휙 고개를 돌렸다. 벽에 등을 기대 편하게 어여쁜 아내를 완상 중이던 언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난 그냥…… 머리 땋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언영이 이제 막 첫사랑에 빠진 순수한 소년처럼 눈을 아래로 깔며 중얼거렸다. 그 또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의복을 다 차려입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목린의 모습을 마저 구경하기 위해 바깥으로 몸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목린 또한 부끄러워져, 땋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심장을 콕콕 찔러대는 간질간질한 침묵이 잇따랐다. 두 사람 모두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잠시 뒤 언영이 번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 내가 한 번만 묶어 줘도 될까?”
“네? 서방님도 할 줄 아세요?”
“당연하지. 누이만 셋인데. 해 줘도 돼?”
목린은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금방 대수롭지 않게 끄덕였다. 누이도 셋이나 있는 데다가, 남자들도 머리를 기르고 묶는 곳이니 못해도 뭐 얼마나 못하겠냐는 생각이었다. 저번에 오두막에서 현화라는 아이를 달래 준 행동만 봐도 그가 어린 누이들 다루기에 익숙하다는 것이 보였다.
목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언영은 벌떡 일어났다. 화려한 대모로 만든 빗을 한 손에 쥐고 그녀의 뒤에 앉았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위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닿는 긴 생머리를 끝까지 주의 깊게 빗겨 주었다. 잠깐 그가 힘만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빗은 제 소임을 열심히 다 했고, 언영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다 빗겨 놓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정수리에 입술을 쪽쪽 쪼아 댔다. 목린이 부끄럽게 웃으며 얼른 묶어 달라고 하니 그제야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섰다.
“흠…….”
언영은 목린을 머리카락을 쥐고 본격적으로 묶을 준비를 했다. 이게 뭐라고 심호흡까지 반복했다. 목린은 그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끔 두피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당기는 느낌이나, 언영이 열심히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는 있었다.
“서방님. 지금 땋고 계시는 거예요?”
시간이 얼마 지나 목린이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눈에 담고 있는 면경을 보면, 언영이 분명 뒤에서 고심한 표정으로 뭔가 꼼지락거리고는 있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같은 곳만 풀었다 땋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까먹었다거나 아니면 괜히 잘 보이고 싶어 으스댔던 거라면 제대로 알려 줄 참으로 목린은 입술을 뗐다.
“아니, 어, 그러니까……. 잠깐만.”
하지만 언영은 귀를 벌겋게 붉힐 뿐이지, 그녀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놔주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허리를 잔뜩 굽혀 몸을 바짝 붙이곤 머리칼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땋아 줄 참이었는데 더 괜찮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지. 잠시만.”
“…….”
아래에서 자신 없게 꼼지락거리던 언영의 손은 갑자기 위 가닥의 모발을 덥석 붙들었다.
목린은 면경을 통해 현란하게 움직이는 언영과 급격하게 변하는 제 머리의 변화를 구경했다. 그가 점점 더 색다른 도전을 추구할수록 목린의 낯빛이 안 좋아져 갔다. 하지만 굉장히 신나 보이는 그의 안면에 대놓고 침을 뱉듯 그만해 달라 요구할 수는 없었다.
“됐다!”
언영이 자랑스러운 표정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으로 쓸며 닦아냈다.
“아…….”
오른쪽 위에 높게 묶인 몇 가닥은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왼쪽으로는 귀와 같은 높이에서 포박된 모발이 달랑거렸는데, 네 살 아이도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다니지 않을 것 같았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환영받지 못한 나머지 머리카락은 언영이 옆으로 멋대로 ‘땋아 놓았다.’ 그것은 사실 어떻게든 꼬아 놓은 것에 더 유사했다.
“이쪽으로 돌아봐.”
후방에서 들리는 언영의 뿌듯한 목소리 탓에 목린은 난감해졌다. 언영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목소리에서부터 기대감이 물씬 풍겨오지 않는가. 애써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든 결과물이 이렇다는 거에 그가 미안해할까 봐 걱정이었다.
목린은 언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몸을 틀었다.
“서방님……. 정성만으로도 저는 괜찮아요.”
부부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언영의 동공이 벼락 맞은 것 같은 목린의 머리를 빠르게 훑었다. 목린은 그 안에 경악이 스며드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다.
“사과하실 필요 없…….”
“정말 예쁘다, 우리 목린이!”
언영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양손으로 목린의 얼굴을 즉각 감쌌다. 탱탱한 볼살이 쏠리면서 목린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언영은 그 위에 입을 맞춰댔다. 짝짝이로 묶인 목린의 양쪽 머리채가 흔들거렸다.
* * *
“쟤는 작년 여름보다 가슴이 더 커진 것 같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것 좀 봐.”
“…….”
처음에는 기겁하며 감히 시선을 ‘저쪽’에 둘 엄두도 못 냈던 목린도 언제부턴가 빤히 구경하는 이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처음엔 근육진 가슴이 징그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무더위가 코앞에 다가오면서, 보란 듯이 여인들의 훈련장 앞에서 남자들이 상반신을 탈의한 채 뛰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요철한 몸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근육으로 가득 차 불룩한 그들의 흉부가 달리는 과정에서 흔들거렸는데 그 모습이 가히 예술이었다. 배는 모두 군살 하나 없이 복근으로 빽빽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오늘은 쉬고 감상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면서 여인들 몇몇이 잘 익은 수박을 여러 개 들고 왔다. 과도 같은 건 없었다. 주먹질 한 방으로 조각내어 사방에 돌렸다. 결국 모두 훈련을 멈추고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사내들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미혼의 여인 몇몇은 점찍은 사내와 은밀히 눈빛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몸에 대한 감탄이 여인들 입에서 자연스레 쏟아져 나왔다.
목린은 가장 조용한 구석에 앉아 남자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상념에 잠겼다.
저들의 벌거벗은 상체를 보다 보면 저절로 언영과 보내는 밤 생각이 났다. 양쪽으로 떡 벌어진 그의 두툼한 몸이 시야를 아예 완전히 가리고, 그것과 빈틈없이 맞붙어서, 서로의 살 냄새에 흠뻑 취해 두 몸을 비비고, 합치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장악하고…….
목린은 들고 있던 수박을 서둘러 내려놓고 양쪽 볼을 찹찹찹 손으로 때렸다. 대낮에 그런 음탕한 상상을 하다니, 미쳐 버린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신당에 가서 기도도 딱히 드리지 않는다. 치욕스러운 일이란 걸 앎에도 서방님이랑 더 하고 싶었다.
얼굴을 때리는 과정에서 양 가닥이 모두 흔들렸다. 언영은 진심으로 그가 묶어 준 머리에 감탄했다. 하여 목린은 이게 귀혈족에서 통하는 외형임을 억지로나마 이해해야 했다. 딱히 마음에 드는 귀혈족 문화는 아니었으나(사실 끔찍하게 싫었으나) 좋은 것, 마음에 드는 것만 가려서 받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이곳에 뿌리박고 살게 되었다면 더욱.
하여 목린은 언영이 묶어 준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신경 써준 언영을 위한 나름대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오는 길에서도, 훈련장에서도 모두 그녀의 머리를 힐끔 보고 갔지만 이상하다고 하는 이 한 명 없었다. 약간 자신감이 생기려 했다.
“목린 님! 저희랑 같이 계곡에 가요!”
갑자기 작은 두 여자아이가 측면에서 쪼르르 달려왔다. 언영의 두 동생이었다.
목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두 동생 중 어린 혜영은 기다렸다는 듯 목린의 다리를 끌어안았고 화영은 목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같이 놀러 가요!”
“안녕하세요. 저, 막내 아가씨는 어디 계세요?”
“선영이는 작문 과제를 다 못 끝냈대요!”
“그래도 선영 아가씨도 기다렸다가 함께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늘 안에 못 끝낸다고 들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가장 어린 막내를 두고 가는 건 좀 미안하지 않은가. 목린이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옆에서 다인이 호탕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목린 님. 저 남자들 내일도 이러고 있을 거예요. 감상할 기회는 많아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여인이 등을 젖히고 웃었다. 목린의 얼굴이 사과같이 붉어졌다. 팔을 흔들며 부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옆에서 혜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오라버니가 제일 멋있는데 저런 거 왜 봐요? 오라버니가 잘 안 보여 줘요?”
언영의 두 누이와 목린을 뺀 모두 박장대소했다. 목린은 어쩔 줄 모르며 혜영의 입을 손으로 막으려 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러면 잘 보여 줘요?”
“잘…… 보여 줘요. 그러니까 그만…….”
이젠 모두가 배를 잡고 구르고 있었다.
“잘 보여 주면 뭐가 문제예요? 내가 알기론 오라버니 몸이 제일 크고 멋있는데. 안 그래요?”
목린은 결국 울면서 먼저 계곡 쪽으로 뛰쳐나갔다. 화영과 혜영은 같이 가자고 해맑게 뒤쫓았다. 목린은 뒤에서 역시 신혼은 귀엽다고 껄껄 웃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천진난만한 두 아이는 계곡에 당도하자마자 바로 옷을 훌러덩 벗고 뛰어들었다. 첨벙첨벙하는 소리가 여름의 감성을 온전히 전달했다.
계곡은 적당한 위치에 있었다. 너무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위험할 정도로 멀지도 않고, 누군가가 기웃거리다 발견할 정도로 근접하지도 않았다. 많은 나무가 지나치게 내리쬐는 햇빛을 적당히 가려 주었다. 목린은 괜찮아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을 벗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당기고 하얀 발을 물에 담갔다. 차가움이 주는 짜릿함에 귀엽게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가씨들, 너무 깊게 들어가시면 안 돼요!”
“걱정 마세요! 여기 안 깊어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물살이 빨라질 수 있어요.”
“네에!”
언영의 누이들은 성격이 매우 활발할 뿐이지, 말을 안 듣는 말썽꾸러기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수심이 얕고 안전한 곳에 모여 둘이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 목린의 얼굴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다녔다. 훌륭한 안식처를 찾은 것 같았다.
“목린 님도 들어오세요! 여기 엄청 시원해요!”
“아무도 안 오니까 걱정 마세요!”
두 소녀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지만 목린은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물에 담그고 있던 발을 살짝 들어 보였다.
“아니에요. 저는 이렇게 발만 담그고 있어도 좋아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이었다. 또 무엇보다 설령 덥더라도 끝까지 이 자세를 고집했을 것이다. 아무리 애들 앞이라도 저들의 오라비가 밤새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물고 핥고 빤 자국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발을 흔들거리며 푸른 물의 요동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영이 물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물었다.
“목린 님, 목린 님은 오라버니 어디가 좋아서 반한 거예요?”
“어…….”
목린은 발길질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목린이 왔을 때는 이미 서로를 보자마자 눈에 담은 운명의 연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서방님은 멋있으시죠.”
목린이 모호하게 말했다.
“정확히 어디가 멋있었어요? 처음 봤을 때?”
“어……. 그냥 전부 다?”
목린은 자신의 표정이 어린 애들에게 어색하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저, 서방님이 그러셨어요? 저희 둘이 서로에게 반했다고?”
“네. 이웃 부족들도 다 아는걸요.”
언영에게 진실을 비밀로 하는 게 낫겠다고 더욱더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목린은 그가 자괴감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대화를 다른 쪽으로 틀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서방님께서…… 제 어떤 모습을 특히 좋아하셨는지도 아세요?”
언영에게 직접 묻기엔 좀 부끄러웠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었다. 목린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영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그가 호감을 느끼는 면모를 꾸준히 지켜야 할 터.
“글쎄요. 보자마자 딱 알았다고 하시던데요.”
목린의 마음에 썩 드는 답변은 아니었다.
모르겠다. 애초에 영구적인 사랑을 바라고 그와 혼인을 결심한 것이 아닌데. 그저 그가 설령 둘의 관계가 끝에 망가진다고 한들, 그녀를 끝까지 존중해줄 것 같아 선택했던 것인데. 왜 인제 와서 사랑이 욕심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목린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쪽팔릴 만큼 짧고 미지근했다. 그가 그녀의 환상과 다른 이라는 순간 바로 깨져 버린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언영이 그녀의 무얼 보고 좋아하게 되었는지만 알게 된다면 그에 꾸준히 맞춰 줄 수도 있겠는데, 그냥 보자마자 알았다니. 너무도 추상적인 데다가…… 솔직히 목린이 보기엔 너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목린의 관심을 빼앗아 간 것이 따로 있었다.
“화영 아가씨, 등에 화상 자국이 있네요?”
어린아이의 등에 새겨지기엔 너무도 가혹해 보이는 상처였다. 화영은 고개를 돌려 등 쪽을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해요! 이상하다는 뜻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어요. 그저 어떻게 생긴 건지 긍금하여…….”
“오라버니께서 저를 지켜 주신 날에 생겼어요!”
안절부절못하는 목린과 달리 화영이 위풍당당하게 웃었다.
“제게는 매우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영광의 상처예요!”
“예?”
“언니!”
그때 갑자기 계곡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어린아이의 외침이 들리며, 목린이 질문을 더할 기회가 날아갔다. 익숙한 목소리임에도 세 여자는 몸을 움츠리며 경계했다.
풀을 헤치고 걸어오는 꼬마는 다름 아닌 언영의 막냇누이 선영이었다. 아이가 씩씩거리는 얼굴로 뛰어왔다.
“나만 빼고 놀러 가고!”
선영이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치자 두 자매는 눈길을 얼른 피했다.
“오라버니한테 이를 거야!”
“아가씨! 여기까지 위험한데 혼자 오셨어요! 어서 우리랑 같이 놀아요.”
울먹거리고 있는 선영을 향해 목린이 팔을 뻗으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신도 다시 신지 못했다. 선영의 눈도 그녀 쪽으로 향했다.
“어?”
선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목린의 머리를 가리켰다.
* * *
“오라버니.”
“혜영아!”
쉴 수 있는 틈이 생겨 사내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언영은 달려오는 누이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며 무릎을 굽혔다. 혜영이 손에 잡히자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싱글싱글 웃었다.
“우리 혜영이 무슨 일이야?”
“오라버니, 목린 님께서 오라버니를 찾고 계셔요.”
“정말? 목린이가 나를 찾아?”
혜영이 끄덕이자 주변에서 남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격렬하게 기뻐했다. 정겹게 언영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야,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저희가 마무리 지을 테니 어서 가 보십시오, 형님!”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있는 이들은 대부분 한때 언영이 목린의 얼굴 한번 눈에 담겠다고 바다를 쉼 없이 목숨 걸고 건너던 그때부터 이미 그와 돈독한 우애를 쌓던 사람들이었다. 늘 언영이 먼저 달려가는 모습만 구경하다가 수줍음 많은 형수님이 먼저 그를 찾는 날을 맞이하니 제 일처럼 감동한 것이다. 물론 목린이 직접 제 발로 걸어왔으면 더 기뻤겠지만, 이마저도 어마어마한 수확이었다.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너는 나 따라와.”
좋아서 입을 못 다무는 언영이 현오의 어깨를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현오는 옳다구나 하고 기분 좋게 끌려갔다.
혜영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그 뒤를 언영과 현오가 잇따라 이동했다. 기대와 흥분으로 부푼 언영의 어깨가 마치 평소보다 훨씬 위풍당당해 보이는 착각을 일으켰다.
“목린이가 무슨 일로 나를 찾을까.”
지난번에 목린이 먼저 그를 찾았을 때는 사라진 서간의 행방을 위해서였다. 요즘엔 그런 뒤숭숭한 일도,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 기대할 만할 것이다. 보고 싶어서 불렀다면……. 상상만 해도 황홀해서 언영은 얼른 허리춤의 호리병을 땄다.
굳이 동반자로 현오를 고른 건 그가 가장 친한 벗인 탓도 있지만, 그가 가장 여인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언영아, 다시 축하한다. 부인께서 먼저 다가오시는 날도 생기는구나.”
현오야말로 가장 언영을 근처에서 자주 지켜보던 사람이었다. 그는 언영 못지않게 미소를 보이며 내심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고백했다.
“이제야 솔직히 말하는데 나는 사실 예전에 믿기 힘들었거든. 너는 그렇다 쳐도 목린 님께서도 네게 마음이 있다는 게.”
“초족은 수줍음이 엄청 많은 부족이야.”
“그건 알지만, 오죽하면 내가 목린 님은 너한테 감정 없는데, 너 혼자 오해하고 있다고 의심까지 했겠어.”
언영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무표정일 때는 가차 없는 벗의 안색을 살피며 현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부러 언영의 어깨를 정답게 팍 내려쳤다.
“에이, 옛날 일이니까 표정 풀고.”
“그런데요.”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던 혜영이 휘릭 고개를 돌리며 끼어들었다.
“표정을 보니 기분이 엄청나게 상하신 것 같아요.”
“흐음.”
현오는 오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주변 분위기가 조금 이상야릇하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거리에 사람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한편 옆에서 나란히 걷던 언영은 간단히 말했다.
“수줍어하는 표정이야.”
“글쎄, 그건 너무 넘겨짚는 것 같은데.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걸. 애초에 네가 정말 보고 싶었다면 두 발로 직접 오셨을 텐데 말이지…….”
오랜 친우가 너무 여유롭게 사는 것 같아 현오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바깥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에 목린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잔소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저기 계신……”
검지를 내밀기 위해 치켜들었던 현오의 팔이 순간 후들거렸다. 얼른 팔꿈치를 오므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야, 주언영. 너 오늘 아침에 목린 님 머리 땋아 줬다고 자랑하지 않았냐.”
“맞아.”
“혹시…… 결과물이 저거냐?”
짝짝이로 묶인 양쪽 머리는 우습다 못해 무서워 보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아래로는 남은 머리가 땋아져 있었는데, 잔뜩 엉킨 상태가 멀리서 봐도 가관이었다.
목린은 그 머리를 가슴께 앞으로 가져와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풀고 있었지만 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부득이하게 잘라 내야 하는 상황도 고려해 봐야 할 분위기였다.
목린의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그녀는 언영이 걸어오는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오는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음에 경악했다. 목린 주변에서 흐르는 무서운 기가 느껴졌다. 저건 아무 때나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머지 귀혈족도 불길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긴 마찬가지였다. 훈련장의 여인들은 마치 저들이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은 자리에 멈춰서 사태를 관망 중이었다. 오는 길에 인적이 드물었던 연유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여기서 오로지 언영만이 둔감했다.
“왜? 예쁘기만 한데.”
“물론 목린 님은 저렇게 계셔도 미인이시지만……. 저건 좀…….”
“눈부시기만 한데?”
“야…….”
말을 말자. 현오는 이를 악물었다.
세 사람은 목린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눈치를 보던 혜영은 누이들이 있는 쪽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그래서 으스스한 분위기의 목린과 마주하는 이는 이제 언영과 현오뿐이었다. 될 수만 있다면 현오도 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머리가 엉켜서 풀리지 않아요.”
목린이 포기한 듯 머리를 손에서 놓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머리는 더욱더 엉망이었다. 그녀가 내뱉는 음절 하나하나에 냉담함이 흘러넘쳤다.
“땋을 줄 안다고 하셨잖아요.”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할 것 같아서 그랬어.”
언영은 이 상황에 하등 어울리지 않는 다정다감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현오의 등골이 싸해졌다.
“야, 정말 화나신 것 같아…….”
현오가 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언영이 뭐라 말하려 입술을 뗐는데, 훈련장에 있던 여인들이 더 빨랐다. 두 손을 모으고 절박하게 사과했다.
“목린 님, 죄송해요. 저희는 초족 문화 중의 하나인 줄 알았어요.”
“진실을 알았다면 바로 말해 드렸을 텐데 어떡해요.”
“저도…….”
화영과 혜영도 따라 했다. 이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래서 목린의 머리를 보고 대놓고 웃은 이는 아직 비웃음을 제대로 조절할 줄 모르는, 나이가 매우 어린 선영뿐이었다.
“……괜찮아요. 여러분은 잘못 없어요.”
연달아 사과를 뱉는 이들에게 목린은 선뜻 용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영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현오는 내심 감탄했다. 하지만 그다음 언영의 발언을 듣고 지금이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언영이 평범한 투로 물었다.
“왜 화난 거야?”
“왜…… 화났냐고요?”
현오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화났냐고요? 머리를…… 이따위로 묶어 줘 놓고 그런 말이 나와?”
“이따위…….”
다인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순하기 그지없는 목린의 입에서 나왔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험한 단어였다. 그러나 언영은 그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내 눈엔 정말 아름다운데…….”
“아아아악!”
목린이 이제껏 들려주지 않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잠깐만! 잠깐만, 목린아! 아야! 내 말 좀 들어 봐!”
목린은 손바닥으로 언영의 몸을 쉬지 않고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하등 아프진 않았지만 언영은 몸을 움츠렸다.
“나 정말 모르겠어! 눈이 멀 것 같이 예쁜데 왜 그래!”
“정말! 나빴어! 너무 미워!”
머리는 목린이 가진 뿌듯한 자부심이었다. 다른 일에는 겸손하기 그지없지만 곱게 땋은 머리만큼은 자랑스럽게 뽐낼 줄 알았다. 빙빙 돌며 머리를 자랑하면 동네 어른들이 귀엽다고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그 기억이 그렇게도 좋았더란다.
“싸움 났다!”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두 팔을 번쩍 하늘을 향해 들었다. 누가 뭐래도 몸싸움은 귀혈족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주언영 져라!”
“목린아. 목린아, 잠깐만. 나 좀 봐. 진정하고.”
언영은 입으로 목린을 만류하기는 하였으나 찰싹찰싹 날아오는 손을 곧이곧대로 맞아 주었다. 틈을 타 계속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씩씩거리는 목린에게 협상은 안중에도 없었다.
“목린아, 잠깐 내 말 좀 들어줘.”
이대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언영이 지는 척 수그렸던 허리를 쫙 폈다. 순식간에 언영의 덩치가 목린을 압살했다. 목린이 손을 날리다 말고 당황하는 사이 언영은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허무할 정도로 가뿐히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눈을 맞추고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가 퍽 진지했기에 목린도 팔을 살며시 내렸다. 그녀의 발이 가볍게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언영은 설명하려고 했다. 적어도 처음 의도는 그랬다. 하지만, 아까까지 울분을 토하느라 살짝 뾰로통한 목린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졌다. 얘는 어떻게, 삐뚤어진 입술도 이렇게 귀엽고 미간에 힘을 준 것도 사랑스럽고…….
결국 대화는 집어던지고, 홀린 표정으로 언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화난 모습도 진짜 예쁘다.”
“크아아아아아악!”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목린이 우악스럽게 발길질을 시작했다.
목린의 조그만 발이 사타부니 부근을 후려쳤고 언영은 짧은 신음을 끄응 토해내며 그녀를 바로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마자 목린은 다시 언영의 몸을 되는 대로 콩콩콩 허술하게 때렸다. 주변에서 함성이 잇따랐다.
목린이 제 딴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때, 그녀의 뒤로 현오가 은밀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좀 도와드릴까요?”
그가 실실 웃으며 손을 푸는 운동을 보이자 뼈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목소리가 들릴 때까진 그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목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필요 없……. 현오 님은 또 서방님 때리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모두 서방님 때리면 안 돼요! 저만 할 거예요!”
목린은 새를 쫓아내듯 팔을 흔들며 훠이훠이 현오를 저 바깥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혹시라도 지금을 기회로 삼으려는 또 다른 이들을 막기 위해 양팔을 뻗어 언영을 (물론 가려지진 않았지만)가렸다.
언영은 그 모습을 헤벌쭉 웃으며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목린의 분통 난 얼굴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그의 두 눈에선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언영을 돌아본 목린이 그의 상태를 파악하고 빽빽 소리 질렀다.
“뭘 잘했다고 웃어요!”
목린의 손이 더 파닥파닥 움직였다. 찰싹찰싹. 언영이 고개를 젖히고 과장되게 울었다.
“아아아.”
“엄살이잖아요! 제가 때리는 거 서방님한텐 별것도 아니면서!”
“아니야. 은근히 아파.”
“거짓말! 아픈 척하면서…….”
분위기가 돌연 바뀌었다. 목린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면서부터였다.
“서, 서방님! 피나요! 코에서 피나요!”
“아?”
그제야 언영도 입술까지 흘러내리는 축축한 느낌을 감지했다.
솔직히 왜 피가 나는지 아는 사람의 입장에선 당혹감보단 민망함이 훨씬 크게 번졌다. 언영은 목린의 눈길을 피하며 어색하게 피를 벅벅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그 짧은 사이에 목린의 동공에 어려 있던 부아가 모두 녹아내렸다.
“……정말로 많이 아프셨던 거예요?”
울상 짓는 목린이 손을 뻗어 언영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팠어.”
“그러면 왜 피가 나요……. 어, 어떡해. 저는 당연히 서방님이라면 끄떡하지 않을 줄 알고…….”
목린은 언영의 코피가 오롯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서방님. 제가 너무 나갔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뭘 잘못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언영이 일단 사과했다. 목린을 든든히 두 팔 안에 안았다. 목린은 언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서방님은 저를 생각해서 하신 건데……. 제가 너무 화만 냈던 것 같아요.”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다신 네 머리 땋으려 하지 않을게.”
“제대로 배운 다음엔 마음껏 해주셔도 괜찮아요……!”
귀혈족은 싸움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화해 모습을 지켜보는 그들의 표정에서 빛이 났다. 뜨거운 함성이 주변을 메웠다. 역시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부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 *
“저기, 그만 만지셔도 돼요.”
“아니야. 많이 무리했잖아.”
밤이었다. 결국 오랜 시간의 사투 끝에 엉켰던 머리를 풀어 낸 목린은 씻고 나서 침상 위에 축 늘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언영이 바투 다가왔다. 그리고 때리느라 고생했다는 의미, 미안했다는 의미로 그녀의 손과 발을 정성스럽게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언영의 커다란 손안에 목린의 발은 그냥 파묻혀 버렸다. 언영은 그녀의 발을 지나치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발일 뿐인데. 목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아프지도 않았다. 몸을 빼며 피하려고 했으나 언영이 너무 꽉 발목을 붙들고 있어서 소용없었다.
“아픈 건 서방님이셨는걸요.”
“무슨 소리야. 갑옷을 맨손이랑 가벼운 신으로 때리는 게 더 아프지.”
“그래도 전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목린은 언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 신경을 그녀의 아담한 발에 몰두하며, 끊임없이 발을 꾹꾹 눌러주고 쓰다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그냥 서방님께선 즐기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응?”
“아, 아니에요.”
목린은 얼른 입술을 오므렸다.
언영은 다시 목린의 발을 아껴 주며 주물렀다. 손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발이 뭐가 그리 좋은지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가려고 했다. 목린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서방님. 발을 계속 만지는 건 너무 이상해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발이잖아요…….”
“우리 목린이 발 오늘 많이 고생했으니까 이렇게 만져 줘야 해. 오늘 힘드셨다고, 고생 많이 하셨다고 풀어 줘야 내일 걸어 다니지. 발 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언영은 목린의 발을 두 손으로 소중히 쥐고 정말 사람에게 말을 걸듯 감사를 표했다. 목린은 작게 웅얼거렸다.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왜 그렇게 발을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냐는 질문이 목린의 턱까지 가득 차올랐다.
발 전체를 아우르는 이상야릇한 손길에 그녀의 솜털이 곤두섰다. 목린은 이번엔 좀 강하게 뿌리쳤다. 다리를 구부리며 피했다. 언영은 그녀를 놓아주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않았다. 목린은 바닥만 내려다보며 부탁했다.
“서방님, 이제 그만해요…….”
“그러면 손 주물러 줄까?”
환하게 웃으며 언영이 몸을 가까이 숙여왔다. 손이 잡힐 즈음 목린이 얼른 등 뒤로 숨겼다.
“아니, 손도 필요 없어요. 저 정말 일어날 거예요……!”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얼른 이 후끈한 자리를 피하고자 하는 요량이었다. 그런데 일어나며 올라간 발이 언영의 얼굴을 툭 치고 지나가 버렸다.
“아아!”
“죄송해요!”
정확히 어디를 때리고 지나갔는지 목린은 알지 못했다. 언영이 바로 짧은 비명과 함께 한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고통을 삭이고 있는지 그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었다. 목린은 즉각 언영에게 다가가 걱정되는 마음을 잔뜩 드러냈다.
“서방님! 괜찮으세요?! 코에 맞으신 건 아니죠? 어떡해! 많이 아프세요?”
“…….”
“서방니이이임…….”
평소라면 ‘하하하하, 괜찮고말고!’ 하며 웃어넘길 사람임을 알기에 목린의 마음은 단숨에 무거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언영의 어깨를 잡고 아주 살짝 흔들었다.
다음 순간,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서방님, 서방님 하던 목린의 발목이 덥석 잡혔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잡힌 발목이 위로 끌어당겨지면서 몸통은 반대로 뒤로 넘어갔다. 민망한 자세 탓에 부끄러워 얼른 일어나려고 했는데, 이미 그녀의 귀여운 발가락은 그의 입에 먹혀들어 간 뒤였다.
“서방님 그걸 왜 빨아요!”
쭙쭙 소리를 내며 언영은 목린의 발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목린과 눈을 마주치고도 화사하게 웃었다.
“얼른! 얼른 빼요!”
“조금 전에 네 발이 엄청 아야 했어. 낫게 해 줘야지.”
“그건 반대쪽 발이잖아요!”
언영은 순간 제 말실수를 깨닫고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게 들킨 그는 이제 뻔뻔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어떻게 발도 이렇게 예뻐. 아까부터 계속 빨아 주고 싶었어.”
“원래 다른 부부도 다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언영은 막 씻고 나와 향긋한 목린의 발바닥에 코를 박고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그 위를 쭈욱 핥았다. 경악한 목린의 두 눈동자에 공포가 차올랐다. 언영은 반대쪽 발에도 똑같이 했다.
“어디든 다 빨아먹고 싶게 생겼어.”
뜨겁게 속삭이는 언영을 보며 목린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예전의 그, 귀혈족이 인육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그 의심이 다시 생각났다. 귀혈족의 참모습을 배우게 된 이래로 지워 버렸던 생각인데 저 소름 끼치는 발언이 다시 상기시켰다.
“안 돼요! 저 맛없어요!”
목린은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외쳤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인육을 먹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미 귀혈족 문화엔 목린이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녀가 얼굴을 팔로 가려 버렸기 때문에 언영은 목린이 진정으로 떨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겁에 질린 목소리를 생동감 넘치게 잘 꾸민다고 속으로 감탄할 뿐이었다.
목린이,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렇다면 언영도 목린에게 맞춰 줄 생각이 있었다. 그는 먹이를 쫓는 호랑이처럼 잽싸게 목린의 위에 드러누워 조그만 그녀를 팔 사이에 가두었다.
“어흥! 잡아먹겠다.”
“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을 듣고 언영은 속으로 매우 놀랐다. 그리고 정말로 간 보는 것처럼 입으로 목린의 귀를 잘근잘근 깨물고 혀로 핥기 시작했다. 그의 품 안에서 목린이 형편없이 떨고 있었다. 목린이가 이런 데에 타고난 줄은 몰랐던 언영은 내심 감탄했다.
그는 이어서 정말로 맛볼 먹이를 만지듯 목린의 엉덩이와 허리를 쓰다듬었다. 살이 많은 엉덩이 부근에 손을 오래 올려놓고 주물럭거렸다.
“밥 매번 든든하게 챙겨 준 보람이 있어. 맛있게 잘 여물었어.”
옷을 찢듯이 벗겨내고 목린의 가슴을 쥐어짜며 그가 속삭였다. 이제 목린은 떨기만 할 뿐 아니라 작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마저 진짜 같았다.
“아껴 먹으려고 했지만 못 참겠는데.”
언영도 몰입하여 낮고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목린은 이제 우느라 숨을 못 쉬고 있었다. 아니, 숨을 못 쉬는 것처럼 구는 거겠지. 언영은 속으로 그렇게 정정했다. 단단하고 두꺼운 허벅지 사이로 목린의 몸을 도망칠 수 없게 꽁꽁 가두었다. 그리고 일부러 굶주린 짐승처럼 거친 숨소리를 목린의 귀에 바짝 대고 들려주었다.
목린은 이제 콜록거리며 울었다. 너무 진짜 같은 소리 때문에 언영은 슬슬 죄책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얼른 끝낸 다음 밤새 예뻐해 주고 싶었다.
“이제 먹어 볼까?”
그렇게 말하며 언영은 목린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똑바로 마주 본 다음, 목린이 손으로 가리고 있는 얼굴을 드러내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뜨거운 밤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얼추 성공했다. 목린의 손을 얼굴에서 떨어뜨리는 것까지는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목린의 얼굴이 정말로 눈물범벅이었다.
‘어……?’
그리고 두려움에 정복된 목린의 눈은 언영의 입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대로 감겼다. 이어서 그녀의 목이 옆으로 꺾이고 팔과 다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목린아……?”
입을 맞추기 직전 다시 언영은 몸을 뒤로 뺐다.
“목린아, 왜 그래? 목린아? 괜찮아? 목린아, 눈 좀 떠 봐……. 목린아!”
언영이 목린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끼워 넣고 일어나 앉았다. 목린의 몸통은 따라서 올라왔지만 팔은 흐물거렸고 목은 어색한 방향으로 축 기울어졌다.
“목린아!”
쾅!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들어 있던 륭과 봄비 모두 눈을 떴다. 얼굴을 삐죽 밖으로 내민 그들의 눈에는 부랴부랴 밖으로 튀어나온 언영과 그의 팔 안에 늘어져 있는 목린이 들어왔다.
언영은 손이 너무 떨리는 나머지 도저히 목린에게 신발을 신겨 줄 수가 없었다. 앉아서 몇 번 시도해봤지만 안 들어가서 결국 신을 아무 데나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목린을 제대로 업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의원님!”
안 그래도 흉악한 인상의 의원은 갑작스레 찾아온 밤손님에 의해 더 피로감이 쌓여 지쳐 보였다. 그는 목린을 들고 오는 언영을 보고 미리 한숨을 쉬었다. 어째 시끌시끌한 밤이 될 것만 같다.
“어찌 이리 되신 겁니까.”
의원은 언영을 안으로 안내했다. 지난번 목린이 초야 때 쓰러져서 데려왔던 곳과 같은 침상이었다. 그 당시 어이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번에 찾아온 사유는 조금이라도 더 말이 되지 않을까. 의원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잡아먹겠다고 했습니다.”
“…….”
너무나도 안이한 생각이었다.
“물론 정말로 먹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부부끼리 밤에 흔히 하는 극 같은…….”
“되었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습니다.”
썩어들어 가는 상대의 표정을 보고 언영이 곧장 해명하려 하였으나, 의원은 손을 내저으며 뒤로 빠졌다.
그래도 이번엔 언영이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다.
“목린아, 미…….”
깨어난 목린을 향해 언영이 사과를 시도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눈을 맞추지 못하며 매 맞는 아이처럼 떠는 목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갔다.
“목린아……!”
“많이 무서웠어요…….”
“목린아, 정말 미안해. 나, 나 사람 먹어 본 적 없어. 귀혈족 중 누구도 사람을 먹어 본 적 없고.”
“……흐윽.”
“목린아,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장난치지 않을게.”
무릎을 꿇고 말을 잇는 그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진심이었다. 목린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의 축 처진 어깨를 살폈다. 그리고 언영의 심장을 쿵 떨어뜨리는 발언을 입 밖에 내밀었다.
“서방님의 진심은 알겠지만 다, 당분간은 각방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무서워요…….”
그렇게 언영의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이 시작되었다.
목린(木隣) 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