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11/25)

11장

목린은 언영에게 짐작하는 범인이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가 먼저 말해 줬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언영이 오두막 앞에서 살짝 망설이는 지금은,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와 인내심이 사라진 그녀를 애타게 했다.

나무로 지어진 간소한 오두막은 사람이 세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방으로만 이루어진 협소한 공간이었다. 주변에 있는 길고 치렁치렁한 나무에 지붕의 절반이 가려져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집에서 우중충한 분위기가 났다.

서먹해진 탓에 목린은 언영에게 제대로 말을 걸지 못하고 그의 뒤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주춤대다 결국 문을 두들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귀가 그다지 밝지 않은 목린의 귀에도 안에서 후다닥 달려가는 듯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목린은 움찔거리며 언영의 등 뒤에 더욱 몸을 가렸다.

“실례합니다.”

언영은 상대를 배려하듯 잠깐의 시간을 주었다. 충분히 지났다 싶었을 때 문을 밀었다. 한데 뒤에 있는 무언가에 걸린 듯 열리지 않았다. 그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주언영입니다. 무서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뒤에 있는 것 치워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는 답이 없었다.

“이 오두막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인 양 이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언영은 팔을 쓰면서 문을 밀었다. 그러자 덜커덩거리며 조금의 틈이 생겼다. 목린은 그가 일부러 모든 힘을 쓰지 않고 상대에게 기회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틈으로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목린은 예상 밖의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린 여자아이였다.

“안 해칠게. 이것 좀 열어 줄래?”

언영의 목소리가 훨씬 담백해졌다. 그는 의외로 이 놀라운 상황에 덤덤했다.

겁에 질린 아이는 언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작은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표정에서도 보였다. 아이의 눈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언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을 열어 주려던 차였다. 아이가 그의 뒤에 서 있는 다소곳하게 목린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이의 고운 피부가 삽시간에 파리해졌다. 언영을 향해 조금이나마 열어 주었던 마음도, 문도 모두 다시 쾅 닫아 버리고 말았다. 언영은 당황했지만, 소녀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목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요. 너무 겁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

언영이 짧게 끄덕이며 문에서 손을 뗐다.

부부는 자리를 지키고 거의 변함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목린은 다리가 조금 아팠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그보다는 안에서 떨고 있을 아이가 조금 더 걱정이었다.

목린은 자신이 이 마을에서 가장 덜 위협적으로 생긴 여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단월도에서도 그녀를 무서워하던 아이가 없었으니 이곳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다. 그렇다면 아이가 겁에 질린 이유는 역시 하나였다.

찔리는 것이 있어서겠지.

범인을 잡았다고 거의 확신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하등 기쁘지 않았다. 외려 불편한 감정만 더욱 응어리졌다. 아이에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무어 때문에 다른 비싼 것은 놔두고 서간 따위를 챙겨 간 걸까.

“안 되겠어.”

갑자기 언영이 못 참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외쳤다. 목린은 서둘러 입술을 뗐다.

“그래도 제 생각엔 겁먹은 아이를 기다려주는 편이 훨씬 나으…….”

“여기 잠깐만 있어. 네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주고 올게.”

언영이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며 황급히 등을 돌린 그때였다. 빗소리로 난잡해진 그 오후에, 문이 끼기긱 열리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목린과 언영의 눈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아이가 소심하게 모습을 보였다. 이리 들어오라는 듯, 조심스럽게 손짓하는 아이의 눈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 * *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언영은 안에 있는 따뜻한 천을 쥐고 목린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사실 둘러볼 것도 없는 곳이었다. 세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벌써 꽉 찬 느낌이었다. 고즈넉한 내부에는 딱히 몸을 숨길 가구도 없어 허전했다. 비가 내리는 소리와 함께하니 더욱더 음침하게 보였다.

바닥 중앙에는 목린이 열심히 찾아다니던 서간이 펼쳐져 있었다. 목린이 물었다.

“가져가도 될까요?”

아이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서간을 다시 곱게 접으면서도 목린은 아직도 떨고 있는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언영이 덮어 준 천을 대신 넘겨주기 위해 손으로 쥐었다. 그런데 그때 언영이 소녀를 내려다보며 뜻밖의 질문을 했다.

“선영이는 없는 거야? 혼자야?”

“선영이요?”

오히려 놀란 목린이 되물었다.

“선영 아가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단언 짓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

언영이 한 번 더 별것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요즘 그렇게 글짓기에 열정을 가진 애는 마을에 선영이뿐이잖아. 도끼로 파인 자국도 높이를 보면 어린애가 만든 게 분명하고 그래서. 훔쳐 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두 가지를 연결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애는 선영이다 싶었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이가 갑자기 흐느꼈기에 언영의 설명은 여기서 끝이 났다.

“나쁜 짓 할 의도는 없었어요…….”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목린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물었다.

“저, 저는…….”

“현화야.”

언영이 아예 무릎을 굽혀 아이를 살짝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다. 아이는 크게 당황해 움찔거렸고 목린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부족 사람들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언영은 아이의 이름을 친근하게 입에 담았다. 아이를 올려다보는 언영의 눈이 친누이를 올려다보듯 부드럽고 믿음직스러웠다. 아니, 목린이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자주 저런 표정을 지었다. 기분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은 이상 매번. 특히나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더더욱.

‘하하하, 안녕하세요!’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는 늘 이토록 해맑게 부족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제가 전부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루는 행사가 있어서 호박 요리를 많이 할 일이 생겼다. 언영은 수도 없이 쌓여 있는 호박을 모조리 다 직접 잘라 주기를 자처했다.

‘하하하하하!’

언영이 가슴에 힘을 주자 안에 끼워 넣은 호박이 모조리 깔끔하게 잘렸다.(따라 하지 마세요.) 언영은 쉬지 않으며 빡, 빡, 빡, 호박을 갈랐고 주변에 있는 귀혈족 사람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그 모습을 감상했다. 그들의 눈에 감동이 넘실거렸다.

‘엄청난 가슴이다……!’

‘실로 족장감이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형님!’

마음이 여리고 감정적인 귀혈족 사람들 대다수가 이 아름다운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물론 목린은 저만치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혼자 서 있었고. 또 그날 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언영의 품에 꽉 갇혀 자던 도중에는…….

‘서방님……. 가슴에서 호박 냄새나는 것 같아요.’

‘뭐? 여러 번 씻었는데? 미안해!’

……이런 기억도 있었지만.

좌우간, 목린이 하고픈 말은 언영의 눈은 언제나 이토록 다정하고 부드러웠다는 사실이다. 그동안은 이 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경우가 전무했다. 애당초 타고난 성격이 늘 그러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초조해하고 긴장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목린에겐, 목현과 언영은 너무나도 다르리라 지레짐작하고 넘어간 경험이 있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훔쳐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목린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언영이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 주지 않을래?”

아이는 언영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아이가 언영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목린의 눈에도 보였다. 그리고 그 소녀의 입술이 벌어졌을 때 부부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진지하게 귀 기울였다.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누군가가 어떤 취미에 능통하면 그들은 칭찬을 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나 실력이 서투른 자들에게는 갈채가 덜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은 서툰 자들이 그 일을 즐기고 있다고 쉽게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성과이기에.

현화는 글을 쓰기는커녕 읽는 법도 잘 몰랐지만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현화는 언영의 누이인 선영이 부러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주변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게 샘이 났다. 그래서 무작정 따라 하고 싶었다. 다만 초조하고 불안한 아이는 제 실력을 기르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거리에서 서간을 나눠 주는 아저씨를 만나서, 그를 놀리면서 노는 사이 급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서간의 대부분이 이번에 족장님 아드님 댁에 시집온 어여쁜 선녀 같은 분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이렇게나 많이 받는데, 그렇다면 하나 정도 훔쳐 가도 괜찮을 거야.

하여 줄곧 틈을 노렸다. 그리고 목린이 쪽잠을 자고 언영이 마구간에 있을 때 몰래 벽을 넘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하나만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를 집었더니 과연 이 하나를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두 장을 집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게다가 언제 언영이 밖으로 나오거나 목린이 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 보니 현화는 모든 서간을 다 훔쳐오고 말았다.

멋대로 가져온 서간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자 현화의 걱정은 살금살금 크기를 더욱 키웠다. 본래 소녀의 목적은, 남들에겐 익숙하지 않을 내용과 필체를 이용하여, 그것을 그대로 베끼거나 아니면 이곳저곳에서 여러 문장을 긁어모아 그럴싸한 것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아는 것도 없으며 초조한 아이가 제대로 그 짓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서간 여러 장을 사방에 이리저리 펼쳐 놓고도 며칠을 더듬거렸고, 결국에는 이는 서간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며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오늘, 목현이 보낸 것까지 급하게 뺏어 온 것까지가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거…… 못 읽었어요.”

훌쩍이면서 아이는 목린의 손에 잡힌 서간을 가리켰다. 알아보지 못하니 손에 쥐어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뜻이었다.

“나머지는 집에 가면 돌려드릴 수 있어요.”

우는 아이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잘못한 거 맞아요.”

“정확히 무얼 잘못했지?”

여전히 한쪽 다리를 꿇어앉은 언영이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왠지 이것은 어린 누이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습관 같다고 목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갔어요.”

“그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면 앞으로 하지 않을 거야?”

“네…….”

“정말이지? 그 물건이 다른 사람한텐 굉장히 소중한 것일 수도 있어.”

“흐흑, 네…….”

아이는 고개를 떨구며 울었고 언영은 가까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어서 그는 고개를 돌려 목린을 올려다보았다.

“목린아, 네가 하고픈 말은 없어?”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목린은 놀랐지만,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서방님께서 다 말해 주셨다고 생각해요. 이제 안 하겠다는 약속도 받아 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 그러면…….”

언영이 다시 천천히 앞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차례네.”

그의 낯빛에 돌연 어두움이 찾아왔다.

목린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언영이 먼저 소녀를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입술을 뗐다.

“현화야. 네가 그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해서 미안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해. 좋은 사람이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의 무릎이 보이지 않는 힘에 무겁게 짓눌렸다.

자신보다 경험이 한창 부족하고 미숙한 아이를 상대로, 동등한 위치에 선 이를 대하듯 그렇게 모든 글자에 진지함을 눌러 담아 말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목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한참 동안 언영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슬픔을 담은 듯한 그의 등을 응시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왠지 오늘 그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봄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 * *

일찍 출발해서 다행이었다. 꽤 시간이 지체되고 비마저 내리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앞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빛은 있었다.

목린과 언영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앙금은 어느새 빗물에 휩쓸려 같이 내려갔다. 숲을 헤쳐 나가다 보니 분노도, 피곤함도, 짜증도 모두 마모되었다. 단지 말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아이는 언영의 등에 업혀 잠이 들었고, 목린은 아까 갈 때처럼 남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여도 언영이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사과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온통 뒤범벅되어 있었다.

사과를 한 뒤 그가 아이에게 이어서 한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린다.

‘나도 너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

그는 언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과연 당시에 티를 냈을까?

목린이 옆으로 살짝 시선을 돌리자 엄청나게 큰 나무가 보였다. 주변에 있는 식물들과 친해지고픈 욕심이 지극한지 마치 손을 뻗는 것처럼 가지를 이곳저곳 사방에 펼쳐 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서 비를 피하기 제격이었다.

목린이 입술을 열었다. 오두막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하는 대화였다.

“서방님, 저녁에 급한 일 있으세요? 없으시다면 왼쪽에 저 나무에서 좀 쉬었다 가는 게 어떠세요?”

언영의 눈도 그 나무를 향했다.

“그래. 마침 비도 서서히 멎고 있고…… 곧 있으면 그칠 것 같으니 잠시만 저기 있자.”

터벅터벅 천천히 나아갔다. 젖은 풀을 밟는 느낌이 이상하면서도 중독성 있었다.

비가 그치려면 그래도 꽤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두 사람은 자리에 앉기로 했다. 목린이 언영의 등에 업힌 현화를 먼저 떼 주었다. 그리고 언영이 다시 아이를 가슴에 받아 안으며 땅에 착석했다. 목린도 언영의 옆에 얌전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목린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오후, 봄비가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늘은 어두운데 오히려 그 외로운 느낌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있다. 옆에서 들리는 언영의 숨소리가 간신히 그녀를 현실에 붙잡았다.

언영이 먼저 입술을 뗐다.

“평생 고민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목린은 휙 고개를 돌려 언영을 올려다보았다.

언영의 옆얼굴을 타고 흐르는 번뇌가 선명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속눈썹이 곧고 예쁘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거면 되겠지, 이거면 모두가 행복하겠지 생각해도, 늘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생겨.”

그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뺨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자연스레 눈물로 착각될 정도로.

“어린 나이에 글을 배우는 걸 선영이가 그렇게 좋아하길래, 당연히 다른 애들도 똑같을 거로 생각했어. 애들이 기뻐하는 것 같아서 뿌듯하고 좋았어.”

“확실히 훌륭한 생각은 맞았어요.”

“모르겠어, 나는.”

목린이 서둘러 말했지만, 그는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다소 회의적인 제 생각을 말했다. 그는 답답한 듯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모두를 끌어안고자 해도, 그 안에서 항상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야. 눈에 보이면 바로 고칠 수 있는 거라면 더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나도 결국엔 사람인지라 내가 모르는 사정들이 자꾸만 벌어져.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거야. 그것만 생각하면 종종 미쳐 버릴 것 같아. 내가 모두를 끌어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내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비웃으며 속삭이는 것 같아서.”

자조적으로 읊조리며 그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힘이 풀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힘없이 내려갔다.

목린은 그에게 두 눈을 고정하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고민을 많이 하셨나 봐요.”

언영이 힘없이 웃었다.

“당연하지. 어머니의 자리를 언젠가는 내가 물려받게 될 테니까.”

“전혀 몰랐어요. 전혀…….”

목린은 고개를 저었다.

“서방님은 늘 밝고, 긍정적이고 고민 없으시고 그러신 줄로만 알았어요.”

나뭇잎에서 빗방울이 하나 뚝 떨어져 현화의 다리에 떨어졌다. 언영은 더 단단히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나는 언제나 밝아야 하니까. 나까지 비관적이라면 내게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겠어.”

‘어머님께선 늘 밝아 보이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목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흘러갔던 월진과의 대화가 갑자기 심장을 콕콕 쑤셔 댔다.

변화하는 목린의 표정을 보고 언영이 서둘러 밝게 말했다.

“하하! 그렇게 어두운 표정 짓지는 마. 그렇다고 내가 맨날 감정을 숨기진 않아. 거의 하루 종일 즐거운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 쾌활함은 일시적이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언영은 다시 얼굴을 굳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목린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자고 한 건 단순히, 더 많이 알고 더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야. 그런 건…… 물론 좋지만, 단순히 배움의 양이 목적이 아니길 바랐어.”

아득한 과거를 끄집어내는 중이라 언영의 눈빛이 사뭇 흐릿했다.

“너한테 예전에 서툴게 글을 남기면서 내 기분이 끔찍했던 건, 내가 무식한 게 부끄러워서라기보다는……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부족한 현실이 안타까웠어. 그래서 나보다 어린아이들은 같은 고민을 하지 않길 바란 거야. 사랑하는 벗, 가족, 정인에게 마음껏 생각을 전달할 수 있게 하려고. 그리고 그 소통 속에서 몸소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

“그런데 현화는 전혀 그런 기회를 못 누리고 있잖아. 현화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자괴감을 느꼈으며, 또 내가 얼마나 많이 그걸 모르고 지나갔을지 상상만 해도 너무…… 절망적이야. 나는, 모르겠어. 이런 식으로 애들이 배워 나가도 괜찮은 건지, 정말 모르겠어.”

줄줄 생각을 내뱉은 언영의 귀가 갑자기 화르르 불타올랐다. 저도 모르게 진지한 생각을 너무 오래 털어놓고 말아 당황해 버렸다. 그는 의미 없이 손으로 머리를 털며 애써 가볍게 덧붙였다.

“뭐, 내가 무식하고 멍청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하하하.”

“서방님, 무식하지 않아요……!”

목린이 언영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어떻게 조금 전과 같은 말을 한 분이 무식할 수가 있어요.”

목린이 언영의 어깨를 쥔 손 중지와 검지 사이에는 목린이 오늘 찾아 해맨 서간이 접힌 채 껴있었다. 오는 길에 빗물에 다 젖어버린 종이는 형편없게 변해 버렸다.

언영의 눈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그의 표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분명 나무 바깥에 오고 있는데, 그의 얼굴도 씻겨 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목린아.”

언영이 애타게 목린을 불렀다.

“그 서간, 다시 쓰지 마.”

언영이 호소했다.

“가지 마.”

또 호소했다. 서간이 낀 그녀의 손을 쥐고 절절하게 부탁했다.

“가지 마, 목린아.”

“서방님……. 서방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내용 아니었어요.”

목린이 눈을 맞추고 고백하자, 언영이 입을 살짝 벌렸다. 그의 눈에서 당혹감과 기대가 같이 섞여 물결치고 있었다.

“……정말이야?”

목린은 한 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여기 떠날 생각 없어요. 서방님께 서간 내용을 숨기려고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오라버니께서 제게만 말해주신 오라버니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걸 제가 허락도 안 받고 마음껏 읽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아…….”

언영은 잡고 있던 목린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목린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옷은 말이에요……. 그 갑옷은 제가 입기엔 너무 무거워요. 첫날부터 입기를 포기했어요.”

“그래? 나름 신경 써서 제작한 거였는데…….”

“그래도 너무 무거웠어요. 그래서 도무지 입고 생활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언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쏟아지는 진실을 받아 내기 힘겨워했다. 목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다, 뻐끔거리듯이 사과했다.

“……미안해. 나는, 몰랐어.”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을 내리깔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내가…… 처음부터 다 오해했던 거였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네가 여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눈치보고……. 나 혼자만 한심하게…….”

언영은 다시 정면을 보고 앉았다. 그는 앞으로 무슨 낯으로 목린을 보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그의 귓가에 다시금 목린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향에 계신 웃어른들께선 늘 제가 성숙하고 차분하다고 해 주셨어요. 저는 당연히 칭찬이라고 받아들였고, 나름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땐.”

언영은 천천히 고개를 다시 돌렸다. 이번엔 언영이 그녀의 말을 들어줄 차례였다.

두 검지를 꼬며 목린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런데 모르겠어요. 어렸던 제가, 지금도 어린 제가, 그 나이에 성숙해 봤자 대체 얼마나 성숙했을까요?”

그리고 목린은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저는 성숙했던 게 아니라, 말을 할 줄 몰랐던 거예요. 숨길 줄만 알았던 거지요. 그저 그 진실을 맞닥뜨리지 않았던 거예요.”

부끄러웠다.

목린은 일부러 앞만 바라보았다. 언영과 눈을 마주치기 두려웠다. 그가 기대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서, 그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계속 입을 열었다.

“당연히 숨기고 있었으니 그분들은 제가 갖고 있는 문제를 모르셨어요. 그래서 제가 성숙하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너무 잘 숨겨 놔서 저 자신조차도 못 찾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저 혼자만 너무 뒤처진, 말 못 하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어요.”

“겁쟁이는 무슨…….”

“서방님이 말씀하셨죠, 말을 타는 건 친해지는 과정과 같다고요. 대화하는 법을 안다고 사람과 바로 친해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을 타는 기술을 안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그건 평소의 제게도 필요한 충고였어요.”

다 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현명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겸손한 이라면, 경험을 쌓은 이라면 알 터였다. 세상에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내가 다 알고 있을 리 없다는 것.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

“하루 만에 갑자기 변하진 못할 거예요. 많은 실수와 두려움이 반복될 거예요. 제가 잘 할 수 있을까 무서워요.”

이런 말을 하는 것마저도 무서웠다. 하지만 언영이기에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가 솔직함을 원한다면, 애써 할 수 있을 만큼 보여 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내가 있잖아.”

언영이 갑작스레 손을 겹쳐 와서 목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실망하지도 않았다. 이런 부인이 부끄럽다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다정하게. 눈에 애정을 잔뜩 담아.

목린은 그를 똑바로 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서방님. 금방 해명했으면 끝날 일이었는데 제가 너무 이상한 태도를 보였어요.”

“아니야, 괜찮아. 나야말로 미안해.”

“저도 괜찮아요. 우리 같이 힘내요.”

목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리고 이거…… 변변치는 않지만…….”

목린은 옆에 있는 작은 손톱만 한 꽃을 뽁 꺾어 야무진 손길로 가락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목린이 열심히 집중하는 얼굴을 빤히 구경하던 언영은,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잡고 완성된 것을 끼워 넣어 주려 하자 입을 헤 벌렸다.

“허어…….”

그의 숨소리가 떨렸다.

“흐어……엉. 흐어엉…….”

“서방님……! 왜 우세요!”

“흐어으어으아으어으엉어…….”

그를 달래면서도 하나만 주기엔 너무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에, 다섯 손가락 모두에 맞춰 하나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제가 틈만 나면 만들어 드릴게요.”

“크흐아으어어엉…….”

“서방님, 그러다가 애가 깨요!”

* * *

목린이 먼저 자리에 누워 있었다. 입꼬리가 온화하게 올라온 그녀의 얼굴은 같은 시각이었던 어젯밤보다 훨씬 여유가 묻어났다. 뽀송뽀송한 뺨이 미소 덕분에 둥글게 부풀었다. 어두운데도 다소 또렷이 보일 정도였다.

잠시 뒤 옆에서 언영이 산만 한 덩치의 몸을 부대껴 왔다. 재롱부리듯 체격에 안 어울리는 몸짓으로 목린에게 상체와 얼굴을 마구 비비며 달려들었다. 얼굴을 목린의 목에 박고 후각이 예민한 짐승인 것처럼 그녀의 향기를 맡아 댔다. 그러고는 좋다고 실실 웃었다. 아래에 눌려 버린 목린은 잠시 끙 하고 힘겨운 신음을 냈지만 이내 손을 뻗어 멋쩍게나마 그의 등을 한쪽 팔로 안고 토닥토닥했다.

오늘 하루 정신적으로 피곤했을 텐데도, 언영은 마을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바로 사람들을 모아 어떻게 하면 어린 아이들이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지 의논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자리에 있던 이들 대부분이 아이가 있는 부모들이었기에 담론은 다소 적극적이었던 것은 물론, 언영의 예상보다도 훨씬 늦게 끝났다.

목린은 그가 자랑스러워 토닥거렸고, 그러자 헬렐레거리는 언영의 입이 가득 찢어졌다. 목린을 옭아매듯이 제 기다란 다리와 그녀의 다리를 함께 꼬았다. 그런 다음 양팔을 이용하여 숨 막힐 정도로 사랑하는 상대를 얼싸안았다.

“서방님.”

“응, 목린아.”

목린이 평온하게 속삭였다. 언영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답했다.

“말해, 마음껏.”

“사실 아까 좀 무서웠어요.”

언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가? 황은도가? 산에 들어가는 게?”

“아니요. 비가 와서요…….”

언영의 얼굴은 풀어지기는커녕 더 금이 생겼다. 잘생긴 미간을 구기며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목린은 천천히 다시 입을 벌렸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안온한 어둠과 따스하게 함께 섞였다.

“그러니까, 서방님이 몇 달 전 오라버니 혼례식 때, 밤새 저를 찾으러 다니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그때 비도 왔고……. 그래서…….”

목린이 자신 없이 말끝을 흐렸다. 의미 없이 몸을 꼼지락거렸다. 언영은 이번에도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그래서 오늘 비 온 게 싫었다는 거야?”

“아니요. 싫은 게 아니라 무서웠어요. 그러니까, 저는…….”

목린은 끝까지 설명을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눈동자를 측면으로 굴리며 회피했다.

잠깐 찾아온 적막은 엄숙한 언영의 목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목린아.”

“……네에.”

“네가 그랬지. 말을 더 하겠다고.”

타이르듯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의 눈동자에 짓궂은 장난기가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목린이 피한다고 화를 내거나 할 리는 없었다. 오히려 다독여 준다면 모를까. 그리고 무르익은 분위기 때문일까, 목린에게 용기가 났다. 그녀는 속삭이듯이 고백했다.

“서방님이 새벽에…… 비에 젖어선 저희 집 앞에 서 계셨을 때, 이제 봄비 하면 그날이 떠올라요. 피도 섞이지 않은 누군가가 그렇게 저를 오래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제대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무척 기뻤어요.”

언영의 열렬한 시선을 마주 보기 겁나 목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래도 오밀조밀 움직이는 입술은 느리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봄에 내리는 비는 제게 무척 소중한 느낌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게 망가질까 봐 두려웠어요. 저희 둘이 함께 추억을 그릴 수 있는 날씨로 남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화해하지 못했더라면 그 상처가 엄청 오래갔을 거예요.”

말이 끝나자마자 언영이 못 참고 입술을 짓누르듯 맞춰 왔다.

혀가 꼬이고 숨이 얽혔다. 바로 연이어 어둠 속에서 사그락사그락 옷을 벗는 소리가 더해졌다.

나신이 된 상태에서 목린은 팔을 뻗어 언영을 찾았다.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언영의 몸이 그녀의 위에 겹쳤다. 불을 끌어안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뜨겁게 서로를 꽉 채우며, 짐승처럼 움직였다. 오로지 열망에 온몸을 맡기고 하나가 되어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더 해요?”

파정을 끝내고 바로 또 언영이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자 목린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제의 한 번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던 터다.

언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널 두고 한 번 밖에 못하는 놈은 사내 자격이 없는 거야.”

“그러면 어제는…….”

언영에게 입술이 먹혀들어 목린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 * *

[오라버니, 저 목린이에요.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답장이 늦어서 죄송해요.

오라버니께서 가지신 고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느라 많이 지체되었어요.

한데 제가 왜 그렇게 오래 고민했는지 아시나요? 물론 제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오라버니를 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에요.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여 고뇌한다고 하니 이해할 수도 없고, 말문이 막혔던 것도 당연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는 제가 착각하고 있다고 믿으시지요. 제가 오라버니의 좋은 모습, 믿음직한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에 단단히 오인하고 있다고 여기실 거예요.

하지만 오라버니,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오라버니께서 정말 생각하시는 것만큼이나 악독한 분이셨다면, 제게 부족한 면모를 숨기실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오라버니와의 마지막 만남에 상처를 받은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 정말 나쁜 분이셨다면 제게 이렇게 사과를 하셨을 리 없어요.

제가 하고픈 말은, 오라버니께서 부족한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땅을 통틀어 오라버니뿐이란 것이어요. 분명 오라버니께서는 지금, 저한테 숨기셨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 앞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이고 계실 테지요.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부족한 점도 많겠지요. 서툰 모습도 많이 보일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계속 오라버니가 주장하시는 그 ‘거짓된’ 겉모습을 바꿔 나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내면에도 그 마음가짐이 함께 스며들지 않을까요?

제가 걱정하는 건 하나예요. 오라버니께서 이런 비밀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늘 곁에 있었으면 해요. 예서 언니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네, 부담스러운 거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께서 언니를 옛날부터 사모하셨으니 얼마나 숨기고 싶을지 잘 알고 있어요. 예, 오라버니께선 모르겠지만 저도, 아버지도, 게다가 언니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예서 언니께서는 오라버니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싫어하지 않으실 거예요. 오히려 기뻐하실 거라 제가 장담해요.

오라버니, 그러면 좋은 사람이 되어서 나중에 다시 만나요. 저도 오라버니처럼 노력할 거예요.

저도 괜찮은 사람을 제 곁에 두게 된 듯해서,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을 거라 믿어요.

다음에는 웃는 얼굴로 함께 만나요.]

* * *

이유 없이 눈이 일찍 떠졌다.

목린은 옆으로 얼굴을 은근슬쩍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그녀를 안고 새근새근 자는 언영의 얼굴이 보였다. 목린은 살며시 웃으며 그의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일어나려는데 몸통을 가로지르는 언영의 기다란 팔 때문에 쉽지 않았다. 잠결에도 목린이 품에서 떠나려는 걸 알고 있는지 그녀가 몸을 비틀려 하면 더 꽉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목린의 가슴을 쥐고 부드럽게 주물럭거렸다. 한두 번 겪은 게 아닌데도 목린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열 번 정도 우악스럽게 주물럭거리다가 결국 언영의 손은 다시 기력을 잃고 처졌다.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목린은 다시 일어나길 시도했다. 끙끙 언영의 팔을 들어 올리고 좁은 틈으로 구르듯 나왔다.

간신히 언영의 품에서 빠져나온 목린은 바닥에 떨궈져 있는 제 옷을 주워 입었다. 밤에 생긴 뜨거운 열정의 흔적이 가려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했더니 언영은 더 거칠게 나왔다. 목린의 안에 들어가 여러 번 몸을 떨며 좋아했다. 그녀의 얼굴이 닳도록 입술과 뺨에 입을 맞추고 평소보다 좀 더 난폭하게 허리를 돌렸다.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예쁘다, 너무 예쁘다 쉬지 않고 귓가에 속삭여 댔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문을 열고 바깥에 나왔다. 새벽 공기가 목린을 얼싸안았다. 어디선가 닭이 울고 있었다. 이른 아침 흐릿한 안개가 그녀의 시야를 방해했다.

목린은 천천히 느긋하게 마구간을 향해 걸어갔다. 이 편안한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모여 목린의 엉덩이 주변에서 살랑거렸다. 청초한 얼굴에서 웃음기가 감돌았다.

마구간 앞에 당도했을 때 이미 깨어나 일어나있던 그녀의 말이 눈인사를 보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여전히 털은 윤기 있게 빛났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고고함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약간 거리를 두고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륭과 확연히 비교되었다.

륭의 사지(四肢)는 아무렇게나 멋대로 뻗어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의 입이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코까지 골았다.

“하하, 륭이 귀엽지.”

먹이통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풀을 갈아 주며 목린이 다정하게 웃었다. 하지만 륭을 내려다보는 은마는 도저히 목린의 발언에 공감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조차도 쓸데없다 생각했는지, 목린이 준 먹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목린은 이름 없는 그녀의 말이 식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손을 내밀어 맛있게 먹으라고 털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정말 무심코였다.

무심코 이름이 떠올랐다.

“봄비야.”

목린이 노래하듯 불렀다.

봄비는 제 이름이 불린 것을 모르는지, 여전히 식사에만 열중했다.

“봄비야.”

목린이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엔 봄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목을 펴며 목린의 순한 눈웃음과 천천히 눈높이를 맞추었다. ‘봄비’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렸다. 이 영특한 말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알고 있었다.

목린은 작게 푸흐흐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 손을 뻗어 말의 얼굴을 얼싸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둘의 이마가 콩 맞닿았다.

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편안한 웃음이 목린과 봄비 둘의 얼굴에서 가시지 않았다.

행복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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