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10/25)

10장

서간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기억하는 건 하등 어렵지 않았다. 뒤를 잇기 위해 수십 번을 반복해 읽었던 문단이다. 오라버니가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용기를 내어 누이에게 털어놓은 고민에 대한 언급이 한가득하다.

기껏 누이에게 비밀을 얘기해 주었는데 돌아오는 말이 ‘죄송해요, 실수로 잃어버려서 남이 읽게 해 버렸어요.’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는가.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다.

물론 그녀에게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지만 남에겐 평범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터였다. 왜 하필 많고 많은 것 중에 서간을 훔쳐 갔는지 오리무중이다. 그것도, 아마도 두 번씩이나. 마을에 서간을 멋대로 가져가는 이가 두 명이나 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 혼자서 분명히 이 마을 출신일 범인을 잡아내고 추궁하는 일은 일찍이 포기했다.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목린은 서둘러 길가를 따라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서방님 어디 계시는지 아시나요?”

가장 먼저 만난 귀혈족 아저씨에게 언영의 행방을 물었다. 아래턱이 길고 몸이 굵직한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목린이 아까부터 쭉 향하던 방향을 가리켰다.

“조금 전에 봤으니까 이동하지 않았다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금 더 사람이 많은 곳에 가까워지니, 길이 나뉘는 거리에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방님! 서방님! 도와주세요!”

“목린아! 왜 그 방향에서 나타나?”

제가 튼튼하게 박아 놓은 표지판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언영은 갑자기 귀룡산 쪽에서 달려오는 목린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 쪽으로 팔을 벌렸다. 목린은 그 품에 냅다 안기며 빠르게 외쳤다.

“서방님, 누군가가 제 서간을 훔쳐 갔어요! 저번에 있었던 일 말고 또요!”

“뭐?”

언영의 얼굴에 내려앉았던 흐뭇한 미소가 점점 옅어졌다.

“꼭 찾아야 해요, 서방님……!”

목린은 언영의 팔꿈치를 그러쥐고 눈물을 글썽였다. 언영은 묵묵히 목린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신당을 향해 내달렸다.

혹시 몰라서 다시 한번 내부에 언영과 들어가 보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나왔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잃어버렸다는 건 어떤 거야? 가족이나 친우에게 받은 거?”

“아니에요. 제가 오라버니에게 쓰던 거예요.”

언영은 쭈그리고 앉아 신당의 벽에 박힌 도끼 자국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끝에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 위를 쓰다듬는데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살짝 무섭기도 했다. 멀뚱히 서서 내려다보던 목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언영이 자국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 보지는 못했고?”

“네.”

“그대로 마을로 돌아갔다면 아마 내가 봤을 거야. 길이 그렇게 이어져 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두 사람의 얼굴이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귀룡산은 결코 걷기에 친절한 산이 아니었다. 귀혈족에겐 어떨지 몰라도 목린은 엄두도 못 낼 곳이었다. 험준하고 가파른 지형 탓에 균형을 잡기 힘들었으며, 이리저리 꼬여 있는 길에서는 방향을 잃기 십상이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야 그 웅대함에 가슴이 떨렸지만 그 내부는 그리 깔끔하지 못했다.

“서간은 내가 찾아낼 테니까 목린이 너는 집에 가 있어.”

언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가 허리를 세우자 단번에 다시 목린보다 높게 올라가며 그녀의 앞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길이 많이 위험한가요? 짐승도 나타나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잖아. 너한텐 익숙하지도 않을 테고.”

목린은 용기를 내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짐승이 나타나는 것만 아니라면 사실 꼭 같이 가고 싶어요.”

평소였다면 괜히 폐를 끼칠까 봐 엄두도 못 냈을 터다. 하지만 사라진 물건이 목현을 위한 서간이라는 사실 탓에 고집이 생겼다.

언영이 남이 아닌 것과 이번 사건은 별개의 일이었다. 서간에 담긴 내용이 그녀에 대한 비밀이라면 모를까, 타인의 사적인 얘기였다. 다른 이도 아닌 언영이 읽게 된다면 목현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언영이 사적인 대화를 마음대로 훔쳐볼 인물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혼자 찾으러 나간다면, 내용물이 그녀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본문을 읽는 상황이 부득이하게 따라올 것이다.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게 벌어지도록 가만히 있기엔 양심에 걸렸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언영이 말한 대로 당연히 그가 혼자 달려갔다 오는 쪽이 수십 배는 더 편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목린은 언영의 입장까지 무시하며 제 의견을 고수할 생각은 없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다음에 던진 말이 희망을 안겨 주었다.

“사실 마음에 짚이는 장소가 있어. 산 안에 아무도 안 사는 낡은 오두막이 하나 있거든. 거길 확인해 보려고. 여기서 엄청 가까워. 서두르지 않아도 너 정도의 체력만 되면 오후에 왕복해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저도 따라가도 되는 건가요?”

목린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묻자 언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오두막인가요?”

“그냥…… 범인이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 같아서. 그렇다면 아마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하겠지.”

언영의 눈이 도끼 자국을 오묘하게 내려다보았다.

“……또한 설령 장대한 덩치의 성인이라고 한들, 마찬가지로 오두막을 먼저 살필 거야. 거긴 다시 말해 사람들이 산을 건너면서 지나가는 쉼터 같은 곳이거든. 또, 다른 곳을 수색하고 싶어도 너무나 광범위한 땅이야. 어떻게 보나 사람 흔적이 많은 곳을 먼저 뒤지는 게 맞아. 가는 길에 다른 흔적을 찾는다면 그때 수색 방향을 바꿔도 늦지 않아.”

목린은 수긍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언영이 몸을 틀며 내려다봤다.

“갈까?”

언영이 앞장을 서고 목린이 그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갔다. 처음엔 그가 업어주겠다고, 들어주겠다고 제안하는 것을 목린은 한사코 거부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언영이 뭔가 달라졌다. 예전 같았더라면 그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바로 그녀를 어깨에 둘러업었을 테다.

예전부터 조금 이상했었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 목린은 드디어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언영은 목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이상한 기류가 흘렀던 것도, 어젯밤에 함께 몸을 섞던 와중에 갑자기 서먹함이 들이닥쳤던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눈치를 본다. 하지만 기억을 되돌려 봐도 언영이 근래에 눈에 띄게 무례한 행동을 보인 적은 없었다. 만약 그가 그녀가 모르는 새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건 분명…….

‘서방님! 아버지랑 친구들이 보내 준 서간 보셨어요?’

‘보셨냐니……. 네가 매일 곁에 끼고 있는 걸 봤냐고 묻는 거라면, 보긴 봤지. 그런데 왜?’

목린의 눈이 서서히 확장되었다.

목린은 언영의 널찍한 등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품은 목린에게 버거울 정도로 넓었다. 어깨가 가장 넓고 자연스러운 선을 그리며 허리가 좁아지는, 완벽한 비율의 상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허리는 여전히 목린을 아예 가릴 수 있을 정도로 굵직했다. 온몸이 근육으로 두툼했다. 함께 몸을 섞을 때면 그가 너무 딱딱해서 가끔 무척이나 아팠다.

언영은 조용히 앞장서서 길을 가로막는 모든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 주었다. 나무가 시야를 가리면 단번에 검으로 도려내고, 잘못 발에 걸려 넘어지기 쉬운 울퉁불퉁한 돌이 있으면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그는 그녀에게 잘 웃어 주지도 않고 있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보다 심각했지만,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풀어 주고자 애써 농담이라도 던져 줬을 사람이 그였다.

“못 잡을 수도 있어, 목린아.”

갑자기 언영이 입을 열어서 목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등진 채였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목린은 확인할 수 없었다.

“네, 알아요. 그렇게 급한 문제는 아니에요.”

어차피 서간이야 다시 쓰면 그만이다. 가져간 사람도 이미 내용을 읽은 지 오래일 것이다. 이건 양심의 문제였다. 오라버니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보일 최소한의 예의.

그때 언영은 등을 갑자기 돌렸다.

“그런데도 그렇게 열심히 움직이는 걸 보면 내게 보이면 안 되는 재밌는 내용이라도 있었나 봐.”

“……?”

언영이 걸음을 멈췄기에 목린 또한 그 자리에 굳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저기서 말하는 재밌다는 게, 정말 재밌다는 의미가 아닌 걸 깨달을 만한 눈치는 있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언영의 말은 진정 참이었다. 필사적으로 숨겨야 하는 게 있냐는 말에, 오롯이 진실만을 답해야 한다면 목린은 대수롭지 않게 그렇다 할 것이다. 오라버니의 일이니까.

하지만 언영의 어투가 이상했다.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호기심을 기반으로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다. 그녀가 던질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린은 언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언영 또한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짙은 눈썹이, 언제나 생동감 있던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이 바뀌어, 계속 왼쪽으로 나부끼던 목린의 긴 머리가 오른쪽으로 갈 때까지.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적막을 깨부순 건 아주 뜻밖의 변화였다.

꼬르륵.

“앗…….”

목린은 얼른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하지만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푸흣-”

언영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푸하하하하하학-! 그의 맑은 너털웃음이 숲에 울려 퍼졌다. 목린은 머리를 아래로 수그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죄 없는 복부를 이유 없이 쏘아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불편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짐에 감사했다. 목린은 정말이지 도무지 어떻게 나서야 할지 감이 안 오던 차였다.

언영은 너무 웃느라 흘린 눈물을 검지로 대충 쓸고 등을 구부려 목린을 두 팔에 담았다. 조금 전 그 어색한 적막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목린이 배고팠구나. 근데 어쩌지, 너무 급하게 와서 먹을 걸 안 챙겨 왔는데.”

목린은 너무도 부끄러워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창피한 표정을 가렸다. 언영은 목린의 몸을 토닥이며 주변을 살폈다.

“먹을 수 있는 걸 찾아볼까? 빨리 이동해야 하니까 너무 오래 걸리는 건 말고.”

“……그러면 저기 있는 산딸기는 어때요?”

목린은 사실 줄곧 여기 오면서 먹고 싶었는데 먹보로 보일까 봐 말을 못 했던 산딸기를 가리켰다. 가는 데마다 보여서 목린의 관심을 자꾸만 사로잡았다. 얘기가 나온 김에 소심하게 얼굴을 드러내며 먼저 제안을 던졌다.

언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목린을 놓아주고 산딸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신발 밑에서 잡초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밟혔다.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

언영은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딸기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 목린에게 뻗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돌아다니면서 여기 몇 개 주워 담아 봐. 그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만 걸러내자. 가는 길에 계곡이 하나 있을 테니까 거기서 씻어 먹자.”

“네.”

목린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언영이 등진 곳으로 뛰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반대 방향에서 산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되었겠다 싶어 언영은 몸을 일으키며 등을 틀었다.

동글동글한 그녀의 뒤통수를 보리라 기대했던 언영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목린아?”

목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를 맞이하는 건 휑한 숲이 전부였다.

한편, 목린은 산딸기가 보이는 곳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얼른 쪼르르 달려가 따 내는 참이었다. 서둘러야겠다는 생각 탓이었다. 그리하여 언영으로부터 약간 멀어졌지만,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 단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코앞의 딸기를 뽁 따내고 옆을 봤을 때였다.

“어……?”

사람의 발이 보였다. 그러니까, 서 있는 사람의 발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저 신발은 언영의 것이 아니었다. 훨씬 더 요란하고 화려했다. 목린의 얼굴이 허옇게 창백해졌다.

“이런 숲에서 혼자 있는 미인을 만나게 되다니.”

목린의 정수리로 난생처음 듣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닿았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애써 귀혈족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봐도 이 음성과 대응되는 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운명이 아니면 뭐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겁에 질린 목린의 손이 떨리면서 쥐고 있던 산딸기 주머니가 함께 흔들렸다. 목린은 눈물을 어떻게든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기 시작했다.

그는 초족에서도, 귀혈족에서도 발견되지 못한 특이한 느낌을 지닌 사내였다. 귀혈족처럼 달각거리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족 특유의 단아함을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은 흰 의복은 거의 무릎까지 내려와, 언영보다는 작으나 비슷한 풍채를 덮었다. 옷을 타고 꼼꼼하게 새겨 넣은 자수며 손목과 목에 화려하게 차고 있는 장신구가 그를 고귀해 보이게 만들었다. 등에 차고 있는 긴 월도(月刀)의 자루에도 금으로 만든 듯한 장신구가 매달려 흔들렸다.

사내는 냉엄해 보였지만 그것은 언영의 무표정이 가진 차가움과는 상이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과 호화찬란한 귀고리는 그를 얼핏 여자처럼 보이도록 착각하게 했다. 그만큼 사내는 꽤 아름다운 편에 속했다. 아니, 한번 보면 쉬이 잊을 수 없는 미모였다. 그의 여우같이 가는 눈이 목린을 뜨겁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가지 목린을 안도시킨 사실은 그 동공 안에 적의는 없다는 점이었다.

“낭자. 오늘 이렇게 우리가 마주한 건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런 말을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목린은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저기……!”

“저와 평생을 함께해 주십시오.”

사내는 목린이 멀어지는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목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육지에서는 이렇게 처음 보자마자 다짜고짜 청혼을 하는 것이 법도란 말인가.

등이 나무에 닿자마자 목린은 화들짝 놀라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더는 뒤로 도망칠 곳이 없었다. 궁지에 몰렸다. 반쯤 주먹 쥔 두 손을 목 근처까지 올리고 떨었다.

사내는 눈을 곱게 접고 웃으며 목린의 손 중에 하나를 그의 손에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 쪽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마치 그러면 목린을 달랠 수 있을 것처럼.

그리고 그 행위가 목린의 정신을 돌아오게 했다. 어쩔 줄 몰라 무서워하던 목린의 한 가지 생각이 차올랐다. 이러면 안 됐다. 단순히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그가 무서워서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송구스럽게도 저에게는 이미 지아비가…….”

“손 떼.”

목린이 작지만 또박또박 제 의견을 말하고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의 틈으로 매끈한 칼날이 비집고 들어왔다.

칼날은 피에 굶주린 것처럼 사내의 목덜미를 끊지 못해 안달 난 듯했다.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검이 자아를 갖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검을 손에 쥔 자의 격정적인 감정의 동요가 반영되는 중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언영이 옆에 바투 달라붙어 적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손 떼.”

언영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맞잡은 남녀의 손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었다.

“주언영!”

사내가 언영을 돌아보며 뻔뻔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

언영도 마지못해 사내를 바라보았다. 당장 손으로 상대의 목을 찢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눈빛이었다.

목린은 잡히지 않은 손을 가슴께에 갖다 대고 의미심장한 관계인 두 사람을 번갈아 휙휙 쳐다보았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마치 두 사람의 세계만 따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여전히 서로를 쳐다보고, 목을 겨누는 칼은 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언영이 조금 더 키가 컸지만 맞은편의 사내도 결코 작은 덩치는 아니었다. 어느새 귀혈족의 몸집이 눈에 익숙해진 목린의 눈에도 그는 거대한 축에 속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저물녘까지 저러고 서 있을 것만 같아, 먼저 행동을 보인 건 목린이었다. 휙 당겨 잡혔던 손을 빼냈는데, 사내는 의외로 그 행동을 하등 제지하지 않았다. 더 용기가 생긴 목린은 아예 자리를 옮겼다. 콩콩 뛰어가 얼른 언영의 등에 바짝 붙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방해는 없었다. 목린은 언영의 체취를 맡으며 소곤소곤 물었다.

“누구예요?”

목린이 등 뒤로 넘어오자 언영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서렸다. 그는 약간 몸을 틀어 목린을 더 철저히 가리며 짧게 대답했다. 눈은 목전의 사내를 향해 사납게 내리꽂힌 채였다.

“내 숙적.”

“숙적이요……?!”

목린의 눈이 똥그래졌다.

저번 대회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귀혈족은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귀혈족와 대립하는, 그것도 ‘숙적’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이라면 보통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목에 날아온 칼날에도 이 낯선 사내는 시큰둥했다. 그는 언영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리고 목린 쪽으로 턱을 까딱거렸다.

“야, 정말 오랜만이네. 얼마 만이냐? 그런데 내가 좀 바빠서 말이지. 지금 저분과…….”

“내 여자야.”

말이 끝나기 전에 언영이 치고 들어갔다.

칼날이 목숨을 노려도 별반 반응이 없던 사내가 이번엔 큰 변화를 보였다. 고작 저 네 음절을 듣고 서서히 경악하기 시작했다.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뭐?”

“내 아내라고.”

언영이 짓씹듯 말했다.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리며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너, 너 혼인했어? 아니, 그보다 여자가 있었어?”

“……내가 분명 여러 번 얘기해 줬을 텐데.”

“당연히 믿지 않았지! 여자가 외딴 섬에 산다고 하길래 없는 사람을 데려올 수 없는 척 둘러댄다고 생각했지.”

그리 말하며 사내는 목을 최대한 옆으로 빼내 목린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주시했다. 목린은 더욱 몸을 움츠리며 숨었다. 언영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좋아, 그렇다면.”

사내는 뒤로 몇 걸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물러서는 모습도 잠시뿐, 그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주변이 변했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그의 부하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불현듯 나무 틈에서 나타나 세 사람을 둥글게 에워쌌다. 모두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여덟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목린은 병아리처럼 떨며 언영의 허리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언영이 호통 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당히 빼앗아 가겠다. 그러려면 목격자가 필요하겠지.”

이어서 사내는 등에 차고 있던 기다란 월도를 제대로 손에 쥐었다.

“걱정 마. 비열하게 구 대 일로 승부를 보려는 건 아니니까. 둘이서만 붙어도 간단히 끝날 일을 내가 굳이?”

사내의 미소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 만만했다. 언영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하지만 이 위험한 상황에서 외려 목린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목린은 언영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믿음직스러웠다. 언영이 목숨을 걸고 싸워 배에서 그녀를 지켜 주던 날이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누가 뭐래도 목린에겐 그녀의 서방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강했다. 평소엔 없었던 용기가 돌연 샘솟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다.

“싫어요.”

목린은 사내와 눈을 제대로 맞추고 당당히, 또박또박 말했다.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언영이었다. 그는 고개를 휙 돌려 크게 벌어진 눈을 통해 목린을 돌아보았다. 목린의 뺨이 뒤늦게 붉게 익었다. 너무 목소리가 컸던 걸까. 쓸데없이 나섰던 걸까. 괜한 고민이 계속 꼬리를 이었다.

하지만 언영은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눈앞의 사내를 마주했다. 언영의 널따랗고 거대한 몸통에 힘이 빡 들어갔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가 등을 보이며 낮게 말했다.

“걱정 마, 목린아.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게.”

그리고 그 또한 검집에서 칼을 뽑았다.

사내는 무기를 굉장히 화려하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마치 남에게 과시하듯 불필요하게 월도를 빙빙 손가락으로 돌려댔다. 그러면서 동시에 안정감을 유지했다. 언영은 그가 날리는 모든 공격을 받아냈다. 언영이 별로 힘을 안 쓰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묵직하게 쾅 차올리는 힘은 두 칼날이 부딪칠 때 소름 끼치는 굉음을 자아냈다.

“가 있어.”

얼굴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언영이 왼쪽으로 거칠게 쭉 쳐냈다. 받아치는 상대의 손목이 살짝 떨렸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들은 아니야. 안전한 곳에 가 있어.”

언영은 숙적이라고 칭한 사내의 수하들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무겁게 말했다.

칼을 휘두르고 있는 자와 막무가내로 대거리를 벌일 정도로 눈치 없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군사들이 무섭기는 했지만, 목린은 언영의 말을 믿고 총총 걸어갔다.

“서방님께서 패배하시더라도,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그들 중 가장 앞에 가까이 있는 이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목린도 속으로 놀랐다. 언영을 믿으니 이런 용기가 절로 생겼다.

“부인…….”

“당신들은 대체 누구예요? 서방님과 저자는 무슨 관계예요?”

후들거리는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며 목린이 캐물었다.

그러다 그때 뒤에서 강한 돌풍이 불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었다. 언영의 움직임이 만들어 낸 잔재라는 것을 깨닫고 더욱 경탄했다. 언영은 은도의 날렵하고 시원시원한 공격을 큰 동작 없이 묵직하게 막다가도 종종 춤사위 같이 잽싼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마치 이 이상 건드렸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경고 같았다. 은도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아까와 같은 여유는 살짝 지워진 상태였다.

정신을 빨아들이는 언영의 그 크지만 우아한 동작에 목린이 홀려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목린에게 말을 걸었던 그 수하였다.

“두 사람은 아주 어릴 때 같은 스승 밑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성호민 님이라고 또 다른 분이 계시는데, 일곱 살 그 무렵이었을까요? 그때 세 분이 함께 가족처럼 반년을 지냈지요.”

언영이 매섭게 날리는 칼에서 죽음을 부르는 바람 소리가 났다.

“간결히 요약하자면……. 저희 족장님, 그러니까 지금 싸우고 계시는 저분은 밤에 요 위에 자주 실수를 하셨고 혼나지 않기 위하여 일찍 일어나 이불을 바꿔치기하곤 하셨습니다.”

“…….”

“주언영 님은 정말로 자신이 저지른 줄 알고 날마다 엉엉 우셨고요.”

“…….”

“뭐, 그런 관계입니다.”

“아…….”

“지금은 저러고 있지만 보기보다 꽤 돈독한 사이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목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 듣고 있었는지 사내가 제 부하를 향해 월도를 들지 않은 손으로 난데없이 삿대질을 했다.

“이봐, 사실은 똑바로 정정하자고! 이불은 정말 언영이 짓이야.”

“웃기지 마!”

사내의 얼굴에 정통으로 언영의 칼날이 내려왔다. 아슬아슬하게 방어하는 그의 이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언영의 검이 코를 반으로 가르기 직전이었다.

한 손으로는 검자루를, 다른 한 손으로는 검날을 아래로 누르는 언영의 목소리에 부아가 넘쳤다. 목소리만 들어도 으스스했다.

“내가 몽유병에 걸려서 창고에 있는 음식을 빼먹는다는 것도, 방을 어지럽히기 좋아하는 혼령이 내 어깨에 늘 붙어산다는 것도 다 네 농에 불과했지.”

“타고나길 내 잔꾀가 너무 좋은 걸 어떡하냐. 그때 일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그래도 우리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거지. 덕분에 넌 나름 스승님과 가장 자주 어울리다가 이젠 제일 사랑받는 제자가 됐고, 그리고…….”

은도는 옆구르기로 위기 속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화려한 귀걸이가 짤랑거렸다. 덕분에 언영이 잠시 허공을 휘두르는 사이, 은도는 옆에 서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언영의 한쪽 흉부에 떡하니 올려놓았다.

“그 당시 스승님께서 벌을 내려주신 동작들이, 이렇게 커다란 가슴을 얻게 된 일환이라고 보면 되잖아.”

“손대지 마! 목린이 거야!”

언영은 은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내질렀다. 커다란 고함 탓에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새들도 화들짝 놀라 날개를 펴고 파드득 떠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화려한 사내의 부하들이 모두 목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목린은 여기서 완전히 사라지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목린은 챙챙챙 소리를 내며 다시 싸우는 둘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저기, 제가 볼 땐 이렇게 목숨 걸고 싸우실 필요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두 분 친우 사이라시면서…….”

그녀는 어정쩡하게나마 중재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사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사내는 목린을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언영과 눈을 맞추고 입술 끝을 올렸다. 상당히 기분 나쁜 미소였다.

“허현오가 얼마 전에 내게 알려 준 사실이 하나 있지. 그땐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겼지만.”

사내는 갑자기 목린의 뒤로 몸을 옮기더니, 그녀가 더 돋보이도록 무릎을 구부리고 자신을 가렸다. 그 상태에서 외쳤다.

“네가 부인의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을 익히 들었다!”

“어어…….”

목린의 귀여운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사내를 향해 모든 오감을 곤두세우고 있던 언영은 당연히 적의 움직임을 자연스레 좇았다. 상대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언영의 눈동자 속에 목린이 정통으로 들어찬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

검을 잡은 언영의 팔이 뻣뻣하게 굳었다. 목린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귀까지 벌겋게 익었다.

“지금이다!”

언영이 조금이라도 뒤늦게 반응했더라면 그의 어깨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기회를 놓친 귀걸이 한 사내의 낯빛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옆으로 몸을 피한 언영 주위엔 이제 방금과는 비교도 못 할 살벌함이 감돌고 있었다. 목린은 자신의 남편을 살피고 움찔 놀랐다. 그가 이를 악물고 속삭이고 있었다.

“감히 목린이를 이용해?”

아까 전까지 묵직한 움직임으로 은도의 공격만 받아치던 건 그저 몸 풀기에 불과했다. 각오하고 움직이는 언영의 육신은 거구의 움직임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렵하고 매서웠다. 그와 동시에 휘둘러 찍는 묵직한 힘은 뼈마디를 모두 산산조각 내기 충분했다. 사내는 환하게 웃었다. 제대로 움직이는 상대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분노가 쇄도하는 언영의 낯빛과 대조적이었다.

언영은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검으로 빠르게 갈라 냈다. 빠르게 탁탁탁탁 손목을 돌려가며 받아치는 은도의 이마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공격을 시작한 언영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폭풍이었다.

“크헉!”

날아오는 검을 피하느라 복부를 강타하는 발을 보지 못한 사내가 배를 맞고 뒤로 엎어졌다. 여전히 배를 발로 짓누른 상태에서 언영은 사내를 애정이라곤 하나 없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손목을 가볍게 돌려 아래로 찌르기 좋게 검의 모양을 맞추었다.

사내의 얼굴에서 그제야 여유가 사라졌다.

“야, 야, 야!”

살아 있는 피가 흐르는 목으로 칼끝이 겁도 없이 내리꽂히려 했다.

사내는 허리춤에 달려있던 단검을 언영의 얼굴 쪽으로 허겁지겁 날렸다. 뺨으로 날아오는 작지만 첨예한 날을 언영이 무표정한 상태에서 주먹으로 꽉 잡았다. 얼굴이 찢길 뻔했는데 동요 하나 없었다.

“야, 너 손에서 피 나.”

사내가 삿대질을 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단검을 급하게 붙든 언영의 손마디가 그였는지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약간이지만 칼날에 혈흔이 흘러내렸다.

언영이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피 나는 손을 흘겨보았다.

“그러네.”

“야!”

언영은 전혀 감흥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칼을 마저 내리꽂았다. 사내가 얼른 옆으로 구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성대가 터졌을 것이다.

“이렇게 싸울 필요 없다니까요?”

목린은 두 팔을 하늘 위로 벌렸다.

“내가 지켜 줄게, 목린아!”

언영이 빛의 속도로 검을 앞으로 쑤셔 대며 외쳤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애써 받아치는 사내의 얼굴에서 이제 완전히 웃음기는 죽어 버리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저는 하나도 위험하지 않아요! 안 들으시네…….”

목린은 푹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발에 뭔가가 차여서 얼른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바로 안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까 산딸기를 따서 집어넣었던 주머니를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안 돼! 내 산딸기…….’

목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아 주머니를 주웠다. 완전히 닫혀 있던 게 아니라서 딸기 몇 개가 바닥에 새어 나왔다.

‘그래도 어차피 씻어 먹으려고 했던 거니까.’

주섬주섬 쏟아진 것을 다시 주워 넣으며 목린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서방님 이기시고 난 뒤에 드시라고 미리 씻어 놔야지.’

목린은 아까 친절하게 언영과 은도의 관계를 설명해 주었던 이에게 다가가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여기 주변에 딸기를 씻을 만한 계곡이 있을까요?”

“네, 저쪽에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목린은 환하게 웃으며 총총 뒤따라갔다.

언영이 목린이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 건 다소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검으로 쾅쾅 내려찍으며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칼날에 혹시 주변에 기웃거리는 목린이가 맞을까 봐 근처를 살피는데, 깨닫고 보니 그녀가 여기 아예 없는 것이다.

“목린이 어디 갔어.”

언영의 숨이 턱 막혔다.

“목린이 어디 갔어!”

“야야야. 잠깐만. 야!”

언영이 굵고 긴 다리를 꺾어 사내의 종아리를 강하게 툭 때렸다. 사내는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그의 멱살을 언영이 두 손으로 쥐어 잡았다. 쓰고 있던 검은 이미 아무 데나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상대가 서둘러 반격을 날리려 했으나 언영은 그의 손에 잡힌 무기까지 뽑아가 저 멀리 내던졌다. 발에 맞지 않기 위해 수하들이 한꺼번에 뒷걸음질을 쳤다.

핏발이 선 눈과 함께 언영이 소리쳤다.

“어디 숨겼어!”

“자, 진정하고. 숨기긴 뭘 숨겨. 내가 그럴 놈으로…….”

증오가 만연한 언영의 동공을 보고 사내는 말을 흐렸다.

“……보이긴 할 테지만 진정하고. 응? 함께 찾아보자고. 일단 날 내려놓…….”

“목린아!”

언영은 사내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목린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저쪽 계곡에 갔습니다.”

“그걸 다 알려 주냐. 재미없게!”

무사 중의 한 명이 친절히 손으로 방향을 가리켜 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사내는 아픈 뒷머리를 쓸면서 투덜거렸다. 언영은 거침없이 앞으로 다리를 휘저어 나아갔다.

“이거 다 먹어도 돼요?”

“네, 괜찮습니다.”

머지않아 언영의 귀에 목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맛있어요!”

언영을 거의 뛰어가다시피 움직였다.

“목린아!”

쪼그리고 앉아 씻은 딸기를 행복하게 입 안에 우걱우걱 넣고 있던 목린이 화들짝 놀랐다. 음식으로 가득 찬 입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서앙임.”

목린이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도한 언영의 어깨가 힘이 빠지며 내려앉았다. 목린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 * *

“황은도라고 합니다.”

호화로운 치장에 둘러싸인 사내는 뒤늦게 자기소개를 했다.

언영이 따 놓은 산딸기까지 함께 씻기고, 짧게 끼니를 때우는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은도의 부하들은 갖고 있던 식량을 조금 목린과 언영에게 나누어 주었다. 떡을 씹으며 목린은 은도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일었다. 모든 게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언영과는 극히 대조적인 양상이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제겐 따로 형제자매가 없어 여덟의 나이에 족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못 볼 꼴을 다 보고 손에 피를 묻히며 힘들게 자랐지요. 서쪽 끝에 있는 해야족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또한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두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귀혈족의 족장 혈통과는 달리 이렇게 주종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은도의 주변을 둘러싼 무사들이 은도를 향해 충성을 의미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들 중엔 은도보다 나이가 갑절 많은 이도 존재했다. 그렇다고 결코 그 중년의 얼굴에 굴욕이 떠다니진 않았다.

은도의 화려한 목걸이가 나무 사이를 꿰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다시 말해 제 곁에 오신다면 남부럽지 않은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팔짱을 끼고 은도를 쳐다보는 언영의 눈에 다시금 살기가 피어올랐다. 은도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것이지만 선택은 오로지 부인의 몫이지요, 하하하.”

언영은 못 들은 척하고 목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자, 목린아.”

목린은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떡을 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뒤에서 은도가 양팔을 옆으로 벌리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 벌써 가려고? 조금만 더 우리랑 있다 가지. 오랜만에 같이 놀자고. 우리 어린 시절 얘기도 다시 회상하고. 부인께선 아무것도 모르시잖아.”

“급한 일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목린이 고개를 숙이고 답하자 연도는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아쉽군. 이번에야말로 내 운명의 여인을 만났구나 싶었거늘.”

“넌 매번 그 소리잖아.”

언영은 탐탁지 못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덧붙였다.

“여기 얼마나 오래 있을 작정인데. 여기 따지고 보면 우리 구역인 거 알지.”

“금방 나갈 거야. 오른쪽만 더 살펴보고.”

“저기, 오는 길에 오두막을 보지 않으셨어요?”

“오두막?”

목린의 질문에 은도는 턱 밑을 두세 번 쓸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 중간에 있는 그 오두막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예. 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굳이 들어가 보진 않았습니다.”

목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언영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무언으로 대화했다. 언영은 목린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준 뒤 은도에게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여기서 아직도 그 꽃인지 뭔지 찾는 거냐?”

“너도 찾아다녔잖아? 나만 갈구니까 좀 억울한데.”

“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건, 찾아야 아는 거고.”

은도는 어깨를 으쓱이며 목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끝맺었다. 그녀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있는 동안 그가 몸을 틀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목린 님, 다음 기회에 만납시다. 이놈과 잘 안 된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저희가 운명이라는 믿음을 아직 떨쳐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고마웠습니다…….”

목린이 공손하게 답하는 동안 언영은 옆에서 분노를 참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은도의 마지막 외침이 그의 인내심을 완전히 박살 냈다.

“그럼 너도 잘 있어라, 귀혈족의 귀염둥이!”

언영이 고함을 던지며 검을 빼 들었다. 목린이 그의 허리를 옆에서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잡아당겨 다행히 큰 싸움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은도는 안전한 거리에 멀찍이 서서 언영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크게 휘저으며 마침내 깊은 숲속으로 동료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굉장히 특이하신 분이셨어요.”

은도와의 정신없는 만남이 휘리릭 지나가고 목린이 말했다. 귀혈족을 처음 만나게 된 이후로는 웬만한 사람에겐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언영은 다시 앞장서 걸으며 오두막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툭툭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쳐내는 자세나 힘을 보아하니 확실히 아직도 분이 안 풀렸음이 여실했다.

“두 분 어릴 때 굉장히 친하셨을 것 같아요.”

“친하긴 뭐가 친해! 매번 날 부려 먹기나 하고…….”

“그래도 은도 님은 서방님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소중한 벗으로 생각하시는 듯해요.”

“정말 좋아하는데 부인을 채 가겠다고 얘기하겠냐고.”

언영이 쌀쌀맞게 중얼거렸다.

“은도 님은 그런 말을 가볍게 하는 성격이신 것 같아요. 진심은 없으셨을 거예요. 그리고…….”

이것까지 말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목린은 조심스럽게 용기를 냈다.

“싫어하면 귀염둥이라고 부를 리가 없잖아요.”

“으아악!”

“서방님!”

언영은 머리카락을 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목린은 뒤늦게 후회하며 언영의 팔을 잡고 말렸다. 한참 동안 소란이 일었다.

“그래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언영이 갑자기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목린의 동그래진 눈과 시선을 맞추며 그가 문장을 끝맺었다.

“목린이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부끄럽기는 했는지 언영이 살짝 수줍게 웃으며 목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간질간질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나서야 하는 건지 잘 알지 못했다. 언영이 원한다고 해서 정말 서방님께 귀여우시다고 할 수 있는 용기까지는 없었다. 뜨겁게 그녀를 바라봐 주는 언영의 눈빛을 가만히 서서 받으려니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언영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목린아, 옷이…….”

언영은 목린의 어깨를 쥐고 그녀의 몸통을 아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옷이 나뭇가지에 걸렸어.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아.”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얇은 목린의 소매를 관통하고 있었다. 언영은 한 손으로는 목린이 움직이지 않게 그녀의 손목을 쥐고, 반대쪽으로 나뭇가지를 잡았다. 터무니없이 크고 무섭게 생긴 손으로 작은 것들을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아!”

“잠깐만.”

날카로운 가지가 살갗에 스치자 목린이 어깨를 크게 움찔거렸다. 그 과정에서 옷이 살짝 더 찢겨 나갔다. 언영이 이를 악물었다. 목린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죄송해요.”

그러자 언영이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그러게 그걸 왜 입고 있어.”

“…….”

언영이 덤덤한 투로 내뱉은 말이 무거운 돌멩이처럼 날아와 목린의 가슴을 맞추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목린은 낯빛도 제대로 감추지 못하고 언영을 휙 올려다보았다.

귀혈족이 그녀에게 한 번도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좋았고, 목린도 그 점이 고마웠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언사를 듣고 묵묵히 넘어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걸 왜 입고 있냐니. 이 옷은 목린에게 고향이었다. 그리고 목린에게 고향이란 그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 준 곳이었다. 그러니 아까와 같이, 낮잡아 보는 투로 지적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보이는 언영의 무거운 시선에 오히려 목린이 놀랐다. 그저 옷일 뿐이다. 겨우 좀 다른 옷을 입었다고 해서 저런 상처받은 눈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목린은 이런 으스스한 기분을 과거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오라버니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그 날. 갑작스럽게 남매의 마음에 상처가 깊이 새겨진 그 대화.

아니, 갑작스럽지 않았다. 이전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소한 일이 쌓이고 쌓여 원래 있었던 상처를 크게 벌렸을 뿐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언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간에 뭐라고 적혔는지 알 것 같아.”

그리고 빠르게 덧붙였다.

“알고 있어.”

“그렇다면 역시……!”

목린은 생각나는 말을 바로 내뱉었다.

“서방님이 훔쳐 가셨어요?”

“나는…… 뭐?”

무언가 말을 이어 나가려고 했던 언영이 중간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라고 했어?”

“저는…….”

“내가 훔쳐 갔다고? ‘역시’? 계속 그렇게 확신하던 거야? 지금 이 모든 게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쫓아왔던 거야?”

“이번엔 다른 사람의 짓 같지만, 그래도 저번엔 분명…….”

예상과 다른 반응이 들이닥치자 목린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의심을 키워 낸 과거 행각을 일단 입 밖으로 내밀었다.

“제가 서간을 읽는 모습을 탐탁지 않아 하셨잖아요!”

“그러면 어떤 남편이 좋아하겠어? 집으로 데려온 내 색시가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고향에서 온 서간만 읽으면서 울적하게 지내는데!”

“그건…….”

“네가 왜 여기 두 달 동안 살면서 끝까지 초족 옷만 고수하는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돌아가고 싶은 거잖아. 그리운 거잖아.”

목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고향이 그리웠다. 가족과 친구들의 품이 그리웠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고픈 열망이 강하게 생기진 않았다. 오히려 귀혈족 사람들에 대해 더 호기심이 생겼다면 모를까. 애초에 이 정도의 그리움 정도는 다 예상하고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이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래서 목린은 속상했다. 그녀를 고향 생각만 하는, 징징거리는 어린아이로만 보는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피로해졌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누구보다 싫었다. 자신이 아직 미성숙함을 인정하는 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린은 여기서 뭘 더 해야 할지 몰랐다.

목린의 불안한 표정을 주시하는 언영의 눈에서 화염이 번쩍거렸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말은 결국 그의 말을 인정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별안간 오른쪽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 한 명이 튀어나왔다.

“아직 안 갔지? 목린 님을 위해서 이걸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게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저희 마을 옆 광산에서 캐낸 귀한 보물입니다. 반으로 가르면 어마어마한 빛이 흘러나오는데 목린 님 뒤에서 나오는 후광과 유사하여…….”

은도였다. 그는 열 손가락에 채워진 반지 중에서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을 빼내 번쩍 들며 다시 나타났다. 신나게 등장했던 그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금세 파악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의 입술 끝이 어색하게 내려앉았다.

목린과 언영은 그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 마음대로 하세요. 계속 마음대로 하세요. 혼자서.”

목린은 언영을 올려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이렇게 삐뚤어지게 말하고 싶지 않은데. 목린의 입에서 의지를 배반하는 말이 나왔다. 언영이 바로 대답했다.

“왜 여태까지 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한 것처럼 구는 건데? 내가 오해한 게 있다면, 바로 말해 주면 되잖아.”

“……몰라요.”

목린은 꾸역꾸역 눈물을 참았다. 여기서 울면 정말 언영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 것 같아서였다.

“말해 줘.”

“몰라요.”

“말해 줘. 고칠 테니까 말하라고!”

벌게진 목린의 눈가를 본 언영이 초조해져서 목소리를 키웠다.

“그렇게 소리 지르는데 제가 어떻게 말을 해요……!”

“말해 줘, 목린아.”

언영이 바로 목소리를 낮추고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여기로 오는 배에서부터 불안하긴 했어. 우리가 어딘가 맞지 않는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고.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좀 알게.”

“배라니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왜 말하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그야 우리는 함께하는 가족이니까!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니까!”

“……저는 제 사적인 생각을 쉽게 남들과 나누고 싶지 않아요. 설령 가족이라도 어색해요.”

다음 순간, 목린은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 발언을 들은 언영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떨리던 어깨가 조용해지다 못해 아래로 처지고 힘이 빡 들어가 있던 얼굴 근육이 사르르 풀어졌다. 마치 모든 걸 놓은 사람인 양.

침묵이 둘러쳐졌다.

“……잘 있어! 다음에 보자!”

은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반지를 다시 손에 끼워 넣으며, 전혀 지금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인사와 함께 쌩하고 떠나갔다.

그렇게 다시 적막이 잠식하고 얼마 뒤.

언영이 입술이 조심스레 벌어졌다. 음산하리만큼 차분했다.

“낱낱이 다 털어놓으라는 말, 아니었어.”

“…….”

“넌 너무 네 감정을 밝히지 않으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내게 문을 열어 달라는 간청이었어. 거절당해도 이해할 수 있었어. 넌 수줍음이 많으니까.”

목린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지금 언영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매몰차게 굴 필요까진 없잖아. 조금은 내게 문을 열어 두어도 되잖아. 내가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아?”

목린은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았다.

언영에게는 솔직함이 곧 사랑이자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벗과 가족들에게 스스럼없이 다정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했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그는 목린이 지금 왜 어려워하는지, 힘들어하는지, 하등 이해하지 못한다. 정서가 다르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방금 전 목린의 머릿속에 휘몰아친 고뇌와 괴로움이 그에겐 전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가 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부부가 되겠다고 맹세를 했는데. 평생 널 지켜 주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내가…….”

혼란이 섞인 언영의 목소리를 계속 듣자니 심장이 꽉 조이듯 아팠다. 얼른 목린이 고개를 들어 뭐라도 말하려고 한 그때였다. 하필이면 언영 또한 마침 몸을 옆으로 틀어서 두 사람의 시선이 엇갈렸다.

“됐어. 서간이나 찾으러 가자.”

체념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묽었다.

목린은 차마 그런 언영을 멈춰 세우고 다시 대화를 이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입술만 몇 번 뻐끔거리다가 말았다.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언영의 뒤를 쫓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입술을 깨물며 다시 대화를 시작할 때를 기다리는데, 언영은 묵묵히 앞서 나갈 뿐, 절대 뒤돌지 않았다.

널찍한 언영의 등이 목린의 눈에 처음으로 벽같이 보였다.

“어.”

갑자기 콧방울 위로 빗방울이 톡 떨어졌다. 목린은 눈을 두세 번 깜박거렸다. 그러자 다시 또 떨어졌다. 이번엔 그녀의 손 위였다. 목린은 손바닥을 가슴까지 들고선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물이 작게 번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보다 조금 더 위에 또 다른 빗방울이 꽃을 피웠다.

그제야 목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는 없었던 먹구름이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언영은 신경질을 내듯 한숨을 내뱉었다. 이대로 짜증 나니 돌아가자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태도라 목린은 내심 긴장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언영의 다음 말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비 오는데 덮어 줄 게 없어.”

그가 목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다소 무뚝뚝하게 말했다. 겨우 그런 게 그리도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목린은 얼른 답했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당장 우산이라도 만들어 줄까.”

말투는 여전히 딱딱해서 내용과 괴리가 일어났다.

“아니에요. 그냥 그럴 시간에 얼른 갔다 와요. 그사이에 더 멀리 가면 어떡해요.”

“……나름 누가 그랬는지는 짐작이 가서, 멀리 가진 못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지만…….”

언영이 말을 뚝 그쳤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오두막이 조그맣게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에서 흐릿하게 반짝이는 저것은 분명 빛이었다. 비가 오는 칙칙한 하늘 아래에서도 혼자 유유히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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