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목린은 꽃 가락지를 만드는 데 열중이었다. 대문을 나오면 나오는 골목 앞에 쭈그리고 앉아 주섬주섬 예쁜 꽃잎을 뽑았다. 손가락이 야무지게도 움직였다. 단월도에서는 주로 이런 자잘한 걸 만들거나, 옷을 짓는 방법으로 소소한 일거리를 얻고는 했다.
안타깝게도 귀혈족의 갑옷에 대해서 목린은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밤에, 또는 갑옷 안에 입는 얇은 의복은 목린의 눈에도 나름 쉬워 보이긴 했다. 하나 언영에게 옷을 지어 선물할까 고민해 보니 금방 문제에 당착했다. 언영은 밤에 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그녀를 안고 잠들었다. 갑옷 안에 입는 옷은 금방 해지고 더러워지기 십상이라 선물로 줄 예쁜 의복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갑옷과 달리 꽃 가락지는 여전히 만들 일이 잦았다. 금방 시드는 터라 잠깐의 기쁨을 주는 그 조그만 물건이 의외로 귀혈족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정말 예쁩니다!’
수염이 북슬북슬한 까만 아저씨가 목린이 만든 진달래 팔찌를 보고 울먹거렸다.
그날 이후 목린은 틈날 때마다 작은 장신구를 만들어 아주 작은 값에 팔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예전엔 마냥 무섭게만 느껴졌던 분들이 감사 인사를 던지며 행복해할 모습을 상상하니 목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서방님껜 아직 만들어드린 적이 없네.’
언영도 대충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만들어 달라 요청한 적이 없었다. 주면 싫어할까? 솔직히 말해 귀혈족의 관점에선 엄청 쓸모없는 물건이기는 했다. 그래도 설마 싫어하진 않으시겠지?
그렇게 고민하는 목린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떠올랐다. 목린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거…….”
목린보다 머리통이 두 개는 큰 중년의 남자가 지친 목소리로 품에 안고 있던 서간 여러 장을 내밀었다. 행색이나 팔에 안겨 있는 다른 서간을 보면 이것이 그의 업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목린의 관심을 앗아 간 건 따로 있었다.
“괜찮으세요……?”
“지나가는 길에 애들 무리를 만나서 놀아 주다가…… 뭐 흔히 있는 일입니다.”
목린은 머리가 산발이 된 남자를 안타깝게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아이들은 초족 아이들과 매우 달랐다. 남자는 좀 얼빠진 표정이었으나 익숙한 일이라는 발언은 참이었는지, 이후 멀쩡히 걸어 나갔다. 그러고 나서야 목린도 서간을 내려다볼 여유가 생겼다.
단월도에서 온 글 뭉치들이었다.
목린은 부랴부랴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가 보일 수 있도록 바닥에 넓게 펼쳐 보았다. 서간은 여러 장이었다. 보낸 사람 또한 다양했다. 그녀의 친우들, 그녀를 좋게 바라봐 주던 이웃들, 아버지…….
특별한 내용이 숨겨져 있지는 않았다. 모두 귀혈족이 훔쳐볼까 봐, 그래서 목린이 위험에 처할까봐 심한 표현을 아끼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느껴졌다. 목린은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 보았다. 다 읽은 종이는 가슴에 안고 잠시간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의 서간이 남았을 때까지 그렇게 했다.
오라버니 목현의 것이었다. 할 말이 많은지 다른 이들이 보낸 것보다 더 두꺼웠다.
목린은 겁에 질린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
천천히 손을 뻗었다. 끈을 푸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펼쳤다.
[목린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수백 번을 글로 사죄해도 내 진심이 닿지 못할까 두렵구나.
하여 서간을 전해 주러 온 새를 따라, 목숨을 걸고 배를 타 네 앞에 직접 가서, 무릎을 꿇을까 잠시 고민도 해 보았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일을 도맡아 하는 중이라 너무도 바쁘단다. 부디 이런 무능한 오라비를 용서하지 말렴.
나에게 처음으로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진 날은, 목린이 네가 네 살 때였단다. 네가 기억을 할지 모르겠다. 그날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쥐구멍이라도 뒤져 너를 찾아내라고 대노한 아버지께서 내게 외치셨다. 그때도 오롯이 나의 잘못이었거든. 네가 안전히 잘 있을 거라는 경솔한 생각을 품고 덕복이와 함께 낚시를 하러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네게 폐만 끼치는구나.
아버지는 어떻게든 오래 나를 자유분방하게 키우고 싶어 하셨다. 족장의 의무는 죽을 때까지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고, 하여 사랑하는 자식에겐 어떻게든 늦게 물려주고 싶어 하셨지. 그래서 네가 사라진 날,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책임’을 배운 날이었어.
그리고 책임은 모양만 조금씩 바꾸어 가며 나의 어깨를 늘 짓누르고 있구나.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도 부끄럽다. 내가 좋은 족장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에, 사실 자주 악몽을 꾸고는 한다. 이건 아버지도 모르는 비밀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깨 탓에 이 짐을 혼자 버틸 수 없다는 게 아버지께,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도 죄송스러워.
무엇보다도 이 점을 나보다 어리고 힘없는 누이에게 늘 숨길 정도로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이 치욕스럽다. 어린 누이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유치하기 짝이 없구나.
너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은, 나의 고민이 가장 격정적이었던 날이란다. 너를 보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더럽게 느껴졌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러웠던 건 나의 언행이었다. 나는 너와 매제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을 안겼어.
목린아.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나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당장 떨쳐 내렴. 형편없는 핑계 따위는 내칠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지렴.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말아 주렴.
그런데도 굳이 네게 내 형편없는 사연을 구질구질하게 읊어 주는 연유는, 네가 나처럼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네가 선망하는 그런 든든한 오라버니가 아님을 네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일이 없을 테지만 혹시나 해서 말한다. 나와 같은 흔들림을 겪는다고 해도 너를 신뢰하고 버티렴. 네게는 나와 달리 그런 용기와 힘이 있다고 내가 굳게 믿는다.
다시 한번 미안하고 사랑한다, 목린아. 너의 내일이 네가 좋아하는 민들레처럼 아름답길 바란다. 부끄러운 오라비가.]
목린은 검지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오라버니의 서간을 꼭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오라버니께선 그런 고민을 하고 계셨구나.’
전혀 몰랐다. 물론 오라버니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다고 믿진 않았다. 하지만 오라버니라면, 옛날부터 차곡차곡 준비하여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마침내 자리를 물려받을 때가 되어선 누구보다 덤덤할 줄로만 알았다. 감정적인 오라버니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런 괴로움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누가 알았으랴. 그녀는 늘 오라버니를 우러러보기만 했었다.
남매는 싸우지 않았고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두 사람도, 그리고 아버지도 속내를 잘 밝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라버니께 힘이 되어 드리고 싶어.’
이 긴 서간을 적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피곤하다면서, 바쁘다면서, 두렵다면서, 글은 차분하기 그지없는 달필이다. 누이가 못 알아볼까 봐 애써 천천히 썼을까. 글씨체마저도 무너지면 누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악물고 열심히 적었을까. 뭐였든지 간에 목린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바로 답장을 쓰기 위해 부랴부랴 필요한 물품을 꺼내 자리에 앉았다.
[오라버니, 저 목린이에요.
날씨가 좋아요. 곧 비가 온다고 들었는데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겠지요. 단월도의 여름 냄새가 그립긴 하지만, 찾아가는 건 잠시 뒤로 미뤄 둬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어요.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여름은 어떤 상대일지 궁금해요.
오라버니의 마지막 그 눈빛을 기억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은 전해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게 먼저 이렇게 아픈 속내를 알려 주신 점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저라면 결코 그런 비슷한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어요. 그 점만 봐도 오라버니가 저를 얼마나 생각하셨는지 확실히 와닿아요.
그래서 힘들어하시는 오라버니를 조금이라도 더 도와드리고 싶어요. 비록 오라버니께서 그동안 홀로 가지셨던 사색의 깊이의 반의반도 채 못 따라가는 얕은 지식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족장은]
“좋은 족장은…….”
목린의 말끝이 흐려졌다.
* * *
“저쪽에 있는 기와 좀 던져 줘. 아니, 그거 말고. 왼쪽에. 맞아.”
언영은 대회 때 지붕이 무너진 집을 고쳐 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리 중인 다인의 거처 위에서, 그는 아래에 서 있는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목린은 말의 갈기를 땋아 주며 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지붕을 다 고치는 즉시 바로 승마 수업을 이어서 진행하기로 했다. 언영은 금방 끝난다고 했지만, 정확히 언제가 될지 그녀로선 전혀 알 수 없었다.
언영은 가장 가까이 붙어 다니는 이들 세 명, 바로 다인, 현오, 은평과 함께였다. 이제 목린도 그 세 명이 익숙해졌다.
다인은 기와를 한 손으로 잡고 팔을 뒤로 뻗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하늘로 내던졌다.
“앗!”
기와는 언영의 손에서 벗어났다. 더욱더 높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도망가듯이 빠르게 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다른 집의 지붕으로 떨어졌다. 그러면서 하나의 기와가 다른 집의 여러 기와를 다시 무자비하게 박살 냈다.
“너…… 당장 이리 와.”
언영이 땅으로 펄쩍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허리춤에서 검을 스르릉 꺼냈다. 현오는 여기 싸움 났으니 얼른 보러 오라고 팔을 위에 휘두르며 관중들을 끌어모았다. 은평만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기와를 다시 주우러 조용히 달려 나갔다.
다인과 언영은 검을 꺼내 진심을 다해 싸웠다. 두 검이 엇갈려 만나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목린이 있는 곳까지 닿아 그녀의 고막을 갉작댔다. 어느샌가 이런 귀혈족의 모습에 나름 적응해버린 목린은 두 남녀를 당혹스럽게 응시했던 것도 아주 잠깐뿐, 다시 눈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아저씨! 받으세요!”
“또 새로운 걸 썼니?”
“네!”
언영의 막냇동생 선영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되레 날이 갈수록 더 주변인들의 호응에 맞추어 자신감이 불어나는 건지, 늘 새로운 글귀를 적어다가 거리에서 지나가다 보이는 아무에게나 선물했다. 지금도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어젯밤 만든 작품을 나눠 주느라 바빴다. 지나가는 귀혈족 사람들 모두 그녀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목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구경하고 있을 때, 돌연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머님!”
말에 편히 기대있던 목린은 월진을 보자마자 바로 허리를 곧게 폈다. 아무리 월진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관계상 대하기 편한 인물은 아니었다.
“언영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네…….”
월진과 목린은 함께 정면을 바라보았다. 다인과 언영은 이제 지붕 위에서 싸우고 있었다. 멀쩡했던 기와마저도 발에 짓밟혀 다 부서지고 있었다. 월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아까 전까지는 열심히 하고 계셨어요! 정말이에요!”
목린이 팔까지 흔들어 가며 열심히 언영을 옹호했다. 그리고 이상한 분위기의 침묵을 해결하기 위하여, 활기차게 길가를 뛰어다니고 있는 선영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저, 선, 선영 아가씨는 무척이나 똘똘하신 것 같아요. 다섯밖에 안된 나이에 벌써 저렇게 글을 쓰시다니 대단해요. 저희 섬 아이들은 저 정도까지 다다르려면 적어도 한두 해는 더 지나야 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좋은 글 선생 덕분이지.”
월진이 겸손하게 답했다. 뒷짐을 지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퍼뜩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뗐다.
“맞다, 그러고 보니 글공부는 예전에 언영이가 제안했단다.”
“네?”
“선영이 또래의 어린 애들에게 더 집중적으로 글공부를 시키자고. 저 당시 언영이는 칼 휘두르느라 바빴거든. 사실 너한테 서간을 쓰겠다고 다짐했을 때 처음 붓을 쥐었다 봐도 무방하지.”
“아…….”
“너한테 그럴싸하게 보이고 싶다고 며칠을 붓만 잡고 있었어. 우리는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니냐 웅성거렸단다.”
도무지 읽을 수가 없어 이게 글자냐 지렁이냐 불평을 늘어놓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목린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 당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는지, 바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자고 마을회의 때 당당히 주장했어. 그리고 평소에도 당당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많이 보여 주며 신임을 얻고 있단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으로 정상이었던 다인의 집 기와마저도 언영의 발에 밟혀 조각났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월진이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목린은 말을 쓰다듬으며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월진은 호통을 치거나 언영의 등을 때리러 가지는 않았다. 단지 가만히 서서 마을의 운치를 둘러볼 뿐이었다.
평화로웠다.
목린도 주변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싱그럽게 내리비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정겹게 귓전을 때렸다. 빼곡하게 모인 높다란 산들은 안정감을 선사했고, 지나가는 많은 이들의 얼굴에 편안함이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말을 고요히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이 멎었다. 옆에 우뚝하게 선 월진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좋은 족장은…….’
목린은 월진이 좋은 족장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는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무서워 빨리 깨닫지 못했었다. 이런 상쾌함을 계속 만끽하게 해 주는 건 좋은 지도자와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니?”
“아니에요!”
화들짝 놀란 목린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월진이라면 목현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아직 목린은 월진에게 마음 놓고 그런 걸 묻긴 조금 껄끄러웠다.
“어머님께선 늘 밝아 보이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뒷짐을 지고 있던 월진이 목린을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며느리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안에 언영이 보였다.
“그렇구나.”
* * *
좋은 족장의 조건은 뭐든지 될 수 있었다.
타인을 잘 이끄는 사람, 남을 잘 배려하는 사람, 다른 이의 말을 잘 귀 기울여 듣는 사람, 자신보다 주민들을 더 위하는 사람…….
아무거나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아무 말도 쓸 수 없었다. 설마 목현이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몰라서 서간에 고충을 남겼을 리는 없었다.
오라버니가 먼저 마음을 열었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 그것은 아무리 상대가 아끼는 누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은 내려놓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 그리고 제 부족함을 남 앞에서 시인하는 그 용기. 그런 진솔한 서간에 겉만 번지르르한 문장을 대충 엮어내 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목린은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답을 내어줄 수 없었다. 애당초 해 본 적 없었던 고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목현이 족장 자리를 물려받으리라 어릴 때부터 쭉 믿어 왔고, 또 그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좋은 족장은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 같은 건 어린 그녀에게 먼 세상 얘기였다.
‘……그렇다고 모르겠다고 답을 할 수는 없잖아.’
목린은 더욱 방을 나가지 않고 서간에 쓸 내용에만 집중했다. 팔과 다리를 대자로 벌려 누운 채로 시간을 때운다는 걸 안다면 분명 아버지께서 철이 없다고 꾸중을 던지시겠지. 하지만 몇 번 목소리를 높이다가 결국엔 웃어 주실 테다. 늘 그러셨으니까.
“보고 싶어.”
오라버니가, 아버지가,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보러 가야겠다는 마음이 사무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한 계절도 채 지나지 않았다. 언영은 언제라도 섬에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니까 급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 마을에 제대로 적응하는 일, 오라버니께 보낼 서간을 끝마치는 일이 훨씬 더 시급했다.
“목린아.”
“서방님.”
언영이 들어왔다. 단지 방에 한 사람만 더 늘었을 뿐인데 공간이 꽉 찬 느낌이었다.
“아니야. 일어나지 않아도 돼.”
목린이 허리를 일으키려 하자마자 언영이 팔을 뻗어 막았다.
언영은 목린이 ‘보고 싶어’를 내뱉은 뒤 바로 들어왔다. 혼자 있는 줄 알았기에 목린은 꽤 크게 그 말을 내뱉었다. 언영이 들었을까?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같아서 머릿속에서 지웠다.
자리에 서 있는 언영의 눈은 목린의 옆에 펼쳐져 있는 서간들로 향했다. 목현이 보낸 것과 목현에게 보낼 예정인 것, 두 장이었다.
목린은 어색하게 팔을 뻗어 그 내용을 가렸다.
이 서간은 목린에게 온 선물이었다. 게다가 목현은 언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적인 비밀을 다른 이도 아닌 언영에게 들키고 싶어 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가리는 게 당연했다. 언영이 일부러 눈을 부라리고 남의 대화를 엿볼 이는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오라버니를 위해서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게 옳았으니까.
그런데도 목린이 서간을 감추니 분위기가 단번에 냉랭해졌다. 너무나 당연한 행위였음에도, 목린은 자신이 언영 앞에 벽을 세운 기분이었다.
“많이 우울해 보여, 목린아.”
언영이 애매한 얼굴로 말했다. 단순히 무표정이라고 하기엔 눈빛이 이상했다.
“아니에요.”
목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답장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게 표정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그때 그녀의 심장이 불현듯 콩콩 뛰었다.
생각해 보니, 해답은 바로 앞에 있었다. 해답은 늘 그녀와 함께하고 밤에 같이 동침했다.
언영 또한 족장의 아들이고, 그가 누이에게 역할을 떠넘기지 않는 한 목현과 마찬가지로 부족을 대표하는 자리에 오를 예정이었다. 목현의 고민에 공감할 수 없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찾으면 됐다. 그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제 거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목린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문장을 마치고 시선을 피하듯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직전에 생각을 바꾸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활기 찬 그의 태도, 주변 이들을 끌어당기는 호탕한 성격, 그리고 신임을 받고 있다는 월진의 지난 발언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가 목현과 아무리 비슷해 봤자 어느 정도로 비슷하겠는가.
‘서방님께선 늘 밝고 당당하시니까, 그런 고민 해 보신 적 없겠지.’
부러웠다. 목린은 그녀가 만일 목현이었다면 이런 언영의 성격에 시샘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께서도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이셨다면, 혼자 마음 고생하지 않으셨을 텐데. 살짝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목린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감돌았다.
언영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목린을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 * *
상황은 더 이상해졌다.
“서방님!”
륭과 목린의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던 언영은 후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바로 등을 돌렸다. 마구간을 향해 초족 치마를 펄럭이며 달려오는 목린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목린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두 말에게 힐끔 눈인사를 던졌다. 그리고 바로 언영을 향해 헐레벌떡 물었다.
“서방님! 아버지랑 친구들이 보내 준 서간 보셨어요?”
“보셨냐니……. 네가 매일 곁에 끼고 있는 걸 봤냐고 묻는 거라면, 보긴 봤지. 그런데 왜?”
목린은 지난 며칠 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답장을 써 주느라 부지런히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언영도 모를 수 없었다.
언영의 답을 들은 목린은 양팔을 넓게 벌리며 외쳤다.
“사라졌어요!”
언영은 흠칫 굳었다가, 륭을 쓰다듬던 손을 떼고 목린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사라지다니……. 그게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사라질 수가 있어?”
“정말 사라졌어요!”
조금 전만 해도, 방에 틀어박혀 있기엔 답답했던 목린은 문을 열고 나와 마루에 누워 있었다. 오라버니께 쓸 글은 머리가 아파 잠시 보류하고, 나머지 친우들과 아버지께 보내는 회신을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러던 과정에서 몸을 녹이는 산들바람에 취해 잠시 눈을 감고 꿈나라에 몸을 떠맡겼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답장을 쓰기 위해 옆에 놓아 둔 단월도 사람들의 서간이 모두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혹시라도 바람에 날아갔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소용없었다.
목린이 언영을 데리고 사건 장소로 데리고 왔을 때도 똑같았다. 언영은 깔끔한 주변을 둘러보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쥐가 갉아먹기라도 한 건가?”
“만약에 누군가 훔쳐 갔다고 치더라도, 그럴 리는 없다고 보지만…….”
목린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도난할 기회는 충분했다. 목린은 누워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으며, 언영은 마구간에서 륭과 놀아 주고 있었다. 길목과 집을 경계 짓는 돌담이 있다지만, 귀혈족 중에선 저 담을 못 넘는 사람을 찾는 것이 훨씬 어려울 테다. 그러나…….
“딱 봐도 서간보다는 그 옆에 있던 이 붓이 더 값어치가 있단 말이지. 굳이 붓을 놔두고 종이 쪼가리만 가져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새 종이도 아닌, 다 쓴 종이였다.
언영의 말에 목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게다가 별 내용도 없었던걸요. 저한테야 소중하지만 다른 귀혈족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닐 내용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목현이 보내 준 글만은 목린이 따로 보관했다는 점이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담긴 나머지 사람들의 글과는 달리 목현의 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솔직했으므로. 그런 내용의 서간을 빼앗겼다면 목린의 마음은 매우 괴로웠을 터였다.
목린과 언영은 그날 종일 집 안을 뒤지며 서간의 행방을 꿋꿋이 쫓았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묵살당한 것을 알았을 땐 이미 해가 지고 난 뒤였다.
언영은 목린의 어깨를 안으며 단월도 사람들에게 더 보내 달라고 하면 된다고, 그리 위로했다. 목린은 우울한 표정이었지만 힘을 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의문의 꼬리만 남긴 채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목린은 달거리를 시작했다.
저번 달에도 달거리를 거쳤다. 초야가 시작되고 약 삼 주가 지나서였다. 어떻게든 빠른 아기를 기대했던 언영은 표정으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었다. 차마 열다섯 명의 아기를 감당할 용기가 없음은 물론이며, 아직은 딱히 애를 바라지 않고 있던 목린은 내심 조용히 안도했다.
지난달의 그 일주일 동안은 내내 언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넣지는 않았지만 계속 집요하게 그녀의 몸을 주물럭거리고 쓰다듬는 모습을 보며 민망해진 목린은 차라리 삽입이 훨씬 낫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이번 달거리는 조금 달랐다. 언영은 사라진 서간과 오라버니에게 써야 하는 답장 탓에 심란한 목린의 기운을 읽었고, 그래서 굳이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다. 덕분에 목린은 혼자만의 시간을 오래 가질 수 있었다. 서간을 쓰는 과정에서 방해가 없으니 편하기야 편했다.
목린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언영이 평소에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테다. 그는 부인이 심란해한다고 별말 없이 먼저 거리를 둘 성격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목린은 여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달거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목린은 딱 하나 빼고 나머지의 서간을 다 완성했다. 목현에게 보낼 종이만이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좋은 족장은’ 이후에는 아무 글자도 없이 깔끔하기만 했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목린의 얼굴에서 그늘이 떠나질 못했다.
달거리가 멈춘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동침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나란히 누워 있었고, 서로가 잠들지 않았음은 공기 중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었다. 목린은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한 눈을 끔벅이며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두 손은 배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였다.
잠시 뒤 언영이 말없이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
목린은 입술을 감쳐물며 숨을 죽였다. 언영도 오늘 그녀의 달거리가 끝났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언영의 기다란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어루만졌다. 그리고 단단히 피할 수 없게 깍지를 꼈다.
목린이 천천히 목을 돌려 언영 쪽을 눈에 담았다. 암흑이 무색하게 그녀의 단아한 눈이 청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이미 그녀를 뜨겁게 직시 중이었던 언영과 눈이 마주쳤다.
“……!”
시선이 맞닿자마자 언영은 목린을 자기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목린의 아담한 몸통이 옆으로 돌아가고 언영은 두 손으로 목린의 얼굴을 감싸며 바로 그녀의 입술을 쭉 빨아들였다.
언영이 끓어오르는 신음을 억누르며 목린의 내부에 깊숙이 침범했다. 목린은 언영의 팔을 잡고 소극적으로나마 함께 혀를 섞었다. 들뜬 언영이 더 몸을 가까이 붙였다.
언영의 손이 목린의 어깨, 등, 허리를 쓰다듬었다. 마침내 엉덩이에 닿았을 때는 언영의 입술이 목린의 목덜미를 지그시 깨물었다. 언영은 목린의 치마를 손으로 거칠게 당겨 올렸고 그럴수록 이에 가하는 힘도 커졌다. 치맛자락이 허리춤까지 끌려 올라갔을 땐 언영이 목린의 목덜미에 진한 흔적을 남기고 난 뒤였다.
“목린아.”
언영은 목린의 치마 속 속곳을 내리며 속삭였다.
“내일은 땋지 않고 풀고 다녀야겠다.”
언영의 어깨에 닿는 목린의 떨리는 숨이 대답을 대신했다.
목린의 엉덩이를 두 손에 쥐고 주무르느라, 언영은 이로 물어서 옷고름을 당겨서 풀어야 했다. 뽀얀 가슴이 드러나자마자 그 안으로 황급히 얼굴을 파묻고 혀로 핥았다. 얼굴을 좌우로 비벼 목린의 옷이 양옆으로 더 벌어지게 하고, 작고 통통한 젖꼭지가 모습을 보이니 그 위에 바로 입술을 묻고 쫍쫍 빨았다.
“읏!”
목린의 입에서 귀여운 신음이 절로 터졌다.
“아아……. 목린아.”
언영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라, 참기 힘들어.”
언영은 참는 것을 지나치게 힘들어했다. 삽입까지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아앙! 아!”
언영이 팔을 옆에 내려놓고 퍽퍽 쳐올리면서, 품에 완전히 가두어진 목린의 두 다리만 간신히 바깥에 나와 흔들거렸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뜨거운 그의 몸에 함께 뭉개졌다.
“하아, 너무…….”
허리를 튕기는 언영은 목린의 정수리 쪽에서 이를 악물고 신음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참지 못하겠다는 말은 참이었는지 들어오자마자 다소 무서운 기세로 그녀의 동굴을 가로질렀다. 살이 부딪치며 팍팍 음란한 소리가 터졌다. 안을 쩍쩍 벌려대며 들어오는 우람한 살 기둥 때문에 목린의 척추를 타고 뜨거운 감정이 일었다. 그녀의 입에서 날것에 가까운 신음이 하염없이 태어났다.
“앙, 아앙, 아, 앙, 아앙!”
목린의 신음이 이어질수록 언영은 눈에 띄게 흥분했다. 그 또한 탁한 숨소리를 내며 하반신을 더욱 요란하게 쿵쿵 올려 찍었다. 확실히 그는 평소보다 거칠고 초조해하는 중이었다.
목린은 얼굴을 최대한 위로 들었다. 눈과 코가 빼꼼 밖으로 나왔다. 목린이 아래에서 꼼지락거리는 걸 느낀 언영이 상체를 살짝 위로 들어 목린과 두 눈을 맞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언영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일렁였다. 아니, 죄책감? 곤혹스러움? 미안함? 그것의 의미에 대해 목린이 고민해 보기도 전에 언영이 신음을 쏟으며 파정했다.
“아아.”
근육질 허벅지가 떨리고 목린의 다리 사이로 언영이 애정을 울컥울컥 들이부었다. 안이 잔뜩 질퍽해졌다. 언영이 성기를 빼내자 밖으로 그의 씨가 함께 콸콸 터져 나왔다. 언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것을 모두 다시 목린의 질 안으로 밀어 넣으며 그녀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손가락 끝이 구멍을 비벼 댈 때마다 목린은 움찔거렸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는 그의 노력이 매번 돋보였기 때문이다. 목린은 차분히 눈을 감고 그가 주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가뜩이나 요즘 피로한 정신이었다. 언영은 한 번 하고 멈출 사람이 아니었고, 오늘 밤은 그저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내주고 싶었다.
“이제 자자. 오랜만에 힘들었지? 미안해.”
그런데 예상이 비틀렸다.
“……?”
“잘 자, 목린아.”
언영은 목린의 옷을 제대로 입혀 주기 시작했다. 허무할 정도로 그 손길에 욕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목린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서방님……?’
겨우 한 번이었다.
‘지치신 건가? ……벌써?’
실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단월도에는 2초 만에 모든 것을 끝내는 사내도 있다고 들었으니 그에 비하면 언영은 초족 사람들이 일컫는 대로 괴물이 맞았다. 그러니 한 번이라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언영은 목린의 몸에 팔을 두르고 옆으로 누웠다. 그리고 마치 두 사람 사이에 그 어떤 뜨거운 교류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가만히 눈꺼풀을 닫았다. 목린만 어둠 속에서 눈을 끔벅거렸다.
미련이 남은 목린은 일부러 몸을 꾸물거렸다. 그의 근육질 팔을 살짝이나마 손톱으로 톡톡 건드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습을 숨긴 언영의 눈동자는 다시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벌써 잠이 든 것 같았다.
‘아…….’
목린의 입술 끝이 축 처졌다.
* * *
목린은 저번에 찾아갔던 신당을 다시 한번 방문했다. 팔에는 목현을 위해 쓰다 만 서간을 끼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족장은’에서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종일 갖고 다니면서 고민해볼 생각에 가져왔다.
지난번과 똑같이, 무릎을 꿇고 공손히 앉아 손을 모았다.
“서방님이랑 너무 더 하고 싶었어요. 불경한 생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들어주길 원하며 비손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즉각 답이 돌아오길 기대하지도 않는 곳이 신당이다. 하여 목린은 조용히 침묵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 갑자기 누군가가 오리란 생각도 없었다.
“서방님도 사람이시니까요. 다음부턴 서방님께 실망하지 않을게요.”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
목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귀가 쫑긋 세워졌다. 저절로 소리의 근원에 관심이 갔다. 단언컨대 이건 도끼 같은 도구로 나무를 내려치는 소리였다.
이곳은 산의 입구 근처였으니, 근처의 나무를 벤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아무리 그래도 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린다든가.
‘지금 이거…….’
점점 속에서 혼란스러움이 끓어올랐다.
‘신당을 도끼로 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미 목린은 벌떡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아무리 귀혈족이 무기를 아무 때나 휘두르는 이들이라고 해도, 자기 집도 아닌 마을의 신당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어떠한 원인에 의해 건물을 없애야 한다고 한들, 안에서 누군가가 버젓이 기도 중일 때 무너뜨릴 리가 없었다.
목린은 문을 통해 나온 후, 치맛자락을 쥐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종종걸음을 내디뎠다. 의문의 소리는 완전히 반대편에서 들렸다. 길을 두 번 꺾어야 했다. 언영이 깨문 자국이 목에 남아서 오늘은 머리를 완전히 풀었다. 뛰는 동안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시원하게 펄럭거렸다.
각오의 심호흡을 한 뒤, 목린은 마지막으로 길을 꺾으며 신당의 후면을 확인했다.
“…….”
아무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목린의 어깨가 힘이 풀려 스르르 내려갔다.
사실 목린이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요란했던 도끼 소리는 이미 알아서 잦아들었다. 목린은 축 처진 몸으로 느리게 걸으며 신당의 벽을 천천히 관찰했다. 고동색 나무로 구성된 벽을 손가락 끝으로 슬슬 쓸면서 나아갔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명백히 도끼로 찍힌 자국들.
목린의 허리 근처 높이에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 위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여기를 왜 찍고 있었을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더욱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자국은 요란하기만 할 뿐이지, 의미 없었다. 건물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깊이로 파이지도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단순 화풀이를 위해 부러 성급하게 빠른 속도로 쳐 대기만 한 느낌. 애초에 벽은 주목적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예감.
그리고 그 소리가 목린이 뛰기 시작할 때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식었다는 건 즉…….
“……!!”
목린의 등골을 타고 아찔한 예감이 지나갔다.
그녀의 안색이 대번에 안 좋아졌다. 어디 아픈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다시 제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아까 달려왔던 길을 다시 그대로 돌아갔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설마. 신당은 그저 신당이었다.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는 곳이지 무언가 값비싸고 귀중한 것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도.
목린은 신당 안으로 절박하게 뛰어들었다.
“하아…….”
아담한 신당은 한눈에 내부가 가득 찼다. 쓸데없이 그사이 사라진 물건을 뒤지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문패도, 그림도 모두 그대로 있었다. 애초에 훔쳐 가도 써먹을 데가 없는 것들이었다.
착각이었나. 목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한 오해였나.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그자는 대체 왜.
혹시 몰라 목린의 눈동자가 더 천천히 주변을 뜯었다. 하지만 여전했다. 바뀐 것은 없었다.
이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나 고민했다. 이곳이 좀 더 위험한 장소였거나, 목린이 그자의 행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족장에게 얘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녀의 추론인 이 상황에선 괜히 바쁜 분의 시간을 빼앗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하나는 분명했다. 여기서 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음이다.
마지막으로 아까 전 그 도끼 자국만 더 살펴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짐하며 목린은 바닥에 놓았던 제 물건을 쥐려고 했다.
“어?”
난데없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이런 기분일까.
허공에 뻗어진 그녀의 손가락이 떨렸다.
신당의 내부는 아까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라진 건 오로지 하나였다. 목현을 위한 서간을 내려놓았던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