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8/25)

8장

“목린 님. 이번 주에 부족 간의 친목 대회가 있는 건 알고 계시나요?”

장터에서 나물을 사 가던 목린은 대여섯 명의 귀혈족 무리와 마주쳤다. 거리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남녀 중 하나가 목린을 보고 반색하며 물었다. 그들은 마침 대회 얘기를 하고 있던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목린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목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네. 서방님께 얼핏 들었어요. 이번에는 특히나 우리 마을 차례라서, 유독 일이 바쁘다고 하시더라고요.”

“목린 님도 오신다면 처음으로 오는 초족이 되겠네요!”

“그, 그렇네요…….”

목린은 머쓱하게 응했다.

친목 대회라는 것에 대해서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월진이나 언영이 초족도 대회에 놀러 오라고 했던 경험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에 각각 한 번씩 열린다던 그 대회는 육지에 있는 여러 부족이 성대하게 모여 벌이는 행사라고 언영이 말해 주었다.

하지만 특정한 실력을 겨루는 ‘대회’라는 점에서 초족의 불안감을 샀고, 무엇보다 폭력적이며 위압적인 육지 사람들이 평화롭게 친목을 나눌 것 같지 않았다. 하여 익문을 비롯한 초족 사람들은 늘 핑계를 대며 참여를 거부해왔다.

하필 이번에 대회 장소가 귀혈족 마을이라 언영은 대회장과 관련된 많은 업무를 도맡는 중이었다.

한 사내가 목린에게 신나게 물었다.

“지난가을에는 희운족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산사태 때문에 여기로 오는 길이 막혀 참여를 못 했기 때문에, 이번엔 많이들 찾아오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들에게 기억에 남는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마침 목린 님도 오셨으니 묻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런 문제에 대해 재치 있는 답을 주시지 않습니까. 하하.”

“으음…….”

목린은 입술을 오므리며 고민했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목린은 귀혈족이 그녀에게 질문해 오는 순간을 나름 즐겼다. 그들이 엄청 무섭게 생겼다는 것과는 별개로, 정말로 그녀를 괴롭히려고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놀랍게도, 질문을 기회로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애써 질문을 만들려고 고민한 모습도 종종 느껴졌다. 물론 목린은 그것이 착각일 뿐이라 여겼다.

또한 귀혈족이 물어오는 말은 생각보다 의외로 평범했다. 결국 똑같이 사람이 어울리는 곳이라 그런지, 약간 관점이 다르기만 할 뿐이지 하는 고민은 초족의 것과 거의 유사했다. 이점을 신기하게 여기며 목린은 성심성의껏 생각을 공유했다. 애초에 단월도에 살 때도 친구들 사이에서 차분히 중재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기 때문에 이는 크게 어려운 행동이 아니었다.

목린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그분들이 좋아할 걸 잘 고려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는 그쪽 사람들이 아니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사내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입에 담았다.

“제가 사실은 희운족 사람이거든요.”

* * *

집에 돌아온 목린은 벽에 기대어 앉아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애썼다.

전말을 들어 보니, 사내는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희운족의 마을에서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그녀가 사는 귀혈족의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마치 목린의 경우처럼.

놀라운 진실은 연이어 터졌다. 다른 부족의 마을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이들이 제 출신을 잇달아 고백했다. 정말 다양한 부족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백화족, 명족, 그리고 지난번에 혼례를 치른 여인이 말했던 화족까지.

그리고 그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자신과 적대 관계 혹은 갑을 관계로 연결된 자들의 마을에 엉덩이를 누르고 산다는 점에서 일말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애초에 목린은 그들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이제껏 특이하다고 잠깐 생각했을 뿐, 당시 그냥 넘어갔던 일이 다시 목린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자신을 희운족이라고 소개한 청년은 목린과 억양이 약간 비슷했다. 백화족 사람은 평생 보지 못했던 특이한 모양의 팔찌를 늘 끼고 다녔다. 오늘 알았는데 그건 그 부족의 상징이었다.

‘……혹시 내가 알던 것과 다른가?’

옛날부터 바깥세상에는 무서운 것이 가득하다고 배워 왔다.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그리고 그 어른들도 웃어른들에게 배운 것이다. 서로를 정복하고 찢어발기며 사는 이들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섬에 갇힌 것도 어찌 보면 행운일지 모른다고.

목린은 주변을 살폈다. 열어놓았던 궤의 가장 위쪽에, 언영의 막냇동생이 준 서간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징그럽기 그지없었던 게 계속 보니 적응되었다. 피가 주는 잔혹함보다 어린아이의 노력이 더 눈에 들어왔다.

섬에 남은 가족, 이웃, 친구들이 모두 얼마나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지는 눈에 선했다. 그녀의 처지가 생각보다 그리 고달프지 않다면, 걱정을 덜 할 수 있게 얼른 섬사람들에게도 알려 줘야 옳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목린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종이, 먹, 벼루, 붓을 구해 다시 돌아와 앉았다.

“음…….”

목린은 붓을 들며 사색에 잠겼다.

일단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기에 마을의 족장이자 가장 가까운 아버지께 전달하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어차피 그가 섬사람들 모두에게 전달할 테니 말이다.

[아버지, 저 목린이에요.

봄이 한창이에요. 가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보면 슬슬 여름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아버지와 오라버니하고 함께 둘러앉아 수박을 먹었던 시원한 여름밤이 벌써 그리워, 마음이 싱숭생숭하답니다.

하지만 아버지, 걱정 마셔요. 귀혈족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나쁜 사람들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이웃 부족과도 원만하게 지내는 것 같고, 흥겨운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아주 달라요. 서방님이 제게 잘해 주시는 건 물론이고요.

어쩌면 우리가 꽤 많이 오해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많이 곡해했던 건 아닐지요.]

“…….”

목린은 심란한 표정으로 붓을 다시 뗐다.

정말 오해였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서방님과 초야 동안에 부끄러운 짓을 너무도 많이 했다. 혼인을 없던 일로 치고 섬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물론 오래 함께했던 섬사람들이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핍박할 거라 생각진 않았다. 그렇다 한들 목린은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 정리해 보자. 서방님과는 이렇게 쭉 살되, 걱정하고 있을 초족에게는 언젠가 진실을 알리는 편이 나았다. 과연 진실을 알게 된 아버지께서 어떻게 나설지 궁금했지만 우선 그 문제는 뒤편에 놓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과연 그가 그녀의 말을 믿어 줄는지부터 확신할 수 없었다.

이다음 문제는 귀혈족이다. 귀혈족에게 사실을 말해야 할까? 귀혈족이 자초지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즉, 언영 또한 매한가지로 진실을 깨닫는단 뜻이다.

‘목린아, 너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목린은 그녀의 말 한 마디, 사소한 표정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언영을 떠올렸다.

많이 이상하고, 특이하고, 또 여전히 가끔은 종종 무서울 때도 있지만 그녀를 사랑해 주는 서방님.

힘을 써 초족에게 보이지 않는 압박을 주고, 또 귀혈족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엄청 마음 아파하실 것 같은데…….’

언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의 아픔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을 듣는다면 언영은 단순히 안타까워하다 못해 병들지도 몰랐다. 지난번에 어떻게 그녀에게 청혼해야 할지 몰라 가슴앓이하다 쓰러진 그가 목린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그 정도로 가벼이 넘어가지 않을 터다.

‘일단…… 어떻게 알려드려야 할지 확신이 생길 때까진 조용히 있는 게 낫겠어.’

영원히 갈 비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최근 몇 해 동안 귀혈족이 초족에게 괴로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와 언영의 혼인에 만족하는 초족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라도 진실을 깨닫는다면 들고 일어설 테다. 하지만 어느새 귀혈족에게 조금이나마 정이 든 목린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순히 시간을 벌자는 이유로 초족에게 진실을 뒤늦게 알리는 것도 괜찮은 대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아버지, 오라버니, 친우들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썩고 있을 테니 말이다.

목린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결국 한참을 고민 끝에, 목린은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은 말끔히 지워 내고, 그저 그녀가 족장 아들의 부인이라는 신분 덕에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다고 신난 말투로 적어 냈다. 이 방법이 귀혈족에게 설명할 시간도 벌 수 있고, 섬사람들의 걱정도 좀 줄여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일단 지금은 이곳 생활에 집중하고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가을쯤에 찾아뵙도록 할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저는 걱정 마시고요.]

‘그리고, 오라버니께도.’

목린의 손이 주춤거렸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끔찍했던 오라버니와의 마지막은 목린이 애써 지워내고 싶어도 실패했던 기억의 편린이다.

사실 그날의 일은 갑작스레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엔 당황했지만, 이성을 되찾고 후에 과거를 되새겨 보니 전조가 있었다. 사람의 감정 변화는 복잡하기 그지없지만, 결국엔 언제나 타당한 연결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목현은 언제부터일까, 늘 지쳐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도 넘어갔던 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물어보지 않으면, 덜 걱정할 수 있다. 진실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적인 감정의 벽을 넘어서 상대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건 꽤 껄끄러운 일이었다. 너무 무례한 행동은 아닐까 하는 상념이 머릿속에 눌러앉기 마련이고, 특히 목린은 그런 걸 잘할 줄 몰랐다. 아무리 피가 섞인 가족이라 해도 그랬다. 아니, 어쩌면 가족이기에 더 방관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오라버니에게는 마냥 귀여움만 받는, 굳이 고르자면 그의 걱정을 ‘받는’ 여동생의 역할이 더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목린의 눈에 오라버니는 하늘과도 같은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았다.

물론 남에겐 절대 가족을 이리 대하라는 충고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어리고, 서툴고, 사람과 제대로 맞닥뜨린 경험이 적은 목린에게 저 둘의 경계는 높다란 성벽과도 진배없었다.

그러나 이유가 뭐든지 간에 모두 썩 당당한 핑계는 아니었다.

본인이 생각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도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었다. 특히나 목린의 경우에는 늘 차분하다는 말을 들어왔던 이로서, 자신이 품고 있는 괴리와 맞닥뜨리기 힘겨워했다.

악몽 같았던 그 사건 탓에 오라버니와의 관계가 한 번에 파국에 다다랐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날은 너무 빠르고 강렬하게 지나갔다. 조금 더 진지하게 서로에 대해 논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목린은 그녀가 눈물을 보였을 때 무너진 목현의 표정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얼마나 파렴치한 행동을 벌였는지, 그의 눈을 보아하니 현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적어도 그 마지막 순간에는. 수년을 오라버니와 함께 살았다. 그 점 하나는 기필코 확신했다.

“뭐 해?”

“서방님! 언제 오셨어요?”

갑자기 언영이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목린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외쳤다. 얼른 몸통으로 서간 내용을 가렸다. 갑자기 거대한 체구가 다가오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쪽에서부터 나 왔다고 계속 외쳤는데. 뭘 그리 열심히 하느라 못 들었어?”

언영의 표정엔 장난기 섞인 서운함과 호기심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서 있는 자세로 몸통을 숙이고 있는 그의 또렷하고 시원한 눈이 짓궂게 접혀 있었다. 환하게 웃은 입에서 보기 좋은 이가 드러났다.

목린은 두 손으로 붓을 꼬옥 잡고 답했다.

“가족에게 서간을 쓰고 있어요.”

하하 웃으면서 열심히 하라고 했을 법한 언영의 태도는 예상과 조금 다르게 나왔다.

“그래…….”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듯 느리게 대답했다. 입꼬리 또한 애매하게 내려갔다. 목린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물었다.

“이걸 섬에 무사히 전달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필요하다면 새를 이용해서 당장이라도 보내게 해 줄게.”

초족과의 첫 교류 이후로 귀혈족은 영리한 조류들에게 초족의 섬과 육지 사이를 넘나드는 훈련을 시켰다.

“정말 고맙습니다……!”

언영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뭔가 탐탁잖은 게 있는지 굳어 있는 표정은, 본래의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언영은 다른 곳을 보며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목린은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낯빛이 변할 기미가 없자,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 무슨 생각 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어요.”

언영은 목린의 말을 듣고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는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하나 뭐라 말을 얹진 않았다. 그의 널찍한 가슴이 차분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언영이 입을 열 기색이 보이지 않아 목린이 천천히 계속 덧붙였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래도 오라버니는 제 가족이에요.”

역시나 목린의 예상이 맞았는지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언영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가족 얘기를 입에 올렸을 때 가장 먼저 그의 뇌리를 스친 것도 분명 오라버니와의 마지막 시간이리라. 당연했다.

목린은 차분히 설명했다.

“오라버니께서 제게 좀 험한 말을 하긴 하셨지만, 그건 걱정에서 우러나온, 평소 생각보다 심하게 나온 말일 테고…… 원래는 좋은 분이에요.”

“나는…….”

언영이 치고 들어왔다.

“오라버니는 제 가족이에요. 제가 잘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 서방님.”

“네가 형님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나는 네가 형님과 부딪히는 일 때문에 걱정돼서 그래. 아직은…… 좀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건 어때?”

언영은 화를 내지도, 제 의견을 되알지게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 목린에게는 거슬렸다. 아무리 언영이 자상하고, 그녀에게 잘해 준다고 해도 아직까진 결국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우선이었다. 그녀에겐 그 둘이 가장 소중했다. 게다가 언영은 늘 그 두 사람에게 번뇌와 고민만 안겨 주지 않았는가. 또한 그는 목린의 가족 사정은 전혀 알지도 못한다.

무엇보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안달 난 그의 표정이 목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현을 믿어도 된다는 그녀의 말을 겉으로만 들어주는 척하는 것 같아서 더 속이 상했다. 언영에겐 멋대로 목현을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좀 험한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제게는 제 가족이 언제나 늘 우선이었어요. 이번만큼은 물러서 주셨으면 좋겠어요.”

언영의 이목구비가 눈에 띄게 굳었다.

목린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아니, 저는…….”

언영은 목린을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야. 이해했어.”

“죄송해요. 그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서방님도 제게는 가족인데…….”

목린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언영이 몸을 숙여 어깨를 잡아 주며 막았다.

“그래도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하고 내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

목린은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었다. 언영은 아예 무릎을 꿇고 앉아 목린의 머리를 당겨 안았다.

“괜찮아. 바로 보내 줄 테니까 지금 쓰고 있던 거 마저 써. 다 잊고. 난 괜찮아, 응?”

“네, 고맙습니다.”

목린은 고개를 떨구며 작게 답했다.

언영은 그녀가 사과하며 얹은 말을 믿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지나다니는 묘한 씁쓸함이 말해 주고 있었다. 목린은 혼자서 속이 탔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기분이었다.

* * *

대회 당일이었다.

새벽부터 항구는 시끄러웠다. 항구 또는 귀룡산과 이어지는 골목으로부터 다른 부족 사람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한 부족이 적어도 오십 명은 달고 등장하며, 부족의 수 또한 열을 훌쩍 넘어섰다. 또한 단순히 몸만 달랑 오는 게 아니라 선물이나 자랑할 것 또한 함께 몸에 지고 찾아왔으니, 여간 성대하고 정신없는 행사가 아닐 수 없었다.

언영은 항구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담당하기로 한 터라 해가 뜨기 전부터 집을 나섰다. 목린은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일찍 나가겠다는 언영의 인사에 대충 답을 했다. 나중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을 때 언영이 누워 있던 옆자리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감도 오지 않았다. 몸을 정갈하게 씻은 뒤, 가진 초족 옷 중에 가장 예쁜 하늘색 유를 걸쳤다. 귀혈족 갑옷은 너무 무거워서 꿈도 못 꿀뿐더러 잘못 입고 나갔다간 균형도 못 잡아 주변에 폐만 끼칠 게 뻔했다.

나가기가 무서워 집 앞마당에서만 서성이며 시간을 잠시 허비하고, 부러 마구간에 있는 륭이와 그녀의 말과 함께 어울리며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더 늦었다간 언영의 걱정을 사겠다 싶어 결국 대문을 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 함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마을의 우측에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터였다. 저번에 목린이 언영에게서 말을 처음 배운 곳도 그 장소였다. 평소에는 한쪽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다른 곳에선 어른들이 훈련을 하고, 노인들이 누워서 쉬는 등 다양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래도 공간이 남았다.

아직 도달하려면 거리가 좀 남았는데도 벌써 목적지에서 날아오는 소란스러움이 목린의 고막을 쾅쾅 때렸다. 덩달아 목린의 심장도 같이 울렁였다.

“아!”

사방이 왁자지껄했다. 어디를 봐도 사람이 있었다. 천 명은 거뜬히 쉽게 넘었다. 웃음소리가 연이어 터지고 모두 적극적으로 팔을 벌리며 오랜만에 만난 벗을 환영하고 있었다. 넓은 대지를 꽉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갑옷을 갖춰 입었는데, 과거의 목린이라면 이들의 생김새를 전혀 비교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미묘한 차이점을 눈이 잡아냈다. 갑옷은 조금씩 다른 특색을 띠었고 부족인의 피부색 또한 모아 놓고 봤을 때 조금씩 달랐다.

공간의 측면에는 각 부족이 자리 잡아 앉을 자리가 계단 형태로 모두 설치되어 있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귀혈족 사람들이 밤을 새 만들어 낸 듯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이 대회를 총괄하는 이들이 이번 시합에 필요한 갖가지 도구를 꺼내며 개수가 맞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시끄럽게 함께 인사를 나누는 다양한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미미했다.

고막을 떵떵 울리는 아우성 탓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즈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을지 모를 언영의 손이 뒤에서 목린의 겨드랑이 안에 들어왔다.

“제 부인입니다!”

목린의 얼굴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쑥 올라갔다. 그녀는 당황하며 팔을 양옆으로 휘저었다.

언영이 해맑게 쩌렁쩌렁 외치자 주변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목린이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말똥말똥했다. 수십 쌍의 눈동자를 한 번에 마주 보는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이 기묘했다.

한편, 오랜 벗과 수 년 만에 재회한 양 그들의 안면에는 반가움이 둥둥 떠다녔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언영과 목린의 앞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그분?”

“반갑습니다!”

“늘 뵙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요! 듣던 대로 엄청난 미인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목린은 위에서 고개를 숙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언제 유명인사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그녀와 눈이라도 한번 마주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수십 번 머리를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언영이 뒤에서 싱글벙글 웃었다.

다시 목린의 발이 땅에 닿고 그녀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였다.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날숨을 내뱉는 동안에 낯선 이들이 언영에게 정겹게 접근했다.

“잘 지냈냐?”

“요즘 어떻게 지내?”

“부인 옆에 있다고 입 찢어지는 꼴 봐라.”

사람들은 목린만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귀혈족의 검은 계통의 갑옷과는 다른 색을 걸친 이들이 끊임없이 언영에게 인사를 해 왔다. 그의 어깨를 툭 치거나 어깨에 팔을 두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다가왔고 언영은 서글서글 인상 좋게 웃으며 모두를 받아주었다. 수많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의 당당하면서도 친절한 미소가 자연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목린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다시 보게 된 언영은 늘 그랬다. 단월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람들은 늘 그렇게 해맑은 그를 좋아해서 다가왔다. 언영 또한 그 사람들을 좋아했다. 물론 그의 지위나 능력은 남들의 흥미를 싹틔우기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의 목적은 그런 류가 아니었다. 목린은 지금 다가오는 자들의 눈만 봐도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소중한 인연을 재회하면서 들뜬 감정이 그 안에 만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영은 널리 잘 알려지고,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따라 왠지 남달라 보이는 언영을 목린은 가만히 신기해하며 올려다보았다.

“…….”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초족이 이상하게 보이겠구나.’

외톨이는 초족이었다.

언영과 목린이 정혼자 관계였던 지난 세월 동안 월진이나 윤근이 초족을 보러 오면 왔지, 초족이 직접 육지에 방문한 경우는 없었다. 귀혈족이 한 번 놀러 오라고 제안한 일은 많았으나 여러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한 번이라도, 딱 한 번이라도 왔다면 혹시 모르지. 진실을 더 일찍 눈치챌 수도 있었을 텐데.

목린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입은 초족 옷은 더욱더 그녀를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씁쓸한 눈동자는 주변을 훑었다. 이곳저곳을 눈에 담았지만, 그중에서도 앉아 있을 수 있는 쉼터에 특히 더 눈이 갔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언영이 물어왔다. 목린은 흠칫 놀랐다.

“앉아 있고 싶어?”

목린은 언영을 물끄러미 올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쪽에 서 있는 은평이 옆에 가서 앉아 있어. 내가 인사 다 끝나고 바로 갈게.”

언영은 검지로 쉼터 끄트머리에 있는 남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 틈에서 간신히 목린은 그자를 눈에 담았다.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언영과 가장 친한 무리에 있는, 말이 없는 과묵한 남자였다. 언영이 현오에게 맞았을 때 그를 일으켜 세워 준 사람이기도 했다.

목린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우선 은평은 언영을 때리지 않을 사람 같았으며(목린은 여전히 내기라는 핑계로 언영에게 주먹을 날린 현오에게 뻣뻣하게 굴었다) 무엇보다 귀혈족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수다스럽고 외향적인 면모가 없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시 말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깐. 은평이가 누군지 알아? 이리 와. 내가 다시 들어줄게!”

“아니에요! 누군지 알아요! 다 보여요. 괜찮아요!”

“그래도 들어줄래! 하하하!”

“괜찮아요!”

겨드랑이를 잡힌 목린은 팔을 아기 참새처럼 파닥거리며 은평을 알아봤음을 한 다섯 번은 언영에게 반복하여 말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인파를 뚫고 은평에게 떠났다.

“…….”

언영은 목린이 은평의 앞에 당도할 때까지 끈질기게 눈으로 좇았다. 두 사람이 함께 대화하는 기미가 보이자 그제야 아쉬운 듯 고개를 틀었다.

“야.”

혼자가 된 언영은 성큼성큼 인파를 뚫고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이 주변을 일부러 어슬렁거리고 있는 젊은이의 어깨를 쥐고 돌렸다.

“전할 말 있어?”

언영과 마주 본 그 자는 언영보다 키가 조금 작은 천진난만한 인상의 사내였다. 머리는 언영보다도 짧게 바짝 깎았다. 녹색 계열의 갑옷을 입은 그는 순한 얼굴과 그렇지 않은 몸을 갖고 있었다.

“언영아!”

그가 언영을 올려다보며 밝게 웃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다. 이어서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부인은? 아까부터 네게 말 걸 기회를 노렸는데 부인께서 옆에 계셔서 계속 기회를 기다렸거든.”

“알고 있어. 잘했어.”

언영은 그렇게 말하며 사내의 목에 정답게 팔을 둘렀다.

이는 우정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또한, 은밀한 비밀을 나누기 위해 서로에게 밀착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언영은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새로 발견된 건 뭐야?”

언영이 미궁의 바다를 조사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두 해 전, 목린의 섬에 배를 선물했을 때부터였다.

당시에는 단순히 목린의 생일을 기념하여 바닥에 ‘목린아 사랑해’를 새긴 배를 선물하러 왔다고 가벼이 알렸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언영은 불어난 의혹을 쉬이 넘기지 않았다.

섬 근처로 몰려드는 어류 수의 갑작스러운 감소는, 비정상적인 개입이 생기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하여 언영은 초족 몰래 며칠 동안 단월도 주변의 바다를 탐사하며 이상한 점을 찾으러 돌아다니곤 했다.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 초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목린에게 보내는 서간에는 거짓된 그의 일과를 보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물론 팔굽혀펴기 만 번을 한다는 말은 그의 의도와 달리 목린을 전혀 안심시키지 못했다.)

동료들까지 끌어모아 몇 주간의 작업 끝에 알아낸 사실은 아래와 같았다. 첫째, 단월도 근처의 어류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둘째, 그나마 남은 녀석들 또한 다양한 방향으로 헤엄쳐 떠나고 있었다. 오로지 한 곳만 제외하고.

바로, 북동쪽이었다.

답은 둘 중 하나였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거나,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거나.

후자로 짐작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좋겠지만, 초족 사람들 수백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 무언가를 좇고 있다면 모두가 일관된 곳을 나아가야 옳을 터.

“그래서 수확은?”

육지, 그중에서도 귀혈족이 사는 마을은 단월도에서 북쪽에 있었다. 북동쪽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추측할 경우 조사해야 할 곳 또한 단연 이웃하는 북동쪽. 하여 그는 그 지역에 사는 명족에게 더욱 나은 수색을 위하여 협력을 요구했다. 귀혈족의 선박 기술도 몸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쪽 사람 중 가장 언영과 친밀도가 높은 이가 바로 이 사내였다. 육지의 모든 부족은 아이가 일곱 살 즈음이 되면 몇 달 동안 멀리 수양을 보냈다. 호민은 그 당시 외진 산에서 함께 지내던 믿음직한 벗이었다. 유들유들하고 착한 성격 덕분에 같이 살던 나머지 한 명과 언영이 늘 싸울 때 옆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해 주곤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꾸준히 친분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았어, 언영아. 그래서 네 부인이 곁에 안 계실 때를 노리고 있었고. 바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 그거 하난 확실해.”

호민의 발언에 언영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늘 가능성을 품에 안고 수색을 시작했지만, 막상 타인으로부터 실존하는 위험의 존재를 알림받는 건 다른 얘기였다.

“……증거는?”

“네가 말한 방향을 뒤지다가, 우리의 함선만 한 거대한 녀석들이 무참히 뜯긴 채,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처참한 현장을 발견했어. 난 그 녀석들을 능가하는 또 다른 적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언영의 눈엔 어느새 냉기만이 눌러앉았다.

호민은 턱을 쓸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이 무조건 초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일단 바다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녀석이 사는 건 사실이야. 모두 잇자국이 난 채 뜯겨 있었는데……. 200년간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거든.”

애초에 200년 전 식인 물고기류의 등장 또한 북동쪽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호민의 부족은 언영이 부탁하기 전에도 원래부터 자주 그쪽을 왕래하며 상황을 살피곤 했다.

호민은 어두운 언영의 표정을 흘깃 올려다보며 부러 더 발랄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초족과 관련은 없어 보여. 일단 어류들이 애초에 북동쪽에서 왔기 때문에, 고향으로 다시 가는 것을 피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 잔인했던 현장과 초족의 섬 사이엔 엄청난 거리가 있어. 심각한 문제라서 서두에 던지긴 했지만, 솔직히 나는 이 일이 초족과는 관련이 없다고 봐.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두 지점 사이에 요원한 거리가 있으니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테고. 또 이번 일이 단월도 주변의 어류가 줄어드는 상황을 설명하진 못해.”

“…….”

“내가 염두에 둔 문제는 달라, 언영아. 난 그 둘을 애초에 다른 사건이라고 보고 있거든. 내가 궁금한 건 다른 문제야. 초족이 연루된 사건의 피해 지역은 단월도뿐일까? 다른 지역은 문제가 없을까? 만일 있다면, 오히려 공통점을 발견해서 사건 해결이 수월해질 수도 있어.”

“단월도 주변엔 다른 섬이 없어. 적어도 우리가 두 해 전에 찾아봤을 땐 없었어. 하지만 확인차 다시 둘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언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호민은 언영의 (드물게)심각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기, 우리가 하는 일을 초족에게 말하는 게 나을까?”

언영이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표정만큼은 육지 최고의 대장부였다.

“아니. 일단 어떻게든 우리끼리 해결하자.”

어차피 약한 초족이 소식을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악의 상황엔 진실을 알리고 초족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켜야 하겠지만, 아직 그때까진 여유가 남아 있었다. 북동쪽 어류들이 무엇에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건의 발단인 그 녀석이 정확히 단월도로 온다는 보장도 전혀 없었으며, 설령 온다고 한들 호민의 말대로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호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동감하는 바야. 설령 초족이 있는 방향을 녀석이 목표로 향하고 한들 아직까진 매우 안전해. 오히려 위험한 건 우리 부족이지. 여름에 사람을 모아 현장을 더 탐사해 볼 생각이야. 일단 녀석의 정체가 뭔지는 알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밝혀내면 바로 네게 알려 줄게.”

“필요하다면 우리 부족 사람들도 그쪽에 보내 줄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안 그래도 이미 다른 부족에게 도움을 부탁하려던 차였어. 부디 이번 일이 크게 번지지 않기를 바라.”

“그래. 늘 고마워. 조심하고. 여름이라면 지금부터…….”

언영이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세게 좁혔다. 호민이 침착하게 답해 주었다.

“한 달. 언영아.”

“아, 그래. 한 달…….”

언영이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언영이 넌 여전히 셈에 무척 약하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목린이는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니까! 하하하하!”

언영은 부러 허리를 쫙 펴고 당당하게 미소 지었다. 호민이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혼인 축하해. 엄청난 미인이시더라. 나도 아까 잠깐 인사해 봤는데, 심성도 고운 분 같았어.”

“흐흐흐흐하……. 맞아.”

언영은 손으로 목덜미를 긁으며 바보같이 히죽거렸다.

“목린이가 내 신부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

“왜 믿기지 않아! 언영이 너는…….”

잘생겼다고 말해 주려다가, 차마 저 괴이한 표정은 평범하다고도 봐 주기 힘들어 호민은 얼른 말을 바꿨다.

“……성격이 좋잖아!”

목을 긁던 언영의 손이 느리게 굳었다. 올라갔던 입술 끝도 어색하게 내려갔다. 호민은 신음을 삼키며 당황했다.

“그거, 마치…… 해 줄 칭찬이 없어서 아무거나 말한 느낌인데.”

함께 대화하는 이가 목린이 아니어서 그런지 언영은 이성을 제대로 붙들고 있는 중이었고, 하여 눈치도 아주 약간은 더 빨랐다. 호민이 서둘러 말했다.

“아니야! 진심이야. 언영이 넌 착하고 의리 있잖아. 언제나 나서서 도우려고 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최소한 한 번은 너한테 빚졌어. 게다가 성격도 유쾌해서 같이 있으면 즐겁고. 정도 많고. 모두 널 좋아해. 다른 부족에도 네가 족장 자리에 오를 날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아.”

“은도 그 자식이 들으면 코웃음 치겠는데.”

“하하……. 은도는 원래 그런 애잖아. 오늘도 보니까 안 왔는걸.”

호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언영은 팔짱을 끼며 코웃음 쳤다.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안 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에이, 언영아…….”

“반은 장난으로 한 말이야. 아무튼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

“아니야! 나야말로.”

* * *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대개 거동이 불편한 나이 먹은 어르신들이었다. 은평만이 근처에 있는 유일한 청년이었다. 그는 나뭇등걸에 앉는 대신 커다란 배롱나무 기둥에 기대 햇빛을 피하고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그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안녕하세요. 은평 님.”

“안녕하십니까.”

목린이 먼저 고개를 숙이자 은평도 따라서 인사했다. 그는 무뚝뚝하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목린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이 자리에서 왁자지껄 모여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저는 아직도 이런 분위기가 많이 어색해요. 저희 섬은 늘 조용한 편이었거든요.”

“그렇군요.”

“네…….”

은평은 이곳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굳이 대화를 이으려 시도하지 않았다. 목린이 없는 양 바로 관심을 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존재를 거슬려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목린은 용기를 내어 줄곧 속에 잠겨 있던 질문을 끄집어냈다.

“저기, 은평 님도 다른 부족 출신이신가요?”

은평의 눈동자가 그제야 목린에게 향했다.

“아닙니다. 여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요? 그런데도 다른 귀혈족 분들이랑 아주 다르시네요.”

“…….”

은평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오묘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린 목린은, 어쩌면 조금 전 그녀의 말이 상처를 주는 발언일지 모른단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

“사실 제게 그런 말을 한 건 목린 님이 처음이십니다.”

“네?”

목린은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신기하네요.”

“…….”

은평은 답하지 않았다.

목린은 그녀의 발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귀혈족 사람들이 부러 그가 의식하지 못하도록 입을 다물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 뒤 사색에 잠겨 있던 은평이 입술을 떼고서야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목린 님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잘 알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죠?!”

“확실히 남들보다 격정적인 면모가 없잖아 있습니다.”

목린의 커다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격정……적이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문화 교류가 중단되었던 동안에는 언어의 변화가 상당했다. 언영으로부터 끊임없는 서간을 받았던 그 당시, 단순히 언영이 지독한 악필이라 글자를 잘못 보았거니 넘겨짚은 단어들이 사실은 멀쩡했고, 되레 그 의미가 변하거나 목린이 난생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표현인 경우가 꽤 있었다. 하여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격정적이라는 말은 너무도 은평과 동떨어진 의미를 지닌지라 목린의 똥그란 얼굴에 혼란이 깊이 잠식했다.

은평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대로 나무에 더 등을 바짝 기대며 눈꺼풀을 닫았다.

평온함을 만끽하고 있는 이에게 조금 전 그 발언의 의미를 다시 말해 줄 수 있겠냐 묻는다면 실례가 아닐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께름칙하게 켜켜이 쌓인 궁금증을 삼키며, 목린 또한 애써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그러다가 마침 오른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악단의 존재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뿔나팔, 등에 메고 움직이는 북, 피리, 완함 등 다양한 악기를 손에 이고 다니는 이들이 풍부한 음색으로 관중들의 혼을 사로잡았다. 덩실덩실 가락에 맞춰 몸을 가볍게 흔드는 음악가들은 모두 목린에게 낯선 자들이었다. 음악에 능수능란한 부족이 하나 있다고 설핏 들은 적 있는데, 아마 그쪽 사람들이 아닌가 싶었다. 목린도 박자에 맞춰 고개를 사붓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

그때 나무에 기대고 있던 은평이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가 어깨를 당당히 벌리고 악단을 마주 보았다.

은평의 허리가 유연하게 꺾이고 각각의 관절이 독립되어 흐느적거렸다. 모든 행각이 악단이 연주하는 곡과 살짝살짝 박자가 어긋났다. 그런데도 열정을 쏟아붓는 격정적인 은평의 얼굴엔 창피함 하나 없었다. 악단은 그의 현란한 안무를 응원했다. 어느새 은평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싸 혼신의 연주를 짜냈다. 광란이 쇄도했다.

목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경악에 찬 그녀의 동공이 주변을 살폈다. 은평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옆걸음 치며 도망갔다.

* * *

“할 수 있다!”

언영의 부친 윤근이 온몸의 힘을 쏟아 휘두르는 깃발이 바람에 신나게 펄럭거렸다. 깃발에는 근육질 사람들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대회는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참가자는 삼백 명을 우뚝 넘었고, 이들 중에 상당한 수를 가려내기 위해 두세 명끼리 붙여 놓고 갖가지 다양한 작은 싸움을 치르게 했다.

싸움이라는 말에 목린이 위험하진 않을까, 혹시라도 잘못해서 큰 부상자가 속출하진 않을까 어깨를 움츠리며 우려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하나 지금 젓가락질 빨리하기 시합, 끝말잇기 등을 실시간으로 눈에 담으며 목린은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었다.

계단형으로 된 좌석 중에 목린은 가장 앞줄에 앉아 있었다. 월진이 닭싸움으로 상대를 휘황찬란하게 무찌르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어머니!”

월진이 한 번씩 승리를 거둘 때마다 언영이 양팔에 안은 첫째 동생과 둘째 동생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아이들 또한 언영의 몸통을 안으며 까르르 웃었다. 막냇동생은 목린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 역시 승승장구하는 어머니를 보며 다리를 신나게 휘젓고 있었다.

대회의 난도는 갈수록 올라갔다. 점점 신체에 많은 것을 요구했다. 준준결승 정도까지 오자 이번엔 도끼 던지기 대회가 새로운 종목으로 떴다.

여기까지 올라온 현오가 던질 차례가 되었다. 목린은 여전히 그가 못 미더웠지만 살아남은 귀혈족 중에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엔 정성을 다해 손뼉을 쳐 주었다.

현오는 건방진 미소와 함께 저 멀리서부터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달려 나가다가, 줄이 그어진 곳에 안정되게 멈춰서며 도끼를 저 멀리 휘 던졌다.

날아간 도끼는 경기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하늘을 반절로 가르듯 자신 있게 비행하던 도끼는 점보다 작게 보일 만큼 멀리 뻗어 나가더니,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떨어졌다.

목린이 입을 못 다물고 있는데 계단형 좌석의 가장 꼭대기에 앉아 있던 사람이 우렁차게 외쳤다.

“다인아, 너희 집 지붕 깨졌다!”

목린은 언영의 팔을 붙잡았다. 자주 붙어 다니는 친한 벗의 거처가 훼손되었다는데 언영의 표정은 다소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목린의 태도를 그가 놀랍게 쳐다봤다.

“지붕이 깨졌대요. 어떡해요?”

그때 갑자기 후방에 앉아 있던 다인의 가족이 모두 몸을 일으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인은 활기차게 아래로 내려가더니 방금 막 도끼를 던지고 오는 현오와 손뼉을 맞췄다. 곧이어 윤근이 갑자기 상체만 한 금 보따리를 구해 와선 다인의 품에 안겨 주었다. 다인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고 모두가 부러움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목린은 조용히 무안해하며 언영의 팔을 잡았던 손을 뗐다.

도끼 던지기 대회의 목적은 거처를 깨부수는 것이었다. 집이 부서진 이들은 호화로운 선물을 받았다. 하여 가장 멀리까지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길가에 떨어진 월진의 도끼는 그녀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승리욕이 강한 그녀는 실망감을 내비치다가도, 금세 허허 웃으며 털어 버렸다. 그리고 언영과 윤근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 남아 있는 우승 후보들을 구경했다.

“서방님께선 어디까지 올라가셨어요?”

목린은 막내 시누이를 소중하게 안으며 물었다. 또다시 어떤 기와집 지붕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 그 정도는 스스럼없이 넘길 수 있는 면역력이 생겼다. 언영은 목린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싱긋 웃었다.

“나는 한 번도 참가한 적 없어.”

“정말요?”

“부족이 많다 보니 한 가정에 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게 제한되어 있고, 늘 승리욕이 강한 어머니께만 기회가 갔어. 나나 아버지 모두, 어머니 대신 참여하고 싶다 완강하게 고집을 부릴 정도로 원하지도 않거든. 또 내 누이들은 너무 어리고.”

“오라버니! 저는 나중에 나가고 싶어요!”

“그래. 우리 화영이한테 우승은 식은 죽 먹기지!”

목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돌연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 덕분에 약간 활기차게 그녀의 입이 열렸다.

“한 가정에 한 사람만 가능하다면 그럼 이제 언영 님도 참가하실 수 있겠네요? 저희 둘이 따로 나왔으니까요.”

“그렇지.”

“서방님께서도 이번에 참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언영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의 귀가 빨갰다.

“우리 초야 때 참가 신청을 받아서 놓쳤어.”

“아아아…….”

목린도 마땅히 던질 대답을 찾지 못해 괜스레 옆을 고집스럽게 쳐다보았다.

대회는 한 청년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날 밤늦게까지 시끄러운 잔치가 벌어졌다. 불을 피우고 놀아서 사방이 밝았다. 목린은 종종 단월도까지 날아오던 매캐한 연기의 정체를 오늘 처음 깨닫게 되었다.

* * *

“이렇게…… 하면 고쳐질 것 같습니다. 됐습니다.”

목현은 이를 악물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지팡이로 사용하던 나뭇가지가 딱 알맞게 동강 났다. 한 번 실수로 험하게 떨군 뒤 끝부분이 아슬아슬하게 부러져있던 차다.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고 애매하게 붙어 있던 부분 탓에 할머니는 몇 번 사용하면서 손을 긁혀 피를 보기도 했다.

“아이고, 고마워. 정말 고마워라. 이 은혜를 어쩔까.”

“은혜라니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더 빨리 해 드렸을 텐데요.”

목현이 지팡이를 다시 할머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안전하게 자세를 잡는 모습을 진지하게 서서 지켜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경사 하나 없는 원만한 들판이다. 적어도 집까지 돌아가시는 데는 무리 없을 것 같아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저…… 아버지는, 족장님은 좀 어떠신가.”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행이네. 우리야말로 고맙지.”

키가 아담한 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목현을 올려다보았고, 쑥스러워진 그는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겸손 떤다고 생각한 할머니의 입술이 더 높이 올라갔다.

할머니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름진 두 손은 지팡이 위에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는데, 그중 위에 놓인 검지를 까딱이며 언제 입술을 떼면 좋을지 시간을 가늠 중이었다.

목현이 먼저 물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노인은 목현과 시선을 맞추고 눈을 몇 번 끔벅거렸다. 이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그냥…… 요즘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사람들 다 걱정이 많아.”

“제 안색이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괜찮긴. 족장님께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신 일이 없었잖어. 게다가…… 목린이 일도 그렇고…….”

섬 주민들은 목린은 물론이고 익문에 대한 걱정도 컸다. 딸을 멀리 보내 버렸는데 어떻게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다니겠냐는 의견이었다. 주변에서 그에게 잠깐 쉬다 와도 좋다는 충고를 던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익문은 보란 듯이, 귀혈족의 마을에서 돌아온 이후 더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남에게 멀쩡히 보이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부러 바쁘게 움직여 목린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는 목적인지는 몰라도, 하늘이 희붐해지는 새벽부터 부엉이가 부는 밤까지 쉬지 않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여쭈어본 적은 없지만 목현은 두 가지 추측이 모두 옳다고 내심 믿었다.

한데 너무도 바지런하게 일한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 다리가 조금 부어오를 때만 해도, 익문은 그가 요즘 너무 열심히 걸어 다닌 탓이라 여겨 가벼이 넘어갔다. 하지만 우둥퉁 두꺼워지는 종아리와 함께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두통이 동반되었다. 그로부터 수일 뒤, 그가 지난번 숲에 들어가 작업을 하던 당시 독성을 띤 곤충에게 다리를 물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사흘 만에 풀풀 털고 일어났을 염증인데, 뒤늦은 치료와 노쇠한 몸 탓에 회복은 다소 더디게 되는 중이었다. 의원은 당분간 집에 누워 끄떡도 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현재 목현이 그의 빈자리를 채운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잘하고 있어.”

“고맙습니다.”

목현은 할머니의 칭찬에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

거처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끝까지 목현의 도움을 끈질기게 거절했다.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바쁜 젊은이에게 그런 하찮은 일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목현은 할머니가 사라지는 모습을 씁쓸한 눈으로 끝까지 좇았다.

잘하고 있다,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등등. 모두 목현이 감당할 수 없는 칭찬이었다. 먹자마자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섭취한 기분이다. 제게는 너무도 과분한 언사였다.

목현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저 끝 어딘가 있을 목린을 찾았다.

꿈에도 목린이 우는 모습이 나왔다. 그날의 그는 미쳤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었던 소리를 했던 것이냐, 그건 또 아니다. 주언영이 줄곧 못마땅했으니까. 비틀린 상념이 끊임없이 꼬이고 꼬여 더럽고 추잡한 말을 무의식 속에서 자아냈다. 변명할 건더기가 없었다.

아버지의 역할을 물려받아야 하는 미래는 언제나 목현의 숨통을 죄는 두려움이었고, 그는 이런 고통을 남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힘이 없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피가 섞인 누이도 사정을 모르고 있다. 늘 선망을 담아 그를 우러러보던 누이의 눈빛을 지키고 싶었다. 지난번에 다 망친 것 같지만.

목린이에게 용기를 내어 사죄해야만 한다. 가중되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목현이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였다.

“……?”

뻗어 나가는 대해를 지켜보던 목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가 오고 있다.

귀혈족에게서 날아오는 새였다.

“아버지!”

“아이고…….”

너무 급한 나머지, 목현은 들어가겠다는 얘기도 하지 않고 덜컥 아버지의 처소에 발을 디뎠다.

익문의 앓는 소리가 목현의 마음을 후벼 팠다. 누워 있는 익문의 다리는 여전히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 두 종아리의 굵기가 한 눈으로 봐도 차이가 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존의 색은 돌아왔다는 것이다. 끼니도 문제없이 잡수시고, 그에게 약간의 미열이 있지만 심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옆집의 의원이 든든하게 말해 주었다.

“아버지. 목린이가 보낸 서간이 도착했습니다.”

목현의 말에 익문이 언제 앓았냐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벌 떨리는 손을 내밀고 흔들었다.

“어디! 어디 한 번 줘 보아라!”

목현이 직접 펼쳐서 건네주었다. 종이를 눈에 담자마자 익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우리 목린이 글씨체가 맞는구나, 맞아……. 그래, 주언영 그놈보다 천 배, 아니, 만 배는 더 잘 쓰지.”

눈물을 흘리면 시야가 흐려지기 때문에, 익문은 눈을 최대한 부릅뜨고 서간을 읽어 내려갔다. 조용하지만 결코 편하지 못한 시간이 흘러갔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목현은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바닥을 묘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익문이 서간을 접는 소리가 난 후에야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끝까지 정독한 익문의 눈에서 폭포가 터지는 중이었다. 꼬부랑거리는 수염이 젖어 들어갔다.

“호의호식이라니……. 나를 위해 거짓말을 쓰는 목린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아버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목현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익문이 순간 예전의 기력을 회복하고 목현을 휙 쏘아보았다. 아들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건지 어떻게든 알아내겠다는 집요함이 돋보였다. 목현도 그것을 느꼈다. 차분한 눈으로 아버지를 위해 설명을 친절히 덧붙였다.

“주언영 그자가 우리 목린이한테 죽고 못 사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목린이가 배척당하는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 뜻이었습니다.”

“……글쎄다.”

익문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현의 발언이 일리는 있다고 여겼는지 표정이 훨씬 누그러졌다. 목현은 아버지의 야윈 손을 쥐고 말했다.

“바깥에 귀혈족이 보낸 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 답장을 쓰면 함께 갖고 갈 것 같습니다.”

“그래. 바로 답을 쓰마. 지금 바로 쓰겠다!”

목현은 헐레벌떡 일어나는 익문의 어깨를 부드럽지만 완강히 눌러 내리며 무릎을 폈다.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드릴 터이니 여기 앉아 계십시오.”

익문은 빠르게 끄덕이며 손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래, 그래……. 아, 그리고 목현아, 섬사람들 모두 목린이를 걱정하고 있을 테니, 나가서 무사히 서간을 받았다고 말해 주고 오너라. 자세히 설명해 주진 말고 그냥 잘 지낸다고만 해도 충분할 테야.”

“예, 바로 그리하겠습니다.”

“미안하구나. 나도 이제 늙어서, 회복 속도가 예전 같지 않아. 얼른 일어나서 너를 도와줘야 하는데. 아직 못 가르친 게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선 모든 것을 시기에 맞추어 적절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게 최고의 스승이자 아버지이십니다.”

익문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제차 고개를 저을 줄만 알았던 아버지의 태도가 석연치 않아 목현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래. 다 가르쳤지. 다 가르쳤어. 이제 나는…… 짐밖에 되지 않겠지.”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

아버지의 발언에 목현은 다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짐이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내가 여기 붙박이고 있다고 해서 모를 줄 아느냐. 요즘 주변에 네 칭찬이 자자하다는 소식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모습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보인다 하더구나.”

“그거야 겉으로 꾸며낸 만용에 불과합니다. 웃어른들께서 많이 도와주기도 하셨고요. 그분들과 아버지가 없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뭐 크게 다를 줄 아느냐.”

익문이 껄껄 웃으며 말했으나 목현은 되레 더 속에서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평범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평범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한다면 누구보다도 그들을 잘 이해해야 하지 않겠니. 다른 이들도 너라고 생각하고 보듬고 가야 하니까 말이다.”

“…….”

“함께 나아가는 거란다, 목현아.”

목현은 피로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거처에서 나왔다.

그는 잠시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가, 눈을 내려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서간에 시선을 두었다.

아까 아버지에게 보여 준 목린으로부터 온 글이 아니었다. 익문의 앞에서 은밀하게 감춰 두었던, 다른 종이다.

다시 고개를 든 목현의 낯빛에 확신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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