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3/25)
  • 3장

    목현은 석경에 비친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특히나 근래에 팍삭 늙고 지친 제 얼굴을 씁쓸하게 마주했다. 기실 좀 늙었다고 해도 말이 그렇지, 아직 젊은 나이를 고려했을 때 여전히 파릇파릇한 건 사실이다. 조금만 기운 차리면 생기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분이 계속 가다간 기운은커녕, 구긴 인상 그대로 꺼림칙한 주름이 잡힐 것이다.

    목현은 피곤한 얼굴로 석경을 밀어 내렸다.

    “형님!”

    그때 난데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신난 목소리가 목현의 귀를 꽉꽉 채웠다.

    주언영이다. 누이의 정혼자. 목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오라버니, 언영 님이 들어와도 될까요?”

    언영이 활짝 열린 입구를 가득 차지하고 있고, 그 뒤에서 목린이 까치발을 하고 묻고 있었다. 목린의 눈은 보이지도 않았고 간신히 드러난 고운 이마만 반짝거렸다.

    목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목린아, 그 질문을 왜 네가 하느냐. 네가 마치 공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처럼. 청혼을 해 온 건 공자 쪽이다. 조심스러워야 할 자는 네가 아니라 공자란다.”

    “오라버니, 말조심하셔야 해요……!”

    목린이 팔짝팔짝 뛰고 허둥거리며 속삭였다. 팔을 사방에 저으며 당황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으나 목현은 지금 가만히 누이를 흐뭇하게 지켜볼 기분이 아니었다.

    언영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형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경솔하였습니다. 형님, 소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린이 너는 나가 있으렴.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

    목린은 무슨 말을 더하고 싶은지 그 자리에서 얼굴을 구겼으나 결국 작게 대답하며 뒤로 물러났다.

    “……네.”

    “금방 끝내고 나올게!”

    언영은 문을 닫기 직전까지 목린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목현에게 다시 공손히 인사했다. 마치 목린이의 뭐라도 된 양 저리 구는 게 가소로워 목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혼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형님!”

    “앉으세요.”

    언영은 목현이 손짓하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목현의 얼굴을 다소 유심히 구경했다.

    언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목현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누이인 목린과 그는 닮은 듯 안 닮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나란히 두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얼굴이 달걀같이 둥근 목린과 턱이 날렵한 목현은 예쁘장한 이목구비가 유사해도 풍기는 느낌이 확연히 상이했다. 목현도 언영이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게 이해갔다.

    옛날에 목린이는 오라버니 같은 서방님을 두고 싶다고 쫑알거린 적도 있고, 사랑보다는 선망에 더 가까웠지만 목현과 분위기가 비슷한 그의 친우의 뒤를 마냥 쫓아다닌 경험도 있었다. 꽤 마른 체격의 과묵한 남자였다. 목현과 마찬가지로 다소 까칠하게 생겼던 걸 보면 목린이에게는 확고한 취향이 있는 게 분명한데, 완전히 정반대의 남자에게 시집가게 생겼다니. 목현은 이것도 참 재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다 싶었다.

    “……공자,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껏 물어보십시오, 형님!”

    “목린이는 공자의 마을에서 어떤 삶을 기대해야 합니까? 새로운 세상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잘 이겨 낼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마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목린이를 좋아하고 존중할 겁니다. 목린이에게 낙원과도 같은 삶을 선물하도록…….”

    언영이 뿌듯하게 말했지만 목현은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공자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현은 뿌듯하게 말하는 언영의 말허리를 싹둑 잘라냈다. 그런데도 언영의 얼굴엔 난감한 기색하나 없었다. 그는 인심 좋은 표정과 함께 넓은 어깨를 제대로 폈다.

    “사랑하는 여인 하나 마을에서 지킬 수 없는 남자가 후에 족장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겠습니까, 하하!”

    “공자께서는…….”

    목현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할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어디서부터 내뱉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귀혈족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부상한 건, 예전에 있었던 목린의 생일 이후부터였다. 확실히 다소 비도덕적이며 불경한 태도를 많이 보이기는 해도, 뼛속까지 썩은 놈들은 아닌 것 같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200년 동안 고립되어 살아온 초족에게, 첫 등장부터 무기를 들고 온 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행동이란 엄청난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또한 귀혈족을 한 번 믿어 보자는 이들은 대개 지난번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놀았던 현장에 함께 있었다. 다시 말해 초족 사람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였다. 나머지 사람들의 기억엔 목린을 그런 위험한 바다에 노출했다는 충격이 더욱 뿌리 깊게 박혔다. 특히나 목현과 같이 목린과 가까운 사이인 자들에게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단순히 누이를 빼앗긴 오라비로서 분노하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허망함에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이 분노는 목현의 마음속에 부족 대 부족에 대한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바깥세상으로의 길이 열리지 않았을 때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으니 욕심이 나지도 않았고, 부끄러운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현재 하는 고민은 훗날 족장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그 또한 함께 얻을 고민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어깨에 얹힌 짐이 곧 그의 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몸이 나날이 노쇠할 때마다, 목현의 가슴에 쌓이는 현실적인 고민의 무게는 더할 수 없이 육중해져 갔다.

    어떻게 해야 좋은 족장이 될 수 있을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아이가 생긴다면, 좋은 아비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누이를 저런 남자에게 보냄으로써 이미 좋은 형제가 되는 건 실패했다고 간주했다.

    똑같이 차기 족장 자리에 있으면서도 주언영은 너무나도 달랐다. 삶에 고민이라고는 없는 자 같았다. 본인의 위치가 얼마나 막중한지 아예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가볍고 책임감이 없었다. 부담 탓에 피로함과 하나가 되어 가는 목현과 달리, 언영은 하루 종일 해맑고 활기찼다. 머리가 비어 있다고 봐도 무방한 듯했다.

    목현이 보았을 때 이는 명백히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차이였다.

    ‘우리에게도 귀혈족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버지. 목린이만 생각하면 죄책감에 마음이 썩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목린이 때문이라면 이해하지만, 네 말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하겠구나, 아들아. 네 자유를 위해 다른 이의 자유를 묵살하고 얻은 것을 너는 힘이자 해방이라고 보는 것이냐. 그것이야말로 결핍이자 악령에게 영혼을 구속당하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냐. 네 말을 듣고 목린이가 참으로 자랑스러워하겠구나. 나는 못 들은 거로 하마.’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의미로 했던 말은 아니나 자신이 경솔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그분께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여동생을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런 자에게 여동생의 남은 삶을 모두 맡길 수는 없었다.

    “공자, 아버지께서는 섬을 더 신경 쓰시지만 저는 그리 굴복할 성정이 못 됩니다.”

    밤잠을 설쳐 가며 좋은 족장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닫게 된 사실은 바로 그가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아주 가끔 터져 나오는 울분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거의 전무했다. 늘 서글서글한 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박으라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임무였다.

    귀혈족이 배를 선물로 바친 이후,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초족이 귀혈족에게 일정한 주기를 두고 찾아가 조공을 바치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겠느냐 쑥덕거렸으나 목현의 생각은 외려 달랐다. 배는 귀혈족 말고 다른 섬 밖의 이들과 접촉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저 바다 밖 어딘가 분명 귀혈족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지닌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힘을 키우고, 그들과 손을 잡으면 된다. 몇 해가 걸릴지 모르겠지만 귀혈족을 모조리 도려내는 것이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고민했을 때 끝이 보이지 않는 높다란 벽과 같은 고뇌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좋은 족장의 길인가?

    “알겠습니다.”

    “하하. 제 말은 위협도 안 된단 표정이로군요, 공자.”

    “어째서 위협이 됩니까?”

    “제 말은 고려할 가치도 없습니까?”

    언영은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런 든든한 오라비가 함께한다는 것이 어째서 위협인지 모르겠습니다.”

    “공자, 제 말을 오인하신 듯한데, 저는 공자의 편이 아닙니다. 목린이의 편이지요. 우리는 동료가 아닙니다.”

    “저 또한 목린이에게 언제나 진심이고 목린이가 언제나 제 우선이니 동료가 맞지요.”

    목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님, 형님이 설령 제 반대편에 서 있다고 한들, 그것이 실로 위협이 될 확률은 극히 미미합니다.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형님의 힘을 소인이 얕잡아 보아서가 아닙니다.”

    “그래요? 그렇게 들렸는데. 그렇다면 한번 들어봅시다. 연유가 무엇인지.”

    목현은 아까 뒤집어 놓았던 석경을 다시 손에 집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소인의 마을은 다른 부족의 땅과도 밀접하게 닿아 있어, 어린 시절부터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님,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언영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말했다.

    “한순간의 탐욕에 이성을 빼앗겨 분별력을 잃은 지저분한 이들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조용했다.

    “…….”

    목현이 쥐고 있는 석경은 그대로 으스러지기 직전이었다. 언영의 다정한 눈이 그 모습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물론 형님 얘기는 아닙니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여기 올 때 누구보다 잘 반겨 주는 분이 형님 아니십니까. 하하!”

    언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목현은 그런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언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유쾌하게 말을 던졌다.

    “저는 뭐 머리는 무식하고 할 줄 아는 게 힘쓰는 것밖에 없는 놈이니 몇 번 얻어터져도 금방 일어나겠지만, 제가 아끼는 이들은 저와 다릅니다. 제 주변에 있는 이들이 저 대신에 피해를 받을까봐 늘 걱정이 많아서 이 문제에는 살짝 예민한 편입니다.”

    목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영은 등을 돌리고 문을 젖혔다.

    “넓은 마음으로 베풀고, 남을 지켜 주며 살아가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답니다, 형님!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한번 혼인 축하드립니다! 목린이가 그러던데, 어릴 때부터 몰래 좋아하시던 분이라면서요?”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하하하하!”

    그리고 시끌벅적하던 그의 존재가 한순간에 방에서 사라졌다.

    * * *

    언영은 살짝 고개를 측면으로 틀어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온기가 완전히 사라진 그의 매서운 눈엔 감정이라곤 없었다.

    “언영 님.”

    “목린아!”

    목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언제 어두워졌냐는 듯, 목린을 향해 방향을 트는 얼굴엔 쾌활한 미소만이 자리 잡았다. 싱글벙글 웃으며 거대한 몸을 갖고 달려오는 언영을 목린은 어깨를 굳히고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한데 키, 키가 그사이에 또 자라신 것 같아요.”

    그가 코앞에 다가왔을 때 목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젠 언영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 보려면 목을 최대로 꺾어야 했다. 이전보다 더 자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했다.

    “이제 내가 마을에서 가장 커! 하하하하!”

    언영은 익숙하게 목린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끼워 넣고 그녀를 제 품에 안아 들었다. 목린은 혹시라도 떨어질까 봐 그의 목에 주뼛주뼛 팔을 둘렀고 언영이 히죽 웃었다.

    ‘어떡해, 더 무서워지셨어…….’

    오라버니랑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묻고 싶었는데. 목린은 울상을 지으며 계획을 조용히 접게 되었다.

    두 사람은 조금 뒤 목현의 혼례가 진행될 공터로 뚜벅뚜벅 향했다. 이미 섬 주민들이 앉아 있을 의자와 음식을 놓을 탁자 등이 모두 깔끔하게 배치된 후였다. 그리고 각각의 자리에는 앉게 될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리 와 있던 초족 사람들은 언영을 발견하고 흠칫 몸을 굳혔다.

    “오, 오라버니의 혼례식을 기념해서 제가 직접 자리를 배정해 드렸어요.”

    “내가 네 옆이야? 이걸 네가 직접 흔쾌히 정했다는 거야?”

    “네…….”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를 앉힐 자리가 딱히 없었다. 정말 아무 데나 앉혔다간 그 옆에 착석한 섬 주민이 놀라서 졸도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어떻게 봐도 그냥 목린이 함께하는 게 제일 무난했다.

    얼마 전에, 겨울이 끝나 가면서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큰 눈이 내렸다. 해가 뜨자마자 목린은 밤새 쌓인 눈을 구경하러 어린아이처럼 들떠선 달려 나갔다. 목린의 오라비와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목린아, 조심하렴. 허허허! 내 아이지만 어쩜 저리도 귀여운지.’

    ‘어, 아버지! 오라버니! 집 앞에 눈사람이 있어요!’

    ‘꼬맹이들이 놀다가 만들었나 보구나.’

    ‘그런데 키가 정말 커요! 애들이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초족 사람들 중 가장 장신인 목현도 이 눈사람보다는 짧았다.

    ‘많이 추워 보인다……. 제 목토시를 나눠 주고 싶은데 얘가 너무 커서 좀 힘들 것 같아요.’

    목린은 아무런 장식도 달지 않아 허전해 보이는 눈사람을 보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이 오라버니가 좀 도와줄까?’

    ‘네?’

    마치 어릴 때 함께 놀던 것처럼 목현이 뒤에서 목린의 허리를 안고 들어 올렸다. 추억을 되새기며 목린은 까르르 웃었다. 마침내 눈사람과 완전히 키를 맞춘 상태에서, 목린은 제 목을 두른 따스한 토시를 풀었다. 그리고 눈사람의 목에 다정하게 휘감아 주었다.

    목린은 눈사람이 살아 숨쉬기라도 하는 양 그것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며 미소 지었다.

    ‘추웠지? 이제 괜찮아.’

    그리고 그때 갑자기 눈사람의 얼굴이 터졌다. 목린의 몸통으로 얼굴이었던 하얀 잔재가 뿔뿔이 흩어지며 떨어졌다.

    ‘목린아!’

    눈사람 안에 숨어 있던 언영이 쾌활하게 외쳤다. 이목구비를 뺀 나머지는 모두 여전히 눈에 갇힌 채였다. 뒤에서 목린을 받쳐 주던 목현이 휘청거렸다.

    ‘형님, 혼인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저도 꼭 혼례식에 참석하겠습니다, 하하하!’

    꽤 오래 이러고 있었는지 언영의 코가 시뻘게져 있었다.

    ‘그리고 목린아, 토시 고마워. 목린……. 목린아?’

    ‘…….’

    목린은 몸을 굳히고 영혼이 나간 눈으로 언영을 바라보았다.

    ‘목린아!’

    목린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옆으로 기우뚱하자 언영이 절박하게 외쳤다. 그의 단단한 팔이 눈을 뚫고 튀어나와 쓰러지는 목린의 몸을 붙잡았다. 그것이 의식을 잃기 전 목린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을 목린은 기억하지 못했다. 목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언영은 목린이 기절하자마자 눈을 뚫고 나와 목린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울부짖으며 의원을 찾았다. 다행히 의원은 목린의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었다. 의원이 어쩌다 쓰러졌냐고 묻자 언영이 ‘목린이는 이런 눈 내리는 날씨를 감당을 못한다’고 울부짖었다.

    옛날부터 눈 위에서 누구보다 신나게 방방 뛰놀던 목린을 봐 온 의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뒤에서 지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젓고 있는 익문과 목현을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해 언영의 말을 알아들은 척해 주었다.

    일련의 소란 후, 본래 친한 친구들과 아버지하고 가까이 앉기로 했던 목린은 울며 겨자 먹기로 혼례식의 자리 배치를 다시 바꿔야 했다.

    언영에게는 목린의 옆에 앉는다는 사실이 굉장히 특별하게 와닿은 듯했다. 그는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또 훨씬 굵어진 팔뚝으로 목린을 압박시켜 가두고 입술을 쪽쪽 빨았다. 목린은 눈을 질끈 감았고, 옆에 지나가던 주민들은 겁에 질려 숨을 멈췄고, 어린아이는 언영의 덩치에 압도당하여 울음을 터뜨렸다.

    * * *

    예서와 목현이 맞절을 하고 일어섰다. 절차에 따라 목현이 가볍게 예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식이 끝났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본격적으로 잔치가 벌어졌다.

    목린은 혼례식을 좋아했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례식은 단월도의 식문화가 가장 돋보이는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섬에는 건강에 좋은 다양한 식자재들이 풍부했고 중요한 날인 만큼 마을 사람들이 각자 모여서 최고의 음식을 선보였다.

    목린은 먹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도 너무나도 행복했다. 앞에 놓인 탁자에 진수성찬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맛에 절로 고개를 젓게 됐다. 목린은 눈웃음을 치며 황홀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손이 끊임없이 반찬과 밥 위를 오갔다. 어르신들은 목린이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렇게 복스럽게 먹는 아이는 또 없을 거라며 껄껄 웃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푼 상태에서 목린은 무심코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언제부터였는지, 언영이 팔을 괴고 그녀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히히히히히히…….”

    그의 눈은 완전히 힘이 풀리고 자유롭게 벌어진 입에선 이상한 웃음소리가 자꾸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술 취한 사람도 이렇게 무너지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흐뭇하게 지켜보는 어르신들과 같다고 치부하기엔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저렇게 입이 망측하게 벌어진 걸 보면, 배가 고파서인 것 같다고 목린은 입에 담긴 밥을 꼴깍 삼키며 생각했다.

    목린은 제 수저를 내려다보았다. 갓 만든 따끈따끈한 쌀밥에 듬뿍 올린, 먹음직스러운 고춧잎 나물무침. 남한테 주기 너무나도 아까웠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만약 언영이 이걸 갑자기 빼앗아 먹으려 했다면 목린은 초족의 운명이고 뭐고 언영의 머리카락을 뜯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언영은 현재 공격성을 내세우지 않고 있었고(목린은 그 점을 매우 높이 샀다. 남이 맛있는 것을 먹는 모습을 보고 참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목린은 그를 화나게 해선 안 됐다. 또한 단월도에 이렇게 맛난 식자재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만일 최악의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 그래도 섬을 불바다로 만드는 일까진 피할지도 모른다.

    목린은 시무룩함을 뒤에 숨기고 언영을 향해 소심하게 수저를 내밀었다. 한 입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너무 맛있어요, 언영 님. 이, 이것 좀 드셔 보셔요. 제가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무침이에요…….”

    “으응, 아니. 난 괜찮아. 너 마음껏 먹어. 흐흐흐흐…….”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목린이 어쩔 줄 모르며 그 자세로 가만히 있자 갑자기 그가 표정을 바꾸었다. 살짝 얼굴을 굳히더니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독촉하기 시작했다.

    “얼른 먹어. 먹는 모습 보여 줘. 얼른.”

    “네……?”

    목린은 여태까지 자신이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언영은 목린이 먹고 있는 음식보다는 그녀의 움직이는 입술이나 터질 것 같은 볼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목린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섬 바깥 사람들은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 또한 돌았던 것 같다.

    그리 생각하니 이해가 되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혈족에서 가장 키도 크다는 남자의 부인보다는 그의 한 끼 식사가 더 그녀의 역할에 어울릴 성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안겼을 때 느꼈는데 자신의 덩치는 언영이 들고 먹기에 딱 좋을 듯했다.

    혼인한 후에 마음이 변하면 잡아먹을까? 딸의 뼈만 전해 받은 아버지는 얼마나 슬퍼하실까. 아니, 어쩌면 혼인은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잡아먹을 생각이었을지도 몰라. 초족 남자들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적극적으로 뺨에 뽀뽀하고 빠는 걸 보면 그녀의 살에 유독 집착하는 건 분명했다. 지금 저렇게 웃는 것도 포동포동하게 살찌운 다음 먹을 생각에 푹 빠져서 그럴지도.

    “정말 드셔도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고, 잘 먹겠다고 하면서 받아먹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언영은 끝까지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너 먹으라니까.”

    “정말 괜찮아요…….”

    목린은 울먹거리기 직전이었다.

    “아냐. 이것도 먹고, 이것도 한번 맛봐.”

    언영은 목린이 먹는 음식을 다 지켜보고 있었는지, 아직 입 대지 않은 것만 가져다가 그녀의 앞에 친절히 갖다 놓아주었다. 한 여인이 손을 뻗어 집으려 했던 고기를 빼앗겨 슬퍼했지만 차마 언영에게 돌려내라고 할 수 없어 울상을 지었다.

    나를 정말 살찌우고 잡아먹을 생각인가. 목린은 젓가락을 빨며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지척에 놓여 있는 숭어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정말로 언영에게 잡아먹히더라도 저건 먹어 봐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목린의 젓가락이 그쪽으로 향하자 언영의 입술 끝도 양쪽으로 찢어지듯 벌어졌다.

    ‘우울했는데……. 너무 맛있어.’

    냠냠거리며 이 환상적인 맛을 음미하고 나니, 아까까지 머릿속을 잠식하던 걱정이 모두 잠시나마 종적을 감추었다. 이 세상에서 목린에게 먹는 것보다 좋은 치유제는 없었다. 목린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언영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얼른 목린의 앞에 새로운 접시를 놔주었고 젓가락을 쥔 목린의 손 또한 야무지게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목전의 음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아침에 먹는 밥도 맛있고, 대낮에 먹는 밥도 맛있고, 저녁에 먹는 밥도 맛있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맛있는 밥은…….

    “혼례식 밤에 있을 일이 정말 기대돼요.”

    목린의 말을 들은 언영이 돌연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기침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그래?”

    “네. 제가 혼례식 중에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에요.”

    밤에 먹는 밥이 제일 맛있다.

    앞에서도 잠깐 거론되었지만 다시 꺼내자면, 초족의 혼례식에는 초야 문화가 없었다. 단순히 아이를 배태하기 위해 하는 행위를 쾌락으로 오래 즐기는 것은 상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고 혼례 행사를 너무 빨리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대신 밤에도 주로 간단한 놀이와 같은 재밌는 일을 이어서 진행하였다.

    그중에서도 목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밤에 하는 군것질이었다. 맛난 음식들은 밤에 먹으면 더 맛났다. 정말 신기했다.

    언영은 팔을 괴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구경하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이 목린에게 쏠려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언영은 갑자기 목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망설이듯 입술을 뗐다.

    “나도 그럴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혼례식 때 말이야.”

    “언영 님도 좋아하시는군요!”

    목린은 그와 자신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게서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밝자 언영의 목이 더욱 빨개졌다.

    “그건 당연한 거잖아? 나는 사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걸 상상하는데. 나는 수줍음이 많은 너도 좋아한다고 할 줄은…….”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까요? 너무도 열정적인 밤이니까요.”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저는 이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져요.”

    허둥거리며 앞에 보이는 잔을 집는 언영의 귀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는 안에 든 것도 확인하지 않고 우선 벌컥벌컥 들이켜고 보았다. 초족의 손에 맞춰진 잔은 그의 손에 비해 터무니없이 아담했다.

    드디어 언영과 말이 통했다고 생각한 목린은 들떠서 재잘거렸다.

    “언영 님, 저는 제 혼례식에서 마지막 잔치만 한 달 동안 계속 쉬지 않고 했으면 좋겠어요.”

    뿌우우우-

    언영이 뱉은 액체가 무지개 모양으로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주변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단월도 주민들은 그가 불을 내뿜는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도망쳤다.

    “괜찮으셔요?”

    목린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언영이 소리치듯 물었다.

    “한 달?! 쉬지 않고? 진심이야?”

    “네? 네. 아, 아무래도 너무…….”

    준비할 게 많겠죠? 그쪽 입장에선 볼품없는 초족 여인일 텐데 그런 사람을 위해서 일주일 동안 음식을 준비해 준다는 것이 애초에 말이 안 됐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맛이 없으셨나 봐요…….”

    “할 수 있어.”

    “괜찮……. 네? 정말요?”

    “한 달. 쉬지 않고. 알았어. 할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게. 목린이 네가 원한다면. 네가 원하면 나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어.”

    언영이 목린의 양쪽 어깨를 잡고 비장하게 말했다. 당황한 목린은 눈을 굉장히 많이 끔벅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말씀은 고맙지만 정말 괜찮아요. 많이 힘들 것 같아요.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아무래도 너무 무리…….”

    “무리 아니라니까!”

    언영은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 듯해 보였다. 목린의 눈엔 귀혈족 식문화에 대한 자긍심에 금이 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할 수 있어. 하고 싶어.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매일 하고 싶어. 지금 당장도 하고 싶어.”

    “뜨, 뜻이 같다니 다행이에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너는 그냥 날 따라오기만 하면 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에요.”

    목린이 희미하게 웃자 언영의 목과 얼굴이 모두 터져 버릴 것같이 빨개졌다. 그는 굳은살이 많이 박인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벅벅 비볐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우선 코피 문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겠군.”

    “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목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 *

    천둥이 소리를 질렀다. 혼례식에 갑작스럽게 이런 날씨라니, 아무래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물론 남은 일정은 내부에서 진행하면 될 테니 큰 상관은 없겠지만.

    익문은 밤까지 이어지는 잔치에 참여할 정도로 젊은 몸이 아니었다. 그건 그의 여식 목린같이 어리고 파릇파릇한 애들을 위한 일이었다. 날씨도 뒤숭숭하겠다, 익문은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누워 잠들 준비를 했다.

    목린이는 지금 저쪽에서 맛있는 과자를 야금야금 골라 먹느라 신이 났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그의 얼굴에 미소가 꽃피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이 집에 살지 않을 목현이를 떠올리니 또 이번엔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이상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여러 가지로 감성적인 하루였다.

    마지막으로 목현의 방이나 좀 보고 올까, 란 생각과 함께 눈꺼풀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평화가 무너졌다.

    “주언영!”

    “장인.”

    어둠 속에서 그의 존재는 저승길로 인도하러 온 안내자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섬에서 저렇게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덕분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고, 고, 고, 공자…….”

    익문은 허리를 벌떡 일으켰다. 왜 주언영이 여기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장인…….”

    번개가 하늘에 빗금을 냈다. 그와 동시에 아주 잠깐 섬뜩한 빛이 주언영의 얼굴에 닿았다가 사그라들었다.

    언영은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공자, 우선 내 말을, 내 말을 먼저 좀 들어 보게나!”

    “급한 겁니까?”

    “그, 그렇다네.”

    “저도 지금 좀 급합니다.”

    낮은 음성으로 답하며 언영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익문은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잠깐만!”

    “장인, 정말 죄송한데 이번만큼은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쭈욱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안 돼! 나도 다 이유가 있었네. 알잖나! 그리고 어차피 다 소용없었다고!”

    목린은 나날이 자라나는 중이었고, ‘혼인하기엔 아직 어리다’라는 핑계가 절대 먹히지 않을 날이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섬의 수백 명의 주민을 위해서 익문은 제 딸을 넘겨줘야 했지만, 아비로서의 절박함을 끝내 마음에서 도려낼 수는 없었다. 하여 오늘 혼례식 내내 여러 사람들 앞을 기웃거리며 목린의 신랑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익문이 조심스럽게 ‘자네에게 혼인 안 한 아들이 하나 있었지?’라고 얘기를 꺼내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모두 갑자기 당황하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표정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딸을 그런 무서운 곳에, 무서운 자에게 어떻게 시집보낼 수 있단 말인가. 주언영도 머리는 있으니 초족의 상황을 이해해 주긴 할 것이다. 익문이 절박하게 소리쳤고, 마침 언영 또한 참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네. 목린이를 우리 섬 사내에게 시집보내고 싶었네!”

    “목린이와 혼인하는 날을 더 앞당기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응?”

    “예?”

    두 사람이 동시에 당황했다.

    “아, 그 얘기 하러 온 게 아니었나?”

    익문이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장인, 조금 전에 뭐라고…….”

    “하하! 아무것도 아니네. 아무튼, 어, 혼인을 앞당기고 싶다고?”

    “장인, 분명 아까…….”

    “날씨가 너무 덥군! 허허!”

    콰콰쾅!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밖에서 바람을 못 이기고 나무 하나가 쓰러졌다.

    “크흠.”

    익문은 손부채질을 하던 오른손을 어색하게 내렸다. 언영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목현 형님도 짝을 만나셨고, 목린이를 위해 거의 4년을 기다렸습니다, 장인.”

    “벌써 그렇게 지났나? 부디 화내지 말고 듣게. 내가…… 보기엔 목린이는 여전히 너무 어리다네. 아직도 눈이 내린다고 신나서 달려 나가는 애를 어떻게 다 컸다고 남한테 보내겠어. 눈사람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영락없는 소녀인데…….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보진 못했습니다. 그 눈사람 안에 있었으니까요.”

    “그런 말을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로 할 필요는 없네.”

    “어떤 말을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익문은 고개를 저으며 대화를 이어나가길 포기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자네가 그…… 눈사람의 안에 있었다면, 그래도 목린이의 들뜬 목소리는 듣지 않았는가. 그러니 목린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엔 아직……. 아니, 한데 대체 눈사람에는 왜 숨어 있던 거야. 혼자서 그런 걸 대체 어떻게…….”

    가끔 번개가 하늘을 밝힌다고 해도 밤은 밤이었다. 어둠에 밝은 언영도 장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가까이해야 했다. 귀혈족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어둠 속에서 제게 다가오는 모습은 그 어떤 초족도 감당할 수 없었다.

    “장인.”

    “흐악! 미안하네. 기밀 정보라면 다신 묻지 않겠네! 그러니 제발 그 자리에 가만히 있게. 내가 생각을 좀 할 수 있게.”

    이 나이 먹고 이불에 오줌을 지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언영이 앞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다시 뒤로 빼고 나서야 익문은 호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눈이 오는 겨울에는 눈사람으로 위장하는 행동으로 다른 땅을 침략하나 보다 싶었다. 다시는 물어보지 말아야겠다.

    무시무시한 귀혈족이 침략을 하러 쳐들어온 날(아니다) 그들이 공격을 그만둔 유일한 이유는 족장의 아들인 언영이 목린을 보고 푹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그렇지 않다). 섬의 운명은 오로지 목린이에게 달려 있었고(오해다) 목린도, 익문도, 마을 주민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힘없는 초족을 지키기 위해 안타깝게도 목린이 언젠가 언영과 혼인하는 것은 기정사실화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인지라, 아무리 족장이라고 해도 그렇지 차마 제 입으로 혼인을 허락한다고 하기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익문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귀혈족의 눈에 밉보이지 않고, 섬을 지키면서, 사랑하는 목린이도 같이 보호할 수 있을까.

    “그러면 공자, 목린이한테 직접 말하고 허락을 받게. 목린이와 함께하는 혼인이 아닌가. 당연히 그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야지.”

    굉장히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일단 목린이를 향한 마음은 진심인 것 같았다. 목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익문이 안 된다고 하는 것보다 목린이 안 된다고 하는 게 더 잘 통할 테고. 익문은 아침에 목린이가 집에 돌아오면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언영의 제안을 거절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 방법도 한계가 있고 목린이를 계속 곤란하게 할 수는 없으니, 그동안에 익문은 다른 방책을 강구해 낼 계획이었다.

    “목린이에게요?”

    “그래.”

    너무 신나서 그대로 춤이라도 추지 않을까 싶었던 주언영은 의외로 평범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생각에 깊이 잠긴 듯 눈을 아래로 약간 내리깔았다. 극적인 표정이 담기지 않은 그의 얼굴은 평소와 너무나도 달라, 익문은 순간 숨을 쉬는 법도 잊고 그 무표정을 감상했다. 그렇다. ‘감상’했다는 표현을 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가만히 있을 때 그의 얼굴은 너무도 멀쩡했다.

    “대체 왜 저런 얼굴로 그런 이상한 웃음을…….”

    “예?”

    “아무것도 아니네. 그럼, 잘 가게!”

    언영은 인사를 마치고 빠르게 자리를 나섰다. 그가 완전히 종적을 감췄음을 안전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익문의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그가 기절하듯 다시 자리에 누웠다.

    * * *

    언영은 장인에게 얘기를 꺼내기 위해 더욱 일찍 자리를 뜨고 목린의 집으로 온 것이었다. 하여 그는 집으로 돌아올 목린을 보기 위해 바깥에 나왔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와 달리 빗방울은 점점 거세게 땅을 내려치다 못해 바닥에 가득 고였다. 어두컴컴해진 날씨 탓에 언영조차도 밖에 있는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데 목린이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영은 살짝 초조해졌다. 이 섬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그가 한 대만 치면 날아가게 생겼다. 바람에 목린이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조그만 목린이가 ‘꺄악, 언영 님, 도와주세요!’ 하면서 바람에 따라 휭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론, 비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친우의 거처에 잠시 머물고 올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니까 계획도 바뀌었겠지.

    하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며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

    언영은 등을 돌려 목린의 집을 흘겨보았다. 딸이 집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장인께서 알고 있을까. 하지만 끝내 모르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래도, 그가 직접 목린을 안전히 데리고 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침을 맞이하는 방법이었다.

    “목린아!”

    언영이 외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바람의 비명과 빗방울의 재롱뿐이었다.

    언영은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래야 눈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비가 험악하게 내렸다.

    단월도는 자연의 상태를 거의 그대로 보존한 섬이다. 하여 운치는 그 나름의 멋이 있었으나 자칫하여 발을 잘못 뻗거나 실수를 하면 날카로운 돌에 몸을 찧는 등의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암흑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는 더욱이.

    언영은 앞으로 발을 뻗었다. 그깟 거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집에 돌아오지 못해 떨고 있을 목린이가 더 걱정되었다.

    * * *

    이른 아침, 목린은 커다란 나뭇잎 우산을 쓰고 축제장을 나섰다. 포만감이 느껴지는 꽉 찬 배를 한 손으로 팍팍 두드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

    한밤중에 심하게 내려쳤던 폭우는 해님이 인사하자 얌전해졌다. 싱그러운 비 냄새를 맡으며 집으로 향했다. 적당히 흐르는 비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길가에 있는 꽃이나 나무, 돌 위에서 반짝거리는 물방울도 사랑스러웠다. 목린은 이슬을 품고 있는 예쁜 나팔꽃 하나를 꺾어 땋은 머리에 꽂았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발을 뻗었다.

    “어머나!”

    집 앞에 도착한 목린은 문 앞에 서 있는 언영을 보고 흠칫 놀랐다. 이미 그의 감당할 수 없이 우람한 덩치에는 약간 익숙해졌다 해도, 저리 고개를 푹 숙이고 암울하게 서 있는 모습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문을 완전히 다 가리고 서 있었다.

    “언영 님……?”

    “…….”

    목린은 손을 덜 떨기 위해 나뭇잎 우산의 줄기를 꽉 잡고 신중하게 다가갔다.

    “언영 님……. 어?”

    언영의 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 있었다. 단순히 새벽에 잠깐 나와 있었다고 이 지경이 될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심지어 가까이서 보니까 옷의 군데군데가 찢겨 있었다. 그 사이로 혈흔이 보였다. 몸의 절반을 두른 갑옷이 아니었다면 더 심했을 것이다.

    “목린아.”

    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완전히 다른 목소리, 다른 표정에 목린은 움찔 튕겨 오르려는 몸을 다잡았다. 가슴께에 주먹을 꽉 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태까지 그에게 했던 말 중에 가장 길었다.

    “언영 님,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왜…… 왜 비도 오는데 이렇게……. 산에서 구르기라도 하셨어요? 왜 이렇게 비를 많이 맞으셨어요? 아버지를 뵈러 오신 거예요? 아버지께서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나요?”

    “너는 안 맞은 거지?”

    “네?”

    언영의 진지한 목소리에 목린이 눈을 깜박거렸다. 누가 봐도 그의 상태가 더 심각하고 끔찍했는데 그는 오로지 그녀의 안위만을 묻고 있었다.

    “비 말이야.”

    “네, 저는 보다시피 우산이 있어서…….”

    “다행이다.”

    “언영 님…….”

    목린은 팔을 높게 뻗어 언영에게도 나뭇잎 우산을 씌워 주었다. 두 사람, 특히 한 쪽이 귀혈족 남자일 경우에 같이 쓰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우산이었다. 목린의 등이 젖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언영이 심각한 표정과 함께 커다란 손으로 목린의 등을 안아 끌어당겼다.

    “목린아…….”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목린의 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뜨거운 눈이 오롯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목린의 뺨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영이 앞으로 쓰러졌다.

    “언영 님!”

    언영의 머리가 목린의 어깨에 떨어지고 그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굽어졌다. 아담한 목린은 무너지는 장신의 남자를 버틸 수 없었다. 무게를 못 이기고 목린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익문이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다행히 의원의 집은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언영의 몸을 운반하는 데 시간이 얼마 들지 않았다. 목린, 목린이 소리를 지르기 전까지는 바깥 상황을 파악 못 했던 익문, 의원, 그리고 의원의 아들 덕복이 함께 힘을 모아 언영을 의원 집 침대로 옮겼다.

    처음엔 하나의 침상에 눕혔으나 철저히 초족 사람들의 몸집에 맞춰 만들어진 가구는 언영의 밑에서 매우 위태로웠다. 하여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붙고, 언영이 그 위를 비스듬하게 가로지르게 되었다. 일을 끝마친 네 명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목린은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족장님. 목린아.”

    어느새 덕복이 시원한 물을 길어와 목린 부녀에게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벌컥벌컥 그것을 급하게 들이켰다.

    “휴식이 많이 필요할 것 같군.”

    진찰을 마친 의원이 언영으로부터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목린이 놀라서 물었다.

    “네?”

    “뭘 그렇게 놀라? 결국 이자도 이렇게 생겼지만 사람이다.”

    ‘이자도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의원은 언영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이 나는지 언영의 얼굴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악몽을 꾸는 어린아이처럼 계속 뒤척이고 있었다.

    목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저 때문에 이렇게 되신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냐?”

    “밤새 비를 맞으신 것 같아요. 저를 찾아다니시느라.”

    “그게 왜 네 탓이냐, 목린아.”

    익문이 치고 들어와 말했다. 목린은 아버지의 말에 답을 못하고 의원을 향해 질문했다.

    “아저씨, 이렇게 크고 강한 사람도 당할 정도로 비가 위험한가요?”

    “솔직히 내가 보기엔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의원은 잠깐 언영의 맥을 다시 짚더니 혀를 끌었다.

    “보니까, 응? 정신이 영 맑지 않아요. 심란한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해.”

    “제가 사라졌던 거요?”

    “그걸 수도 있고. 더한 문제가 속내에 있었을 수도 있고.”

    말을 하다 말고 의원은 언영의 의식이 돌아왔는지 아닌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자고 있음을 확인한 뒤 안심하며 크게 내뱉었다.

    “물론 우리 쪽 입장에선 이 사람이 아파야 더 좋겠지만! 불쌍한 목린이.”

    “언영 님은 많이 무섭고 가끔 엄청 이기적으로 굴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목숨을 걸고 저를 구해 주기도 한 걸요.”

    목린이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연민과 동정에 휩싸인 의원과 아버지의 시선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녀가 목에 칼이 날아와 억지로 거짓말을 쥐어짜는 줄 알고 있었다. 뒤에서 방을 정리 중이던 덕복 또한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의원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우리 불쌍한 목린이. 이제 너무 무서워서 이자가 잘 때도 옹호해주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 그건 아니에요. 많이 무섭긴 해도…….”

    목린이 두 손을 저으면서까지 열렬히 부정하려 했으나 그다음 날아오는 발언에 다소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저번엔 위험하게 너를 들고 공중에서 들고 놀지 않았니?”

    “그건 맞지만…….”

    “눈사람 안에 숨어서 너를 기절시킨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벌써 잊은 거야?”

    목린은 답하지 못했다. 잊어버리기엔 너무도 생생한 기억이었다. 이때다 싶어 익문도 끼어들었다.

    “그리고 식인 물고기 틈에서 널 구해 준 건 구해 준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처음부터 너를 그쪽으로 데려가질 말았어야지.”

    “피 냄새가 나서 몰려든 거라고 했잖아요, 아버지.”

    “그러니까, 그 피가 어쩌다 나왔냐니까?”

    “언영 님이 코피를 흘리셨어요. 계속 말해도 믿지 않으시면서.”

    “저렇게 생긴 사람이 허약하게 코피를 흘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목린도 익문의 말이 타당하다고 보았지만 실제로 코피 흘리는 모습을 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믿지 못하겠지만 제 앞에서 두 번이나 흘리셨어요. 혹시 이번에 쓰러진 것도 코피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흠, 딱히 큰 지병은 발견되지 않던데. 아무튼 목린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난번엔…….”

    익문과 의원은 번갈아 가면서 언영이 목린 앞에서 벌였던 극악무도한 일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중에 상당수는 목린을 비롯한 초족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었고, 목린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기도 했다.

    목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동안 잊었던 사건까지 모여서 휘몰아치니 확실히 언영이 다시 무섭게 느껴졌다. 좀 괜찮다 싶다가도 또 바로 몰상식한 행동으로 기대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주언영이었다.

    의원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자가 없었다면 너를 우리 덕복이랑 맺어 주는 건데……. 에휴.”

    멀리서도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덕복과 목린의 눈이 마주쳤다. 덕복은 화들짝 놀라더니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목린 또한 의원을 마주 보며 얼른 말을 돌렸다.

    “저, 심란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죠.”

    “그래, 그래.”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심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인데…….”

    지금도 언영의 ‘하하하!’나 ‘흐흐흐…….’, ‘히히히힉’ 같은 웃음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그거야 모르는 법이지.”

    의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느냐는 투가 역력했다.

    “아무튼 무척이나 건강한 몸이니 알아서 깰 거다. 그만 신경 써도 돼.”

    * * *

    귀혈족의 무시무시한 주언영이 앓아누웠다는 소식은 단월도 섬 전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믿을 수가 없어 의원의 집 주변을 기웃거렸다. 지금도 집 밖에서 의원이 ‘믿기지 않겠지만 그자도 사람이고, 기절을 하오! 그러니 아픈 사람이 아니면 모두 물러서시오!’를 외치며 방문객들을 내쫓고 있었다.

    이틀째 언영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주민 한 명의 증언이 있었다. 가장 산에 가깝게 붙어사는 아주머니께서 한밤중에 “아으어으아윽! 악! 악! 아악!”하며 누가 굴러떨어지며 외치는 비명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날씨에 산에 올라가는 미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귀신인 줄 알고 해가 뜰 때까지 떨었다고 아주머니는 회상했다.

    그 날씨에 그 산에 올라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 산 위에서는 마을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

    목린은 고요히 자고 있는 언영을 내려다보았다.

    목린은 언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 외모에 자신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목린 역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뜻 그 사람이 예쁘다, 멋지다 생각한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을 때 갑자기 훅 끼쳐 들어오는 순간이 있었다.

    단순히 낭만적인 감정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본래 저마다 다양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친구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모습을 우연히 봤는데 그 모습이 뇌리에 오랫동안 눌러앉았다. 키우는 소를 쓰다듬는 마을 할아버지의 웃음이 너무나도 따뜻해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구경했다. 새로 과일을 땄는데 하나 먹어 보지 않겠냐고 내미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이 그리도 곱게 보였다.

    바로 전날까지는 그들을 보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이 햇살처럼 다가와 심장을 따뜻하게 다독여 주었다. 그러니 목린도 자신에게 하나쯤은, 적어도 하나쯤은 그런 특이한 아름다움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 언영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본 것뿐이고.

    하지만 그뿐이다.

    목린은 비슷한 경험으로 목현의 친우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아니, 그날의 감정을 정말로 ‘좋아했다’고 해도 괜찮을지 목린은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그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었다. 마을에서 그 사람이 가장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약간 마른 체격에 키가 큰 그는 예리한 얼굴을 갖고선 말이 없었다. 그가 지닌 신비로움은 목린이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원하는 그의 모습은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환상이 깨졌다. 그가 다른 여자와 가약을 맺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질투도 나지 않았다. 목린이 ‘좋아한’ 남자는 목린을 마찬가지로 좋아해 주고, 그녀와 혼인하고 싶어 하는 남자였다. 그러니 다른 여자의 것이 된 그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단월도 사람들은 단월도에서 태어나서 섬을 떠나지 않는다. 그 남자도 지금 버젓이 이 섬에 살고 있다. 혼례식에서도 얼굴을 봤고 저번 주에도 길에서 마주쳤다가 인사했다.

    몰래 따라다니며 얼굴을 구경했던 게 무색하게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목린이 지금 그 무엇보다도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여기 있어?”

    “네.”

    그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언영 또한 변할지도 모른다는 점.

    목린은 재빨리 몸을 틀었다. 덕복 오라버니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평소 작업할 때와 같이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언영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을에서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이답게 타고난 넓은 어깨가 돋보였다. 그가 언영을 못마땅한 듯 주시하다가 뜸 들이며 입술을 뗐다.

    “……목린아.”

    “네, 오라버니. 말씀하세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저 사람을, 저 사람의 부족을 받아들일 수 없어. 처음 쳐들어온 날은 충격 그 자체였지. 네가 없었다면 그쪽에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를 일이고.”

    그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네가 오로지 부족을 위해서, 네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건 아닐지.”

    목린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등 뒤로 땋은 머리가 귀엽게 딸랑거렸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언영 님은, 보이는 것과는 조금 면모가 있으셔요.”

    “그래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너는 이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겠지. 보이는 것과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냥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났을 거야.”

    “…….”

    목린은 말문이 막혔다. 덕복의 발언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니?”

    “……아니에요. 곧 갈게요.”

    “그래. 문만 닫고 나오면 돼.”

    “네. 안녕히 가세요, 덕복 오라버니.”

    덕복은 뭔가 할 말이 마저 있는 듯 망설이다가 결국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고 다시 목린과 언영만이 남았다. 어차피 고비는 넘겼으니 의원이 꾸준히 확인하러 올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익문이 그녀를 끌고 나오려 하지 않는 이상 방에 새로운 손님이 오진 않을 터였다.

    목린은 제 손에 올려져 있는 것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

    과거 언영이 선물해 주었던 그 창이다.

    일부러 이곳에 챙겨 온 건 아니다. 해가 지나면서 목린이 창을 갖고 노는 날은 줄어들었다. 이는 언영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어린 시절 취미였던 행위를 천천히 잊어 가는 성장 과정에 불과했다.

    비가 많이 왔고, 그래서 산에 놓은 창이 보관해 둔 그 자리에 잘 놓여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 때문에 부랴부랴 들고 내려온 것이다. 다행히 창은 멀쩡했다. 삐뚤빼뚤 새겨진 언영목린 또한 여전히 선명하다. 평범한 단월도 창이라면 이미 수년 전에 부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으으…….”

    그때 언영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잠잠하던 그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언영 님!”

    목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영 쪽으로 몸을 기댔다. 바닥으로 창이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언영은 눈을 뜨지 못하고 계속 고통스러운 신음만 내뱉었다. 그답지 않게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

    “언영 님, 정신이 드세요?”

    “목린아…….”

    언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힘이 없었다. 언제나 (다소 지나치게)빛나던 눈이 저렇게 변한 현실 때문에 목린은 가슴 한편이 아렸다. 그래서 따뜻한 목소리로 응했다.

    “네, 언영 님. 저 목린이에요.”

    그리고 언영의 손이 갑자기 날아와 목린의 허리를 휘감았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언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갑옷을 입든 안 입든 그의 가슴팍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목린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위에 눕혀졌다. 얇은 천으로 된 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그의 울퉁불퉁한 근육이 여실히 느껴졌다. 사내의 냄새가 목린의 후각을 가득 차지했다.

    “목린아.”

    “네, 네.”

    당황한 목린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어떡하지…….”

    “왜, 왜 그러세요. 한번 말씀해 보세요.”

    “아아…….”

    목린은 언영의 가슴팍에 파묻혀 있던 얼굴을 들었다. 말은 나름 멀쩡하게 하는데 낯빛은 여전히 영 좋지 않다. 여전히 여기가 꿈인지 아닌지 헤매고 있는 모양새였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나중에 기억이나 할지 의문이 들었다.

    목린의 손이 절로 뻗어졌다. 특별한 애정을 담고 움직이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다만 이전보다 더 까칠해진 그의 뺨이 거슬렸을 뿐이다.

    “목린아…….”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린의 여린 손목에 닿았다.

    “네, 네.”

    “내가 너한테…… 청혼을 해야 하거든.”

    언영의 뺨을 쓸던 손이 어색하게 멈췄다.

    “……네.”

    “그런데, 네가 싫다고 답할까 봐 겁나.”

    그렇게 말하고 언영은 끝에 힘없이 피식 웃었다. 잠결에 그냥 내뱉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듣기 괜찮았다.

    목린은 잠시 이해를 못 해 미간을 구겼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픈 거예요? 고작 그런 문제 하나로 심란했어요?”

    “고작이 아닌데. 목린이는…… 수줍음이 많으니까, 딱히 그러자고 답하지 않을 것 같아.”

    “그걸……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언영이 목린의 손바닥에 먼저 스스로 뺨을 비벼 왔다. 목린은 순간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는 이어서 그녀의 손에 입술을 묻었다. 그가 말을 할 때 입술이 움직였고 숨이 닿았고 목린은 손목이 떨리는 것을 겨우 견뎠다.

    “그냥 그럴 것 같아.”

    목린은 천천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색하게 손을 옆으로 빼냈다.

    “……아니에요. 저한테는 지금 혼인하나 다음 해에 혼인하나 별 차이 없는걸요. 왜 언영 님은 다른 때는 해맑다가 항상 이런 일이 닥치면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고 그래요.”

    “그건…….”

    “그건……?”

    언영이 웃기 시작하자 탄탄한 가슴이 들썩거렸다. 여전히 그는 몽롱한 꿈에 빠져 있었다. 그 위에 누워 있던 목린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웃음이 점차 사그라들고 언영의 핏기 없는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목린이가 너무 예뻐서…….”

    언영의 기다란 손가락이 목린의 허리를 살살 문질렀다.

    “목린이 처음 본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그렇게 귀엽고 예쁘게 생긴 애는 난생처음 봤어.”

    눈을 감은 그는 현재에 없었다. 추억에 되돌아가 처음 만났던 그날에 듬뿍 젖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랑에 빠진 사내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목린이 두려워하는 바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환상이 깨지지 않은 과거에 스며들어 평생 그곳에만 머무는 것.

    “……그러면 목린이가 안 예뻐지고 안 귀여워지면요?”

    “으응?”

    “제가 나이 먹고 늙으면…… 그럼 그때는 마음이 변하는 거예요?”

    언영은 낮게 웃었다. 목린은 심각한 지금 웃음을 터뜨리는 그가 얄미웠다. 아픈 사람이라 봐주려고 했는데 얼른 밀어내며 몸을 일으킬까 고민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달콤한 말을 속삭인 건.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오늘의 목린이가 어제의 목린이보다 귀엽고 내일의 목린이는 더 귀엽고……. 쭈글쭈글 할머니 된 목린이는 내가 보자마자 심장 멎을 정도로 귀엽겠지.”

    “…….”

    “뭐, 이미 그렇긴 하지만.”

    그가 이어서 첨언했다. 잠결에 나오는 웅얼거림에 불과했지만 가까이 있는 목린은 똑바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결이기에,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 꾸며져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기에 더욱 날것이었다.

    “나날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 사랑하게 될 거야. 우리의 추억이 가득한 얼굴인데 어떻게 점점 더 예뻐 보이지 않을 수 있겠어.”

    “…….”

    목린은 눈을 감았다.

    조금 전 그의 말을 음미하고, 또 음미했다.

    목린은 언영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지금 보이는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래를 예지하는 그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는 신이 아니기에.

    “……언영 님.”

    목린은 그의 품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허리를 감싼 그의 손에 몸이 데일 것 같았다.

    “그렇게 얼른 혼인하고 싶어요?”

    언영의 모든 것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영이라면, 아무리 당시엔 전부인 줄만 알았던 불타던 사랑이 전체 인생을 봤을 때 작은 불꽃에 불과했음을 나중에 깨닫더라도.

    ‘마음껏 들어줄게! 평생 발 바닥에 안 닿게 해 줄게!’

    ‘혼인하고 나면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가게 해 줄게.’

    ‘목린아. 나 따라 해 봐. 어깨랑 가슴을 제대로 펴고, 얼굴을 살짝 든 다음 크게 웃어. 하하하하!’

    ‘너의 특별한 날을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영광을 내주어서 고마워. 태어나 줘서 고마워.’

    열정적이고 아름다웠던 과거를 선물해 준 그녀를 끝까지 존중해 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설령 그 마음이 식었다고 해도, 이전과 다르다고 해도, 그 사랑과 관심을 더 예쁘고 더 귀여운 다른 누군가가 누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날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 사랑하게 될 거야.’

    언영은 함께하는 시간이 주는 그 성장과 추억, 그 존재 자체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점을 그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이렇게 함께하니까 얼마나 좋니, 하하하!’

    목린의 아버지는 자식들이랑 셋이서 함께 무언가를 같이하는 것을 유독 중시했다. 아주 작고 사소한 행위라도 두 남매와 함께하고자 했다. 목린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목현은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가 가장 후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목린을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충분한 추억을 쌓지 못한 것이라고.

    결국 사람은 혼자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이든, 증오든, 우정이든, 심지어는 무관심이든, 우리는 누군가와 접촉하고 닿으며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기억이 우리를 만들기 때문에.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다는 것. 결국 나중에 가서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건 그뿐이라.

    ‘어쩌면 아버지와 언영 님은 생각만큼 크게 다르진 않을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주언영의 경우엔 어떤 과거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목린은 여전히 그의 사랑을 영원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하나 그가 궁금했다. 어떤 삶이 그가 저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는지. 어떤 환경이 그를 이리도 적극적이고 몸소 나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이전엔 단순히 무서웠던 그의 행동이 이제 그녀의 호기심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이 정도로 그녀의 호기심을 촉발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목린은 알았다. 이런 궁금증은 오라버니의 친우를 향했던 풋사랑처럼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저 창에 새겨져 있는 언영과 목린의 이름처럼, 또렷하고 깊게 삶을 관통하며 계속 관심과 열정을 부풀릴 것이다.

    언영은 끝내 대답이 없었다. 다시 감긴 눈과 닫힌 입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심장만이 목린의 아래에서 쿵쿵 뛰었다.

    * * *

    나흘 뒤. 언영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다.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안색이 돌아온 언영이 의원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니,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던 의원은 맞은편에 있는 아들 덕복의 시선을 느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목린아, 내 곁에서 나를 계속 지켜 줬다면서!”

    이어서 언영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목린을 격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목린은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표정과 함께 작게 답했다.

    “아, 아니에요. 고생은 덕복 오라버니와 의원님께서 하셨지요.”

    이어서 언영이 바로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목린이 조금 더 빨랐다. 수줍은 목린의 뺨이 붉게 여물어 있었다.

    “저, 언영 님. 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뒤.

    “자아아아아앙이이이이이이이이인!”

    “으아아악!”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익문은 그대로 그것을 바지 위에 쏟아부었다. 젖은 바지를 붙들고 사방팔방 폴짝거리고 있는데 언영이 갑자기 나무 판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그의 뒤에선 목린이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 서 있었다.

    언영이 행복하게 웃으며 외쳤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목린이가 얼른 혼인하자고 합니다!”

    익문은 언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원래 믿을 수 없는 놈이지만 특히 이번엔 더욱 그랬다.

    말이 되는 소린가. 나흘 만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목린이가 수줍게 다가와선 혼인을 앞당기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물었다는 게. 저게 사실이라면 목린이 혼례식 때 익문은 친절히 허공에 엉덩이로 ‘주언영 사랑해’ 글씨를 쓸 것이다. 보나 마나 주언영 저 악귀 같은 놈이 우리 목린이를 몰아붙인 것이리라.

    “목린아. 아주 어지럽겠지만 솔직히 말해 보아라.”

    주변에서 언영이 빙글빙글 끊임없이 공중제비를 반복하며 방을 돌고 있었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저런다. 거의 칠척장신의 우람한 사내가 휙휙 돌아다니니 방에 바람이 불 정도였다. 익문의 턱에 달린 수염이 그에 맞춰 펄럭거렸다. 목린과 익문은 언영이 움직이는 궤도 안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채였다.

    목린은 부끄러운 탓에 고개를 못 들고 있었고, 이를 다른 의미로 해석한 익문은 회전 중인 언영이 듣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를 깔았다.

    “공자가 너를 협박하였느냐.”

    “아니에요. 빨리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어차피 할 혼인이라면 빨리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어요.”

    “목린아……!”

    당연히 아버지는 여식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익문은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목린의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리고 언영이 들을 수 없는 크기로 속삭였다.

    “미안하구나. 내가…… 우리 부족이 너무 약해서…….”

    “그런 말 마셔요, 아버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주름진 아버지의 손이 따뜻했다. 혼인을 앞당기자는 건 목린의 선택이었으나 아버지의 마음도 온전히 이해 가는 터라 그녀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덕복 오라버니의 말씀이 옳았다. 언영과 목린은 본래 엮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인제 와서 고려해 봤자 무의미할 뿐이었다. 중요한 건 눈앞에 벌어질 미래였고, 목린은 최소한 이번엔 자신이 직접 결정내리고 싶었다.

    주변을 계속 빙글빙글 돌던 언영이 이내 익문의 옆에 철퍼덕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목린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사랑이 뿜어지다 못해 넘쳐흐르는 눈을 목린은 차마 마주 보지 못해 바닥만 바라보며 떨었다. 언영의 입이 바보같이 헤벌쭉 벌어졌다.

    “흐흐흐, 정말 너무너무 예쁘다…….”

    익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언영은 이어서 무릎으로 기어가더니 목린을 팔 안에 가득 끌어안았다. 목린의 눈만 겨우 빼꼼 삐져나와 귀엽게 깜박거렸다. 언영은 목린의 머리에 제 볼을 비비적거리며 끔찍하게 좋아했다.

    “……그러면 지금 혼례식에 앞서 필요한 것을 한 번 논해 보도록 하지.”

    익문은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의복이 다르고, 사는 거처도 서로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하여 오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익문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목현의 혼례식에 참석한 언영은 다소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저희 혼례식도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몸만 오시면 됩니다.”

    “다르지 않다는 말을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없겠는가.”

    “그냥, 저희 쪽이 좀 더 시끄럽습니다.”

    “……그건 매번 그렇잖나.”

    “그렇죠.”

    “…….”

    익문은 눈을 감고 호흡을 정돈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다. 여기서 모든 걸 뒤집어엎을 수는 없었다.

    “……후, 나는, 혼례식은 여기서 했으면 좋겠네. 아예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될 텐데 혼례식이라도 목린이가 좀 마음 편한 곳에서 할 수 없겠는가. 그…… 온몸이 울퉁불퉁한 녀석들 사이에 껴서 혼례가 진행되는데 얼마나 무섭겠어. 우리 처지를 알잖나. 목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섭다고요?”

    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인, 혹시…… 혹시 저희가 무섭습니까?”

    아아, 이렇게 4년간의 오해가 해결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익문은 입술을 뻐끔거렸고, 언영의 눈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익문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매섭게 쏟아졌다.

    ‘저렇게 당연한 걸…… 심각하게 묻는 연유가 뭐지?’

    분명히 무슨 의도된 바가 있는 듯하다. 그러니 저리 당연한 것을 묻는 게 아니겠나. 하지만 앞서 나왔던 대화의 문맥을 다시 되새겨 봐도 도저히 어떤 노림수가 담겼는지 판단 내리기 힘들다.

    “아, 아니. 물론 아니지.”

    “휴…….”

    언영은 안도했다.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 목린을 겁주는 것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언영이 목린을 향해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밀며 미소 지었고, 겁먹은 목린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익문은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 내가 말한 무섭다는 것은…… 낯선 환경 얘기였네.”

    “하지만 목린이가…… 혼례식에 관해서 특별히 부탁한 게 있고, 그걸 저희 마을에서 이뤄 줄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언영의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확 붉어졌다. 목린과 가까이 붙어 있던 몸을 어색하게 떼어냈다. 그가 듬직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부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이번엔 반대로 익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목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밤에 하는 일 말이에요?”

    “어?”

    언영이 크게 당황했다. 마치 여기서 목린이 그 얘기를 꺼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목린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익문의 반응도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목린이 혼례식 밤에 먹는 과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매우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 목린이가 정말 좋아하긴 하지.”

    “예……?”

    언영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문제는 둘이서 정하게. 그쪽에서 혼례식을 진행한다면 평소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겠구나, 목린아.”

    “평소와 색다른 경험이라니……?”

    언영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익문과 목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목린이가 평소에…… 대체 뭘…….”

    “언영 님께서 저를 위해 준비하시는 거라고 하니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목린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말했다. 그녀의 뒤에 후광이 보여서 언영은 눈을 찡그려야만 했다. 그가 감격에 차올랐다.

    “목린아…….”

    언영은 다시 목린을 얼싸안았다. 한쪽 팔로 목린의 허리를 휘감고 나머지 손으로 조그만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거의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한 채 언영이 굳건하게 말했다.

    “내가 정말 열심히 할게. 지치지 않고 너를 만족시켜 줄게.”

    “언영 님…….”

    “네가 평소에 뭘 했든, 예전에 누구랑 했든 나는 상관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과 너와 내가 함께 만들어 갈 아름다운 미래야. 오히려 과거 경험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더 밤에 행복하게 해 줄게.”

    “정말 그 정도예요?”

    귀혈족의 식문화도 굉장한가 봐. 더 다양한 음식을 먹을 생각에 목린의 마음이 순수한 기대로 꽉 찼다. 언영은 대답 대신 그녀의 반듯한 이마와 귀여운 콧방울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하아…….”

    익문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 * *

    혼례 준비를 위해 제 마을로 돌아간 언영은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지난 뒤 단월도로 돌아왔다. 여태까지 섬에 타고 왔던 배는 지금 보이는 모습에 비하면 장난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바다를 완전히 압도하는 이 새로운 배는 단월도 섬 주민을 모두 실어 나를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고, 그런 만큼 초족 사람들에겐 공포 그 자체로 와닿았다.

    수십 명의 무사가 제 덩치만 한 보따리를 들고 끊임없이 배에서 내렸다. 모두 혼례식을 기념하여 귀혈족이 보내는 선물이었다. 평생을 섬 주민들이 놀고먹어도 될 정도의 양이 전해졌으나 초족 그 누구의 표정도 편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목린이를 팔아먹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흐아앙-”

    몸집이 거대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눈앞에 돌아다니니 결국 아기 하나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부모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목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긴 나왔는데 이대로 귀혈족 귀에 거슬렸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쉬이, 쉬이. 착하지, 응?”

    “집에 돌아가면 맛난 거 줄게. 지금 집으로 갈까?”

    부부가 결국 집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튼 그때였다.

    “나만큼 아기를 잘 달래는 사람이 없지.”

    귀혈족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아이의 앞에 거대한 그늘을 만들었다. 초족 부부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여인은 아이의 아버지와 키가 비슷했지만 입고 있는 갑옷과 근육 덕에 옆으로 더 넓었다.

    머리카락이 목 중간까지 오는 그 여인은 매우 비장한 표정으로 한쪽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부부는 긴장했다. 그들이 저 손에 맞는 건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안 된다.

    “안 돼!”

    “자, 우리 모두 어깨를 펴고! 드넓은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저 높은 강산 위 용의 아가리! 다 같이 힘을 합쳐 찢어 버리자!”

    여인의 웅장한 노래가 끝났다. 그녀는 뿌듯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기가 더 크게 오열했다.

    “어, 어……? 왜 안 웃지?”

    여인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당황했다. 보통 이렇게 하면 귀혈족 아기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배다인. 뭐 하는 거야.”

    “어, 주언영.”

    아이의 부모는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이번에 다가온 자는 다름 아닌, 목린을 약탈한 것이나 다름없는 귀혈족의 차기 족장 주언영이었다.

    과연 우두머리의 피가 흐르는 자답게 이 수많은 무사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신장을 지녔다. 그리고 높게 뻗은 키와 단단한 근육만이 그의 특이점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이 웃음기가 죽어 버린 얼굴은 얼마 전 지나가 버린 겨울도 다시 불러일으킬 만큼 매서웠다.

    그렇게 초족 부부가 겁에 질려 언영의 생김새를 심각하게 판단하는 동안, 다인이라고 불린 귀혈족 여인은 장난스럽게 언영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때렸다. 말이 장난스럽지, 초족이 맞았다면 바로 뼈가 부러졌을 힘이었다.

    “봐라. 내 노래를 듣고도 우는 아기는 처음이야.”

    언영은 울고 있는 아기를 무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다인이 머리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너무 감동하여서 우는 건가?”

    “…….”

    한편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목린이와 후에 가질 아기 생각으로 언영의 머릿속이 가득 찼다.

    목린이와의 아이는 그냥 적당히…… 15명 정도면 딱 맞으리라. 언영은 천천히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이를 갖고도 팔팔하게 움직이는 귀혈족 여인들을 생각했을 때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그의 아이를 배에 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봐 주는 목린이. 그와 함께 만든 15명의 아이들에 둘러싸여 기뻐하는 목린이. 그의 품에 안겨선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하는 목린이. 밤에 그가 몸을 쓰다듬어 주며 ‘우리 열여섯째도 만들까?’ 묻자 그의 품 안에서 수줍게 얼굴 붉히며 끄덕이는 목린이.

    목린이와의 행복한 혼인 생활을 상상하니 가슴도 벅차오르고 사타구니도 벅차오르고 코피 또한 벅차오르려 했다. 언영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호리병 중에 하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말 절박합니다, 스승님!’

    ‘허허허허, 언영이 왔누? 우리 강아지.’

    ‘코피를 멈추는 약이 필요합니다!’

    ‘허허허허.’

    얼마 전 언영은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어 예전 스승의 앞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빌었다. 일 년 내내 겨울인 곳이었다. 언영의 어깨에 하얀 언덕이 쌓였다.

    목린보다도 작은 덩치의 마른 할아버지는 언영을 보고 수염을 쓸며 인자하게 웃었다. 창고에 곧장 뽀르르 들어가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드는가 싶더니 머지않아 큰 상자를 번쩍 들고 나타났다.

    ‘나올 것 같다 싶으면 이걸 얼른 마시거라. 허허허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언영은 바닥에 계속 머리를 박으며 감사를 표했다. 스승은 한결같은 미소를 유지했다.

    ‘허허허허.’

    ‘하하하하!’

    ‘허허허허.’

    ‘하하하하!’

    그리하여 현재 언영의 허리춤에는 호리병 10개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혼례식이 다가오는 지금 목린이 살짝 웃어만 줘도 바로 코가 반응을 보일 것 같아서 미리 대비해 놓은 것이다. 언영은 이어서 스승과 있었던 그다음 대화를 회상했다.

    ‘평생 함께하고픈 여인을 만났습니다, 스승님. 그래서 말인데 스승님의 충고가 필요합니다.’

    ‘허허허허. 쭉 홀몸이었던 내게 무슨 충고를 들으려고. 허허허허.’

    ‘하지만 스승님 말씀은 틀린 게 없지 않습니까.’

    ‘허허허허. 뭐 굳이 원한다면……. 난 우리 강아지가 잘하리라고 믿는다만, 허허허허…….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인자하던 스승의 미소가 단번에 실종되었다.

    ‘네 멋대로 몰아붙인 건 아니겠지.’

    ‘예! 목린이가 먼저 혼인을 앞당기자고 하였습니다.’

    언영이 위풍당당하게 답했다.

    ‘근데 왜 나는 다 네가 저질렀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수줍어했을 뿐, 싫어하진 않았습니다!’

    ‘흐음…….’

    스승은 여전히 언영의 말을 믿지 못하는 낯빛이었으나 추궁을 그만두고 넘어갔다.

    ‘허허허허, 우리 강아지.’

    ‘하하하하.’

    ‘축하한다. 언제 한번 데리고 올라오너라. 허허허허.’

    ‘예, 하하하하.’

    한편, 회상 장면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변하는 언영의 다양한 표정을 구경하던 아기가 집중하느라 서서히 눈물을 줄여 나갔다. 다인이 크게 외쳤다.

    “어, 아기가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다인의 눈이 질투로 이글거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서 있는 언영을 잽싸게 주먹을 쥐고 노려보았다.

    “어떻게 한 거냐, 주언영!”

    언영이 거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머지않아 나도 애 아빠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아이가 내게 친밀감을 느낀 게 아니겠냐.”

    아니었다.

    “애 울음 그치기는 내가 제일 잘했는데, 나쁜 놈! 죽어라!”

    다인이 갑자기 도끼를 꺼내 들고 언영의 머리를 내려칠 자세를 취했다. 초족 부모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죽여 봐라. 죽여 봐. 어디 한번 해 봐. 하하하!”

    언영은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요령 있게 촐랑거리며 공격을 피했다. 여인은 씩씩거리며 초야 전에 고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떵떵거렸다. 애 아빠 평생 못 되게 해 주겠다 이를 갈고 말했다. 물론 귀혈족의 눈에는 다인이 허술하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고 이 모든 게 장난임이 보였지만, 초족에게는 전쟁이었다. 부부는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

    * * *

    한편 목린은 이제 막 초가집을 나서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소박한 짐 보따리와 언영이 준 창을 들고 익문과 함께 나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옆집에 있던 덕복이 달려왔다.

    “목린아.”

    “덕복 오라버니, 안녕하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목린은 머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덕복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종종 섬에 놀러 오는 거지?”

    “기회만 된다면 꼭 올게요.”

    “그래도 많이 아쉽다.”

    옆에서 익문이 마치 그의 말에 동의하듯 푹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성숙하고 사람 좋은 덕복이 사위로서 탐이 났다.

    “목린아.”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이번엔 오라버니인 목현이었다. 피로가 가득 쌓인 얼굴로 나타난 그는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목린의 앞에 당도했다. 다리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푸른 삼베가 시원하게 펄럭거렸다.

    “네, 오라버니? 어어?”

    목현은 목린의 손목을 쥐고 그녀를 숲속으로 잡아끌었다. 덕복도 익문도 그의 완강한 태도를 처음엔 막으려 했으나 어딘가 심히 비틀어진 목현의 표정이 그들을 주춤거리게 했다. 목린은 결국 두 남자에게 기다리라 눈짓을 해 보였다. 짐을 잠시 덕복에게 쥐여 주고 오라버니와 발걸음을 맞췄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상쾌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서 새가 지저귀고, 보들보들한 흙과 잎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오라버니, 아파요…….”

    “목린아. 잘 들어라.”

    목현은 다소 깊숙한 곳에 다다르고 나서야 목린을 놓아주었다. 목린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오라비를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그는 각오를 다지듯 피로가 쌓인 얼굴을 한 손으로 거칠게 쓸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날이 갈수록 오라버니는 그녀와 멀어져 갔다. 그의 지친 얼굴의 기반에 응축된 저 분노는 대체 어디서 기인한 걸까. 과연 그녀에게 감히 그것을 물어볼 자격이 있을까.

    목린은 남의 일에 깊숙이 파고드는 말을 먼저 꺼내기 늘 어려워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랬다. 혹시라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어 미리 거리를 두었다. 피가 섞인 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이 오라버니가 힘을 기르마.”

    “네?”

    “힘을 기르겠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렴. 언젠가 꼭 구하러 가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라버니? 무슨 이상한 일을 꾸미시는 건 아니죠?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구하다뇨. 저는 끌려가는 게 아니라 혼인하러 가는 거예요.”

    “아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그쪽에서 너를 먼저 버리는 것도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니.”

    목린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주언영의 눈엔 네가 처음에 특별해 보였겠지. 그쪽 사람들과 우리는 생김새가 퍽 다르지 않느냐. 원래 사내들은 가지지 못해 본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크단다.”

    무서워하지 않는 목린을 보고 있으니 목현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막무가내로, 멋대로 몰아붙인 놈이니 너를 향한 마음도 그렇게 멋대로 식겠지. 그런 가벼운 놈이다.”

    “오라버니!”

    목현은 목린의 두 어깨를 억세게 쥐고 제게 억지로 집중하게 했다. 그의 지친 눈에 핏줄이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앉아 있었다.

    “막상 혼인을 하고 널 계속 취하다 보면 너를 향한 주언영의 관심은 서서히 식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 돌아와서…….”

    목현은 입을 갑자기 다물었다.

    그의 누이가 울고 있었다. 머리에 물을 끼얹은 양 정신이 돌아왔다.

    “목린아.”

    목현은 목린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이 굳어서 멈췄다.

    “어디까지 가나 조용히 들어보려 했는데, 안 되겠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영이 큼지막한 몸을 나무에 기댄 상태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남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목린은 뒷걸음질 치며 자연스럽게 목현에게 거리를 두었다.

    “언영 님!”

    “주언영.”

    목현은 자신의 매부가 될 자의 이름을 짓씹듯 내뱉었다.

    언영은 나무에 기대고 있던 긴 몸을 바로 세우며 다가왔다. 긴 다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하나뿐인 누이에게 지아비의 마음이 식을 테니 기다리라니, 못 하는 말이 없으십니다.”

    “…….”

    “저를 부부 사이의 기본적인 도리조차 지키지 않는 놈으로 보셨다는 점에서 울분을 삭이기 힘듭니다.”

    다른 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우둔한 척 미소 지으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 일만은 안 됐다. 언영이 눈에서 노여움을 뿌리며 씹어뱉었다.

    “감히 저의 4년을 그딴 식으로 보지 마십시오.”

    목현과 언영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사람 모두 눈꺼풀을 닫지 않았다.

    “형님, 인간이 야망을 갖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소인에겐 감히 형님의 사정을 물어볼 자격이 없겠지요.”

    잠시 뒤 언영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하나 이상한 눈 갖고 정신 똑바로 차린 놈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형님께서도 조금 위험하십니다.”

    “……목린아. 누군가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섬에 남아야겠지.”

    목현은 여전히 언영을 쏘아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목린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 형제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오라버니…….”

    “늦겠어.”

    언영이 그리 말하며 목린의 손을 쥐고 잡아끌었다. 목현은 언영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목린도 언영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목현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속절없이 끌려가면서도 틈틈이 뒤돌아 목현을 살폈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목현은 그녀가 알던 친근한 오라버니와는 어느새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고, 언영은 무엇을, 어떻게 다 파악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언영 님.”

    목현이 이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숲을 빠져나가면서 언영은 한 번도 목린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빨랐다. 목린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언영의 옆모습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언영 님. 저, 괜찮으세요?”

    “지금이라도 말해.”

    언영이 참아왔던 것을 부어내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목린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목린도 숨을 죽이고 얼굴을 높이 들었다.

    바람이 그들 사이를 타고 빠르게 지나갔다.

    언영의 또렷한 눈에 안타까움이 사무쳤다.

    “여기까지 온 과정에 네가 싫어한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기서 말해. 내가 멋대로 몰아붙인 거 있으면 말해. 지금 당장이라도 네가 원한다면 그냥 나 혼자 떠날 테니까.”

    멀거니 듣고 있던 목린은 그의 말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입을 연다면 곧바로 오라버니 얘기가 나오리라 짐작하던 차다. 그러나 언영의 뒤에 줄지어 서 있는 푸른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러다 깨달았다.

    ‘막무가내로, 멋대로 몰아붙인 놈이니 너를 향한 마음도 그렇게 멋대로 식겠지.’

    언영은 바로 전에 오라버니가 했던 말에 괴로워하다가 끝내 터진 것이었다.

    “내가 착각하고 있던 게 있다면 전부 말해 줘.”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뱉었다.

    목린은 그 점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녀는 목현의 그 말을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그 말이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마치 적어도 그 문제에 관해선, 오라버니보단 언영을 더 신뢰하기라도 한 것처럼.

    목린은 몇 번 용기 내 입술을 달싹거렸다. 언영의 눈이 그 모습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것을 보니 더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끝내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녀의 정수리는 언영의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고 나면…… 돌아오지 않으실 거예요?”

    언영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내심 그런 거 없다고 목린이 바로 대답하길 기대했던 탓이다. 그 외의 다른 질문을 던진다는 건 아무래도, 목린의 속내에 켕기는 게 있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게 더 옳으니까.

    “네가 싫다고 하면 안 와.”

    잽싸게 표정을 갈무리고 언영이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목린이 아무 대답 없이 빤히 올려보기만 하자 결국 눈을 옆으로 흘기며 자신 없게 덧붙였다.

    “……거짓말이고 몇 번 몰래 구경 오긴 할 것 같아. 하지만 눈에 띄진 않을게.”

    목린은 계속 말이 없었다. 언영은 점점 더 당혹스러워했다.

    그리고 당혹은 슬픔으로, 슬픔은 체념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어색한 침묵이 다소 오랜 시간 언영을 짓눌렀을 때, 그리고 결국 그가 참지 못할 정도로 그 무게가 불어났을 때.

    언영은 넓은 등을 어색하게 돌렸다.

    “그러면…… 나는 이만 갈게. 우리가 가져온 패물은 그냥 갖고 있어. 굳이 혼례 때문이 아니어도, 초족에게 좋은 걸 나눠 주는 것 정도는 그저 교류를 목적으로 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발을 바닥에서 떼질 못하겠는지 여러 번 머뭇거렸다. 그래도 마침내 끈질긴 시간이 지난 끝에 겨우 한 걸음 멀어졌을까.

    목린이 얼른 몸을 뻗어 언영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고작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언영의 거대한 몸이 끌려가듯 돌아갔다. 목린이 고개를 꺾듯 위로 올리고, 두 사람의 맑은 눈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런 거 없어요.”

    목린이 말했다.

    “몰아붙이신 거…… 없어요.”

    “사실이야?”

    “네.”

    거짓말이다.

    “그러면 후회하지 않겠어, 나랑 혼인하는 거?”

    새끼손가락이 잡힌 언영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이내 반대로 목린의 손을 뜨겁게 감쌌다. 그의 상냥한 체온을 느끼며 목린은 작게 속삭였다.

    “……모르겠어요.”

    목린은 그녀의 대답에 언영의 표정이 살짝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힘을 놓았고 목린의 손이 해방되었다.

    하나 그 또한 지금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게 아주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녀가 이렇게 먼저 나서서 부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많은 변화에 의해서 벌어진 일인지. 이 또한 그가 그녀를 크게 바꿨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아마 앞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더욱 바꿀 수 있으리라는 것을.

    목린은 손이 자유로워지자 언영에게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뻗었다.

    당연히 언영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목린을 품에 뜨겁게 안아 들었다.

    한편 사람들은 목린과 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수많은 선물 운반을 다 끝내고, 귀혈족 무사들이 배 주변에 둘러싸여 언영을 눈으로 찾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고픈 그들은 모두 현재 다소 예민한 상황이었다. 초족 사람들은 갈수록 험악해지는 귀혈족의 안색을 관찰하며 눈치를 봤다.

    “저쪽에 있다!”

    무사 하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걸걸하게 외쳤다. 마침 근처에 서서 목린의 보따리를 쓰다듬고 있던 익문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단월도의 큰 면적을 차지하는 낮은 산에는 집이 모여 있는 마을을 전부 내다볼 수 있는, 툭 튀어나온 아슬아슬한 절벽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현재 그곳의 가장 끝에 언영이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그는 목린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끼워 넣고 그녀를 절벽 밖으로 들어 올렸다. 마치 그녀를 과시하면서도 찬양하는 듯한 자세였다. 목린의 발이 아무것도 밟히지 않는 공중에서 대롱거렸다.

    “목린아!”

    섬 전체에 언영의 들뜬 외침이 귀를 찌를 정도로 울렸다.

    언영은 귀혈족에겐 가장 명예로운 방법으로 목린에게 청혼했다.

    “내 아이를 낳아 줘!”

    내 아이를 낳아 줘- 아이를 낳아 줘- 낳아 줘- 낳아 줘-

    언영의 고백이 메아리쳤다.

    아래에서 귀혈족 사람들이 하늘에 무기를 던지며 환호했다. 바닷물이 떨릴 정도로 우렁찬 함성이었다. 초족 사람들 중 허약한 노인 몇몇이 그대로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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