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나무의 우듬지가 햇빛을 한가득 받았다. 맑고 따사로운 계절 속에 온풍이 함께 어우러져 최고의 대낮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런 나날에 혼인을 맺은 행운의 신부가 바로 지금 공터에 앉아 저보다 어린 여자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소녀들이 오늘의 주인공에게 연이어 재잘거렸다.
“선화 언니, 언니. 자세히 말해 줘.”
선화는 어제 무리 중에서 첫 번째로 시집을 간 여인이 되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두세 살 어린 애들과도 잘 어울리던 선화는 갑자기 자신은 이제 이 꼬맹이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훨씬 성숙한 옷을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나타났다.
“하지만 딱히 해 줄 말이 없는걸. 그것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짧게 끝났단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에 가장 말투가 험악하기 짝이 없던 소녀였단 사실을 돌이켜봤을 때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짓이었지만, 아직 미혼인 소녀들에겐 이런 엉성한 변화마저도 뭔가 대단해 보였다. 둘러앉은 소녀들 모두 입을 헤벌쭉 벌리고 선화를 구경했다. 선화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서툴게 입에 바른 연지가 돋보였다.
초족에게 혼인 후의 ‘초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몸을 섞는 행위는 단순히 후손을 얻기 위함인 것. 그 이상의 가치가 없는 행동에 빠지는 것은 곧 타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초족 사람들은 굳게 믿었다.
하여 부부는 어두운 방에 들어가 눈 깜박할 사이에 교합을 마쳤다. 상대의 몸을 보고 이상한 생각으로 번지지 않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행했고, 정말 삽입과 파정 두 단계만 거치고 끝났다. 사람마다 결과가 다양했지만 가장 빠른 경우 2초 만에 끝내고 나온 적도 있었다.
집에서 부부는 정말 아이를 갖기 위한 필수적인 삽입만 했고, 개인의 공간을 중요시하여 잠을 자는 방도 따로 가졌다.
그토록 추악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니 초족의 주민들은 일단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교접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만큼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없었다. 징그러워하고 몸서리를 치면서도 끝내 하나라도 더 듣고자 했다.
한 소녀가 몸통을 앞으로 숙이고 은밀히 입술을 뗐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과하게 떠돌아 어느새 진실인 양 자리 잡은 소문 중 하나를 꺼냈다.
“듣자 하니 육지 사람들은 그 짓을 밤새 한다더군요.”
선화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그런 망측한 게 있나! 염병, 숨이 내 목에 닿는데, 어찌나 기분이 나쁘던지. 그런 짓을 밤새 하느니 니미럴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릴…….”
초족에서 결혼은 주로 사랑이 아닌 두 가정 사이의 유대를 목적으로 이뤄졌다. 선화에겐 남편을 향한 각별한 애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도 못 참고 평소의 그 걸걸한 말투를 되찾고 외치던 선화의 목소리가 이내 힘을 잃고 잠잠해졌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오른쪽을 어색하게 훑었다.
“…….”
아까부터 얼굴이 창백해진 목린이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제 치마를 구기고 있었다. 선화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한 나머지 소녀들도 뒤늦게 자기들의 실수를 깨닫고 허둥거렸다.
목린의 양쪽에 앉은 소녀들은 그녀의 손을 각각 하나씩 쥐고 쓰다듬으며 달래느라 바빴고, 나머지 애들도 엉금엉금 기어와 목린에게 끊임없이 긍정적인 말을 던졌다. 하지만 시무룩해진 목린의 얼굴은 낫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목린아. 물론 괜찮은 귀혈족도 있을 거야.”
“그래, 그렇고말고.”
“그 족장의 아들이라는 자는 아닌 것 같지만…….”
“얘! 조용히 해!”
가장 눈치가 빠른 아이가 잽싸게 선화에게 물으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언니, 듣던 대로 많이 아팠어?”
“아, 아니. 솔직히 말해선 들어온 줄도 몰랐어.”
“그렇다면 밤새 생각만큼 힘들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언니? 그렇대, 목린아…….”
친구들이 어깨를 두들겨 주며 달랬다. 목린에겐 그들의 표정이 익숙했다. 연민이 아래에 깔린 걱정. 지난 두 해 동안 질리도록 익히 봐 온 얼굴이었다.
분명 진실한 위로일 터이지만 목린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절감했다.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 그래! 목린아. 내일 만나자.”
“목린아, 조심히 가!”
“내일 봐!”
“응, 얘들아. 고마워…….”
목린은 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낯빛은 이미 굳이 눈에 담지 않아도 쉬이 그려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그 표정을 보고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는 했지만, 어차피 바뀌지 않을 미래를 깨닫게 된 후로부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목린은 터벅터벅 힘없이 돌길을 걸어갔다. 축 늘어진 팔에 생기가 없었다. 집이 모여 있는 마을 아래가 아니라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진 산 위로 방향을 바꾸었다.
울창한 숲의 냄새가 목린을 상냥하게 환영했다. 곰살궂은 바람 아저씨는 목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짓궂은 햇빛 언니는 목린의 얼굴 위로 지나치게 내리쬐었지만, 그마저도 달가웠다. 목린은 계속 위로 올라갔다. 나무에서 재롱을 부리는 다람쥐들이 눈을 부릅뜨고 목린을 신기하게 구경했다.
지난번 익문의 탄생일에, 어미인 월진하고 군사 여럿과 함께 언영은 배에 가득 호화로운 선물을 담고 찾아왔다.
‘이미 가족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하하!’
월진이 팔짱을 끼고 등을 꺾으며 가가대소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이어서 옆에 서 있는 언영이나 무사들도 똑같이 그 행동을 따라 했는데 초족 주민들은 그 모습을 보고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한편 정작 선물을 받은 목현이나 익문은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준 패물들은 감히 초족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귀한 것들로, 우리에겐 이런 것을 쉬이 구할 힘이 있으니 반항하지 말고 딸을 내놓으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졌다.
언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빠져 평소처럼 섬을 드나들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꾸준히 목린만을 위한 서간을 보냈다. 새가 날아와 전해 주고 떠났다. 물론 목린에게 보낸다고는 했지만, 제일 먼저 아버지 익문이 이상한 내용이 없는지 확인하고 그제야 딸에게 마지못해 내밀었다.
‘엄청난 악필이군.’
‘그래도 열심히, 자주 쓰잖아요.’
‘목린아, 설마 이놈을 두둔하는 것이냐!’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아버지…….’
‘이놈은 야만인이야. 잊지 말아라! 우리가 조금만 강했어도 그런 놈에게 널 주진 않았을 거다……!’
서간의 절반은 사랑한다는 얘기, 그리고 나머지는 언영의 일과 얘기였다. 목린으로서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목록의 나열이었고 익문은 그것을 읽을 때마다 끔찍하다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얼른 보고 싶다고, 매일 안고 뽀뽀할 수 있게 하루라도 빨리 혼인하고 싶다는 부분을 읽을 때면 익문의 눈에 화염이 튀었다.
내심 바빠진다는 것을 빌미로 목린을 향한 언영의 관심이 식기를 바랐던 익문에게, 매번 날아오는 서간은 고통의 연속에 불과했다. 특히 목린의 탄생일 또한 내일로 다가온 지금, 다시 한번 언영을 비롯한 귀혈족 이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에 그는 요즘 자주 몸서리를 쳤다. 그자들이 오지 않을 리 없었다.
목린 또한 언영이 무서웠다. 하지만 예전만큼 싫어하지는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에게 감사의 의미로 선물 받은 창을 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언영이 준 철로 된 창은 산 높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정도 거리만큼 올라왔을 때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로 보이는 갈참나무 아래, 이곳이 목린의 비밀 장소였다. 언제부터 이곳을 신비스러운 혼자만의 공간으로 썼느냐 묻는다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기에 답할 수 없었다.
옛날에 빨빨거리며 이곳저곳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목린은 작은 굴을 파 놓고 그 안에 물건을 넣어 놓고 놀았다. 길에서 우연히 주운 구슬, 깨진 석경(거울) 조각, 도토리 몇 개 등등. 언제 숨겨 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들이 쌓여 지금의 추억을 만들었다. 오늘도 산에 오른 목린은 자리에 고이 누워 있는 창을 집어 들었다. 창은 차마 굴에 넣기엔 너무나도 길었다.
“…….”
삐뚤빼뚤한 ‘언영목린’을 한 번 손으로 쓸었다. 지난번에 목린이 새로 파내서 ‘몽린’이었던 제 이름을 고쳐 적었다.
언영이 준 창은 부담스러운 선물이었다. 이전에 목린이 쓰던 것은 대나무를 대충 깎은 것으로, 최대한 창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 본 것이지, 실제 전투에서는 쓰일 수 없는 쓸모없는 물품이었다. 하여 창을 연습할 때도 목린은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니 얼마나 바른 자세로 꼼꼼히 반복하느냐는 별반 중요하지 않으리라 보았던 것이다.
하나 제대로 된 무기를 손에 쥐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잘못 연습했다간 안 좋은 습관이 몸에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좋은 선생님을 찾아보자니, 무예를 폄하하는 분위기인 단월도에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가 공중에서 울었다.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잎사귀가 흔들리는 노래가 높다란 하늘에 메아리쳤다.
마음이 금방 차분해졌다. 연습하기에 좋은 계절, 늦여름이었다. 목린은 창을 멀리 날리기 준비하는 자세로 손을 뒤로 당겼다.
그때 뭔가 익숙한, 청아한 냄새가 코끝을 갉작대고 놀았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안착했다. 뒤에서 다가온 손이 목린의 허리를 안아 제자리에 맞게 돌렸다. 크고 골격이 두드러지는 그 손은 목린의 복부 전체를 거의 감쌀 만큼 길었다.
“더 자신 있게.”
그의 나머지 손이 목린의 팔꿈치를 더 뒤로 당겼다. 그동안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목린이 뒤늦게 살짝 허덕거리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지럼 태웠다. 기쁨에 젖은 목소리가 듣기 좋은 너털웃음을 뽑아내며 그녀의 얼굴에 단단히 밀착했다.
“옳지. 이제 던져!”
그 상황에서 창을 제대로 던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상하게 뻗어 나간 손은 힘을 충분히 내지 못했고, 그래서 목린은 평소 실력보다 훨씬 형편없이 창을 던졌다. 두 걸음 길이도 못 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고꾸라진 창은 목린의 자신감처럼 휘청거리며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잘했어!”
“아!”
그래도 언영은 반색하며 양손으로 뒤에서 목린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신나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사이 언영의 키가 더 커지고 힘도 늘어났기에 목린은 이전보다 더 높게 떠올랐다. 목린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상대적으로 훨씬 아담한 발을 휘저었다. 언영은 끊임없이 쾌활하게 웃음을 펼치며 이젠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목린을 돌렸다.
언영은 그 사이 더 키가 늘어나 이제 익문을 훨씬 뛰어넘었다. 볼살이 다 빠져서 얼굴 윤곽이 더 진하게 도드라졌다. 처음 보니까 어색할 뿐이지, 더 매섭고 날카로워져서 돌아온 그의 인상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시원하게 옆으로 뻗은 눈은 주변을 뒤덮는 살 없이 또렷했고, 코는 자칫 오만해 보일 정도로 위에 우뚝 올라서 있었다. 입술은 너무 얇지 않고 적당히 도톰한 것이 예쁜 색으로 반짝거렸다. 턱은 군살 없이 날카롭고 예리하게 빠졌다.
너무 균형이 잘 잡혀 자칫하면 냉정해 보일 수 있는 인상이 따스한 미소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목린은 순간 몸을 뻣뻣이 굳히고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세밀히 뜯어보았다.
“목린아……!”
그러나 그가 목린의 이름을 부르며 안면 근육이 흐느적거리고 사랑에 빠진 멍청한 미소가 얼굴 전체에 전파되는 순간, 목린의 두근거림도 금방 잠잠해지고 말았다.
언영은 거의 울려는 표정으로 목린을 확 끌어안은 뒤에 얼굴을 맞대고 비볐다. 목린의 얼굴이 구겨지듯 꾹꾹 눌렸다. 이어서 언영은 그 위로 다정한 입술을 끊임없이 쏟아부었다. 목린은 그의 어깨를 얌전히 붙잡고 눈을 내리깔며 받아들였다.
한참을 쪽쪽거리다가 언영은 마지못해 목린을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까 던졌던 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목린이 평소에 보관해 두는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두었다. 목린을 향해 또 몸을 틀며 언영이 들뜬 목소리로 축하했다.
“목린아, 생일 미리 축하해!”
목린은 치마를 매만지며 수줍게 답했다. 오늘은 뒤로 땋은 머리의 끝이 목린의 허리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고맙습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아, 아니요.”
“그러면 내려가자.”
목린은 당연히 언영이 이번에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리라 예상하고, 몸을 마주 보는 위치로 틀었다.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넣기도 쉽게 팔을 살짝 옆으로 벌렸다. 하지만 언영은 길을 따라 걷지 않고 뭐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목린을 내려다봤다.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안 내려가?”
“아…….”
목린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얼른 다시 발을 돌려 길을 향해 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장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사라지고 싶었다. 손으로 뺨을 팍팍 때리며 더듬거렸다.
“그, 아니에요……!”
손을 옆으로 내밀어 언영의 검지를 꼭 잡고 소심하게 낑낑 잡아끌었다. 얼른 떠나서 잊어버리고 싶었다.
“얼른 내려가요. 얼른요.”
그러나 목린의 소망을 묵살하듯 언영은 그 자리에 뿌리가 박혔다. 잡힌 검지를 어리벙벙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상황을 가늠하는 듯싶다가 이내 그의 눈이 팽창하듯 크게 벌어졌다. 그의 동공에 이채가 도드라졌다.
“어……. 어……. 하…… 하하하!”
“…….”
“하하하하하!”
“어서……! 내려가요……!”
“하하하하하!”
“저는, 그러니까,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당연히 하실 줄 알고……. 어머나!”
언영이 목린의 허리를 가뿐히 안아 올렸다. 목린은 안절부절못하며 성격답지 않게 허공을 강하게 발길질했다. 그래 봤자 언영의 눈에는 깜찍한 재롱에 불과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내려 주세요!”
“하하하하하! 마음껏 들어 줄게! 평생 발이 바닥에 안 닿도록 귀하게 모셔 줄게!”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진심이었다. 단순히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는 게 아니라, 이번엔 튼튼한 두 팔을 이용하여 머리 위로 번쩍 그녀의 몸통을 붕 띄워 올리고만 것이다. 목린은 이제 안타까워 보일 정도로 파리해졌다.
“너무 무서워요, 언영 님!”
하지만 차마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까 봐 내려 달라거나, 싫다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한편, 귀혈족에게 ‘무섭다’는 것은 깨뜨려야 할 임무였다. 귀혈족은 끊임없이 제 속의 두려움이나 의심과 싸우는 일을 매우 중요한 목표로 여겼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목린이 무섭다고 했을 때, 언영은 그녀의 내부에 깃든 공포와 맞서 싸우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자처하기로 마음먹었다.
“꺄아아악!”
내려주기는커녕 위태로운 그 상태에서 언영이 잰걸음으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목린의 가느다란 외마디소리가 길가를 그들먹하게 채웠다.
언영이 목린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질 일은 결코 없었지만, 실로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 사실이 하등 고맙지 않았다. 목린의 몸이 가차 없이 흔들거렸다. 뒤로 땋아 내린 머리가 채찍을 휘두르듯이 사방에 펄럭였다. 그사이에 군데군데 꽂혀 있던 꽃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한편 약초를 캐러 산에 올라오는 마을의 할아버지가 그대로 두 사람을 맞닥뜨렸다. 그는 언영과 그 위에 떠 있는 목린을 목도하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리며 우스꽝스럽게 뒤로 풀썩 넘어졌다. 마치 귀신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손톱으로 돌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벅벅 긁으며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신 한 짝이 홀라당 벗겨졌다.
“에, 에, 에구머니나!”
언영의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가 활짝 피어올랐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 저, 저……! 사람을 죽이려 하는구먼!”
할아버지는 바구니를 줍는 것도 잊고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에 힘이 안 들어가 몇 번이나 바닥을 헛되게 긁었다. 그리고 힘들게 올라왔던 길을 기우뚱거리며 되돌아갔다. 벗겨진 신은 다시 찾아가지 않아 흙길에 뎅그러니 버려졌다. 나이 든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에 지닌 모든 원기를 모두 뽑아내며 도망쳤다.
언영을 금세 다시 잔잔함을 회복한 길가를 아쉬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수줍음이 많군.”
목린은 대답할 힘도 없었다. 엄동설한 한겨울에 알몸으로 폭설을 맞고 있는 사람인 양 전신을 가냘프게 떨며 울음을 삼켰다. 아까 조금이라도 그에게 설렘을 느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꾸준히 써 주는 서간에 감동한 것도 다 소용없었다.
언영은 계속 같은 자세로 목린을 받쳐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는 너무 신난 나머지 재미난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평지로 내려왔을 땐 앞서 내려간 할아버지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주민들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익문과 목현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익문은 억장이 우르르 무너졌다. 목현 또한 입술을 피가 터질 정도로 깨물었다.
“목린아! 공자!”
“장인! 형님!”
“꺄아아아악!”
익숙한 이들을 발견한 언영의 얼굴이 더욱 펴졌다. 그는 위에 떠받들고 있던 목린을 일부러 보란 듯이 위로 살짝 던져 올렸다가 잡고, 다시 던졌다가 잡고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버팀목이랄 게 없이 그대로 당하기만 하는 목린이 겁에 질려 귀가 찢어질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귀혈족에겐 무조건 통할 수법이었다. 언영에게 떠 있는 목린을 다시 잡는 것은 숨 쉬는 일보다도 간단했다. 이렇게 힘을 과시하면 모든 시부모가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며 기뻐했다. 제 자식을 튼실하고 믿음직한 놈에게 맡긴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아래로 들썩거리는 연인 또한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하나 초족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아아아……!”
“아버지, 정신 차리십시오!”
익문의 노쇠한 몸이 결국 무너졌다. 그를 받쳐 주고 있던 목현마저도 함께 옆으로 넘어져 버렸다. 익문은 부들부들 떨리는 검지로 언영을 가리키며, 엉킨 수염 사이의 메마른 입술로 빗발치는 서러움을 우렁차게 토해냈다.
“내 절대 저놈에게는 우리 목린이 못 보낸다. 못 보내……!”
한편 언영은 다시 목린을 고쳐 안아 들었다. 눈높이를 맞추고 여전히 목린의 발은 둥둥 떠 있는 상태에서, 언영은 목린의 볼에 제 입술의 흔적을 쪽쪽 남기고, 얼굴을 맞대며 홍복을 누렸다. 근육질 팔에 꽉 갇힌 목린은 이대로 쥐어짜질 것 같았다. 한참이나 소리를 질러 금세 성대가 쉬어 버린 데다 안색은 마치 맨 처음 그에게 잡혔던 날만큼이나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아비라서 너무 미안했다. 익문은 주름진 손으로 아들의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목현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를 통해 필사적으로 쏟아부었다.
“목현아. 저 녀석이 돌아가자마자 당장 우리 목린이의 남편감을 한 번 구색해 보자.”
“아버지…….”
“아직은 시집보내기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적당한 녀석을 찾고 준비하며 지내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가겠지. 목현아, 네 친우 중에 가장 괜찮은 녀석이 누구냐.”
목현은 답하지 못했다.
그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작에 목현이 손을 썼을 것이다.
본래 목린의 남편은 좋은 자리였다. 족장의 딸이라니, 혼인이 곧 가문 사이의 계약인 초족에게 목린은 누구라도 탐낼 최상의 여인이라고 봐도 좋았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언영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아무리 훌륭한 혼처라고 해도 귀혈족 사람의 위협을 받고 싶어 할 멍청이는 여기 없었다. 만약 정말 나중에 목린을 향한 언영의 관심이 식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 다시 언영이 마음을 바꿀지 모른다는 이유로 모두 꺼릴 테고, 목린은 끝까지 홀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목린이 원한다면야 괜찮겠지만, 여태까지 벌어진 모든 일에 목린의 의사는 하등 관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라비와 아비로서 그녀에게 믿음직한 사람을 붙여 주고 싶은 건 당연한 심리였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버지, 그러다가 저쪽에서 보복하면…….”
“하아…….”
“제정신이 아닌 놈입니다. 목린이를 다른 사내에게 보냈다간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 자명합니다.”
목현은 알고 있었다. 주언영이 싫다, 주언영을 죽이고 싶다고 고래고래 꿈에서도 소리 질러 대는 아버지이지만 절대 그 이상으로 행동하실 분이 아니다. 마을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목현이 그리 말하자 씩씩거리던 익문의 몸에서 힘이 파사삭 흘러나갔다.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익문이 웅얼거렸다.
“이게 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우리 목린이 창 던지고 놀고 싶다고 할 때 오냐오냐해 줬어야 했어……. 아이고, 아이고……. 이 아비가 잘못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극악무도한 귀혈족 탓이지요.”
한편 두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눈에 담을 수는 있되, 대화는 놓치고 있는 언영은 그들 부자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장인께서 어디 편찮으신가?”
목린은 여전히 아까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중이라 답하지 못했다. 눈을 아래에 내리깔고 천천히, 최대한 차분하게 규칙적인 호흡을 되찾았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한데 입술에 다른 것이 닿으며 상황은 종결되었다. 언영의 입술이었다.
“……!”
목린의 얼굴에 충격이 빗발쳤다. 나머지 주민들의 낯빛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섞는 일만큼은 아니더라도 입술을 부딪치는 행동 또한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졌다. 구태여 하고 싶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남들 몰래 하고 나오는 것이 초족이 쌓은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언영은 질식할 정도로 목린을 품에 가두고 그녀의 조그만 입술 위를 쪼아대면서, 부드럽게 여린 점막을 물고 빨았다.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를 중시하는 귀혈족에게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장려하는 행동이었다.
마지막으로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익문이 철퍼덕 쓰러졌다.
* * *
익문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집에 옮겨져 있었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느낌. 익숙한 장소. 익숙한…….
“장인!”
“…….”
익문의 눈꺼풀이 다시 느리게 닫혔다. 언영은 절박하게 익문의 어깨를 품에 안아 당겼다.
“장인! 눈을 뜨십시오! 장인! 정신 차리십시오! 장인!”
“정신은 차렸네. 부러 눈을 감은 것이네.”
“휴……. 다행입니다. 장인.”
그놈의 장인, 장인 소리……. 눈치 볼 필요 없었다면 익문은 바로 이를 으드득 갈았을 터다.
“눈을 뜨자마자 들린 것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다시 감을 수밖에 없었네.”
여전히 눈동자를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익문이 웅얼거렸다.
“내가 우리 목린이 마음 아프게 한 죄로 지옥에 떨어졌나 보구나.”
“장인……. 갑자기 혈압이 안 좋아져서 쓰러졌다고 들었습니다.”
“……누구 때문인지 궁금하군.”
그렇게 구시렁대다가 나중에서야 제 말실수를 깨닫고 익문은 입술을 오므렸다. 귀혈족 앞에서 대놓고 비꼬는 날이 오다니. 이 사내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벌인 과실이었다. 제발, 제발 못 알아듣고 넘어가길.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길.
언영이 시든 줄기처럼 늘어져 있던 익문의 손을 번쩍 집어 들었다. 고작 그 행동 때문에 익문의 상체 또한 벌떡 일으켜질 뻔했다. 장인의 손을 따뜻하고 두툼하게 감싸며 언영이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다졌다.
“소인이 바로 잡아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주면 매우 고맙겠네. 제발. 제발 그렇게 해 주게.”
저렇게 언영이 황당하게 답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허탈해서 기가 찰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자칫 방심하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 익문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무시무시한 배와 군사들의 첫 등장은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오싹하다. 주언영의 저런 멍청한 모습도 다 연막 중의 하나이리라.(아니다.)
“그나저나 월진 족장님께서는 오지 않으셨는가?”
“예. 어머니께서는 마을 일로 바쁘십니다.”
“마을 일이라……. 다른 부족과의…… 그런 건가.”
그래. 분명 지금도 꾸준히 침략으로 영토를 넓히느라 바쁠 것이다. 단월도 또한 목린이가 아니었다면 이미 종속국 비슷한 게 되었거나 모두가 노예로 팔려갔을 터이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언영이 놀라서 물었다.
육지에서는 여러 부족의 화합을 위하여 주기적으로 반년에 한 번, 봄과 가을에 함께 축제를 개최했다. 항상 새로운 대회가 함께하는데, 작년에 있었던 ‘빠르게 유밀과 10개를 먹은 뒤 엉덩이로 자기 이름 쓰기’ 종목에서 월진은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쳤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승리를 거머쥔 자가 월진이 옛날부터 제 친구이자 경쟁상대로 보았던 백화족의 족장이었다.
이번 대회에선 무조건 그자보다는 잘해야 한다고 월진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그래서 단월도에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월진은 대신 목린에게 주는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모르겠는가.”
“당연히 모르시리라고 생각했는데, 하하! 아, 그러면 초족도 참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돼…… 됐네…….”
“재밌을 텐데요.”
“자네는 그런 게 재밌-! 후우…….”
익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혀끝까지 올라온 수많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대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지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비가, 마을의 족장이 잠깐 기절했었다는데 목린이도 없고 목현이도, 아무도 없다. 텅텅 빈방에 주언영 하나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인식하며 익문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한데 모두 어디 가고 왜 자네만 내 방에 있는 건가.”
“아! 장인께서도 얼른 나가 보셔야 합니다. 목린이의 생일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소인이 여기 있을 테니 모두 나가서 보라고 했습니다. 목린이도 목현 형님도 바깥에서 구경하느라 바쁩니다. 장인 또한 만족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글쎄, 그렇게 치면 익문은 언영의 말은 모두 틀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겠네. 일단 한번 보세.”
일단 그 선물이 무엇이든지 언젠가 보기는 봐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예상대로 끔찍한 것이라면, 족장으로서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얼른 나서는 것이 시급했다. 익문이 손을 바닥에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언영이 그 옆에서 잡아주며 도왔다.
“너무 놀라서 다시 쓰러지셔도 소인은 모릅니다, 장인.”
언영은 뿌듯하게 말했다.
“대체 무얼 가져왔길래 그런 말을…….”
문이 열리고 외부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익문의 눈을 때렸다. 환한 시야를 가득 차지하는 바다가 오늘따라 왁자했다.
“저것은……!”
익문이 대경하는 모습을 언영이 해맑게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단월도의 바다를 배가 차지하고 있었다. 두세 사람 정도가 탈 수 있는 뗏목부터 시작해서 수십 명을 채울 수 있는 거대한 배까지 다양한 종류가 함께 차례로 세워져 있었다. 배를 옮겨다 준 귀혈족 무사들이 초족 주민들로부터 물이나 간단한 요깃거리를 받아먹고 있었고, 가까이서 이 광경을 눈에 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섬이 시끌시끌했다.
언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친근하게 익문을 한쪽 팔로 옆에서 안았다. 그리고 든든하게 설명했다.
“모든 배에는 비상시에 쓸 수 있는 활이나 검, 창 같은 무기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물론 초족 사람들이 그것들을 제대로 쓰려면 더 훈련해야겠고, 해서 아직 저희 마을로 건너올 수 있을 만큼 배를 몰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평소보다는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장인.”
“고…… 고맙네.”
익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대부분의 땅이 그렇듯이 단월도도 장단점을 고루 가진 섬이었다. 숲과 바다에는 풍부한 식자재가 넘쳐났지만 반대로 무언가를 제작하는 데 있어 보탬이 되는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집이 대체로 설비가 취약하고 무기가 볼품없으며, 어류가 득실거리는 바다로 멀리 나가지 못하는 것도 이에 기인했다.
한데 요즘 섬 주변에 늘 있던 작은 물고기들이 잘 몰려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밖으로 더 멀리 나가자니, 초족의 배는 볼품없었고, 사람을 잡아먹는 어류가 언제 머리통을 밖으로 내밀지 몰라 모두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만 멀리 가면 수심이 터무니없이 깊어졌다. 그 누구도 해저의 끝이 어디인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튼튼한 배로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더 멀리 나가게 된다면, 그리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력만이라도 갖춘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었다. 설령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딱 봐도 훌륭한 자재로 만들어진 배는 분해해서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었다. 마을을 다스리는 족장으로선 이보다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없었다.
멀리서 봐도 너무나도 훌륭하게 만들어진 배를 차례차례 훑어보며 익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고맙네.”
여태까지는 안 고마웠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으나 언영은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다.
“모든 배 바닥에는 ‘목린아 사랑해’라는 말을 제가 일일이 새겨 박아 두었습니다.”
배를 응시하던 익문은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목을 틀며 언영을 올려다보았다.
“그것 참…… 다행이군. 절대 볼 일이 없을 테니…….”
익문은 어느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다 내뱉고 있었다. 이 이상한 사내에게 그 또한 천천히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그러면 소인은 목린이랑 나갔다 오겠습니다.”
“으응?”
그건 또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가다니? 익문이 물어보려고 했을 땐 이미 언영이 저 멀리 달려 나간 후였다.
한편, 목린의 친구들은 엉망이 된 목린의 머리를 다시 예쁘게 땋아 주고 있었다.
“목린아, 괜찮아?”
“으응, 난 괜찮아…….”
핏기 없는 얼굴의 목린이 친구들의 말에 하나하나 답해 주었다. 목린은 더 늘어날 질문을 피하고자 일부러 배를 쓰다듬으면서 그쪽에 관심이 쏠린 척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더는 목린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머리를 다 땋아 준 후엔 저들끼리 모여 웅성거렸다.
“아까 그렇게 목린이를 불쑥 들어 올리는 거 봤어? 징그러워라. 사람이 아니라 망측한 괴물이나 할 짓이지.”
“그러면 목린이 괴물한테 시집가는 거야?”
“목린이 너무 불쌍해…….”
근방에 있던 목현이 그 대화를 엿들었다. 제 욕을 엿들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해졌다. 목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성큼성큼 빠르게 발을 뗐다. 뗏목 바닥을 쓸다가 오라비의 성난 발걸음을 귀에 담은 목린은, 그가 그녀를 부르기 전에 미리 등을 돌려 대화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목린아.”
“저는 괜찮아요, 오라버니.”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목린이 눈을 내리깔며 작고 차분하게 말했다. 목린의 습관적인 대답 탓에 목현은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괜찮을 리가 없지 않으냐!”
워낙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오라버니였기 때문에 목린의 눈이 위아래로 크게 벌어졌다. 목현은 얼굴을 잔뜩 구기며 처참한 낯빛으로 말했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냥 섬에서 좋은 사내 만나서 평온하게 살아야 할 내 누이가 어떻게……. 사방에선 사람들이 너랑 그 야만인 얘기만 하고 있고…….”
목현의 말을 듣느라 목린은 옆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목린아, 가자!”
“어머나!”
갑자기 튀어나온 언영이 목린을 번쩍 어깨 위로 안아 들었다. 목린의 눈엔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져 보였다. 목현이 진노하여 내질렀다.
“무슨 짓입니까!”
하지만 이미 앞서 달려 나간 언영은 가장 작은 쪽배 위에 사시나무 떨듯 하는 목린을 천천히 소중하게 내려놓고,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를 양손에 쥐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간신히 그를 따라잡은 익문이 쩌렁쩌렁 고함쳤다.
“공자!”
“해가 지기 전에 꼭 돌아오겠습니다!”
언영의 단단한 팔이 맹렬한 속도로 노를 젓자 쪽배가 바다를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목린은 숨을 들이마시며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과 표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 뒤에 서 있는 주민들 또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목린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악물었다.
* * *
바다 냄새가 났다.
언영이 노 젓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쉬지 않고 저었는데도 지치지도 않는지, 배가 움직이는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고개를 오랜 시간 들지 않은 목린의 눈에는 넘실거리는 새파란 바닷물, 제 치맛자락, 그리고 언영의 종아리와 발만이 보였다. 언영의 다리는 종아리 중반까지 오는 화(靴)와 검은 바지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목린은 살면서 이토록 큰 발이나, 굵다랗고 긴 하체를 본 적이 없었다. 치마 밖으로 살짝 빼꼼 나온 제 아담한 발과 비교하니 그 크기는 더욱더 터무니없었다. 목린은 움찔 놀라며 제 발을 안으로 완전히 숨겼다.
“이 정도만큼 바다에 나와 본 적 없지?”
“네, 네…….”
갑작스레 날아온 언영의 곰살궂은 질문에 목린은 어색하게 끄덕거렸다.
“왜 숙이고만 있어? 마음껏 구경해도 좋아.”
“저, 혹시 무서운 물고기가 공격해 오면 어쩌죠?”
“걱정 마. 이 정도 거리에선 안 와. 왜, 걱정돼?”
“……네.”
사실 물고기보다 앞에 앉은 사내가 더 무서웠지만 굳이 그것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내가 있는데 뭘 걱정해. 내가 다 때려눕히면 되지. 하하하!”
그가 목을 꺾으며 쾌활하게 웃자 배가 살짝 양옆으로 흔들렸다. 목린은 양손을 재빨리 뻗어 배를 잡고, 목숨을 걸며 몸을 지탱했다. 숨이 달달 떨려 나왔다.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한 것 같은데.”
언영이 두리번거리더니 노를 놓았다. 목린 또한 용기를 내어 눈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청청한 바닷물은 최고의 운치를 선보였다. 단월도가 조그맣게 보이고, 한없이 위로 뚫려 있는 천공의 빛깔은 온화하기 그지없다. 아까 머리를 다시 땋다가 덜 묶여서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산들바람에 맞춰 몸을 맡겼다. 그야말로 화풍난양(和風暖陽)이었다.
언영이 큼지막한 몸을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의 비범한 골상은 이런 자그마한 쪽배와 전혀 자연스레 어울리지 못했다. 배의 중앙에 앉은 언영은 팔을 뻗어 목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뺨이 그의 어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떨지 않기 위해 손을 꽉 쥐었다.
목린의 어깨를 감지 않은 언영의 손이 저 멀리 그의 고향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 끝에 희미하게 우뚝 솟은 산이 보여?”
목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자 기분 탓일지 몰라도 희미하지만 보이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목격하는 타지의 흔적에 목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기가 바로 우리 마을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귀룡산이야. 어머니께서 나와 내 누이들을 가지셨을 때 아버지는 거의 매일 산에 올라가 물을 떠 놓고 아이가 건강히 나올 수 있게 비손하셨다고 들었어.”
“거, 건강히 잘 나오신 것 같아요.”
목린은 떡 벌어진 언영의 어깨와 탄탄한 몸을 훑어보며 심각하게 대답했다.
“뭐? 하하하하하!”
언영이 박장대소했다. 신중하게 고려해서 언영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말을 고른 목린은 대체 뭐가 웃기는지 몰라서 멀뚱거렸다.
언영은 목린의 뽀송뽀송한 뺨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어루만지며 신나게 덧붙였다.
“언젠가 내 누이들도 보여 줄게. 아직 너보다도 어려서 얼마나 덩치도 작고 귀여운지 몰라.”
“네……!”
여태까지 목린이 본 귀혈족 사람들은 모두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아기 때도 저런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담했을 과거가 쉽게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하여 그런 이들이 우글우글한 땅에서 대체 어떻게 살까 걱정이 앞섰는데, 작고 귀여운 이들도 없지는 않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목린이 기대 어린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열심히 귀엽게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언영의 귀가 빨개졌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고개를 틀고 목린의 어깨를 더 바짝 안아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저쪽으로 가는 길엔 서문족이 있는데, 재밌는 사람들이야. 걔네가 자랑하는 폭포가 있는데 정말 아름다워. 그리고 여기에서 더 오른쪽으로 가면 백화족이 살고 있는데…….”
목린은 무엇이든 잘 알고 있는 언영이 신기했다. 섬을 떠난 적이 없는 그녀와 달리 그는 이곳저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 본 것 같았다. 여태까지 봐 온 언영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목린은 어느새 굉장히 집중하여 이야기를 귀에 담고 있었다. 육지에 대한 언영의 유창한 설명은 다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이 왜 금족이냐면, 거기선 하늘이 종종 금빛을 띠기 때문이야. 상상해 봐. 정말 예쁘겠지?”
“네, 신기해요……!”
목린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답하자 언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목린의 몸통을 두 팔로 질식시키듯이 감쌌다. 그리고 같이 양옆으로 몸을 나긋나긋 흔들었다. 겁에 질린 목린의 얼굴이 그의 팔에 파묻혀 눈만 빼꼼 삐져나왔다.
언영이 행복에 젖어 목린의 동그란 정수리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혼인하고 나면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가게 해 줄게.”
“정말요? 정말 그럴 수 있어요?”
목린이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 언영의 팔에 묻혔던 이목구비를 드러내며 물었다.
이제껏 상상했던 혼인 후의 미래는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하였다. 단순히 혼인을 한다고 끝이 나는 게 아니라, 혼인 후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언영과 매일 마주치고 산다면 그만큼 그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고, 그 말인즉슨 그가 언제라도 단월도를 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죽을 때까지 가시방석에 앉아야 하는 삶을 예상하고 또 그에 맞춰 심적으로 준비 중이었는데……. 생각만큼 끔찍한 인생은 아닐 것 같다는 희망이 새싹을 피웠다.
“물론이지!”
“다행이다…….”
목린의 작은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산뜻하게 자리 잡았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양쪽으로 올라가고 또렷한 눈이 사랑스럽게 반절 접혔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언영의 귀, 얼굴, 목이 전부 빨갛게 타올랐다. 그는 참지 못하고 목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겹쳤다. 손이 너무 커서 목린의 얼굴이 다 감싸지고도 남았다.
“정말 너무 귀여워…….”
그 상태에서 바로 언영은 고개를 틀며 목린의 입술에 급하게 제 것을 부딪쳤다. 저번처럼 떨리는 입술을 맞대고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이번엔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바로 벌어진 틈으로 혀가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목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언영은 그녀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입술을 타고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태어났다. 쫀득거리는 마찰 사이로 목린이 “흐읏” 하고 작게 신음을 흘리자 언영의 거대한 몸이 떨리고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언영의 혀가 서툴게 목린의 입 안을 핥았다. 목린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고 만지는 그의 거친 손이 달달달 떨렸다. 입에서는 절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언영은 목린을 계속 제게 당겨 안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과감하게 나아갔다. 세 개로 보일 정도로 떨리는 손이 목린의 가슴 주변을 망설이며 배회했다. 언영이 피를 빨듯 목린의 아랫입술을 물고 안 놔주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어깨를 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언영은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그녀를 놔주었다.
그리고 그때 목린이 머뭇거리며 뱉은 한 문장이 그를 강제로 현실에 끌어당겼다.
“저기…… 또 코에서 피가 나고 계셔요…….”
그 말에 언영이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민망함이 얼굴에 엄습했다.
목린은 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제 얼굴에도 조금 묻은 혈흔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리고 신중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피를 닦을 만한 것은 갖고 오지 않았고 작은 쪽배에는 이 상황에 도움을 줄 만한 물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목린은 발을 모아 쭈그려 앉은 다음 치마 끝부분을 뚜두둑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속에 숨겨져 있던 목린의 하얗고 매끈한 종아리가 활짝 드러났다가 다시 치맛자락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언영의 몸이 바짝 굳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언영은 목린의 반대쪽을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삼 년, 앞으로 삼 년만 더 참으면…….”
“어서 이쪽으로 돌아보세요.”
피를 봐서 심각해진 목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나왔다. 이어서 그녀는 지혈을 도왔다. 무릎으로 서서 언영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가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인중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자 언영은 애써 눈동자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불안하게 쪽배 바닥을 톡톡톡 때렸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어?”
“코피를 흘리는 일이 잦으신 것 같아서요.”
“뭐? 아냐.”
“하지만 저와 계실 때만 해도 이미 두 번이나 흘리셨는걸요.”
언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게다가 양도 더 많아지신 것 같아요.”
목린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다가, 허벅지 쪽이 어딘가 불편한 듯 자세가 계속 바뀌는, 갑옷으로 가려진 언영의 사타구니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리도 어디 안 좋으세요?”
“아, 아니야. 이건…….”
언영이 평소답지 않게 목린으로부터 등을 틀었다. 목린은 혹시 자신이 말실수를 해서 저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철렁 내려앉는 심장을 무시하고 주먹을 꽉 쥐며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영 님, 피 많이 흘리는 거 좋지 않아요.”
“……그래.”
“조심하셔야 해요…….”
그때였다. 옆에서 보이는 언영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더니, 그가 불시에 몸을 휙 돌려 벌써 밤이 왔나 싶을 정도로 목린의 앞에 큰 그늘을 드리웠다.
목린은 등을 뒤로 빼고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반대로 언영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목린아.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목린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그를 지금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앞서 당황스럽게 몸이 만져진 것도 피를 보니까 다 머릿속에서 날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감정은…….
“사람이 피를 여러 번 흘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목린아……!”
목린의 대답이 어땠든 간에 일단 목린이 걱정을 했다는 점에서 언영은 최고로 감동하였다. 원래 매우 멀쩡하게 생긴 얼굴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해지면서, 언영은 목린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끼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본인도 무릎을 폈다.
언영은 한 손으로 목린의 뒷머리를 안고 나머지 팔로 허리를 감으며 그녀를 아기 다루듯 둥기둥기 들었다가 내렸다. 배가 약간 불안정하게 삐거덕거렸다. 목린은 양옆으로 흔들리는 제 몸을 인지하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편 언영은 목린의 뺨에 쪽하고 입을 맞추고 신나게 말했다.
“목린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분명해.”
“저 배, 배가 뒤집힐까 봐 무서워요, 언영 님.”
“하하, 우리 목린이는 겁이 많네!”
“정말 너무 무서워요……!”
“하하하!”
목린이 버팀목 삼아 언영의 목에 팔을 둘러 몸이 더 가까이 와닿자, 그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떨었다. 그러자 배도 같이 요동쳤다. 목린은 짧게 비명을 지르고, 다리를 주뼛주뼛 그의 허리에 감으며 여름철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찰싹 매달렸다.
그리고 그때 목린은 등지고 있어서 몰랐지만, 언영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돌연 언영의 키만 한 회색빛의 식인 물고기가 물에서 용솟음치며 올라왔다. 그리고 목린의 머리를 삼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크기의 입을 벌렸다. 끊김 없이 둥글게 입을 둘러싼 잇몸에는 빼곡히 모든 자리에 이빨이 박혀 있었다. 백 개가 넘는 뾰족뾰족한 갈고리같이 생긴 것이 보기 좋지 않은 누런빛을 띠었다.
언영은 지체하지 않았다. 오랜 훈련으로 그의 몸은 늘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대로 허리를 반절 돌리며 튼튼한 오른쪽 다리를 높이 직선으로 올렸다. 그의 발이 목린의 정수리보다 높게 올라갔다. 날쌔고 우렁찬 돌려차기가 물고기의 옆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함과 동시에, 둔탁하게 퍽 하는 소리가 요동쳤다. 물고기의 이빨 40여 개가 우두두두 뽑혀 날아가 바다에 풍덩 빠졌다. 누런 눈 또한 충격으로 흐리멍덩하게 벌어졌다.
쪽배의 오른쪽에서 등장한 물고기는 그대로 배를 넘어 왼쪽으로 기우뚱 재주를 부리듯이 떠났다.
“어, 어?”
목린은 범상치 않은 일이 방금 지나갔음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언영은 바닷물에 둥둥 떠 있는 피 묻은 이빨을 보지 못하게, 목린이 그곳을 등지도록 방향을 바꾸었다.
“여기 앉아 있…….”
언영이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목린을 내려 주려던 차였다. 그는 얼른 다시 노를 쥐고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한데 그때 목린의 정수리 위로 또다시 같은 종의 물고기가 튀어 올라 징그럽게 입을 쩍 벌렸다.
이빨이 모두 완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엔 다른 놈이었다.
이번에 언영은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아까와 같이 강력한 한 방에 물고기의 머리가 옆으로 꺾이며 이빨이 후두두 빠졌다. 몇 개는 배 위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언영은 목린이 그것들을 보지 못하게 그녀의 뒤통수를 안고 더 제 품으로 바짝 가두었다.
하나 아무리 목린이 본 게 없더라도, 뭔가가 세게 얻어터지는 소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긴장이 팽팽한 적막이 찾아왔다.
목린은 언영의 목에 더욱 의지하며 작게 속삭였다.
“언영 님……? 방금 뭐였어요……?”
언영이 그동안 목린이 무섭다고 해도 웃어넘겼던 연유는 목린이 겁먹은 상황이 별것 아니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럴 일은 없겠다만, 언영이 목린을 높게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린다고 해도 그나마 뼈 좀 부러지는 게 전부였다. 귀혈족들 사이에서는 겨우 그 정도로 두려워하면 비웃음을 샀다. 그렇다고 언영이 목린을 비웃거나 떨어트릴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배가 뒤집혀 바다에 빠진다고 해도, 언영이 금방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목숨이 걸리지 않은 일에 겁내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언영은 배워 왔다.
하지만 식인 물고기는 얘기가 달랐다.
식인 물고기는 귀혈족에게도 골칫거리였다. 무기를 써서 죽일 수는 있다지만 그전에 아래에서 치고 올라와 두꺼운 몸통으로 배를 쪼개 버리는 녀석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단월도와 육지 사이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배를 개발한 지 이제 겨우 다섯 해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만으로 목숨을 빼앗아갈 수 있는 게 바로 이 녀석들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바다에 올챙이가 몇 마리 있어서.”
언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목린의 몸을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올챙이는 바다에 살지 않…….”
목린의 입에서 엄청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언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물고기가 아가리를 수직으로 찢고 목린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언영은 그대로 목린을 꽉 붙들고 몸을 꺾어 돌리며 거센 발차기를 날렸다. 이번엔 몸통 전체의 힘을 갖다 썼으니 물고기는 더욱더 멀리 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언영의 귓가에 목린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목린은 언영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울먹거렸다.
“여기까지 식인 물고기가 올 일은 없다면서요……!”
언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계속 더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쪽배는 포위되었다. 물 안에 스멀스멀 다가오는 그들의 적나라한 형태가 모습을 비추었다. 언영은 얼른 눈을 잽싸게 움직여 적의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총 열 마리. 각기 다른 속도로, 같은 목적지를 추구하며 스멀스멀 헤엄쳐 오고 있었다.
언영도 절망스러웠다. 저들이 등장할 줄 알았더라면 절대 목린을 이곳으로 끌고 오지 않았을 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찾아온 거지. 여기까지 올 일이 없을 텐데 이번에 갑자기 왜.
그리고 그때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치마 찢은 거! 그거 꺼내!”
“네?”
“거기서 나는 사람의 피 냄새를 맡고 온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새로운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장대하게 치솟았다. 언영은 이번에 목린의 머리를 안고 있던 손을 떼고, 이를 악물며 물고기의 몸통에 주먹으로 강한 타격을 가했다. 발로 차는 것만큼 멀리 보내진 못했으나 일단 일시적으로 배 밖으로 내보내는 데는 성공했다.
방금 쳐낸 물고기의 종을 떠올려 보니 확실해졌다. (철저히 귀혈족의 기준에 국한하여 말하자면)터무니없이 약하고 지능이 거의 없는 녀석들임에도, 후각이 제일 치명적으로 발달했다. 인간의 피 냄새를 맡으면 환장했다. 유독 언영보단 목린을 노리는 점에서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꺼냈어? 내 손목에 묶어.”
“네? 그냥 바다에 빠뜨리는 게 더…….”
“어차피 이미 몰려들었어. 조금이라도 더 공격이 내게 집중되게 하는 편이 나아. 어서 묶어! 그리고 저쪽 끝으로 가!”
목린은 혼자 위험을 감당하겠다는 언영에게 선뜻 그러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채 거친 날것의 표정으로 고함치는 그에게 대드는 건 누가 봐도 시간 낭비였다. 목린은 일단 항거하는 태도 없이 서툴게 매듭을 묶고 난 뒤에 얼른 발걸음을 반대쪽으로 옮겼다.
언영의 말이 맞았다. 목린과 언영이 각각 쪽배의 양쪽 끝에 자리를 잡자마자 물고기들은 전부 언영을 목적지로 삼았다. 물속의 시꺼먼 그림자가 한 곳으로 기어왔다. 언영은 노 하나를 손에 쥐며 비범하게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원래는 손을 올려놓는 각각의 외판에 다리를 벌려 발을 아슬아슬하게 올려놨는데도, 굵직한 종아리는 일체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태양 아래 서 있는 언영은 조금 전에 그 쾌활한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라 보였다. 그만큼 부지불식간에 면모를 탈바꿈했다. 그의 눈이 사냥을 준비하는 날렵한 매처럼 움직였다. 온전한 바다의 용사였다.
공격이 들어왔다. 새로운 상대가 하늘에 등장했다. 빼곡히 박혀 있는 이빨이 그를 반겼다. 언영은 천을 묶은 반대쪽 손가락으로 여유롭게 노를 휘리릭 돌리며 놀다가 순식간에 행동을 바꾸었다. 그의 눈에 본격적으로 불꽃이 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핏줄이 터질 정도로 세게 노를 움켜쥐고 제 눈높이까지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대로 노의 넓은 면을 적의 입을 정확히 쑤셔 박다 못해 입천장을 찢고 들어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벗어나지도 못하는 물고기가 섬뜩한 이빨을 언영의 목전에서 번뜩이고, 묵직한 몸통을 파닥거리며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노를 빼지 않고 되레 체내의 찌걱거리는 장기와 근육으로 끊임없이 침투하는 언영의 근육 진 팔이 부들거렸다. 그는 노로 쏘삭인 상대의 입 속을 흉흉하게 지켜보았다.
언영의 두 손이 모두 노에 붙잡힌 지금, 그의 우측 후반부에서 또 다른 적이 하늘로 비상했다. 목린이 울음을 터뜨리며 경고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 박혀 들어갔던 노가 비늘을 뚫고 몸을 관통하여 위에서 찢겨 나왔다. 언영의 첫 번째 승리였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그다음 상대를 맞이했다.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손목을 향해 날아올 것을 알고 예견이라도 했는지 그대로 허리춤에 달려 있던 단검 하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잡아서 잽싸게 뒤로 찍었다. 정통으로 찔린 물고기가 몸을 비틀며 껄떡거렸다.
목린은 눈물로 흐려지는 시야를 이겨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형편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마치 그런 그녀의 생각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양 언영이 때맞춰 든든하게 외쳤다.
“나서지 마, 목린아! 내가 다 무찌를게! 얌전히 앉아 있어!”
언영이 어느새 두 번째로 죽인 물고기의 혀를 묶어 바다에 힘차게 던졌다.
“둘!”
또 다른 놈이 날아왔다. 언영은 노를 휘두르며 다다다다 빠르게 연타했다.
“몸 풀고 싶었는데 잘됐네, 하하하하하!”
그가 해맑게 소리쳤지만, 부러 목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저런다는 사실을 알 정도의 눈치는 그녀에게도 있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지, 좋아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적이 끊임없이 날아들고, 언영은 아까와 같이 노를 녀석의 입에 날렵하게 찔러 박았다.
“넷! 아, 젠장!”
이번에 각도가 조금 어긋났다. 아까처럼 입천장을 향하게 해 위로 뚫어 버리려던 시도는 실패하고, 대신 정면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찢고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서 식도가 완전히 막혔으나 나름의 저항으로 물고기가 입을 악물었고, 그 과정이 노가 지저분하게 잘려 나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언영은 반절로 부러진 볼품없는 노를 힐끔 내려다보며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혹시라도 발에 맞을까 봐 목린은 어깨를 웅크리며 다리를 더 끌어안았다.
섬으로 돌아갈 때 쓸 노가 하나는 있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언영은 허리춤에 달려 있던 두 단검을 모두 각각 손에 쥐어야 했다.
“짧은 무기는 자신 없는데.”
그가 엄지로 무기 손잡이를 쓸며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하나 목린이 볼까 봐 금방 어두운 표정을 거두고 그녀를 향해 믿음직하게 말했다.
“무서우면 눈 감고 있어, 목린아! 금방 끝내 줄게!”
목린은 지금 언영이 얼마나 신경 써서 움직이고 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저렇게 날쌔게 몸을 던지고, 뛰고, 주먹을 날리는데 배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에 언영이 목린을 둥기둥기 흔들고 놀았을 때가 더했다. 배가 조금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려 하면 언영이 재빨리 왼쪽에 무게를 실어 중심을 지켰다. 저렇게 무겁고 큰 몸이 정신없이 움직여 대는데, 목린이 앉아 있는 자리는 다소 평온하다고 봐도 좋았다. 이쪽으로는 피도 튀지 않았다.
짧은 무기는 자신이 없다면서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치명타를 입히고, 찌르고, 돌리고, 박고, 찢고, 상대를 연달아 도륙하는 모습은 흡사 춤의 한 동작 같기도 했다.
“숙여!”
언영이 이미 죽어 버린 물고기의 꼬리를 쥐고 목린을 향해 내질렀다. 목린이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숙임과 동시에, 언영이 그녀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물고기의 몸통을 휘둘렀다. 그러자 목린의 위에 튀어 올랐던 물고기가 대신 그것을 맞고 얻어터졌다. 언영이 가볍게 들어 올렸을 뿐이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놈이라서 그 타격 하나로 이빨이 대부분 뽑혀 나가고 튀어나온 눈알이 터졌다.
“여섯!”
저만치 날아가는 물고기를 보며 언영이 시원하게 외쳤다. 그리고 한쪽에서 날아오는 또 다른 녀석의 두툼한 몸통을 굵은 한쪽 팔로 단단히 끌어안고, 단검으로 그 위를 길게 부우우우욱 갈랐다. 피가 콸콸 솟구쳐 나오자 그대로 바다에 휙 던져 버렸다.
“아, 젠장!”
“언영 님!”
갑자기 날아온 새로운 적이 갑옷이 가려 주지 않는 언영의 팔꿈치를 덥석 물어 버렸다. 옷 위로 순식간에 피가 번지고 언영은 고통에 찬 신음을 짜증스럽게 씹어뱉었다.
언영은 꿈틀거리는 적의 몸통을 남은 팔로 압박했다. 그리고 무릎 한쪽을 이용해 빠르게 올려 쳤다. 체내에 있는 장기가 일그러지자 그것이 억지로 이빨을 다시 뽑았다. 바다로 얼른 안전하게 도망치려는 것을 언영이 놓치지 않고 발로 걷어찼다.
그 과정에서 물고기의 목이 꺾이며 이빨에 흥건히 묻은 언영의 혈흔이 주변으로 튀었다. 그중 몇 방울이 목린의 옷을 검붉게 적셨다.
“목린아, 얼른 그거 닦아 내!”
언영이 당황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더하여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기가 만연한 눈과 함께 물고기의 아가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두두두두둑, 하면서 식인 물고기의 입이 바깥쪽으로 벌어지며 찢겼다. 목린은 구역질이 나오려는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진작 이렇게 뜯어낼 걸 그랬네. 여덟.”
언영은 가장 징그럽게 죽어버린 입 찢긴 물고기를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휙 내던졌다. 아홉 번째 상대도 비슷한 방식으로 죽여 버렸다. 쪽배를 둘러싼 바닷물의 빛깔이 피가 섞여 더러워졌다. 서서히 죽은 물고기들이 물 위로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더 있었는데.”
기다란 몸을 곧게 뻗고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언영의 모습은 살벌했다. 그의 얼굴과 갑옷에서 짐승의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고 넓은 가슴이 거친 숨소리에 맞춰 들썩거렸다. 초족에게선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인간의 잔인한 면모였다. 같은 사람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종의 생명체를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목린은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눈을 감는 것도 잊었다. 만약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낮게 뛰어오르는 물고기가 아니었다면 꾸준히 쳐다봤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언영의 피가 튄 치맛자락을 목표로, 식인 물고기가 다소 허술하게 날아올랐다. 목린이 그것과 똑바로 눈을 맞출 정도로 위치가 가까웠다. 언영의 동공이 살벌하게 끓어올랐다.
“여깄구나!”
언영이 뒤에서 끌어안듯이 팔을 벌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각각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단검이 동시에 물고기의 몸을 꿰뚫었다. 박힌 상태에서 검의 손잡이를 반 바퀴 돌리며, 언영이 입으로만 웃었다. 제 널따란 품에서 파닥거리는 녀석의 몸통을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응징했다.
“내가 두 눈 똑똑히 뜨고 있는데 감히 누구를 넘봐, 응?”
“언영 님, 얘는 아까 찼던 그 녀석이에요!”
언영은 뒤에서 보느라 몰랐겠지만 이미 이빨이 거의 없어지거나 으깨진 상황이었다. 날아오르는 모양새도 영 시원치 않았던 것을 보면 아마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죽을 놈이었다. 죽은 줄 알아서 바깥에 차냈는데 끈질기게 엉겨 붙는 정도에 그쳤다.
“뭐?”
언영이 당황하며 눈을 끔벅였다.
새로운 놈이자 마지막 놈의 등장이 뒤를 이었다. 여태까지 모습을 보인 동족 중에서 그 크기가 가장 거대했고, 가장 날렵했다.
언영은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번 상대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는 두 팔을 모두 쓴 터였다. 다시 단검을 뽑아 팔을 꺾고 찔러 넣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휘날려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괴물이 언영의 뒤에서 목을 뜯어내러 왔다.
목린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부서진 노를 순간적으로 움켜쥐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까 숲에서 언영이 해 줬던 충고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팔꿈치를 더 높이 들고, 더 자신 있게.
무섭게 생긴 이빨로 인해 강제로 분절된 노는 잘렸다는 말보다 뜯겼다는 말에 더 가깝게 생겼다. 끝이 반듯하지 못하고 거칠어져, 잘못해서 손만 스쳐도 피범벅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부분이 적에게 향하도록 목린은 힘차게 노를 투척했다.
끝이 첨예한 노는 그대로 물고기의 피부를 찢고 들어가, 다름 아닌 심장을 정통으로 찍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언영의 뜨끈뜨끈한 목을 얼마 두지 않은 거리에서, 물고기가 그대로 공중에서 굳어 버렸다. 그리고 피를 토해내며 아래로 고꾸라졌다. 마지막 남은 생을 고통에 몸부림치며 파닥거리다가 그렇게 떠났다.
언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광경을 잠시간 지켜보다가, 마찬가지로 얼이 나간 목린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주했다.
“위험하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처음으로 언영이 목린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성을 냈다.
“하지만 그랬으면, 언영 님은 머리가 먹혔을 거 아녜요. 어떻게 그렇게 놔둬요…….”
그 말에 언영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언영은 말을 더 하려다가 말았다. 입을 굳게 다문 상태에서 배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마지막 놈을 더 안으로 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귀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왜 바다에 안 버리는 거예요?”
“당연한 거 아냐? 네가 처음 잡았으니까 기념해야지.”
“정말 죽었어요?”
“응.”
“맙소사…….”
목린은 손으로 뺨을 가렸다. 이제껏 물고기를 잡아 본 건 강에서 한 건전한 낚시가 전부였다. 물고기가 아무리 길어도 목린의 팔보다는 짧았다. 다른 초족 사람들 대부분도 비슷한 생활을 살았다. 그런 낚시마저도 작년쯤에 물속에 숨어 있던 언영을 건져 낸 이후로 목린은 피하던 참이었다.
“그나마 덩치 작은 따까리들이라 다행이었어.”
“네? 작은, 작은 거예요?”
식인 물고기는 언영보다도 몸집이 우람했다.
“목린아. 나를 구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언영이 사뭇 진지하게 입술을 뗐다. 어릴 때부터 알아서 혼자 날아다녔으니 누군가가 구해 줄 필요가 없었다.
“정말이에요……?”
반면 목린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가혹한 종족이라고 해서 설마 같은 마을에서 자란 이들까지도 그리 무자비하게 대할 줄은 몰랐다. 귀혈족은 정말 정말 무서운 이들이구나.
“응, 정말.”
“우와, 저 정말 기뻐요.”
목린은 가슴이 찡해지는 따뜻한 감정을 전달받았다. 이어서 치맛자락 아랫부분을 다시 뚜두둑 찢기 시작했다.
“아까 물렸던 팔 이쪽으로 주세요. 별거 아니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아, 아니……. 나는 괜찮은데.”
“어서요.”
싸움이 있었던 만큼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언영이 하나의 노로 열심히 배를 움직이는 동안, 목린은 배에 남아 있는 사투의 흔적을 애써 지워 냈다.
주변의 바닷물이 완전히 깨끗한 곳에 다다르자 언영은 노를 잠깐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쪽배 바깥으로 몸을 내밀더니, 정수리부터 목까지 물 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 안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연이어 팔도 집어넣어 얼굴을 손으로 벅벅 비볐다. 이후에 모습을 다시 보이니 피가 묻혀 있던 부분이 훨씬 깔끔해졌다.
그의 짧은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얼굴에 쩍 달라붙었다. 목린은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입을 꾸욱 막았다.
“왜? 내 모습이 웃겨서 그래?”
“아, 아니에요!”
목린은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 쳤다.
“하하하하!”
언영은 호탕하게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이어서 목린에게 웃는 법을 가르치기까지 이르렀다.
“목린아. 나 따라 해 봐. 어깨랑 가슴을 제대로 펴고, 얼굴을 살짝 든 다음 크게 웃어. 하하하하!”
“하……하. 하하…… 하.”
목린은 뻣뻣하게 턱을 올리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눈은 난감함에 젖어 입만 뻐끔거리며 웃는 척했다. 언영은 목린이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얼른 목린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그녀의 볼에 쪽쪽 끊임없이 입을 맞춰 댔다. 숨이 막힐 정도였기에 목린은 이것이 그를 보고 웃은 것에 대한 벌인지, 진심에서 나오는 행동인지 끝까지 아리송함을 거두지 못했다.
* * *
마침내 다시 섬에 다다랐을 때는 노을이 거의 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오겠다는 약속은 아슬아슬하게 지킨 셈이었다.
단월도는 늦은 오후와 밤의 중간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몽환적인 빛깔의 하늘이 섬을 얼싸안은 지금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신비한 이채의 세계에서 인간은 모두 터무니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저 이런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것을 만끽할 기회를 거머쥠에 감읍할 뿐이었다.
“섬이 너무 예뻐요.”
목린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힘들었던 사투 끝에 결국 밖으로 삐져나온 얇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맞춰 살랑거렸다.
“그러게.”
언영은 섬을 바라보다가 목린 쪽으로 눈을 돌리고 이내 푹 고개를 숙였다. 빨개진 귀만이 그의 표정을 짐작케 했다.
“……섬이 네게 그 예쁨을 정말 많이 나눠 줬나 보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목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 아니야.”
언영은 후욱후욱거리며 손목이 안 보일 정도로 노를 빠르게 젓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른지 목린의 땋은 머리가 마구 펄럭거렸다.
‘혹시 섬이 예뻐서 침략할 마음을 품고 중얼거린 건 아니겠지?’
아까 싸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저런 실력이라면 사실 혼자서 단월도의 모든 성인과 맞붙는다고 해도 이길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 존재인지 다시금 떠올랐다. 목린은 손가락을 파르르 떨며 주먹으로 치마를 구겼다.
한편, 육지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나와 언영과 목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거의 지고 있는데 왜 오지 않는단 말이냐……!”
“익문, 조금만 더 기다려봐.”
“분명 목린이를 납치해서 데리고 떠난 게 틀림없네!”
“고작 쪽배로 어디를 간다는 거야. 아무리 귀혈족이라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미리 월진 족장이 탄 거대한 배가 저쪽에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네.”
익문은 거의 확신한 듯이 말했다. 옆에 있던 목현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부친을 달랬다.
“아버지, 그래도 아직 공자가 약속한 시각이 다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저 모습을 보아라!”
익문은 속삭이며 검지로 조심스럽게 왼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언영이 가져온 수많은 배와 함께 그것들을 운반하는 일을 도운 귀혈족의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몸집이 아담한 초족 사람들을 신기한 듯 구경하거나(말을 걸었다가 상대가 울음을 터뜨릴 뻔한 이후 이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면 저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두가 휘황찬란한 갑옷을 걸치고 신식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사실 이 무기들은 그저 장신구나 다름없는 것으로, 아주 약간의 모양새와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에 따라 내부에서 은밀한 서열이 정해졌다. 물론 초족의 눈엔 다 똑같아 보였다.)
“목린이 어떡해!”
“목린아, 흐흑…….”
목린의 친구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타났습니다!”
그때 갑자기 섬에서 가장 시력이 좋은 청년이 수평선을 똑바로 가리키며 자신 있게 외쳤다. 모두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부랴부랴 달려 나갔다.
“목린아!”
“목린아, 괜찮냐!”
그리고 배가 근접해 오면서 초족 사람들은 배 위에 있는 것이 두 남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서서히 ‘그것’을 눈에 담은 자들의 안색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적당히 가까이 도달했을 때 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린이 잡은 거대한 식인 물고기를 두 팔로 들고 과시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목린이가 잡았습니다!”
“뭐, 뭐?”
초족 사람들이 더듬거렸다.
“혈압에 좋다고 하니 많이 드십시오, 장인! 저랑 목린이 혼례식 때 신나서 춤도 출 수 있을 정도로 팔팔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린이를 그런 위험한 곳에……!”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언영의 발언에 초족 사람들 모두가 입을 쩌억 벌리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목린이가 대어를 잡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그런 위험한 장소로 데리고 갔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고함이 날아왔다. 귀혈족 무사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기를 양손에 쥐고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 높여 열광했다.
“와아아아!”
“백목린! 백목린! 백목린!”
귀혈족과 초족의 반응은 상극이었다.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초족 사람들과 달리 귀혈족 사람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타고 온 배로 들어가 그릇과 요리 기구를 꺼내들고 나왔다. 졸지에 공터 한복판에서 거대한 모닥불로 목린이 잡아온 물고기를 굽게 되었다.
귀혈족 사람들 두 명이 양끝에서 물고기를 잡고 타오르는 불 위에서 돌렸다. 어느새 별들이 인사하는 밤이 되어 붉은 불꽃은 제 존재를 가장 독보적으로 빛냈다. 흐릿한 으스름달 아래에서 유일하게 선명하게 타올랐다.
섬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한 입 맛보고도 남는 충분한 크기였다. 귀혈족 사람들은 신나게 춤을 추며 모닥불 주변에서 노래를 불렀다. 오늘의 영웅 목린을 추앙하는 가사를 즉석에서 지어냈다. 언영의 품에 갇혀 있느라 목린은 어색하게 그 틈에 껴 있었다. 잠시 뒤 언영이 한 손으로 목린의 엉덩이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마를 다정하게 맞댔다. 목린은 어색하게 언영의 목에 팔을 둘렀고, 그는 듬직한 목소리로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속삭였다.
“목린아.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너의 특별한 날을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영광을 주어서 고마워. 태어나 줘서 고마워.”
모닥불 덕분에 언영의 얼굴 한 면이 뜨겁게 빛났다. 목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직설적인 표현에 어쩔 줄 몰랐다.
“아니에요, 고마울 것까진…….”
“정말 고마워. 정말.”
언영의 눈동자가 목린의 입술에 달라붙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부딪힘과 동시에 목린은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귀혈족의 장난기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러든지 말든지 언영은 목린의 엉덩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상냥하게 안았다.
식사 준비가 다 된 후에는 언영이 주변에 서 있는 초족 사람들의 팔을 끌어당겨 이쪽으로 오게 했다. 냄새 때문에 호기심은 생기는데 차마 가까이 가서 뭐 하냐 물어볼 수는 없어 얼쩡거리던 이들이었다. 언영이 쾌활하게 웃으며 함께하자고 끌어당기니 어쩔 수 없이 발이 옮겨졌다. 무엇보다도 언영의 커다란 손에 잡히고 나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날 초족과 귀혈족이 함께 스스럼없이 어울린 건 아니었다. 언영의 옆에 앉은 목린을 제외하고 초족 사람들은 모두 무리지어 구석진 틈에 앉았다. 종종 귀혈족 사람이 뭐 필요한 건 없냐, 불편한 건 없냐고 다가와 물어보면, 그 사람의 허리춤에 달린 흉흉한 도끼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 그렇다고 그 날이 나빴다 볼 수도 없었다. 수많은 농담과 즐거운 담화가 끊이지 않았다. 언영이 목을 젖히고 내는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는 처음엔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안 들리면 어색할 정도로 분위기가 흥겨웠다. 배에서 꺼내 온 술을 마신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종종 불장난을 치거나 무기를 휘둘러서 초족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의 행각이 위험한 일로 번지는 경우는 없었다.
나쁘지 않은 생일이라고 목린은 생각했다.
“졸려?”
제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목린을 내려다보며 언영이 물었다. 팔로 그녀의 몸을 더욱 가까이 당겨 안았다.
“아니요……. 자는 거 아니에요.”
위에서 언영이 웃는 소리가 들리자 목린은 다소 억울했다. 그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목린은 그저 잠깐 눈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있었을 뿐이다.
“잠깐만 이러고 있다가 금방 일어날 거예요.”
“응. 그래, 그래.”
“어깨 아플 텐데 죄송해요.”
“아니야. 평생 이러고 있어도 돼.”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안 된다고 항변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먼저 몰려오는 피로를 해결하고 싶었다. 잠깐만 눈만 붙이고 있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주변의 소리가 얌전히 사그라든다. 점점 현실로부터 멀어진다. 유일하게 생생히 와닿는 건 이제 언영의 시원한 체취뿐. 그곳에 의지하듯이 정신을 모두 기울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긴장이 더 나른하게 풀렸다. 몸이 두둥실 날개가 달린 듯 떠올랐다. 편안한 꿈나라가 그녀를 환영했다. 언영의 말이 맞았다. 평생 이러고 있는 것 또한 괜찮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