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우거진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민 채 앞을 바라보는 어린 청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귀까지 붉어진 그의 멍한 눈빛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 보면,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녀의 울음소리가 청청한 숲을 외롭게 떠돌아다녔다. 싱그러운 꽃들마저도 그녀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소녀는 끊임없이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댔다. 옆으로 꼼꼼하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숲을 꽤 오랫동안 헤매고 다녔는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샛노란 유(저고리)와 빨간 주름치마에 작은 잎사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흐윽…….”
돌이켜 보면 소녀의 아버지께서는 그녀가 창을 던지고 노는 것을 늘 반대해 왔다. 풀을 뜻하는 초(草)족이라는 부족명에서 볼 수 있듯이 마을은 자연과 산림을 중시하는 풍토를 지키고 있었다.
부족이 사는 단월도는 섬이었다. 고립된 지역에서 분쟁은 위험했기에 갈등이 벌어져도 어떻게든 쉬이 넘어갔다. 그런 문화가 계속 발전해 결국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 무예와 같은 활동을 꺼리고 경시하는 분위기가 면면히 이어져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순하기 그지없었다.
본디 여기 있던 사람들은 그랬다.
아버지께서는 소중한 딸에게만은 숨기고 싶으셨겠지만, 마을 전체를 들쑤시고 다니는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귀혈족이 이곳 단월도를 장악하려 한다는 뒷얘기 말이다.
언제부턴가 온갖 극악무도한 어류들이 해저에 득시글거리기 시작하면서, 단월도와 머나먼 육지 사이에 놓인 광대한 바다는 인류의 힘을 능가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여 그동안 초족은 외부인의 침입 없이 약 200년간 온화한 나날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단절은 그들에게 독이 되기도 했다. 힘이 약한 그들은 똘똘 뭉쳐 서로에게 의지하고픈 기질을 강하게 보였다. 이는 타지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으로 번졌다. 무서운 말이 빠른 속도로 주민들의 귀를 타고 흘러갔다. 발이 붙은 양 이곳저곳 뻗어 나간 과장과 허풍 또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불어났다.
소문에 의하면 육지에는 작은 향리를 무력으로 장악해 영토를 넓히는 부족도 있다고 했다. 노인들은 모두 죽이고 힘 있는 남자들은 노예로 써먹는다고 한다. 어린 여인들은 강제로 첩이나 씨받이가 된다는 말도 있다.
섬이 고립된 상황에서 외부의 소식을 바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종종 육지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그 연기가 바람을 타고 섬에 놀러오곤 했다. 하늘에 남은 흐릿한 여흔은 필시 잔혹했을 싸움을 짐작케 했다. 바깥세상에 사는 이들은 늘 싸우느라 바쁜 듯했다.
연결이 단절된 유구한 세월 동안 타지인에 대한 소문은 끊임없이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침략이라면 초족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소녀인 목린도 알았다. 그녀의 보잘것없는 창 솜씨가 마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족장의 딸로서 뭔가를 해 볼 수 있다면.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다면.
“흑…….”
그렇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곤충이 찌르르찌르르 울고 풀 냄새가 잔잔히 돌아다니는 숲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는 소중한 고향.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어린 목린은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에 매달린 이슬을 대충 닦고, 아담한 손으로 제 키에 맞춰 허술하게 제작된 대나무 창을 꽉 쥐었다.
“어?”
그리고 그때, 목린보다 우람스러운 형체 하나가 그녀의 뒤로 잽싸게 달려들었다.
* * *
“하아.”
익문은 오전부터 내내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문지르며 고뇌에 빠져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주름은 오늘따라 더 촘촘해진 것만 같았다. 몸을 앞으로 움츠리고 걱정에 앓는 지금의 그는, 평소에 남들에게 보여 주던 늠름하고 인자한 족장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초로(初老)를 앞둔 그저 평범한 아버지였다.
“그렇게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변에 복슬복슬하게 올라온 수염 사이의 입술이 나지막하게 뻐끔거렸다. 울연함이 목소리에 듬뿍 묻어나왔다.
육지와 단월도를 잇는 바다에 약 200년 만에 낯선 물체가 발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이었다. 너무도 경악스러운 나머지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헐레벌떡 뛰쳐나와 운집했다. 우는 아이를 안고 급하게 온 여인도 있었고, 그동안의 다리 통증도 잊고 껑충껑충 뛰어온 노인 또한 즐비했다. 그들은 파리한 안색으로 좌절을 맞아들였다.
‘저것이 바다에 사는 요물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우리에게 격노하신 게 틀림없소!’
불분명한 형체가 가까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그것이 ‘배’라고 알 수 있었다. 황소를 15마리는 연이어 줄 세워 놓은 만큼 그 길이가 압도적이었다. 그들이 보고 자라온 작은 쪽배와는 괴리감이 너무도 컸으나, 현재로선 그 단어 말고는 저 요상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인간이라고 쉬이 단정 지어 안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초족이 생각했을 때 저 깊은 미지의 바다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 멀쩡한 배를 몰고 온 이들 또한 범인(凡人)이 아닐 테다.
‘이곳이 단월도입니까?’
바로 그 순간은 초족 사람들 모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많은 군사들이 거대한 배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정도의 신장과 골격이 가능하다고 초족은 생각지 못했다. 어깨는 기형적으로(철저히 그들의 관점에서) 넓었으며, 마치 하늘에게 도발을 하는 양 정수리는 높게 치솟았다. 다리와 팔은 실컷 두들겨 맞아 혹이 난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세상을 향해 쌓게 된 모든 부정적인 멍울을 빚어내 인간을 만들면 저것과 유사할 테다. 그만큼 저들은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곧 압제였다. 무시무시한 갑옷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아무도 군사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더 상황에 걸맞을 터였다. 힘없는 초족 사람들은 단지 오늘의 이야기를 몇십 년 후 어린 후손들에게 즐겁게 들려줄 수 있는 그 날이 올 수 있기를, 그때까지 자신들이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상대가 끌고 다니는 위압감을 봤을 때 영 가망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맞습니까?’
우락부락한 사내들 중 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물었다. 조그마한 아이 하나가 마침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제야 사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는 품 안에서 귀하게 보관되어 있던 죽간을 꺼내 들었다.
‘저희는 육지에서 온 귀혈족입니다. 이곳의 족장을 뵙고 싶습니다.’
‘……나요.’
무리의 가운데에 서 있던 익문이 한 걸음 더 걸어 나왔다. 뒤에 서 있던 그의 아들 목현이 여동생 목린을 보호하듯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사내는 익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귀혈족의 주월진 족장께서 보내신 서찰입니다.’
상대는 무척이나 태연해 보였기에, 익문은 족장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으로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똑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죽간을 건네받았다.
가죽끈을 풀고, 그가 묵직한 죽간을 펼쳐 읽어 내리는 동안 심장을 옭아매는 정적이 모두의 주변을 감쌌다. 어린 아기조차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숨을 죽이고, 모두가 겁에 질린 눈으로 족장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잠시 뒤 익문이 망설이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한 달 뒤에 올 생각인가.’
죽간의 내용은 다소 웅장했다. 아무래도 단절되어 있던 200년의 시간 탓인지 알아볼 수 없는 단어도 몇 가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요지는 확실했다. 하나로 간추려질 수 있는 문장을 귀혈족의 족장은 참 장엄하게도 적어 놓았다.
‘예.’
한 달 뒤에, 무려 백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족장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통보였다.
사내들이 무덤덤하게 대꾸했고 익문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창백해졌다. 오늘 찾아온 열 명의 군사도 이렇게나 그들의 숨통을 조였다. 백 명이 의미하는 바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침략이다.
주민들이 조심스럽게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목린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늘 당당하던 아버지가 이토록 정신을 못 가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바로 답장을 쓰겠네.’
가로로 도열한 10명의 군사가 그의 시야를 차지한 이 상황에서, 부족을 지키기 위해 익문이 당시 행할 수 있던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초족의 족장 익문이 줄곧 걱정해 왔던 바로 그날이었다.
족장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몸부림치며 수많은 밤을 허비했다. 이제라도 섬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장비를 만들고 싸운다 해도 수년간 훈련해 온 전문적인 전사들을 이길 리가 만무했다. 섬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초족에게는 아직 이 험한 바다를 가로지를 충분한 기술이 없었다.
어른들끼리 모인 회의에서 여러 가지 방책이 거론되었다. 섬 주민 몇백 명을 모두 나오게 해 함께 무릎을 꿇어 보자. 다 같이 금전이나 귀한 물품을 모아서 갖다 바치자. 어떻게든 어린아이들만큼은 구해 달라고 빌어 보자. 함께 머리를 싸매 보니 그럴싸하게 보이는 방안이 튀어나왔지만, 그것이 확실히 통한다는 믿음은 아무 데도 없었다.
지난 나흘간 익문은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이 뻐근하고, 한숨이 쉬지 않고 푹푹 꺼져 나왔으나 신기하게도 잠자리에 들진 못했다. 머리는 끔찍하게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는 부족을 대표하는 족장이었다. 처음 족장이 되었던 날에 자기 자신보다 주민을 위하는 족장이 되겠다고 말했었고, 그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어린 두 아이들이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는 동료 중 그 누구의 앞에서도 털어놓지 못했지만, 최악의 경우 그는 주민들은 건들지 말고 자기 목만 잘라 가라고 빌어 볼 참이었다.
그러니 오늘이 아끼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아버지, 오늘 창을 던지고 놀고 싶어요.’
‘안 된다!’
그래서 호통쳤다. 예민해진 정신 탓에 순간 솟구치는 불안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창은 위험한 물건이다. 무예를 꺼리는 부족 분위기 탓에 위험한 무기들은 목린과 같은 어린 나이에만 잠시 쥐어 볼 뿐, 크면서 흥미를 잃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날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무분별한 행위에 사랑스럽고 소중한 딸을 떠맡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딸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표현이 험하게 튀어나왔다.
‘귀혈족이 온다는데 너는 그런 농땡이에 빠져 있겠다는 것이냐! 족장의 딸이!’
‘아니, 그것이 아니라…….’
아니라는 것을 익문도 알았다. 족장의 딸로서 철들지 못한 어린 나이에 우월감을 느낄 법도 한데 목린은 굉장히 겸손하고 바른 아이였다. 차분하며 심성도 온화했다. 누구나 예뻐하는 고운 아이인데.
호통을 들은 목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을 때, 익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죄송해요…….’
오전에 할 일이 흘러넘치도록 쏟아졌기에, 익문은 울먹이며 달려 나가는 목린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내가 호통을 쳤을까. 달래 주었어야 했는데. 익문은 속으로 끊임없이 후회했다. 아이의 커다란 눈이 흔들리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 어룽졌다.
그리고 되돌리지 못할 과실 탓에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지금, 고민의 무게가 더욱 불어났다.
울상을 지으며 나간 목린이 실종된 것이다.
우애를 빙자하여 찾아오는 귀혈족은 머지않아 본심을 드러낼 것이다. 가족이 흩어진 상태에서 공격이 날아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최악의 상황 또한 예측해 볼 수 있다.
어떻게든 귀혈족이 오기 전에 목린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 목린이는?”
천막이 거두어지고 아들이 모습을 비추자마자 익문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윤기 없는 수염이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중이었다.
젊은 청년이 표정을 무너뜨리며 응답했다.
“찾지 못했습니다.”
아아, 작은 탄식이 족장의 입에서 고통스럽게 흘러나왔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 목린의 형제, 목현 또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보고해야 할 것이 있었다. 목현은 목을 가다듬고 힘겹게 입술을 뗐다.
“아버지, 귀혈족의 배가 보입니다.”
익문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 * *
200년 동안 초족은 단 한 번도 침입은커녕, 방문객 또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에 왔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배가 백 명을 담고 다가온다. 거대한 돛에 새겨진 잔혹한 문양이 절로 지켜보는 초족들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했다. 그들은 쇠락하는 정신을 끈질기게 붙들어 잡았다.
“흐아앙!”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가 다가오는 배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구경을 나온 이들은 별로 없었다. 대개는 남이 함부로 열 수 없게 문 뒤에 무거운 물건을 놓고 집안에 구어박혀 있었다. 작은 창문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어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익문의 옆에 나란히 선 동료들이 그의 어깨를 든든하게 두들겨 주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를 도와주겠다는, 끝까지 함께 사람들을 지키자는 그런 의지를 보이는 행동이었다. 익문은 비장한 각오로 팔을 뻗어 옆에 있는 아들의 어깨를 안았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선 목린에 대한 걱정이 끊임없이 불어나는 중이었다. 하나 그에게는 도저히 떨쳐 낼 수 없는 족장의 임무라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그간 딸이 보여 줬던 모습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사고뭉치는 아니니 혼자서 위험한 일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배가 육지에 다다랐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배와 육지가 연결되었다.
터벅터벅. 백 명에 육박한다는 군사 모두 철저히 행렬을 지키며 빠져나왔다. 거대한 갑옷이 움직이고, 자잘한 게 부딪치며 왈각달각하는 소리를 자아냈다. 모두 한 마음 한 사람이 된 양 그 움직임엔 틀어짐이 없었다. 개개인의 인격은 철저히 무시된 것만 같았다.
행렬 가장 앞에 선 건 우람한 키의 여인이었다. 위로 묶은 머리카락이 머리 뒤에 짧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백익문.”
걸걸한 목소리가 족장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익문은 상대를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반갑다. 귀혈족의 족장, 주월진이다.”
여인은 익문보다도 키가 컸다. 치렁치렁한 검은 갑옷을 벗는다 한들 근육으로 다져진 몸은 덩치를 봤을 때 익문과 큰 차이가 없을 법했다. 단월도에서는 이런 여성은 물론 남성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굵고 단단한 팔에 갇히면 숨도 못 쉬고 바로 죽겠구나 싶었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눈을 내리까는 태도가 마치 상대를 가차 없이 깎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이에 대해 익문이 내보일 수 있는 태도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예, 부디 편안하게 묵고 가시길 바랍니다.”
익문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답했다.
‘흠?’
월진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왜 말을 높이는 거지?’
단월도는 월진이 어린 시절부터 와 보고 싶었던 곳이다. 비단 월진뿐만이 아니었다. 이제껏 족장의 자리에 올랐던 모든 이들에게 단월도는 꿈의 땅이었다.
‘월진아. 바다 너머에는 단월도라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 하나 있단다. 내 아버지도, 내 할머니도, 그 위의 분도, 그 위위 분들도, 모두 그 섬의 주민들과 교류하는 게 꿈이었어.’
귀혈족의 선조들은 누구보다도 교류와 친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많은 것을 접할수록, 배우는 것이 쌓일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취하고자 하는 확실한 방향과 목표는 다른 부족들을 설득해 냈고, 결국엔 현재 다른 부족들과 수 년째 평화 연맹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함께하는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속에 들지 못한 유일한 두 부족 중 하나가 바로 단월도의 초족이었다.
200년간 다른 땅과 단절되었으니 얼마나 고독할까. 월진은 그들의 고통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하여 족장 위치에 올라오고 수년을 단월도에 닿을 수 있는 튼튼한 배를 제작하는 데에 쏟아부었다.
종종 축제가 벌어질 때면 큰불을 일으켜 단월도에 신호를 보냈다. 우리가 있다, 그러니까 기다려 달라는 호소였다.
앞서 보낸 부하들의 설명으로 미리 전해 받았지만 실제로 본 초족 사람들은 훨씬 더 특이한 이들이었다.
‘늘 말을 높이는 이들이 있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인가 보군.’
그 외에도 번쩍거리는 갑옷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모습이며, 온순한 억양이며, 모두 한번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용모를 가진 것을 보면……. 확실히 초족은 월진이 아는 ‘일반적인 사람’의 상식을 깨부쉈다.
갑옷이나 근육을 이용해 몸을 넓히는 것은 귀혈족을 비롯한 육지 사람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다지 깊은 우정이 없더라도 스스럼없이 두 팔 벌려 서로를 안고 친하게 구는 행동이 자연스럽다는 풍습도 있다. 넓은 몸을 갖고 있으면 따뜻한 품을 선사할 수 있기에 매우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하여 누구라도 신체의 근육을 발달시키는 활동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때문에 월진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가히 충격적일 것이란 생각에 차마 다다르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법했다. 닭이 달걀을 낳는데 갑자기 달걀이 닭을 낳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큼, 이제껏 삶에서 쌓아온 모든 지식을 뒤집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200년간 쌓인 자연스러운 문화였다. 이를 거꾸로 받아들이기는 의외로 쉽지 않았다.
한편 월진의 머릿속을 지나간 생각에 대해 알 턱이 없는 익문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주변에서 초족 사람들의 긴장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특히 월진의 뒤에 서 있는 군사들은 엄청난 위압감을 퍼뜨렸다.
“그럼 우선 먼저 마을을 둘러보시겠습니까?”
익문이 서둘러 물었다. 귀혈족이 다른 위험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무엇이든 해야 했다.
“좋다! 하하하!”
드디어 선조들의 꿈을 이룰 수 있다! 월진은 벌써 익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는 수줍음은 많아도 좋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익문의 등을 다정하게 팍팍 내려쳤다. 귀혈족과 대치하고 있는 익문을 숨 쉬는 것조차 멈추고 지켜보던 섬 주민들이 히익 하고 몸을 떨었다.
익문과 월진이 나란히 걷고 그 뒤를 목현이 따라 걸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월진이 데려온 군사들이 규칙적으로 걸음을 맞췄다. 다소 침잠된 분위기 속에서 안내가 시작되었다.
익문은 마을을 돌고 지리를 설명하면서도 정신이 다른 곳에 나가 있었다. 산뜻한 태양도 그의 싸늘해진 정신을 감싸기엔 역부족이었다. 월진이 옆에서 실수로 돌멩이라도 발로 차 버리면 놀라서 찔끔거렸고,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곧 지배할 마을의 흐름을 읽는 것만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편 월진이 지켜보던 것은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는 주민들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수줍음이 많군.’
일부러 따뜻한 품을 가진 이들을 백 명 끌고 왔는데 효과가 없는 느낌이었다. 익문이 아닌 다른 주민과도 대화를 나눠 보고 싶은데 기회가 영 안 보였다. 그녀는 귀혈족의 마을보다 더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한 이 섬이 마음에 쏙 들어서, 다양한 이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이것저것 많았다. 보무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월진은 후면에 뒤따라 걷고 있는 소년과 말을 트기로 결심했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월진은 휙 등을 돌려 물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목현은 순간 당황했으나 얼른 목을 가다듬었다.
“족장님의 아들, 백목현이라 합니다.”
목현은 최대한 힘 있게, 월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월진은 호탕하게 웃었다.
“내게도 아들이 있다! 외형은 정반대지만 말이다!”
목현의 표정이 흔들렸다. 저 안에 내포된 함의가 과연 무엇인가? 비웃음인가? 조롱인가? 두 사람을 한 번 맞붙게 해 보겠다는 선포인가? 아들이란 사람도 저 뒤의 무시무시한 군사들같이 생겼다면 목현 자신은 주먹 한 방에 날아갈 것이 자명했다. 아버지의 큰 키를 물려받아 초족 사람 중에 가장 장신임에도 그러했다.
한편 그렇게 목현이 심각하게 고뇌하고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한 문장을 쉽게 잊어버린 월진은 이제 콧노래를 부르며 마을의 우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월진은 이제 우물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관찰했다. 그 순간, 익문은 목현에게 고개를 숙이고 엄숙하게 말했다.
“목현아, 너는 가서 목린이를 계속 찾아보아라.”
“예.”
“……무슨 일이 생겨도 오라비답게 목린이를 지켜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어느샌가 다가온 월진이 불쑥 물었다. 익문과 목현은 어깨를 들썩이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익문은 머리를 조아리며 연거푸 더듬더듬 쏟아부었다.
“아무, 아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대는…….”
월진은 미간을 좁혔다. ‘혹시, 내가 무섭나?’라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한데 갑자기 등장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온통 뒤흔들었다.
“어머니이이이이!”
모두의 머리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어머니! 어머니!”
그것은 사내였다.
단월도에는 나무가 매우 많고, 또 그 길이 또한 엄청났다. 소년과 청년 그 중간쯤 되는 남아가 높다란 나뭇가지 사이를 껑충껑충 뛰어넘고 사뿐히 날아오르며 이곳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집에 숨어 있던 초족 주민들이 그 현란한 움직임을 얼빠진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여기 온 이래 처음으로 월진이 분노를 보였다.
“언영아! 네가 대체 왜 여기 있느냐!”
그녀의 안면 근육이 떨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익문은 이대로 평화는 끝인가, 생각하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소인의 부인을 찾았습니다!”
사내의 형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날쌘 움직임이 놀라운 이유는 그가 한쪽 팔로 커다란 짐을 편히 들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뭔가를 팔로 꽉 붙들어 맨 채로 나머지 한 손으로만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질렀던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단순한 짐이 아니었다. 익문의 얼굴 위로 공포가 넓게 퍼졌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만약 목현이 서둘러 그의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익문은 당장 그 자리에서 무너지거나, 저 사내를 잡으러 달려 나갔을 것이다.
키 큰 사내의 발이 마침내 가볍게 땅에 닿았다.
“언영아! 그동안 배에 숨어 있었던 것이냐!”
월진이 고함을 지르니 주변의 공기가 떨렸다. 익문과 목현은 자기들도 모르게 서로를 붙잡고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격노에도 개의치 않고, 언영이라고 불린 소년은 팔에 끼고 있던 사람을 마치 물건인 양 두 손으로 공중에 들어 불쑥 어머니께 내밀었다. 해맑게 웃으며 소리쳤다.
“이 아이를 보십시오! 부인으로 삼고 싶습니다!”
목현이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팔을 더 세게 부여잡은 것은 자신을 억제하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들었다.
목린은 여자아이기는 했지만, 섬에서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다. 하나 낯선 이가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끼고 안아 들어 앞으로 내민 지금, 그녀의 발은 힘없이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얼이 나간 표정의 목린은 벌벌 떨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혼이 나가 버렸는지,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옆으로 예쁘게 땋아 놓았던 머리가 언영의 품에 안겨 날아오는 과정에서 엉망이 되어 버렸다.
월진은 잠시간 턱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돌연 모든 분노가 자취를 감추었다. 갑자기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어미가 되어 있었다.
“오오, 장하구나!”
마음에 담은 여자아이를 든든하게 들어 올리고 있는 아들을 보며 월진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의 사랑도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마을의 공터에서 너무 심심한 나머지 젊은 사람들이 모여 심심풀이로 전투를 벌였는데, 그의 움직임을 보고 반해 버렸다. 바로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안아 들어 빠져나왔다. 남편 또한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마찬가지로 홀딱 빠졌다 말해 주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월진은 갑자기 그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남편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마을에 남아 있었다. 그에게도 지금 광경을 보여 주고 싶은데. 어리고 말썽만 피울 줄 알았던 아들이 이렇게 사랑을 할 정도로 자라다니……. 단순한 놈이라 과연 제 짝을 만날 수나 있을지 월진이나 남편이나 고민이 많았다. 월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견(손수건)을 꺼내 눈에 조금씩 찍었다. 목이 멘 목소리로 익문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익문, 인사하게. 내 아들이네.”
“예, 예……. 공자님. 초족의 족장 백익문이라 합니다. 한데…… 그…… 품에 제 아이는…… 왜…….”
익문은 차마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언영이라는 어린 청년은 다 큰 귀혈족 어른처럼 우락부락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초족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목린은 마치 덫에 걸린 다람쥐 같았다.
언영이 씩씩하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귀혈족의 주언영입니다. 잠깐, 이 아이가 당신의 여식입니까?”
익문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겐 장인이시겠군요.”
익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예? 장인이요……?”
“정말 귀여워.”
그렇게 말한 언영은 그대로 목린의 몸을 절반 휘리릭 돌려 그를 바라보게 했다. 그는 헤벌쭉 웃으며 목린의 겁에 질린 표정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를 품에 바짝 끌어안았다. 여전히 목린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언영은 그 상태에서 목린의 뺨에 쪽 하고 길게 입을 맞추었다.
목린의 충격받은 눈이 위아래로 더 벌어졌다. 익문이 급기야 목덜미를 잡고 휘청거렸다.
“모, 목린아!”
“아버지!”
목현은 익문의 등에 손을 대고 그가 뒤로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언영은 더욱 싱글벙글 웃으면서 목린의 얼굴에 계속 입술을 찍었다. 이어서 제 뺨을 그녀의 뺨에 비비적거리며 행복해했다. 섬 주민들은 입을 틀어막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반면, 귀혈족 사람들은 덩치에 맞지 않을 만큼 따스한 눈으로 구경했다.
월진은 아들을 뿌듯하게 내려다보다가 이어 익문에게 신나게 걸걸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익문. 그러면 혼인은 언제가 좋을까?”
“혼인이요?!”
익문은 겨우 목현을 붙잡으며 허리를 지탱하고 더듬거렸다.
“목린이는…… 목린이는…….”
“자네 아이도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예?”
자네랑 표정이 비슷하지 않은가. 월진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보아하니 이 마을 사람들은 정말로 수줍음이 많고, 모두 한결같이 저런 아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로운 부족과의 화합은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나 좋은 평판이 있는 귀혈족은 어디를 가나 환영받았다. 월진은 자기들과 관련해 부정적인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번 죽간에 초족은 긍정적인 답장을 보내 주지 않았는가. 품이 따뜻한 1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초족은 분명 환영한다고 흔쾌히 말했었다. 싫으면 거절하면 됐다. 우리가 뭐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아니고.
그래서 월진을 비롯한 귀혈족 사람들은 이렇게 판단 내렸다. 아, 저런 표정이 초족에겐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구나. 좋다는 뜻이구나. 단지 부끄러워하는 것뿐이구나.
“목린아, 너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언영은 감격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목린에게서 눈을 못 뗐다. 정신이 완전히 나가 축 처져 버린 목린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헤벌쭉 웃으며 뜯어보더니 그녀의 콧방울에 입술을 쪽 갖다 대고 신나게 내뱉었다.
“혼인은 당장 내일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목린의 눈이 휘둥그레 팽창했다.
“잠깐만요, 공자! 우리는…… 우리는 그리 빨리, 어린 나이에 혼인하지 않습니다.”
너무 긴박해진 나머지 익문이 팔을 뻗으며 외쳤다.
“그럼 어느 정도의 기간이 더 필요한가?”
모자(母子)가 똑같이 실망한 표정으로 익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 판박이라 익문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언영이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사흘? 나흘?”
흥분한 그가 긴박하게 덧붙였다.
“이틀?”
“아니, 적, 적, 적어도 오, 오, 오 년은 있어야…….”
삽시간에 언영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정말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낯빛이라 익문은 한 삼 년 정도로 낮춰 말해야 했나 후회했다. 분명 어린 사내일진데도 어두운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그 순간 월진이 언영의 등을 팍, 한 번 내려쳤다.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목현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휘청거렸다.
월진이 쩌렁쩌렁 호통 쳤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라! 정말 이 아이를 마음에 담았다면 당연히 아이가 함께한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어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
언영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돌변했다. 그는 대롱대롱 흔들리는 목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린이를 위해서라면 십 년도, 이십 년도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 장하구나! 단순히 마을만 둘러보고 가려 했는데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게 되다니! 하하하!”
“하하하!”
월진이 목을 뒤로 젖히며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찬가지로 언영도 따라서 웃었다. 그리고 함께하던 군사들도 따라 했다. 그들은 손에 쥐고 있던 창이나 검을 비롯한 무기를 두 팔로 치켜들고 흔들며 환호했다.
호쾌한 웃음이 사방에 파도쳤다. 이날의 기억은 오랜 기간 초족 사람들의 악몽에 남아 깃들었다.
* * *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아니, 왼쪽! 왼쪽으로!”
“내가 봤을 때는 분명 오른쪽이었는데?”
“아니야. 숲길로 빠졌네.”
오늘도 집 밖에는 ‘호위’들의 혼란스러운 외침이 가득했다. 목린은 지루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주사위만 의미 없이 던졌다. 다섯 개의 주사위가 한 손에 모였다가 바닥에 여러 개로 흩어지는 모습이, 꼭 지금 저 호위들이 찾고자 하는 대상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나누는 분신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빨리 움직인단 말인가. 평범한 초족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목린아, 걱정하지 마렴. 아저씨가 지켜 주마.”
초가집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아저씨가 목린이 들릴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당당하게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저씨께 분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이제껏 살면서 제대로 된 무기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그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고, 그저 귀혈족이 초족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대상일 뿐이었다. 성인 남성이 여럿 모여도 어린 청년 하나 잡지 못했다.
‘목린아. 미안하구나……. 그 상황에서 혼사를 거절하면, 어떤 보복이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무시무시했던 귀혈족이 다행히 아무 공격 없이 집으로 돌아간 날, 그날 밤 익문은 목린을 따로 방에 불러놓고 말했다. 그나마 목린이 없었더라면 단월도는 그날 이미 파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족장의 아들이 마음에 담은 여자아이의 섬을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라도 쉽사리 침략할 수는 없었을 테니.
목린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해요, 아버지.’
‘차라리 가끔은 네가 이해를 못 할 철부지 딸이길 바란단다. 네가 너무 일찍 성숙해진 것 같아 이 아비는 마음이 미어터지는구나.’
‘…….’
익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목린은 대답 없이 두 손을 내려놓고 손톱을 뜯었다. 익문은 관모를 벗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리 걱정하지 말아라. 한낱 어린 시절의 치기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지금의 행동이 부끄러워 이곳에 발도 디디지 않을 테니 그리 알 거라.’
‘너무 부끄러워서 이곳을 영원히 없애 버리려고 하면요?’
‘그럴 일은 없다!’
익문이 황급히 외쳤다.
‘하지만 소문들을 생각했을 때 그리 행동하는 게 타당하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정말 혼인을 하고 마을을 안전히 지키는 편이 훨씬…….
‘목린아, 아비 몰래 이상한 일을 꾸미려는 것은 아니지? 그건 안 된다!’
‘네…….’
‘주언영은 너를 금방 잊을 것이고, 우린 그렇게 조용히 귀혈족의 기억에서 사라지면 된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거라!’
과연 그럴까. 목린은 차마 근심에 빠진 아버지에게 대꾸할 용기는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하나 그의 말에 대한 의구심은 끝까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귀혈족이 다시 타고 왔던 배를 통해 떠나는 그 날까지, 언영의 눈은 목린에게 달라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목린아, 내가 자주 찾아올게!’
마지막으로 떠나기 직전 언영이 외쳤지만 목린은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족장의 아들이니 할 일이 많을 테고, 여기부터 육지까지 왕복하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었다. 단순히 보고 싶다는 이유로 바로 닻을 올리고 출발하기에는 꽤 먼 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때는 귀혈족이 방문한 지 한 달이 조금 안 된 오후였고, 목린은 또래 여자아이들 여러 명과 함께 도란도란 모여 숲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높게 솟은 나무에서 검은 형체가 몸을 던지며 내려왔다.
‘목린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악!’
다름 아닌 언영이었다. 목린의 친구들은 비명을 지르며 언영이 목린을 데려가지 못하게 함께 그녀를 감쌌다. 목린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보게 가려 버리자, 언영은 안달 내며 주변을 서성였다.
‘비켜 봐. 목린이 얼굴 좀 보게. 응? 목린아, 얼굴 좀 보여 줘.’
‘꺄악!’
‘오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소녀들의 비명이 컸기 때문에 마을 어른들이 금방 달려 나왔다. 이걸 어쩐다,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결국 잡히기 전에 폴짝 나무 위로 튀어 올라 지난번 등장했을 때처럼 나무를 타고 빠져나갔다.
그 이후에도 몇 주에 한 번씩 걸쳐 언영은 단월도에 출몰하였다. 눈에 띄지 않게 작은 뗏목으로 몸을 옮겨 사람이 지나지 않는 숲을 통해 섬에 편하게 들어왔다. 목린이 얼굴 한 번 보겠다고 팔이 쑤시도록 노를 혼자 휘저으며 마을에 와선, 그녀가 보일 때까지 잠입했다.
‘목린아!’
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 있다가 산책을 하고 있던 목린의 앞에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고.
‘목린아!’
목린이가 방문한 장터에서 갑자기 옷을 바꿔 입고 상인 노릇을 하고 있기도 했고.
‘목린아!’
하루는 목린이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웬 엄청난 게 물렸다 해서 봤더니 해맑게 웃고 있는 언영이었다. 목린은 비명을 지르며 낚싯대를 내던졌고 미간 정중앙에 그것을 맞은 언영은 짧게 소리를 지르더니 물속으로 다시 꼬르륵 빠져 버렸다. 이후에 사람들이 그를 건져내기 위해 함께 해안가로 몰려들었으나 그사이 훌륭하게 잠수를 해서 빠져나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다.
주언영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한 해 정도가 지나갔다. 그는 열정이 식기는커녕 되레 더 열렬하게 단월도를, 목린을 찾아오고 있었다. 목린은 과연 이것을 한순간의 치기로 볼 수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주사위를 다시 정리해 집어넣는 목린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몇 주 전. 그날도 목린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정쩡한 대나무 창과 함께 숲에 들어갔다. 허공에 부족한 자세로 열심히 휘릭휘릭 흔들어 대다가, 나무에 기대어 잠시 햇볕을 쬐며 휴식을 취했다.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을 때 목린은 다시 옆에 누워 있던 창을 쥐어 들었고, 이는 갑작스러운 비명을 촉발했다.
창에 길고 두꺼운 뱀이 칭칭 감겨있었다.
큰 반응이야말로 뱀을 자극시킨다는 사실을 몰랐으랴. 하나 목린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목청껏 소리를 질렀고, 뱀 또한 이에 놀라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바로 옷깃 안에서 살짝 드러난 목린의 손목을 문 것이다.
목린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물린 자국이 선명히 피부에 새겨지고, 뱀의 독이 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경악한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눈앞에 있던 다 큰 사내만 한 바위가 갑자기 땅 위로 떠올랐다.
‘모오오옥리이이인아아아아!’
그 아래에서 언영의 해맑은 미소가 불쑥 튀어나왔다.
‘흐하하! 목린아, 나 왔어!’
언영은 거대한 바위를 으랏차차 두 팔로 번쩍 치켜들며 땅속에서 등장했다. 나 이렇게 강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며 구애하기 위함이었다. 충격 먹은 목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목린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목린아!’
주저앉아 있는 목린과 그녀의 부풀어 오른 손목을 본 언영은 지체하지 않았다. 큰 바위를 옆으로 휙 가볍게 던져 버렸다. 땅에 부딪힌 바위가 무거운 굉음을 내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그는 목린을 향해 입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목린이 어깨를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목린의 부풀어 오른 손목이 당겨졌다.
언영은 목린의 가는 팔을 우악스럽게 쥔 뒤에, 그대로 고개를 숙여 뱀의 잇자국이 남은 그곳에 망설임 없이 제 입술을 갖다 댔다. 독이 섞인 혈흔이 마치 귀한 보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겁지겁 빨아들였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처음에 목린은 가만히 앉아 그 행위를 받아들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개미만 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속삭였다.
‘독이…….’
너무 작은 목소리라 언영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으나 대충 무슨 말인지 짐작은 했는지 고개를 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이미 꼬맹이 때부터 여러 번 당해 봐서 이 정돈 거뜬해!’
입술에 피를 묻히고 있는 그의 얼굴은 다소 흉측했으나 이번만큼은 목린도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뱀에게 자주 물렸다고 저렇게 밝게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육지에선 다 크지도 않은 소년 소녀들을 뱀의 먹이로 자주 던져 준단 말인가. 이 얼마나 냉혹한 곳인가.
한편, 한때 자신이 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착각해 자주 뱀을 도발해서 어머니께 엉덩이를 열 번은 얻어맞았던 언영은 겨우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목린을 마주 보았다.
‘위기는 막았으니까 이제 마을로 내려가서…….’
언영의 눈동자가 다시 천천히 내려가면서 그의 말끝도 점차 흐려졌다.
아까 전엔 경황이 없었다. 하나 이성이 돌아오고 주변이 시야에 차기 시작하며 언영은 자연스레 목린의 하얗고 가는 팔목에 눈길을 두었다. 평소엔 소맷자락에 가려져 있던 고운 피부가 소동 탓에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언영은 방금 전 저 위에 그의 입술이 닿았던 사실을 똑똑히 기억했다.
언영의 얼굴이 불처럼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린은 의아해하며 눈을 끔벅였다. 커다란 눈이 호기심을 갖고 옆에서 움직이는데도 언영은 평소와 달리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며 우왕좌왕했다.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하던 그는 불에 덴 것처럼 목린의 손목을 황급히 놔주었다.
‘나, 나는 이만 바빠서!’
언영은 몸을 뒤로 내빼며 일어났다. 벌겋게 익은 얼굴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며 빠져나갈 길을 찾았다. 앉아 있던 목린은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가만히 입술만 오물거렸다. 그러나 언영의 외침에 묻혀 버렸다.
‘부축해 줄 사람들을 불러올게!’
목린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으며 언영이 내질렀다. 그 외침을 끝으로 그는 숲 속으로 다시 사라지는가 싶더니, 잠시 주춤하며 아까 내던졌던 바위가 있던 곳으로 종종걸음 쳤다. 그러고는 바위를 번쩍 들어 다소 정성스럽게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다시 고개도 안 들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날 고맙다는 말도 못했던 미안함이 목린의 마음속에 여전히 불편하게 줄기를 키우고 있었다. 언영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어떤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소 무서운 사람이긴 하나 은인은 은인이었다.
‘아, 안 돼. 그 사람은 나쁜 귀혈족이야.’
목린은 머리를 강하게 휘저으며 언영을 향한 긍정적인 상념을 모두 떨쳐 버리려 애썼다. 땋은 머리 구석구석에 끼워 넣은 꽃들이 떨어질락 말락 했다. 가만히 있으면 더욱 혼란스러워질 듯하여 오라버니의 옷을 만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 *
“형님!”
“컥!”
단순히 언영이 한쪽 팔로 안았을 뿐인데 목현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목현은 언영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태어난 해를 비교했을 때의 얘기고, 외적인 용모만 따졌을 땐 언영이 두 살은 더 많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작년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키가 비슷했는데 이젠 목현이 아우인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언영의 몸이 훨씬 굵직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오셨습니까.”
익문은 이제 언영의 일방적인 방문에 놀라지도 않았다. 또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정말이지 한 해 동안 그렇게 정신없는 술래잡기를 펼쳤는데도 언영은 단 한 번도 섬 주민의 손에 잡힌 적이 없다. 항상 목린이 얼굴만 잠깐 보고 다시 신나게 빠져나갔다. 그것이 괘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게 대단하기는 했다. 대범하다고, 아니면,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한편 언영은 익문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목현을 놓아주고 익문에게 달려갔다. 목현은 해방되자마자 여러 번 헛기침을 했다. 대낮에 아버지와 마을에서 이게 대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장인!”
익문은 그 단어를 듣고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오래 들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언영은 우렁찬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 그렇습니다. 공자께서야말로……. 크흠!”
스스럼없이 달려와 끌어안는 언영의 행동은 수백 번을 반복해도 소름 끼쳤다. 익문은 어색하게 언영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공자, 그……. 목린이를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멋대로 침입하는 건……. 그…….”
“안 됩니까?”
순간 언영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익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언영이 워낙 환하게 웃는 일이 잦고, 과격한 표정 변화가 많아서 그렇지 가만히 있으면 이렇게 냉담한 얼굴이 또 없었다. 눈매가 어찌나 날렵하고 턱선도 매끈한지, 이렇게 정반대의 면모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저 싸늘해진 표정으로는 바로 전쟁을 선포해도 이상할 일 없으리라.
“아니, 안 되는 건 아니고, 그…….”
언영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익문은 크게 안도했다.
“아, 그나저나 장인께서는 왜 제게 말을 높이십니까?”
“예?”
“제 장인이십니다. 왜 구태여…….”
“저는 이것이 더 편합니다.”
괜히 말실수를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느니 이편이 더 마음이 놓였다.
“한데 공자, 이렇게 자주 찾아와도 되는 겁니까? 분명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으실 텐데요.”
내심 그렇다 답하며 당장 떠나 주기를 바랐다.
“목린이를 보기 위해서 밤새 해결하고 왔습니다! 목린이를 만날 수만 있다면 소인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영은 늘 익문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말만 했다. 이번에도 활짝 웃으며 꺼낸 말은 익문이 속으로 끄응 신음을 내게 했다.
“장인, 목린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 목린이는 지금…… 많이 아픕니다.”
어찌 보면 틀린 말은 결코 아니었다. 목린은 실제로 언영이 섬에 등장했다는 얘기만 들리면 시름시름 앓았다.
“예?!”
언영이 소리쳤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방을 빙글빙글 돌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목린이가! 목린이가!”
“공자! 진정하십시오!”
“목린아! 지금 당장 보러 가야겠습니다!”
“그, 그건 안 됩니다! 전염병입니다!”
익문은 생각나는 대로 뱉으며 언영의 팔에 달라붙었다.
“상관없습니다! 목린아!”
차마 소중한 여인의 아비를 거슬린다고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언영은 익문을 두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익문은 팔로 언영의 목을 감싸며 고함을 질렀다. 언영은 그 상태로 익문의 집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장인! 죄송합니다!”
“내려놓으십시오! 공자! 내려놔! 내려놓으라고!”
“말을 놓으시다니 소인은 기쁩니다!”
“내려놔! 주언영!”
‘주언영이 보이면 당장 잡아서 족장 앞에 데려다 놓아라’라는 명령을 받은 이들은 족장이 언영의 품에 안겨 있으니 쉽게 나서질 못했다. 어찌 보면 명령을 지킨 셈이었다. 그리하여 언영은 동네 한복판을 아무런 방해 없이 가로지를 수 있었다. 목린이 있는 초가집 앞에 순식간에 당도했다.
“열어!”
문을 지키고 있던 이는 언영이 달려오자 입을 굳게 악물고 비장하게 있다가도, 그가 안아 들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족장임을 확인하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명령을 내려주는 이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열라고!”
답답해진 언영이 다시 한번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 열지 마! 열지 말게!”
익문이 버럭버럭 던졌다.
문을 지키던 호위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정말 볼품없는 무기로 허공을 찔러 대며 쩔쩔맸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 하나는 언영이 달려오는 속도를 전혀 낮추지 않고 있음이고, 이대로 가다간 문에 정면으로 부딪쳐 언영과 익문의 얼굴에 달걀만 한 혹이 불어날 게 뻔했다. 귀한 아들이 그런 징그러운 상처를 달고 나타났는데 귀혈족이 과연 가만히 있을지 의심되었다. 결국 호위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멈춘 언영은 거칠게 숨을 쉬며 말 그대로 익문을 호위에게 건넸다. 마치 물건을 주고받듯이 행했다. 언영이 너무 자연스럽게 익문을 내미니까 호위도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하나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모두 언영처럼 이렇게 자유롭게 성인 남성을 들어 올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익문을 옮겨 받은 순간 힘없는 호위의 팔이 아래로 확 꺾이고, 덕분에 익문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크게 찧었다.
“아악!”
“목린아, 괜찮아?!”
한편 익문을 건네준 뒤로 바로 집 내부에만 신경을 쏟은 언영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바닥에 앉아서 피륙으로 베를 짜고 있던 목린은 갑자기 언영이 시야에 나타나자 조그만 어깨를 굳히며 호흡을 멈추었다.
그는 볼 때마다 나날이 더 커지고 있었다. 저런 어깨로 달러가면 단단한 돌도 부서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허벅지는 거의 목린의 허리만큼이나 굵었고, 대체 평소에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종아리엔 말랑한 살이라곤 하나도 없고 근육으로 울퉁불퉁했다.
“목린아……!”
언영이 성큼성큼 걸어와 몸을 기울여 목린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넣었다. 그러자 질질 끌려가듯 베틀 앞에 있던 목린의 몸이 일으켜졌다. 언영은 허리를 펴고 자신과 눈높이가 같아진 목린의 볼에 계속 쉬지 않고 뽀뽀했다. 목린의 뽀얀 볼이 꾹꾹 눌리길 반복했다.
“고, 공자! 지금 뭐 하는 짓이요! 잠깐…….”
익문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자? 공자!”
하지만 익문이 따라서 들어오려고 하자 언영은 발을 휙 하고 뻗어 문을 닫아 버렸다. 종아리의 힘만 썼는데도 문 전체가 나가떨어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이어서 언영은 문 옆에 있던 큰 상자를 발로 쓱쓱 밀어서 문 앞에 옮겨 두었다. 익문은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세게 문을 주먹으로 쾅쾅 내려쳤다. 조바심에 순간 감정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목린아! 목린아, 너무 못 참겠다 싶으면 바로 소리를 지르거라! 당장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다!”
“네게 줄 게 있어.”
목린에게 오롯이 집중하느라 그녀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언영이 신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설렘이 만발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목린의 뺨에 얼굴을 비빈 후에 그녀를 옆에 있는 침상 위에 다소곳하게 앉혀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바짝 달라붙어 앉았다. 다리가 닿아서 목린이 어색하게 발을 움직이는 동안, 언영은 등 뒤에 아까부터 차고 있던 기다란 것을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거. 네가 그날 쓰던 그 볼품없는 창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그날이라 함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일컫는 것이었다.
목린에게 무기를 보는 눈은 없었으나 손에 꽉 잡히는 느낌이나 무게를 고려했을 때, 그가 건넨 창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제작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언영의 눈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뿌듯함이 그것을 방증했다. 좋은 자원인 철이 무기를 매끄럽게 뒤덮고 있었다. 목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고맙습니다.”
“돌려서 뒤에 한 번 봐 봐.”
창을 뒤집어본 목린의 미간에 줄이 생겼다.
“어때? 내가 새겨 넣었어.”
“…….”
삐뚤빼뚤한 글씨로 언영목린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목린을 몽린이라고 적기는 했지만, 각고의 노력이 보였기 때문에 목린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앗!”
갑자기 옆에서 언영이 확 끌어안았기 때문에 목린은 창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언영은 목린의 허리를 당겨 안아 더 제 몸에 바짝 붙인 뒤에 그녀의 뺨에 입술을 다정하게 지분댔다.
숲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목린을 처음 발견한 그날, 언영의 세상이 바뀌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와 혼인하겠다고 어머니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린이는 여전히 수줍음이 많았다. 어쩌면 볼에 입을 맞출 때 목린의 낯빛이 떨떠름한 것도 그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물론 그건 좀 다른 문제였지만 언영은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앞으로 사 년만 더 기다리면 돼.”
“…….”
“그러면 이렇게 번거롭게 방문하지 않아도 매일 볼 수 있어.”
언영은 목린을 꽉 끌어안으며 앞뒤로 이리저리 흔들었다.
“네…….”
너무 대답이 없으면 그의 기분을 거슬리게 할지도 모르니까 목린은 차마 눈을 못 마주치고 어색하게 답했다.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언영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다가도 또 금방 얼굴을 찡그렸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네…….”
“전염병이라며.”
목린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네…….”
“난 너만 아픈 건 싫어. 나도 같이 걸려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목린의 아래턱이 잡혔다.
처음에 목린은 언영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병에 걸린 적이 없다고 알려야 하나 고심했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어디에 내리꽂혀 있는지 알게 된 순간, 조금 전 그가 어떤 것을 목적으로 그런 언사를 내뱉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
아무렇지도 않게 볼에 입술을 꾹꾹 내려찍던 사내가 이번엔 진정으로 두 입술을 겹치려 하니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함께 연결된 귀와 목 또한 만지면 데일 것같이 색이 붉어졌다. 언영의 눈이 반쯤 벌어진 목린의 입술에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그에 따라 꿈틀거리는 모습이 목린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내 비장한 각오로 그가 목린의 여린 입술 위에 제 것을 찍었다.
언영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부딪친 입술마저도 달달 흔들리고 있었다. 입술은 물론이고 목린의 어깨를 잡은 손까지 같이 떨었다. 얼굴을 서서히 앞으로 더 들이밀면서 목린의 몸에 더 바짝 달라붙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목린을 품에 꽉꽉 끌어다가 안았다. 하지만 차마 더 이상 나갈 용기는 없어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어린 애기한테 뽀뽀하듯이 입술만 갖다 댔다. 그것마저도 언영에겐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버거웠다.
실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그렇게 달라붙은 상태에서 목린은 기쁨에 요동치는 언영의 심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술 위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피!”
눈을 뜬 목린은 두 손으로 언영을 확 밀어냈다.
“피가 나요! 어떡해!”
목린은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언영의 뺨을 감싸며 울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영의 코에서 피가 주룩주룩 떨어지고 있었다. 삽시간에 지극히 감정적으로 변한 목린의 얼굴을 언영은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양 멍하니 바보처럼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피를 흘리는 사람이 목린이라 오해했을 터였다.
“가만히 계세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목린이 피를 닦을 것을 챙기러 갔다. 한번 이성을 잃은 목린은 좀 전까지의 차분함은 던져두고 사방팔방에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혼잣말하며 당장 쓸 만한 영견을 찾기 위해 방을 급하게 뒤졌다.
분위기가 좀 진정된 건 다분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출혈이 멈추고, 목린은 벌겋게 변한 언영의 인중을 매우 정성스럽게 닦아 주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마냥 히죽거리기만 하던 언영이 난데없이 조용해진 상황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목린아.”
목린은 갑자기 손목이 잡히고서야 뒤늦게 분위기를 읽었다. 영견을 쥔 손이 그의 얼굴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언영의 단단하고 상처가 많은 손이 그녀의 가는 손목을 탁, 하고 힘껏 감싸 쥐었다.
웃음기를 싹 거둔 언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또렷한 눈이 오로지 목린에게만 집중되었다.
“그거 알아?”
소리를 지르지 않고, 호쾌한 박장대소도 터뜨리지 않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고 듣기 좋았다. 이게 어떻게 사람의 음성인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목린의 심장이 콩, 콩, 활발하게 튀어 올랐다.
“네가 나한테 ‘네’ 말고 다른 말을 한 걸 똑바로 들은 게, 이번이 처음이야.”
목린은 입을 살짝 벌리고 탄식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많이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진실한 마음 하나는 분명해 보였다. 목린은 아직 어려서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실과 거짓을 명백히 구분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사내는 확실했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마음을 담아 둔 사람이 내뱉는 말이 ‘네’밖에 없으면 확실히 많이 아쉬울 것 같았다. 늘 해맑게 ‘목린아!’라고 외치며 달려와도 내심 오늘은 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찾아오는 거겠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목린은 목전의 사내에게 살짝 마음이 누그러지고 말았다. 마을의 평화를 위해선 어차피 그와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라고 목린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흐흐흐…….”
하지만 그런 생각도, 그가 다시 괴상망측한 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바보같이 헤벌쭉 올리니 곧장 죽어 버렸다. 손목이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목린은 그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감히 이상한 상념을 뇌리에 담았던 저 자신을 꾸짖었을 것이다.
“흐흐흐흐흐흐흐…….”
“저기, 입으로 피 들어가요.”
“흐흐흐흐흐흐……. 목린아…….”
“정말로 들어가요.”
“흐히흐하흐히흐흐…….”
그렇게 웃더니 언영은 잠시 눈치를 보며 얼른 덧붙였다.
“한 번만 더 뽀뽀해도 돼?”
“……코 밑에 피 묻은 상태에서는 안 돼요.”
“그러면 얼른 닦아 줘.”
그가 얼굴을 불쑥 내밀고 싱긋 웃었다. 목린은 그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단순히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그를 보니 내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는 그에게 허락해도 될 것 같았다. 부족을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