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찍어야 할 의상들이 스튜디오 안으로 촤르르 밀려들어 왔다. 미팅. 회의. 촬영. 인터뷰. 각종 행사. 팬 싸인회.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초대장. 파티. 동종업계 누군가의 결혼식. 인맥을 쌓아서 나쁠 게 없고 눈도장 찍어야 할 곳엔 반드시 걸음을 옮겨야 한다. 한국에 들어오면 일에 어느 정도 치일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도 못 갈 만큼 정신없을 줄은 몰랐다. 마지막으로 선규호와 통화한 게 어제 새벽 두 시였다. 같은 하늘 아래 있어도 만나기가 힘들다니. 이상한 갈증이 목을 긁는 기분이었다.
“자. 마셔!”
매니저 누나가 건네주는 생수를 받았다. 이런 종류의 갈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플라스틱 마개를 천천히 돌렸다. 밤 열한 시가 넘어가는 벽시계를 힐끔거리며 누나를 불렀다.
“나, 집 가고 싶은데.”
“알잖아. 오늘 저기 걸린 거 다 입고 촬영해야 끝나는 거.”
“열나는 거 같아요.”
“약 사 올게. 타이레놀이면 되지?”
“진짜. 이러기예요? 벌써 이틀 밤샜잖아. 좀 보내줘요.”
애원하는 표정을 지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 바닥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나의 이런 허무맹랑한 요구가 먹힐 리 없었다.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설득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생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냉기 서린 물이 식도를 타고 싸늘하게 넘어간다. 선규호는 뭐 하고 있을까. 집에 잘 들어갔을까. 벌써 자려나. 모스크바에서 촬영하는 내내 했던 생각을 한국에 와서도 변함없이 하고 있다니. 아이러니였다.
“오늘만 째면 안 돼요?”
“네가 고딩이니. 째긴 뭘 째? 아, 강 실장님!”
진동 모드로 울리는 핸드폰을 받은 매니저 누나가 미간을 살짝 구긴다. 아, 그래요? 네, 맞아요. 몸을 일으킨 누나가 쉬고 있어, 하고 서둘러 룸 밖으로 나간다. 물끄러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큼지막한 유리창 너머 새까만 어둠에 잠식된 세상이 내려다보였다. 뾰족한 불빛들을 깃발처럼 세워둔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버릇처럼 핸드폰을 꺼내 선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도 없이 건조한 신호음이 차분하게 고막을 달궜다.
-…여보세요오ㅡ.
말끝을 늘이는 선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들었었구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겨우 핸드폰만 귀에 댄 채 전화를 받고 있는 선규호가 그려졌다.
“자고 있었어?”
-…으응.
“미안. 얼른 자.”
-…….
전화를 끊으려는데, 선규호가 나를 불렀다.
-태오오….
“어, 규호야.”
-으음. …보고 싶어.
나는 입꼬리를 가만히 당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선규호가 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바로 갈게.”
통화를 종료하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차 키를 낚아챘다. 룸을 빠져나와 복도를 지나쳐 촬영 장비가 갖춰진 홀 안을 힐끔거렸다. 매니저 누나가 이마에 손을 얹고 통화를 하다가 나를 쳐다봤다.
“답이 없네. 알았어요, 실장님.”
통화를 끝낸 누나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태오야.”
혹시 몰래 빠져나가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게 아닌가 싶어 서둘러 말을 붙였다.
“아씨, 괜히 생수 마셨어. 화장실 가려고. 왜, 무슨 일 있어요?”
“철수하자.”
“네?”
“리 작가 이 개새끼가 일 만들었네. 오늘 화보 엎었으니까 일단 집에 가자.”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갑자기 화보를 엎었다니.
“왜요? 리 작가님 무슨 일 났어요?”
“내가 진짜, 말하기도 민망하다. 참, 머리 아픈 건 괜찮니?”
“어. 괜찮아요.”
“어서 집에 가. 누나가 내일 연락할게.”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도 보고 싶다는 말은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인색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한 번씩 선규호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잠결인데도, 그 목소리에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았다.
* * *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한기가 치밀었다. 척추를 타고 끼쳐오는 소름 탓에 괜히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빨리 선규호를 끌어안고 싶었다. 고작 며칠 못 봤는데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도어 록을 풀고 현관문을 열었다. 반듯한 선규호 신발 옆에 아무렇게 벗어 던진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엘런 것이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엘런이 이쪽을 쳐다봤다.
“언제 왔어?”
“온 지 좀 됐어.”
“왜 온 건데?”
“선규호랑 약속한 게 있어서.”
어쩐지 평소와 달리 엘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무슨 약속?”
엘런이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서둘러 형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스탠드 불빛 너머 잠들어 있는 선규호가 눈에 들어왔다. 곱게 감긴 눈꺼풀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숨소리가 여기서도 느껴졌다. 아까 통화했을 때 선잠에서 잠깐 깼다가 그대로 다시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선규호에게 다가갔다.
“조금 있으면 깰 거야.”
방문에 비스듬히 기댄 엘런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엘런을 노려봤다.
“너 선규호한테 무슨 짓 했냐?”
“내가 너냐?”
“그럼 뭔데?”
엘런이 따라와, 하고 말하곤 먼저 자릴 떴다. 녀석을 따라 베란다 밖으로 나갔다. 차갑다 못해 시린 밤바람이 아무렇게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든 녀석이 불을 붙였다. 필래? 내 쪽으로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자 곧바로 불을 붙여주었다. 휘황하게 빛나는 도시의 불빛 사이로 담배 연기가 헝클어졌다.
“반희용 만나고 왔어.”
“희재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거긴 자꾸 왜 가냐?”
“병실 말고.”
착잡했다. 병실이 아니면 무의식 밑바닥에 갔다 왔다는 말인데,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또 거길 기어들어 간 모양이다.
“박사님 말 못 들었어? 네 영역 아니잖아. 거기 들어갈 때마다 수명 줄어드는 거 몰라?”
헤르셔가 무의식에 접속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든다는 건 박사님을 통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엘런은 멈추지 않고 반희용 꿈에 들어가 차갑고 어두운 그 밑바닥 아래로 찾아갔다. 대체 무슨 심정으로.
“그냥 다 바닥나게 매일 밤 들어갈 걸 그랬나?”
“야!”
엘런이 입에 문 담배를 깊게 빨아 당겼다. 메마른 녀석의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반희용이 얼마 못 살 것 같대.”
“…….”
“의사가 손 놨다고 하더라. 희재한테 마음의 준비 하라고 했다는데.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싶었어.”
“그래서 거길 들어갔다고?”
반희용 동생인 희재가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엘런과 관계된 일을 문자로 남길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들어온 이후 꾸준하게 반희용 병실을 드나들었다는 것도 알았다. 어쩌면 엘런은 나를 구한 것처럼 반희용을 그 어둡고 음침한 무의식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규호가 같이 가준다고 해서 데리고 갔어. 걔 사람 마음 읽는 능력 있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냥. 마지막이니까.”
귀를 의심했다.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선규호가 뭘 읽어?”
필터 끝까지 빨아 당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곤 엘런이 나를 쳐다봤다. 동그란 눈동자가 정말 몰랐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너 몰랐어?”
“미친 새끼, 말이 되는 소릴 해.”
“하. 헤르셔가 아니라서 그런가. 영 감이 딸리네. 난 걔 꿈 안에 들어가는 순간 알겠던데.”
“…….”
“다 읽잖아. 여기. 속 안에 든 감춰진 모든 걸.”
엘런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태우고 있던 담배 맛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