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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무의식의 세계 (28/37)

27. 무의식의 세계

어둠은 곤혹스럽게 나를 짓눌렀다. 마치 손발이 절단당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감각이 전류처럼 몸 전체에 흘렀다. 정체되어 있는 공간에 나 역시 박제된 것 같았다. 생경한 감각이 나의 육체 위로 쏟아졌다. 나는 아마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씁쓸한 감정을 다 느끼기도 전에 선규호가 떠올랐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던 미소가 생각났다. 뭔가에 빠져 있을 때의 모습. 맞닿던 입술의 촉감. 내 아래에 있을 땐 발갛게 달아올라 부끄럽게 귓불을 붉혔던 선규호. 단편적인 기억들이 나를 찔렀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마지막으로 선규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선규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것 같았다. 내 진심은 얼마나 가벼웠을까. 어떤 말도 믿기 힘들었겠지.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널 설득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설득할 수 없었다. 네 감정을 농락한 꼴이 되었으니, 넌 믿을 수 없었을 거였다. 널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널 안고 싶었다. 달콤한 네 품이 그리웠다. 나에게만 보여주었던 달뜬 신음이 다시금 듣고 싶었다. 들짐승처럼 너를 할퀴고 상처 입혀놓고 이 지경이 되어서도 이렇게나 욕심은 뻔뻔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모든 것이 멈추고 내 의식도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었다. 죽음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와르르 무너진 감정들이 정처 없이 나를 들쑤시는 것 같았다. 눈꺼풀 안이 축축하게 젖는 것 같았다. 코끝이 달아오르고 입술 새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꾸욱 어금니를 깨물었다. 한심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이. 선규호는 어떤 표정을 할까. 엄마는. 아저씨는. 감은 눈 밑으로 인생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콰쾅!’

섬광처럼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감은 눈으로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통 어둠이었던 허공이 반으로 쪼개지듯 갈라지고 있었다. 검붉은 실금이 쩍쩍 갈라지는가 싶더니 훅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순간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나는 시체처럼 뻣뻣하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뭔가가 꿈틀거렸다. 쿨럭쿨럭 기침 소리가 고막에 닿았다. 죽어버린 내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금세 몸을 일으킨 무언가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여전히 주위는 어둡고 탁해 사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 존나, 이 새끼.”

쏟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뻗은 손이 나를 일으켰다.

“사람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고 있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엘런이었다.

“뭐야. 이거 상태가 왜 이래?”

힘없이 축 늘어진 나를 바라보며 녀석이 눈썹을 구겼다. 보시다시피 나는 전혀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단지 눈동자만이 모든 걸 감지하는 창구일 뿐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엘런이 나를 당겨 그대로 등에 둘러멨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떨어졌어? 진짜 죽고 싶었던 거야?”

“…….”

“미친 새끼.”

엘런이 욕을 뱉었다. 단단하고 너른 등에 아무렇게 업혀진 나는 녀석이 지껄이는 욕설을 가만히 들었다.

“기태오.”

맞닿은 등이 발음하는 대로 울렸다.

“진짜 어쩌려고 이래.”

“…….”

“선규호가 매일 우는 건 아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뾰족한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심장이 따끔거렸다. 슬픈 표정의 선규호가 아른거렸다. 섬세한 속눈썹을 떨구고 한껏 휘어진 눈매로 처연하게 울던 선규호가 떠올랐다. 진심으로 나를 거부하던 선규호가 다시금 심장을 치고 올라왔다. 걔가 왜.

“씨발.”

꽉 잡아. 엘런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힘이라곤 들어가지 않는 몸뚱이가 녀석의 등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맡아지는 냄새가 변했다. 밑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어둠의 부스러기들이 몸집을 부풀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짓누르던 공기가 집요하게 내 몸을 압박하는 게 느껴졌다.

“카오오오오! 크와아아아!”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상어의 송곳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고 괴성을 내질렀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에 뇌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사납게 날뛰는 맹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쫓아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루였다. 그것을 본 순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내 몸이 마비된 것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이 모든 상황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나는 무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 거였다.

그루는 무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잠재된 의식이나 기억, 꿈 조각 등을 먹어 치우는 망각이었다. 저 커다란 아가리에 먹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모두 소멸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을 터였다. 어둠을 집어먹고 몸집을 부풀린 거대한 그루가 금방이라도 나와 엘런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엘런이 빠르게 몸을 놀리면서 손끝으로 진을 치기 시작했다. 직선의 푸른 선이 손끝을 놀릴 때마다 중력을 비틀고 허공에 무늬가 새겨졌다. 순간 블랙홀처럼 시공간이 휘면서 사건의 지평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열리듯 강렬한 빛 무더기가 둥근 원형으로 벌어졌다. 엘런이 나를 그 안으로 던지고 단숨에 뛰어들었다. 포효하는 구루의 긴 울음이 공간 너머로 사그라들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광속이 따라붙었다. 추락하는 속도가 극도의 두려움을 만들었다. 나의 세계가 잠식되는 순간이었다.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시선이 맞닿자, 선규호가 식탁 맞은편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쪽으로 몸을 기울이곤 손을 뻗었다. 해사하게 웃으면서 형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었다. 닿는 감촉이 기분 좋아서 눈가가 저절로 감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선규호를 쳐다봤다. 잠깐 시선을 놓치면 형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있었던 일이 꿈처럼 여겨졌다. 몸집을 부풀리고 달려들던 그루가 서늘하리만치 머리채를 낚아챌 것 같았는데, 평온한 햇살이 내리쬐는 식탁에 선규호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갓 구워낸 빵 냄새가 고소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크램블 에그와 바삭하게 구워낸 베이컨이 담긴 접시를 내려다봤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모양인지 형이 버터를 바른 빵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작게 웃었다.

“학교 근처로 오피스텔 얻기로 했어.”

“…….”

“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하니까. 사이즈 괜찮은 거 알아봐 주시겠대.”

나는 그대로 일어나 선규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대로 선규호를 끌어당겨 품에 가득 안았다. 작게 웃는 네가 두 팔을 감아 나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왜 그래? 응?”

묻는 목소리가 사근사근해서 목이 자꾸만 메는 것 같았다.

“그렇게 좋아?”

“어, 좋아.”

품에 잔뜩 안고 있어도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좋아해.”

“알아.”

“좋아해, 선규호.”

“…….”

“정말. 좋아해, 규호야.”

눈이 맞닿는 순간 입술을 맞췄다. 가느다란 허릴 그러쥐고 바짝 당기면서 떨어진 입술에 또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선규호는 귓가를 벌겋게 물들이면서 작게 신음했다. 느슨하게 감겼다가 떠진 눈꺼풀이 야했다. 나는 그 입꼬리에 입을 맞추었다. 선규호가 흘리는 웃음소리가 과자처럼 바삭했다.

“야. 왜 이렇게 급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아왔다. 모르겠어. 너무 좋아서. 정말, 네가 좋아서…. 선규호가 내 뺨을 붙들고 시선을 맞춰왔다. 달콤한 웃음이 해사하게 번지고 있었다.

“나도.”

“…….”

“계속 네가 그리웠어.”

선규호의 목소리에 몸 안의 혈관이 한꺼번에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번쩍 선규호를 안아 들었다. 2층까지 성큼성큼 올라갔다. 거실을 지나 내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눕히고 그대로 그 위로 올라탔다. 사랑스러운 선규호가 내 가슴을 밀면서 눈을 맞췄다.

“너무 급하잖아.”

“못 참겠어.”

“얼마나 커졌길래 이래?”

흣. 선규호의 손가락이 아래쪽을 더듬다가 내 중심을 움켜잡았다. 하체에 몰린 흥분감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배어드는 것 같았다. 꽤 오랫동안 자위밖에 하지 않아 몸이 예민해진 탓인지 미약한 자극에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선규호가 내 입술에 슬쩍 입술을 붙이면서, 눈을 감았다. 목을 받쳐 들고 그대로 깊게 입술을 빨았다. 혀를 내밀어 입안을 더듬었다. 데일 듯 뜨거운 혀를 찾아 내 것을 비벼댔다. 내 목에 팔을 감은 선규호가 입술을 벌리고 내 혀를 애무했다. 닿는 촉감. 부딪히는 소리. 팽팽하던 이성적 사고가 뚝 끊기는 걸 느꼈다.

“하아. 하고 싶어.”

“…….”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손바닥에 닿는 살결이 나를 자꾸만 부추겼다. 열기를 머금은 매끈한 피부가 닿는 족족 달아올랐다. 상체를 밀어 올려 젖꼭지를 탐했다. 연한 돌기가 입안에서 빳빳하게 발기하는 게 느껴졌다. 침으로 번들번들하게 젖은 젖꼭지를 앞니로 약하게 깨물자, 선규호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가 더 듣고 싶어 선규호의 몸을 더듬었다.

“가, 간지러워.”

귓불을 건들면서 귓구멍을 혀로 핥자 선규호가 움츠러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를 삼켰다. 만질 수 없을 것만 같던 네가 내 아래서 작게 떨어대기 시작했다. 옷을 잡아 벗기자 둥그스름한 어깨까지 붉은 물결로 넘실거렸다. 나는 곧바로 입술을 가져갔다. 춥, 추읍. 입술에 맞닿는 살결의 촉감에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어깨에서 팔을 타고 손목까지 입을 맞추었다. 어디 한 군데 안 이쁜 구석이 없었다. 새하얀 살결을 더듬듯 빨면서 선규호의 손바닥을 펼쳤다. 다섯 개의 가지런한 손가락이 눈앞에 드러났다. 나는 깨질 듯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고 있던 선규호가 입 맞추던 손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다시금 맞닿았다. 뜨겁고 야릇한 입맞춤이 내 숨통을 잔뜩 헝클어뜨렸다.

“손바닥에 하는 키스가 간청이라는 거 알아?”

네가 내 손바닥을 가져와 방금 내가 했던 것처럼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마른 내 손위로 맞닿아 부드럽게 뭉개졌다. 그 촉감에 솜털이 다 서는 것 같았다.

“간청할게. 태오야.”

“…….”

“제발.”

“…….”

“일어나 태오야.”

이상하게 애처로운 목소리가 심장을 관통했다.

“제발, 기태오.”

그 목소린 어느 순간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품에 가득 안고 있던 선규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시야 가득 들어왔던 익숙한 풍경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또다시 깊고 짙은 암흑이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기태오!”

긴박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쫘악!

“이 새끼야, 정신 차려!”

뺨을 얻어맞았는지 얼얼한 통증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인상을 쓰며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는 엘런이 보였다. 큰 눈이 나를 살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새끼. 여기서 또 의식을 놓으면 어쩌냐?”

“어디야?”

“간신히 위층으로 왔어.”

“아직 죽은 건 아니라는 거네?”

“하, 씨발. 답 없는 새끼. 여기까지 끌고 온 보람도 없이 그따위로 말할래?”

엘런이 나를 쏘아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다시금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무의식이 점점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무겁게 눈꺼풀이 감기려는 찰나, 찰싹하고 엘런이 내 뺨을 때렸다.

“병신아, 진짜 죽고 싶어?”

“으, 음. 졸려.”

강제로 녀석이 내 멱살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아래층에 있을 때보다 몸의 감각이 미묘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엘런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다시 네 꿈 안으로 들어가려면 설계가 필요해.”

“알잖아. 그때도 안 됐던 거.”

“시간이 없어, 그루가 다시 냄새를 맡고 좇아올 거야.”

엘런이 몸을 부축했다. 무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누워 있을 땐 사지가 절단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는데, 한 층 올라왔다고 수월하게 움직여졌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칠어졌다. 체감 온도가 현저히 낮아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한기가 치민 몸에 소름이 자꾸만 돋아났다.

“으, 존나 추워.”

엘런이 두 팔을 감싸 손바닥으로 쓸면서 몸을 움츠렸다. 입김이 새하얗게 품어져 나오고 있었다. 싸늘하게 체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파고드는 추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꿈 아래에 놓인 무의식의 두 번째 단계. 오래전 반희용의 무의식에 들어갔던 때가 떠올랐다.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반희용은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애석하게도 의식불명이었다. 면회조차 엄격해서 가족을 제외하곤 반희용을 만날 수 없었다. 엘런은 이 모든 걸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반희용의 꿈에 잠입하자고 나를 꼬드겼다. 정말 답도 없는 새끼였다. 반 친구 하나를 골로 보내놓고 그 꿈에 들어가자니. 지금껏 붙들고 있던 신뢰조차 조각조각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반희용을 저렇게 만든 건 너잖아.”

“엘런!”

“네가 부르지만 않았어도 저렇게 되진 않았어.”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죄책감으로 오그라든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엘런은 만회할 기회라며 자꾸만 나를 부추겼다.

“그러니까, 반희용을 깨워야지.”

“개소리 마.”

“무의식에 잠입해서 너는 꿈을 설계해.”

“실패하면?”

“그럴 리 없어. 우린 함께 반희용을 데리고 꿈에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 문만 제대로 연결해. 그리고 내려가면 문제없어.”

낡은 옥탑방에 엘런과 나는 나란히 누웠다. 엘런이 반희용의 꿈에 접속하면 나는 꿈과 무의식을 연결할 꿈을 설계할 것이었다. 엘런이 무의식의 문을 열면 그곳으로 들어가 반희용을 찾아 설계한 꿈을 통해 반희용을 데리고 나오자는 이야기였다. 가설로만 놓고 볼 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설계엔 자신 있었고, 엘런은 어떤 상황에서든 꿈을 통제할 수 있었다. 다만, 우린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반희용의 무의식에 잠입했다.

“여기선 설계를 할 수 없어.”

“그게 말이 돼?”

“꿈이 아니잖아.”

“그럼 쟤 저렇게 두고 가야 하는 거야?”

엘런이 반희용을 가리켰다. 깊은 어둠에 잠식된 듯 반희용은 검은 대리석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꿈을 연결할 고리가 전혀 보이지 않아.”

내가 만든 설계가 오로지 꿈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무의식의 나락으로 떨어진 순간 내 능력은 무용지물이었다. 뜻밖의 사실에 엘런도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억지를 부렸다.

“데려가야 해. 태오야.”

“시간이 없어. 그루한테 먹힐 거야.”

덩치를 부풀리고 있는 검은 그루가 금방이라도 우릴 덮칠 것 같았다.

“반희용. 살려주면 안 돼?”

“…….”

“알잖아. 내가 쟤 좋아하는 거.”

엘런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쳐다봤다.

“살려 줘. 여기서 저 녀석을 데리고 나가자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절박함이 녀석의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무의식과 꿈을 이어보려고 애썼지만, 애초에 꿈속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그루가 금방이라도 덮칠 거야.”

“잠깐만.”

“병신아, 빨리!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대리석 위에 반듯하게 누운 반희용에게 다가간 엘런이 상체를 숙였다. 그리곤 창백한 반희용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반희용의 무의식에서 다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반희용의 기억도 꿈도 아닌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반희용의 의식은 그 후로도 되돌아오지 못했다. 우리가 무의식에 내려가기 전에, 이미 반희용은 그루에게 송두리째 집어 삼켜졌다는 걸 알았다. 조금이라도 의식을 찾으려고 했다면, 시체같이 그렇게 누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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