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어쩔 수 없는
서류에 싸인한 순간. 모든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준 감독은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적이었다. 자신의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촬영장소, 시간, 배우 의상이나 아주 작은 소품의 디테일까지. 감독은 까다롭게 신경 썼다. 씬 하나도 허투루 찍는 법이 없었다. 처음엔 드라마랑 달리 영화 촬영은 처음이라서 모든 감독들이 오준 감독처럼 촬영하는 줄 알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오준 감독 특유의 방식일 뿐이었다.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일까. 마치 한번 영화를 찍어보고 온 사람처럼 프레임 안에 담아낼 영상을 기가 막히게 뽑아냈다. 괜히 천재 감독이란 타이틀이 붙은 게 아니었다.
“태오 씨, 괜찮겠어요?”
간밤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맑았다. 어젯밤 형의 기숙사 학원에서 늦게까지 비를 맞았던 탓에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창문 하나가 열리는 게 보였다. 단번에 선규호라는 걸 알았다. 나를 발견하고 놀란 얼굴이 거리가 꽤 됐음에도 다 알 수 있었다. 꽤 긴 시간 비를 맞고 있었던 탓에 제대로 웃어주질 못했다. 나를 보곤 기분이 나빠졌는지 형은 그대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어겨서 내가 더 싫어졌는지도 모른다. 계속 보고 싶었다. 두 품에 가득 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면서 열린 창문을 넋 놓고 바라봤었다. 그냥,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날 싫어해도 좋으니. 그 얼굴을.
“아, 네, 감독님.”
“트럭 뒤로 오토바이를 몰면서 이쪽으로 지나갈 거예요. 저기 표시해둔 지점까지 치고 갔다가 빠지면 되니까. 속력을 최대한 내는 게 중요해요.”
오준 감독은 몇 번이고 리허설로 익힌 씬을 재차 설명했다. 완벽하게 봉쇄한 도로 위엔 8톤 트럭이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세련된 레플리카가 눈에 보였다.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오토바이를 몬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줄 몰랐다. 제대로 기합을 넣고 촬영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태오 씨.”
감독이 차분한 어조로 눈을 맞추며 나를 불렀다.
“지금이라도 촬영이 힘들면 말해줘요. 전문 스턴트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니까.”
“직접 하고 싶어요. 배항조가 시시하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사람은 아니잖아요.”
우스갯소리에 오준 감독이 작게 웃었다.
“좋아요. 기태오 씨. 촬영 시작합니다. 흠, 여기 눈 밑 그러데이션이랑 입술 색만 조금 더 죽이죠.”
옆에 따라붙어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빠르게 얼굴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브러쉬가 눈 밑을 따라 명암을 만들자 삶에 찌든 피폐한 사내의 얼굴이 그럴듯하게 묘사됐다. 붉은 입술 색을 죽이려고 파운데이션을 덧바르는데 속이 이상하게 메스꺼웠다. 뭔가가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불편한 감각이 배 속을 휘저었다. 요즘 거의 잠을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했다. 틈만 나면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여전히 선규호에게선 답이 없었다. 시간이 생길 때마다 기숙사에 찾아가 면회도 신청했지만, 선규호는 단 한 번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거절당할 때마다 내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깨달았다.
“장갑은 이걸로 껴요. 색 맞추는 게 화면에도 잘 드러나니까.”
“네.”
잠깐의 틈을 타 핸드폰을 꺼냈다. 얼른 단축번호를 눌러 전화를 건다. 일정한 신호음이 이어지고 있지만, 쉽게 전화를 받아주지 않는다.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축이며 숨을 골랐다.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은데, 오늘도 선규호는 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익숙한 기계음이 선규호를 대신하고 있었다. 가슴이 다시금 답답해졌다. 짧게 한숨을 내쉬곤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문자를 찍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너에게 문자를 남겼다.
[규호야.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너에게 그런 짓을 하기 전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어. 지금이 너무 괴로워. 너무 힘들어. 날 싫어하는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나는 그대론데. 나를 미워하는 너를 보는 건 너무 힘들어. 규호야. 규호야. 나 어떻게 해야 할까. 알려줘. 네가 하라는 대로 할 게 제발, 내가 어떻게 해야…]
문자를 바라보다다가 나는 천천히 지웠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게 병신같았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침을 삼켰다. 손가락으로 문장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기다려줘, 형. 오늘 만나러 갈게.]
마음을 담은 문장이 볼품없었다. 그래도 네게로 가닿는다면 좋겠다. 뜨거운 볕이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나는 서둘러 헬멧을 쓰고 리허설 때처럼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속력을 내야 한다는 것만 빼면 그다지 어려운 촬영은 아니었다. 8톤 트럭 꽁무니를 쫓다가 폭발하는 트럭을 피해 정해진 방향으로 핸들을 꺾으면 될 일이었다. 리허설 때도 어렵지 않았다.
시동을 켜고 속력을 낼 준비를 했다. 감독의 큐 싸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빠르게 출발시키며 몸을 낮췄다. 굉음이 고막을 날카롭게 갈라냈다. 육중한 8톤 트럭 뒤를 바짝 쫓았다. 도로에 표시된 붉은 선이 나올 때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웅장한 소릴 내며 달리는 트럭이 코앞에 닿을 것만 같았다. 저 멀리 방향을 꺾어야 할 붉은 선이 보였다. 나는 빠르게 시간을 쟀다. 그 순간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처럼 복통이 치밀었다. 아차 하는 사이 표시된 붉은 선을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레플리카가 허공 위로 튀어 올랐다.
끼이이이익! 쾅!
몽롱했다. 꼭 꿈같이. 티브이 화면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인파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두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옆구리가 터졌는지 피가 흥건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상황들이 휙휙 변했다.
“세상에! 태오야.”
“태오 씨 정신 차려요.”
“어서 빨리.”
“어머. 태오야….”
태오. 태오야…
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구급차가 왔는지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여기예요! 빨리. 기태오 씨 내 말 들려요? 언제 사고가 났죠? 충격 주면 안 되니까 한 번에 옮겨. 하나 둘 셋…. 잡다한 소리가 고막에 흔적을 남겼다가 흩어졌다.
“이봐요. 기태오 씨. 대답할 수 있겠어요?”
“…….”
“기태오 씨. 내 목소리 들려요?”
“…….”
“기태오 씨. 기태오 씨?”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뜬 눈으로 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간다고 문자 보내지 말걸. 네가 기다리면 어쩌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지금껏 무시했던 것처럼. 이번 문자도 무시해버렸으면 좋겠어. 그래 주었으면 해. 기다리지 마. 기다리지 마. 규호야.
눈꺼풀 밑으로 모든 것이 새까맣게 점멸한다. 어떤 생각도 더는 할 수가 없다. 부서져 망가진 몸이 축 늘어졌다. 순간 무서워졌다. 죽음이 이토록 가깝게 조우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감은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마지막까지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이 툭 하고 끊겨 나갔다. 나는 천천히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꼈다.
감은 눈 밑으로 달콤한 선규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보고 수줍게 웃는 얼굴. 귓불을 붉히던 표정. 속눈썹을 느리게 감았다 뜨면서 나와 눈을 맞추던 선규호. 너무 예뻐서 심장이 뻐근해지던 눈빛, 미소. 속삭이던 목소리.
시끄러운 소음이 점점 멀어졌다. 순식간에 의식이 새카맣게 꺼져버렸다.
* * *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이 캄캄해서 내가 몸을 떨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슴께가 죄어들었다. 강이준이 휘청대는 나를 부축했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고막이 파열된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규호야, 선규호!”
나는 아마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입은 것 같았다. 강이준이 나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거니까. …하지 말고…그러니까.”
강이준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꽉 조여대고 있는 명치 끝이 아려서 아랫입술을 엉망으로 씹어댔다. 강이준은 빠르게 차를 몰았다. 막혀서 곤란한 길을 신속하게 걸러 차를 몰았다. 신호 대기에 차가 멈추자 압박되던 심장이 조급하게 뛰어댔다. 불쑥 강이준의 손이 내 턱을 그러쥐었다. 고개가 돌아간 줄도 몰랐다. 엉망으로 흐려진 눈가로 흐릿한 강이준이 보일 뿐이었다. 형이 작게 탄식했다.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
짓이겨진 입술을 이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빼주며 나를 안타깝게 쳐다봤다.
“무서워. 형. 걔, 걔가….”
말조차도 꺼내기 두려웠다. 입술 밖으로 나간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어금니를 꾸욱 물었다.
“피 나, 그만 깨물어. 규호야.”
“이딴 게 뭐가!”
“…….”
“뭐가 중요해….”
기태오가 촬영하다 사고를 당했는데. 어떡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걔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자 하고 전화하는데 다 무시했어. 만나러 기숙사에 여러 번 왔을 때도 그냥 돌려보냈다고.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했지만, 다 거짓 같았어. 믿을 수 없었어. 그런데 이건 반칙이지. 어떻게 이래. 어떻게.
미끄러지듯 병원 입구에 차를 세웠다. 빠르게 보조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고가 딱 멈춘 것처럼 어디서 널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때마침 접수처에서 기태오에 관한 정보를 알아본 강이준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가자, 방금 수술 들어갔대.”
무릎 밑으로 다리가 푹 꺼지는 것 같았다.
“규호야, 일어설 수 있겠어?”
“시, 심각한 거 아니지?”
“아닐 거야.”
무릎을 접고 몸을 낮춘 강이준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현기증이 핑 하고 뇌를 흔들었다. 눈꺼풀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어지러움에 인상이 써졌다. 그 순간 뜨뜻미지근한 촉감이 코 밑으로 흘러내렸다. 눈앞이 팽 돌았다. 감돌고 있던 핏기가 싹 가시는 게 느껴졌다. 아마 나는 그대로 쓰러진 것 같았다. 아득하게 나를 부르는 강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눈을 뜬 순간 손목이 아렸다. 통증이 느껴지는 손을 들어보니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 혈관을 한 번에 못 잡고 꿰뚫은 바늘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멍청하게 정신을 놔버렸던 모양이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찌를 듯이 울리는 골이 헝클어졌다. 잠깐 혼미해진 눈앞으로 엘런이 보였다.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은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듯이 쳐다봤다.
“어디 가려고?”
“태오한테.”
“가만히 있어.”
강압적인 손이 내게로 뻗어왔다. 팔을 붙든 녀석의 눈동자가 닿을 듯이 코앞으로 떨어졌다. 침대에 강제로 눕혀놓곤 시선을 맞추었다. 시원스런 눈매에 담긴 새까만 동공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너도 환자야. 안정을 취해야 한대.”
“태오는? 수술은 끝난 거야?”
“…….”
“왜 아무 말도 않….”
점점 어둡게 변하는 엘런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떨군 녀석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규호야.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다시금 엘런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불길한 불안에 습격당했다.
“기태오.”
“…….”
“걔, 죽었어.”
경중의 무게가 없는 건조한 목소리가 나를 짓눌렀다. 내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피식 웃었다. 개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농담이야.”
그대로 주먹으로 녀석의 명치를 날렸다. 훅 하고 끓어오른 화가 가시지 않았다.
“네 주먹 존나 아프네.”
“그따위 농담을 왜 해?”
“너, 계속 표정이 구렸잖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녀석의 팔을 쳐냈다. 빨리 기태오에게 가야 했다. 시답지 않은 농담 때문에 가슴이 철렁한 걸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링거를 뽑아내고 바닥에 두 발을 딛는 순간, 엘런이 나를 붙잡았다.
“뭐야. 벌써 기태오 용서하려고?”
“신경 꺼.”
“너 진짜 기태오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밉고 배신당한 기분만 가득했는데. 기태오가 사고 났다는 소릴 듣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무사하기만을 바랐던 간절한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기태오가 내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나는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고갤 돌려 엘런을 쳐다봤다.
“어. 나 걔 좋아해.”
* * *
기태오는 성 꼭대기에서 물레에 찔려 저주받은 공주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녀석 앞에 섰다. 창백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품 좋은 몸이 못 본 사이 야위어 있었다. 계속 태오 옆을 지켰을 아줌마가 나를 쳐다봤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붓고 벌겋게 짓물러 있었다.
“규호 왔구나.”
“태오는….”
“어. 괜찮아. 다리 수술 잘됐다고 의사 선생이 그러더라.”
새까맣게 타 잿더미가 됐을 폐부에 안도의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수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오른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압박붕대로 단단히 감싸진 다릴 본 순간 심장 끝이 조이는 것 같았다.
“잠깐 태오 좀 봐주겠니?”
“…….”
“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챙길 것도 있고.”
“네, 다녀오세요.”
아줌마가 병실을 빠져나가고 나는 주저앉듯 녀석 옆에 쓰러졌다. 모두 내 잘못 같았다. 그냥 다 내가 몹쓸 짓을 저질러 기태오가 이렇게 된 거 같았다. 한번 헝클어진 마음은 주워 담을 수 없이 넘치고 있었다. 네가 했던 짓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에도 지금 이 순간엔 어떤 의미도 없는 것처럼 하찮게 여겨졌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수술이 잘됐으니, 걷는 데 지장은 없을 터였다. 강이준과 함께 병원으로 오면서 들었던 온갖 잡다하던 생각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웃음이 났다. 나는 그대로 태오의 가슴에 머릴 기댔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숨결과 함께 생생한 고동 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여보, 진정 좀 하고.”
“애가 안 깨잖아요. 벌써 며칠을 저러고 누워 있는데 의사 나오라고 해! 담당의 어디 갔어?”
나의 기도가 무색하게, 기태오는 며칠이 지나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정밀 검사를 몇 번이고 해봤지만, 어떤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줌마는 기어이 의사의 멱살을 잡고 난리를 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방심했던 순간 기태오가 손가락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가 닿을 수 없이 먼 곳으로. 완전히 나만 혼자 내버려두고.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깊게 잠에 빠져 있는 기태오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기태오를 흔들었다.
“기태오. 일어나.”
“…….”
“어떻게 이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
“빨리! 장난 그만 치고 일어나라고. 이 나쁜 새끼야.”
꿈쩍 않는 기태오가 점점 흐릿해졌다. 나는 무너지듯 태오 위로 쓰러졌다.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다. 데리러 온다고 했으면서. 기다리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나를 혼자 두고. 나만 혼자. 버려두고. 어떻게 그래. 어떻게 나한테.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 너 밉다고 한 것도. 다신 보고 싶지 않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너 아니면 안 되게 길들여놓고 태오야. 제발. 돌아와. 일어나줘. 보고 싶어. 안고 싶어. 다시 너와 사랑하고 싶어. 태오야. 하아. 태오야.
녀석의 품에 머릴 묻었다. 금방이라도 네가 일어나 내 머릴 만져줄 것 같았다. 하지만 기태오는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