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괴로운 마음
기어이 엘런이 일을 쳤구나, 싶었다. 도무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침대에 묶여 있는 선규호를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사이 엘런에게 무슨 짓을 당했을까 봐, 머리꼭지가 도는 것 같았다. 서둘러 침대 쪽으로 뛰었지만, 룸 안의 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캄캄한 암흑이 시야를 덮쳐왔다. 엘런에게 또다시 당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선규호를 무사히 데리고 이 빌어먹을 꿈에서 빠져나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더듬거리듯 앞으로 발을 뻗는데 훅 하고 몸이 사정없이 밑으로 추락했다. 금방이라도 저 밑바닥 어딘가로 곤두박질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에 번쩍 눈이 떠졌다.
“하아. 하. 하아.”
가쁜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눈앞이 컴컴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 이렇게 튕겨 나올 줄 몰랐는데, 쪼개질 것 같은 두통에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엘런은 벌써 돌아간 모양인지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엘런이 일방적으로 꿈을 종료했다는 게 이상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나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자신의 꿈 안으로 끌어들였으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녀석이 생각을 바꿨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자 찌를 듯한 두통에 몸이 휘청거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선규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빨리 엘런을 찾아야 했다.
방문을 연 순간, 눈을 의심했다.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오는 선규호가 보였다.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규호야!”
나는 다급하게 형에게 다가갔다. 어째선지 나와 눈조차도 마주하지 않고 성큼성큼 자신의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거실을 가로질러 선규호에게 다가갔다.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한데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라질 것 같은 선규호의 손목을 낚아챘다. 힘줘 당기자 선규호가 내 쪽으로 끌려왔다. 우리의 시선이 다시금 부딪혔다.
“놔.”
차가운 목소리가 고막을 꿰뚫었다.
“왔으면서 왜, 그냥 가려고 해?”
“……하.”
선규호 입에서 새어 나온 한숨 소리에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맞추던 시선을 금세 피해버렸다. 조급해진 심장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다급하게 선규호의 턱을 끌어올렸다.
“나, 봐. 규호야….”
내 쪽으로 고갤 돌린 선규호가 매섭게 내 손을 내쳤다. 온기가 사라진 눈동자로 가차 없이 나를 향해 입술을 놀렸다.
“존나 네 장단에 놀아나는 거 보고 재밌었겠다?”
간당간당하던 뭔가가 심장 아래로 뚝 끊어졌다. 조여드는 긴장감에 손발이 차갑게 굳는 것 같았다. 나를 튕겨내고 결국 엘런은 선규호에게 전부 까발려버린 모양이다. 짐작 못 한 건 아니지만, 실제로 일이 터지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몰라서 물어?”
울분과 상심이 섞인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왜. 왜! 매일 밤 내 꿈에 들어와 그딴 짓을 한 건데?”
알아버렸구나.
“말해. 이유가 뭐야.”
어떤 말로 너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첨엔 그냥 골려줄 생각이었어. 나 존나 싫어했잖아. 닿기만 해도 소름 돋는단 얼굴로 무시하고. 그때 너 진짜 재수 없었어. 그냥 너도 괴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깨면 기억도 못 할 꿈이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야. 정말 믿어줘. 네 꿈에 들어간 건 맞는데. 엘런이 끼어들어서 자꾸 일이 꼬였던 거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거 아냐.”
“그래, 다 꿈이지. 네 말처럼.”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수긍하듯 읊조렸다. 나는 아주 잠깐 네 감정에 기대고 싶었다. 나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도 있다면, 그 작은 불씨에 희망을 걸고 싶었다. 차가운 감정이 날을 세우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더라도. 네 본심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씨발.”
“…….”
“어쩌냐. 난 네가, 용서가 안 되는데.”
꾸욱 다문 입술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게 보였다. 선규호의 울분에 찬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본 순간, 심장 부근이 꾸욱 하고 죄어오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통증 때문에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안 돼. 하나도.”
선규호가 몸을 돌렸다. 방문 손잡이가 눈앞에서 돌아갔다. 날 이렇게 홀려놓고. 온통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마음 한 올 남김없이 이렇게 묶어놨으면서.
“엘런한테 휘둘리고 싶지 않았어.”
“…….”
“그 새끼가 널 어떻게 할까 봐. 겁이 났어.”
“…….”
“넌, 내 마음 알고 있으니까. 그 새끼 말보다 내 말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 존나 연기 잘하네.”
씨발, 연예인 아니랄까 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에 살점이 찢기는 것 같았다.
“네 빌어먹을 그 능력으로 내 꿈에 들어와서 뭔 짓을 했는지. 다 보고 왔는데. 끝까지 개소리다?”
“규호야.”
“나 좋아한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잖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감정까지 모두 부정하고 있는 선규호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손을 뻗어 그대로 선규호를 끌어당겼다. 기겁하고 발버둥 치는 너를 두 팔 가득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오해야.”
나를 밀어내는 선규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놔. 이 개새끼야.”
선규호가 주먹으로 사정없이 나를 쳤다.
“좋아해. 좋아해, 규호야.”
내 목소린 하나도 안 들린다는 듯이 거칠게 내 품을 거부하던 선규호가 떨어져 나갔다.
“씨발!”
“…….”
“넌 좋아하는 사람 꿈에 들어와 그딴 짓 하냐? 반 애들 앞에서 따먹고 그래? 꿈에서 할 짓 못 할 짓 다 하다 보니까 현실에서도 그 짓 하고 싶어서 나 깔았냐?”
상처받은 건 넌데, 무너져 내린 건 내 심장이었다.
“…규호야.”
“내 이름 부르지 마!”
코끝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목구멍 안에서 뭔가가 넘어와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네가 긋고 있는 선이 분명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칠게 방문이 열렸다. 동그란 뒤통수가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어떤 여지도 없이. 나는 너에게서 버려졌다.
어떤 밤을 보내고 어떤 생각으로 새벽을 맞이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선규호는 집을 나갔고 내가 취한 어떤 연락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온 신경이 선규호에게 꽂혔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꿈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저절렀던 일들을 생각해봤다. 결과적으로 엘런이 반희용에게 저질렀던 짓과 다를 바 없는 짓을 나는 선규호에게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잘못한 걸 알았을 땐 용서를 먼저 구했어야 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간과한 건 내 잘못이었다. 호기심에 널 찔러보고 골려줄 생각에 마음대로 너를 조종하면서 못된 짓을 한 건 사실이니까. 너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는 게 마땅한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알량한 자존심. 엘런에게 무시당하기 싫은 치기 어린 마음. 병신같이 우선순위에 무엇을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선규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이준이 전화로 며칠 자기네 집에 머물 것 같다는 소릴 덤덤하게 전했다. 선규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그의 집에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며칠을 찾아가도 허탕이었다. 일부러 피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집에 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날짜가 칼끝처럼 날카롭게 나를 헤집고 지나갔다.
홍콩에서 부모님이 오자, 선규호는 대학 입시를 핑계로 기숙사 학원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연락이 닿지 않은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초조함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몇십 통의 전화와 문자를 보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사과를 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은 쉽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선규호가 나를 봐줄 이유가 무엇도 없다는 것이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어떤 식의 방법으로도 너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에 숨이 막혔다.
그럼에도 미치겠는 건. 네가 그립고 보고 싶다는 거. 네 숨결, 웃음. 이젠 가 닿을 수 없는. 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너에 관한 모든 것들에 목이 말랐다. 매일 밤 네 꿈에 몰래 발을 들여놓던 날들을 후회하면서도 다시 널 만나고 싶은 마음에 꿈속으로 찾아가고 싶었다. 참 염치도 없었다.
무너지고 있는 건 내 심장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칼같이 나는 버려졌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딘 시간을 걸으며 일과를 견딜 뿐이었다. 무기력하게 침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몇 주를 보냈다. 보다 못한 엄마가 등짝을 후려치면서 성질을 부렸다. 고상한 척하느라 숨기고 있던 성깔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미친놈처럼 굴 거냐며 노발대발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척 침대에 엎어져 눈을 감아버렸다.
이 와중에도 선규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만 생각하면 심장이 먹먹해졌다. 나를 쳐다보던 마지막 눈빛이 송곳처럼 나를 찔렀다. 우리가 나누었던 입맞춤과 마음을 섞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진 것 같아 속상했다. 너에게 용서를 어떻게 구해야 할까. 답답한 마음에 습관처럼 한숨이 쏟아졌다.
“미치겠다, 유화야. 쟤 왜 저런다니?”
보다 못한 엄마가 매니저 누나를 집으로 불렀다. 드라마가 끝났기에 망정이지 촬영 도중에 이딴 식으로 컨디션 조절 못 하고 감정에 끌려다니면 인생 조지는 거라고 쓴소리를 한 시간 반가량 듣다 보니 뇌가 멍했다. 솔직히 뭐라고 하는지 알 게 뭐야, 싶었다. 다 부질없고 의미 없었다. 빈 껍데기 위를 지나가는 잔소리일 뿐이었다.
“기태오.”
“…….”
“시나리오 읽어봤어?”
“아뇨.”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준 감독의 시나리오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땐 단역이나 다름없는 배역이었는데, 그사이 오가는 말이 달라졌는지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준 감독이 나를 ‘배항조’ 역에 캐스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왔다는 것이었다. 회사 측에선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내겐 더없이 좋은 기회임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오준 감독의 ‘낮달의 바다’는 지난 3년간 오준 감독이 공들여 작업한 시나리오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번 이슈화되고 있었다. 잘하건 못하건, 캐스팅이 됐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어째선지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연애하니?”
순간 눈이 마주쳤다.
“하여튼, 까져가지고.”
다 알겠다는 듯이 매니저 누나가 씨익 웃었다. 외꺼풀인 눈매가 휘어졌다가 금세 진지한 표정이 됐다.
“그게 아니라….”
“썸타는 거야?”
그런 거라면 차라리 좋겠다. 이미 쫑나버린 관계에 어떤 이름도 없다는 것이 새삼 슬퍼졌다. 나는 천천히 고갤 흔들었다.
“없어요. 그런 거….”
그냥 둘러대기 위해 한 말인데, 그 말이 어떤 힘을 갖는 건 무서웠다. 머릿속으로 우려했던 것을 말로 뱉는 순간, 모든 게 끝난 것만 같이 불안했다. 선규호가 내가 보낸 문자를 봤을까. 음성 메시지는 들었을까. 부재중 통화 목록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렇지 않게 나를 차단해버린 건 아닐까.
“태오야.”
“…….”
“이번 촬영에 사활이 걸린 거 알지?”
“…….”
“이 한 편의 영화가 네 미래를 바꿀 수도 있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멍했다. 심장이 구멍이 난 것처럼 허했다. 매니저 누나가 가고 침대에 엎어졌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도무지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다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 오준 감독의 시나리오니, 기회니. 내 미래가 정말 영화 한 편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이라도 하루아침에 흥행 참패를 맛볼 수도 있는 일이고. 오준 감독이라고 매번 승승장구할 거란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산 있는 도전임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밑으로 선규호가 스며들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규호야.
내 말 들려?
눈가가 뜨거웠다. 팔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꾸욱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목구멍에 뭔가가 일렁거려 입술 밖으로 소리가 샐 것 같았다. 자꾸만 어깨가 들썩거렸다. 왜 나는 너한테 그런 짓을 했을까. 병신같이.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도 모르고. 이토록 마음 아플 줄 모르고….
* * *
“괜찮냐?”
강이준이 차가운 아이스티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무기력하게 강이준을 올려다봤다.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이 세련되어 보였다. 아마 일 때문에 밖에 나가려는 모양인지 깔끔한 슈트 차림에 새로 맞춘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닿을 듯 말 듯 맡아지는 향수 냄새가 상큼하게 코끝을 스쳤다.
“어디 가?”
“출판사.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어.”
혼자 있기 싫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강이준이 살짝 입술을 말아 올리며, 같이 갈래? 하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느슨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며칠 밀린 공부, 학원과 과외 스케줄. 봐야 할 인강. 빼곡하게 처리해야 할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노인처럼 소파에 납작하게 엎어졌다.
“농땡이 너무 피우는 거 아냐?”
“그래도 된다며.”
“하긴 기숙학원 들어가면 방귀도 맘대로 못 뀐다.”
웃으라고 한 소리에 마음이 착잡했다.
“안 웃냐?”
“…….”
“왜 이렇게 낙담인 건데?”
손가락을 뻗은 강이준이 내 볼을 가만히 쓸었다. 미끄러지던 손가락이 가볍게 턱을 그러쥐고 살짝 올려 눈을 맞추게 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강이준의 마음이 문장이 되어 떠오르는 게 보인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활자로 쏟아졌다. 생각해보면 아무 말도 없이 며칠 신세 진다고 눌러앉은 게 벌써 사흘이나 됐다.
“얼른 가. 늦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신경 쓰이게 하지 말든가.”
그러게. 신경 쓰이게 하지 말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어째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걸까. 눈만 감으면 기태오가 떠올라 심장이 어떻게 될 것만 같다. 기태오가 보여준 이중성에 치가 떨리다가도 기태오와 보냈던 기억들이 나를 찔러댔다. 버스 안에서 내 팔꿈치에 닿을 듯 말 듯 부딪혔던 온기라거나 입 맞추던 그 입술의 촉감이라거나. 날 바라보던 그 눈빛과 내 이름을 부르며 흥분할 때의 숨소리 같은 게 나를 괴롭게 했다.
“다녀올게.”
“응.”
강이준이 나가고 텅 빈 오피스텔에 남아 쓰러지듯 소파에 누웠다. 발코니 창 너머 비스듬히 내려앉은 낮달이 발자국처럼 찍혀 있었다. 팔만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원을 꺼놓은 지, 사흘. 집을 나왔을 때와 같은 시간으로 멈춰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도로 테이블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네가 개새끼고 쓰레기고 변태 새끼라는 걸 알면서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는 내가 정말 싫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강이준의 집에서 나왔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시에 집중하고 싶다는 핑계로 기숙사 학원에 들어왔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던 내게 이곳 생활은 한마디로 좆같았다. 강이준 말마따나 방귀도 허락 맡고 뀌어야 할 정도로 정해놓은 규율과 규칙이 엄격했다. 방 배정을 받은 첫날부터 속이 좋지 못했다. 머리가 울렁이고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자꾸만 신물을 토해대느라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침대에 누워 꼼작도 할 수 없는데, 체력관리를 못 했다는 이유로 벌점을 받았다. 하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통화권을 박탈당했을 땐 내가 지금 감옥에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눈에 들어온 낯선 천장은 언제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어김없이 기태오가 떠올랐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쓸 때마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상처처럼 녀석이 신경 쓰였다. 마지막에 봤던 얼굴이 자꾸만 잊히지 않았다. 감긴 눈 밑으로 잠이 끼어들었다. 온종일 시달렸던 탓에 침대에 누우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나는 곧바로 꿈 안으로 떨어졌다. 마치 잠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엘런이 건들건들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해왔다.
“왜 왔어?”
“심심할까 봐.”
“지랄하지 말고 꺼져.”
엘런이 푸핫, 하고 웃으면서 내 머리칼을 헝클었다. 무슨 이유인지 녀석은 틈만 나면 불쑥 꿈 안으로 찾아왔다.
“넌 생긴 거랑 다르게 말하면 존나 깨는 거 알아?”
“좆까.”
신경질적으로 녀석의 손을 쳐냈다.
“왜. 머리카락 정리해주는데, 싫어?”
“만지는 거 싫어.”
“기태오가 만질 땐 가만있었잖아.”
“걔 얘기가 왜 나와?”
짜증이 솟구쳤다. 심신의 피로로 까무러쳐 잠만 자도 부족할 것 같은데, 이 빌어먹을 꿈은 끝도 안 날 것 같았다. 엘런은 손을 뻗어 허공에 가볍게 원을 그렸다. 동그란 빛이 손가락 끝에서 떨어졌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눈으로 보는 건 좀 신기했다. 허공에 오묘한 오로라를 품은 원이 드러났다. 손바닥만 했던 원이 점차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커진 오로라가 영롱하게 물결쳤다.
“이게 뭐야?”
“이리 와.”
안으로 들어간 엘런이 오로라에 감겨 흐릿흐릿해진 얇은 막을 뚫고 손을 내밀었다.
“설마, 겁먹은 건 아니지?”
고작 꿈일 뿐인데, 겁먹을 리가 없다. 손을 잡는 순간, 훅 하고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기분이었다. 아주 작은 공기 방울처럼 몸이 붕붕 떠올랐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차원이 다른 세계로 떨어졌다. 눈을 뜬 순간 부드러운 모래가 만져졌다. 푸른 하늘엔 색색별의 행성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별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펼쳐졌다. 하늘이라기보다 우주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엘런은 익숙한 공간엔 들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쳐다봤다. 지면 위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바닷속인가 눈을 의심했다. 몽실거리는 구름 사이로 커다란 혹등고래가 유유히 날고 있는 게 보였다. 홀로그램일까. 막연한 생각을 하는 사이. 또 다른 오로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밝고 강렬한 빛이 눈이 부셨다.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엘런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붕 떠오른 몸이 자석처럼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번쩍 눈을 떴을 때 새까만 어둠이 온몸을 휘감았다. 화려한 이전의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었다.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발밑은 끝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다. 일렬로 이어진 디딤돌만이 이 세계의 전부였다.
“여긴 뭐야?”
“누군가의 무의식.”
“무의식?”
엘런은 잠깐 생각하듯이 눈을 내리깔고 미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곳에 나를 끌고 온 이유가 궁금했다. 엘런은 말을 아꼈다. 징검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한기가 들었다. 반팔 아래로 소름이 끼쳐서 자꾸만 팔을 문질러댔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엘런이 우뚝 멈추었다. 낡은 문이 눈앞에 있었다. 쇠로 징을 박은 투박하고 육중한 문이었다. 손잡이를 당겨 엘런이 문을 열었다.
“여기에 그 애가 있어.”
“…….”
“너랑 닮았다고 했던 애.”
엘런의 표정은 어째선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엘런을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틈에 여름방학이 끝나버렸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을 것 같던 기숙사 생활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알람 소리에 눈이 떠졌다. 똑같이 반복되는 패턴임에도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묘했다. 하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맸다. 시름시름 앓는 사람처럼 거울 속 내 얼굴은 창백했다. 살이 빠진 탓에 유난히 갸름해진 턱이 신경 쓰였다. 생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나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기태오도 학교에 오겠지. 어떤 얼굴로 녀석을 봐야 할지 답답했다.
선을 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토록 괴로운 마음은 들지 않았을까. 가장 화가 나는 건, 녀석이 나를 그런 식으로 농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음을 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오해할 것도 없고, 명백한 사실인데. 자꾸만 기태오의 마지막 눈동자가 떠올랐다. 상처받은 눈으로, 애틋하게 심장을 할퀴던 그 시선이 신경 쓰였다. 앞뒤 상관없이 믿고 싶어질 만큼, 간절하던 녀석의 태도에 괴로웠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문자, 부재중 통화. 몇 번이고 녀석이 학원으로 찾아와 면회 신청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끝까지 녀석을 만나주지 않았다.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또다시 그 눈으로 나를 본다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서둘러 가방을 어깨에 메고 기숙사 학원을 빠져나왔다.
볕이 뜨거워 금세 정수리가 뜨끈해졌다. 아침인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인강을 플레이했다. 조금만 멍해져도 생각하기 싫은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강사의 목소리라도 듣고 있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유독 하늘이 새파랬다. 손을 뻗으면 손바닥 가득 파랗게 물이 들 것 같았다. 머지않아 버스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길을 따라 걷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낯선 사람들 틈에 낯익은 얼굴이 이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기태오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형.”
“말 걸지 마.”
녀석을 외면하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녀석을 피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나를 따라오는 녀석이 느껴졌다. 곧바로 녀석이 내 손목을 그러잡았다.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완강하게 붙들린 탓에 자꾸만 녀석이 이끄는 대로 몸이 끌려갔다.
“놔. 놓으라는 말 안 들려?”
“얘기 좀 해.”
“놔.”
골목길 담벼락에 녀석이 나를 밀어붙였다. 바짝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쳐다봤다. 맞닿는 눈동자에 몸이 데일 것 같았다. 나는 힘을 줘 녀석의 가슴팍을 세게 밀쳤다.
“꺼져, 씨발.”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
“내가 다 잘못했어.”
녀석이 내 어깨에 그대로 이마를 기대왔다.
“형이 하란 대로 할게.”
“…….”
“나 받아주면 안 돼?”
다른 사람처럼 쉽게 네 마음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나를 가지고 놀았던 꿈 안에서의 너와 내 앞에서 매달리는 네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가증스러웠다. 이것도 연기가 아닐까. 또 언제 뒤통수를 치려고.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내가 하란 대로 한다고?”
“…….”
“그럼,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형.”
“넌 내가 한 말 하나도 이해 못 했냐?”
“…….”
“싫다고. 너 같은 새끼 존나 역겨워. 알아?”
나는 녀석을 두고 빠르게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학교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올라 아무 곳에 몸을 구겼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버스가 덜컹거리면서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기태오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나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쁜 놈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나쁜 새끼라고.
기태오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담임이 지껄였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기숙사와 학교를 오가며 입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것 같았다. 잡생각을 덜 수 있으니 이것으로 족했다. 수시 원서를 넣고 난 후로는 시간이 더 빠르게 흘렀다. 자기소개서와 면접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것과는 별개로 정시 준비도 틈틈이 해야 했다.
캄캄한 창 너머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풀어놓은 문제집과 정리한 노트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씻고 나와 밤늦게까지 책상에 붙어 있다 보면 막연하게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그게 싫어 더 공부에 매달렸지만, 모르겠다. 그날, 기태오는 왜 그딴 표정으로 나를 만나러 왔을까. 못 본 사이 핼쑥해진 얼굴도 맘에 안 들었다. 내 어깨에 닿았던 녀석의 체온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책상에 엎드렸다. 기태오가 보내왔던 문자가 떠올랐다.
[보고 싶어.]
학교에서 돌아와 핸드폰을 기숙사에 반납하기 전 기태오에게 온 문자였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문자들만 잔뜩 보내던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무시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또 생각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매몰차게 녀석을 외면했는데, 보고 싶다니. 왜. 답답했다. 심장에 커다란 돌을 얹고 있는 것처럼 괴로웠다. 빗소리가 좀 더 굵어지고 있었다. 습한 공기가 좁은 방 안을 점점 더 눅눅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답답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굵은 빗방울 소리가 선명하게 고막을 달궜다. 떨어지는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5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밤 풍경은 낯설었다. 잘 닦인 도로와 비에 젖은 건물들이 아무렇게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밤공기가 빗방울과 함께 들이닥쳤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저만치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 아래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우산도 없이,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있어 제대로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기태오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멋대로 뛰어대는 심장 탓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녀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올려다봤다. 젖은 머리카락, 눈썹,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꼭 눈물처럼 보였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몸 어딘가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병신같이, 저기서 왜.
얼른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감에게 걸리면 벌점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대신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빠르게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도 그 병신 같은 게 언제부터 거기에 서서 비를 맞고 서 있었을지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정신없이 1층까지 내려오는 동안 등이 흠뻑 젖었다. 빠르게 학원 입구 쪽으로 뛰었다. 문을 당기자 단단히 잠겨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뒷문도 마찬가지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려다가 핸드폰 보관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보관함을 보고 한숨이 내쉬어졌다.
터벅터벅 계단을 밟고 도로 방으로 들어왔다. 열린 창문으로 들이닥친 빗방울로 방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창가로 빠르게 다가갔다. 가로등 아래 서 있던 인영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