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숨김없이 밝혀지고
최종화 대본을 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형광펜으로 밑줄 쳐놓은 문장을 눈으로 읽으면서 발음해본다. 처음 대사를 암기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말에 감정을 담는 것이었다. 대사를 칠 때마다 국어책 읽듯 딱딱한 발음이 목에서 흘러나왔다. 노력엔 장사 없다고, 듣고 말하고 듣고 말하고.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씩 대본을 붙잡고 매달렸었다. 대학 들어가려고 꼼수를 부렸던 이 일이, 지금은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턴가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나는 설구가 된 것 같았다. 설구처럼 말하고, 웃고 까불고. 점점 내 것이 되어가던 캐릭터와 작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손에 든 대본을 잠시 내려놓고 침대에 엎어졌다. 좀 전에 들은 선규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낯간지러운 말은, 죽어도 안 할 것처럼 굴면서. 보고 싶다는 말에 같은 마음을 보여줬다. 시간을 쪼개서 전화했다는 걸 안다. 짧은 통화를 하면서도 다 알 수 있었다.
주인 없는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선규호 냄새가 맡아졌다. 나는 좀 더 코를 박고 달콤한 향기를 맡았다. 선규호 냄새만으로 기분이 야릇해졌다. 침대에 눌린 성기가 조금씩 딱딱해지고 있었다. 내 아래에 깔려 신음하던 선규호가 떠올랐다. 축축하던 눈동자, 신음을 참던 입술. 부끄럽게 빨개진 귓불과, 둥근 어깨가 나를 흥분시켰다.
“하아. 미치겠네.”
오른손을 바지 속으로 밀어 넣고 점점 부풀기 시작한 성기를 그러쥐었다. 이미 머릿속으론 알몸의 선규호를 올라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몸을 내려다보면서 밤새 성기를 박던 일을 떠올렸다. 내 것을 빨아 당기던 음란한 입구, 성기를 잔뜩 조이던 내벽의 촉감. 급격한 흥분감에 숨이 조금씩 차올랐다. 덩달아 내 것을 쥐고 있던 손길도 바빠졌다. 선규호가 야릇하게 입을 벌리고 내 것을 물고 빠는 상상을 했다. 혀로 귀두 끝을 핥으면서 기둥을 음란하게 어루만지는 손가락을 떠올리자, 긴박하게 사정감이 차올랐다.
“헉, 허으. 읏.”
내 좆을 입안 가득 물고 있는 선규호를 상상하면서 나는 잔뜩 차오른 정액을 토해냈다. 내 정액이 선규호의 침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걸 보며 성기를 짜내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등을 휘덮고 올라오는 쾌감에 어깨가 잘게 떨렸다. 헉헉대며 선규호를 작게 불렀다. 상상 속의 선규호가 나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살결이 내 몸에 닿는 거 같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고 그대로 엎어졌다. 반쯤 벗은 바지가 엉덩이 밑에 걸쳐진 채였다. 파정의 여운이 몸을 나른하게 만들고 있었다. 고조된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자 수치스러웠다. 선규호 방에서 개처럼 냄새를 맡으면서 자위라니. 정액이 튄 시트의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싸질러놔서 닦아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머리맡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침대 위를 더듬다가 핸드폰을 겨우 받았다.
“여보세…,”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아왔다.
-잘 있었어, 아들?
엄마였다.
“엄마?”
하필이면, 이럴 때. 병신같이 액정화면이라도 확인해볼걸. 아무 생각 없이 엉덩이를 까고 엄마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다. 얼른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에 걸린 바지를 쭈욱 잡아당겨 입고선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어떻게 너는 전화 한 통이 없어?
“바빴어.”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규호는. 둘이 잘 지내는 거 맞아?
“어.”
-말뿐인 거 아냐? 걔가 좀 인색하잖니.
그 인색한 새끼가 매일 밤 날 홀리고 있어, 엄마.
“아냐. 잘 지내고 있어.”
방금도 걔를 반찬 삼아, 내가 뭔 짓을 했는지 모르지.
-아휴, 난 또 니들 둘만 놔두고 와서 뭔 일 생길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한 줄 아니?
그러게 엄마. 그냥 연애만 하지. 왜 재혼했어?
-참! 너 일냈더라?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오준 감독 오디션에 붙었다면서?
호들갑스럽게 콧소리를 내며 흥분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설레발은 다 치고 있었다.
-세상에 오준 감독이라니. 엄마 진짜 깜짝 놀랐잖아!
“아직 한다고 결정한 것도 아니고….”
-어머, 얘가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해야지. 그 감독이 얼마나 유명한지 몰라서 그래?”
매니저 누나가 엄마한테 연락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는지, 오준 감독이 어떻고 그가 벌어들인 연간 수익이 얼마고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성공 사례까지 나열하기 시작했다. 피곤했다.
“엄마, 나 대본 연습해야 해.”
-내 정신 좀 봐. 알았어. 규호랑 싸우지 말고. 응?
“어. 끊어.”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다 찝찝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시트를 한꺼번에 잡아 뺐다. 내가 싸지른 정액 위에 선규호가 잔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꼴리는 일이지만, 일단, 형이 오기 전에 빨래를 해두고 싶었다. 둘둘 말은 침대 시트를 옆구리에 끼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세탁실 문을 열자, 은은한 세제 냄새가 맡아졌다.
언젠가 선규호가 몽정한 팬티를 손빨래해 몰래 숨겨놨던 걸 찾은 적이 있었다. 정액의 흔적은 없었지만, 향긋한 비누 향이 선규호의 정액 냄새 같았다. 변태같이 축축하게 젖은 선규호의 팬티를 성기에 휘감아 자위를 했었다. 음란하게 다릴 벌린 선규호가 벌름거리는 구멍을 보여주는 상상을 하면서 진한 정액을 팬티에 쏟아냈었다. 그게 무슨 행동인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하얗고 탄탄한 엉덩이 사이에 내 좆을 넣는 상상만으로 정액을 울컥울컥 쏟아냈다. 내 정액이 묻는 선규호의 팬티를 바라보면서 심장 끝이 따끔거렸다. 욕정하고 있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분간도 못 하고. 나는 꿈 안에서 형을 괴롭혔다.
세탁기에 시트를 넣고 전원을 눌렀다. 버튼 하나로 간단하게 세탁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드럼 세탁기가 윙윙 도는 것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거실로 빠져나오자, 도우미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누가 왔는지 인터폰을 들고 서서 태오 학생, 하고 나를 불렀다.
문을 열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인터폰의 액정화면을 들여다봤다. 낯익은 얼굴을 바라보며 표 나게 한숨을 쉬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얼굴만 봐도 짜증이 치밀었다.
“제가 나가볼게요. 절대 문 열어주지 마세요.”
빠르게 거실을 가로질렀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쨍쨍한 태양 빛이 정수리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강렬한 빛이 금세 숨통을 쥐고 꽈악 조이는 것 같았다. 너른 정원을 빠르게 지나쳤다. 등줄기로 금세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손을 뻗어 큼지막한 대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자, 엘런이 내 가슴팍을 밀치고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짜증 난 미간에 날 선 주름이 잡혔다. 안으로 들어온 녀석을 냉큼 잡아당겼다.
“너 뭐 하는 건데?”
전전긍긍하는 나를 보고 엘런은 미소를 지었다.
“왜, 놀러 오면 안 돼?”
내 어깨를 툭 치곤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잘 가꾼 수목들과 연보랏빛 수국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정원 내부를 눈으로 훑던 엘런이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쫌 사나 보다. 니네 형.”
“…….”
“옥탑방보다 낫네.”
내가 예전에 살던 곳이 불현듯 떠올랐다. 온갖 불행과 체념만이 가득하던 곳. 어떤 희망도 열망도 없이, 꾸역꾸역 하루를 살던 벌레처럼. 보잘것없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이내 고갤 흔들었다. 여긴 옥탑방도 아니고, 나 역시 더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그만 가.”
“……”
“네 말처럼 여기 선규호 집이야.”
주인도 없는 집에 이방인은 들이고 싶지 않았다. 선규호가 지금처럼 엘런을 몰랐으면 좋겠다. 아니, 둘이 영원히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에서 만난 기억은 모조리 삭제해버리면 그만이고 어차피 선규호는 기억도 못 하니까.
“네 방, 어디야? 구경시켜주라.”
방 안으로 들어온 녀석이 털썩 침대에 앉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방을 드나들었던 것처럼 행동이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학습용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우습게도 엘런이 내 방에 있다고 생각하자, 전에 살던 옥탑방이 떠올랐다.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 나눠 먹고 아무렇게 엎어져 꿈속 세계를 돌아다녔던. 그 한 줌의 시간.
“여긴, 왜 왔어?”
기억하고 있던 깡마른 엘런은 이제 없지만, 마주쳐오는 눈동자는 그때와 같았다. 측은하게 마음을 부추기는 눈동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것 같은 어떤 안타까움이 부스러기처럼 몸 안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고, 우린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또 나를 찾아왔다. 내가 너를 두고 돌아섰던 그 날로부터, 너는 육체만 성장한 채 마음이 멈춰버린 미숙아처럼. 네 눈이, 그 눈동자가 내가 알고 있던 엘런 같아서. 이 상황이 참 싫다. 가만히 나를 보던 엘런이 작게 입을 열었다.
“집 구경.”
녀석이 침대 위로 몸을 쓰러뜨렸다. 손을 뻗어 푹신한 베개를 끌어당겨 머릴 기댔다. 찰랑거리는 옅은 금발이 아무렇게 헝클어졌다. 쌍까풀진 눈동자가 빤히 나를 쳐다봤다. 도드라진 콧날과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간 입술선이 눈에 들어왔다. 고갤 돌렸다.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게 싫었다. 널 위해 할애할 마음 같은 건 오래전에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았다고 생각했다. 반희용을 그렇게 만든 그 날. 너와 난 완전히 끝났으니까.
“농담할 기분 아냐, 그만 가.”
피곤했다. 십 년쯤 늙어버린 것처럼.
“이리 와서 손잡아 줘.”
애처럼 굴고 있는 엘런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위태롭게 허공에 떠 있었다.
“보여줘 봐.”
“…….”
“네 형, 그런 의미로 사랑한다며?”
엘런의 관심이 선규호에게 기울고 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꺼져.”
“약점 잡힌 거 잊어버렸나?”
엘런은 권모술수에 능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싶었고, 부딪히고 싶지 않았지. 내가 너를 잘 알고 있는 만큼 너도 나를 잘 알고 있으니까. 내 미래의 어떤 선택지까지 너는 다 꿰뚫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인데, 엘런.
“까발려, 그럼.”
쓸모없게 만들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선규호가 나의 약점이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언제든 엘런이 꺼낼 수 있는 패를 만들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고작, 내가 입만 놀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상체를 일으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엘런이 단숨에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순간이었다. 늪처럼 빠지고 나서야 위기가 닥쳐왔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를 너무 얕보고 경계심을 늦춘 탓이었다. 무식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침대 위로 엎어졌다. 내 밑에 깔린 엘런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또렷한 검은 동공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 까먹었나 본데.”
엘런이 내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겹쳐왔다. 손바닥에 완전히 겹쳐지자, 핏기가 싸악 가시는 게 느껴졌다. 강렬한 현기증이 치솟았다. 손쓸 새도 없이, 잠의 나락으로 엘런이 나를 단숨에 밀어버렸다.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아무리 뜨려고 애써도 소용없었다. 짓눌리는 암흑 끝에서 엘런의 목소리가 작게 멀어지고 있었다.
“나, 헤르셔야, 태오야.”
이상했다. 함께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엘런은 보이지 않았다. 꿈 안에 들어오면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나 혼자 덩그러니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가 온통 컴컴했다. 도무지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둠에 눈이 익자, 저만치 떨어진 곳에 커다란 검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육중해 보이는 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는데, 문 너머에 문이, 또 다른 문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져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새로운 문 앞에 섰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검은 문이 기분 나쁜 소릴 내며 열렸다. 끼이이이익, 고막을 긁는 날카로운 소음 탓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 전보다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얼마간 더 걷자, 발끝 앞에 새로운 문이 나타났다. 이번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나는 문턱을 넘으려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만약, 여기가 엘런의 꿈이라면.
어디에 어떤 함정이 숨겨져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간의 행적들을 들춰볼 때, 엘런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자신의 꿈 안으로 끌어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집 구경을 핑계 삼아 괜히 집에 발을 들인 게 아니라면.
“……”
이곳에 들어오기 전, 떠벌리던 엘런의 목소릴 상기했다.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에 선규호도 끌어들였을지 모를 일이었다. 심장 밑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지난번 꿈에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엘런의 최면에 걸려 된통 당할 뻔했었다. 심호흡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밑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생살에 생채기를 내듯 푸른빛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금박장식을 두른 새하얀 문을 만들었다. 눈을 뜨자, 손바닥만 한 문이 허공에 둥둥 떠오르는 게 보였다. 손을 뻗어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문 너머를 상상했다. 나는 최대한 엘런과 상관없는 곳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엘런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곳. 아니 상상조차 해볼 수 없던 곳. 그리고 그 공간에 내 꿈을 연결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연결된 공간에 기억을 확장시켰다. 빛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떠올렸던 장소가 문 너머에 자리 잡는 게 느껴졌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엘런의 꿈 안에 새로운 꿈을 설계했다. 검지로 문을 툭 하고 건들자,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만들어놓았던 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꿈 내부를 들여다봤다. 눈 안에 또 다른 눈이 열리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나를 감쌌다. 이곳을 이루고 있는 풍경과 사물이 까맣게 사라지고 푸른 점과 선으로 이뤄진 거대한 틀이 보였다. 설계도면처럼 꿈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떤 흐름으로 꿈이 이어지고 어디에서 변형될 수 있는지를 살폈다. 엘런이 설계한 꿈은 단순했지만, 몇 겹의 꿈을 거치면서 시간의 방향을 제멋대로 바꾸고 있었다. 겹의 수를 헤아리기 위해 미로에 놓인 문의 개수를 세는데,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미로 끝에 엘런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시간을 벌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애초에 떨어졌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땅이 푹 꺼지면서 몸이 밑으로 사정없이 추락했다.
질끈 눈을 감았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허공 밑으로 끝도 없이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바닥이 만져졌다. 눈을 뜬 순간, 침대에 묶여 있는 선규호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 끝이 꽈악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 * *
아득하게 달아오른 몸이 금방이라도 절정에 닿아 폭발할 것 같았다. 몸이 자꾸만 붕 떠올랐다. 강제로 몸이 열렸다. 안을 뚫고 들어오는 이물질이 닿기만 해도 어떻게 될 것 같은 곳을 가차 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밭은 숨과 신음이 입술 사이에서 음란하게 배회했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고압적으로 나를 다루는 태오의 손길엔 어떤 자비도 없어 보였다.
다시금 그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아픔보다 이상한 쾌감이 안에서 울렁거렸다. 파르르 경련하는 허벅지를 그가 강제로 벌렸다. 깊게 박혀든 이물질이 음란하게 부어오른 그곳을 자극했다. 전류가 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잘게 떠는 진동이 나를 휘어 삼키는 것 같았다. 건들지도 않은 빳빳한 성기가 참지 못하고 정액을 토해냈다. 그걸 다 내려다보고 있으면서 태오는 멈추지 않았다.
깊게 박힌 딜도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충격과도 같은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는데, 녀석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성기를 움켜잡았다. 그리곤 정액으로 흐트러진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하복부가 멋대로 들썩거렸다. 파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강렬한 쾌감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절정이 나를 한계까지 몰아갔다. 생리적으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 말라고 태오를 말렸지만,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앞의 태오는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녀석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헐떡이는 몸이 진정되기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쏟아지는 호흡이 자꾸만 입안에서 엉켜들고 있었다. 오르내리는 가슴의 돌기를 우악스럽게 잡아 쥐는 게 느껴졌다. 통증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잡고 비틀면서 태오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닿을 듯이 가깝게 시선이 부딪혔다. 악의에 찬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그 순간 완전히 몸을 숙인 그가 내 목에 이를 박았다.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핫. 아파. 흣, 태오야….”
콱 물린 잇자국을 혀로 핥는 게 느껴졌다. 느리고 음란한 혀 놀림에 하반신에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목선을 타고 내려온 입술이 앙증맞은 브래지어 아래로 닿았다. 뾰족하게 선 젖꼭지를 혀로 핥는 게 느껴졌다.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오르듯 뜨거웠다. 꼼짝없이 묶인 양쪽 손목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가 덥석 오른쪽 젖꼭지를 물었다. 난폭하게 앞니로 연약한 돌기를 깨물었다. 순간 고개가 뒤로 꺾였다. 견디기 힘든 통증이 유두를 타고 가슴 전체로 퍼지는 것 같았다.
“하읏. 그만해. 으아!”
고갤 흔들면서 몸을 버둥거렸지만 태오는 그 낯선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맹렬한 기세로 나를 노려봤다.
“거짓말.”
“으읏, 싫!”
갑작스럽게 그의 손이 내 성기를 움켜잡았다. 좀 전 정액이 흘러 음란하게 젖은 요도구를 엄지로 비벼대면서 예민한 살갗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싫은 것치곤, 잔뜩 젖었는데?”
젖꼭지를 물고 빨면서 점점 팽창하고 있는 성기를 위아래로 자극해댔다. 젖꼭지를 핥는 혀 놀림에 등이 휘었다. 딜도로 사정없이 당했던 엉덩이 안쪽이 붉은 열기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성기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갔다. 열꽃이 펴 뜨겁게 달아오른 입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왔다. 예민한 살갗을 건들자 입안에 고여 있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태오가 젖꼭지에서 입술을 떼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얼한 젖꼭지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렸다.
“존나 느끼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내가 네 여기.”
느리게 입구를 문지르면서 태오가 속삭였다.
“매일 밤 내 좆으로 길들인 거 알아?”
“하읏, 하지….”
“별의별 짓으로 네 구멍 존나 따먹었다고.”
태오의 손가락이 입구를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두꺼운 손가락이 뜨겁게 달아오른 내벽을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잔뜩 달궈진 하반신이 그의 손놀림에 멋대로 튕겼다. 고조된 성기 끝이 금방이라도 뭔가를 싸지를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
손가락이 크게 안을 휘저었다. 나는 고갤 흔들었지만, 태오는 손가락 하나를 우악스럽게 욱여넣으며 인상을 썼다.
“지금도 재미 삼아 너 가지고 놀고 있잖아.”
무엇이 너를 이토록 화나게 했을까.
“넌 그냥 내 좆집이야. 알아?”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상했다. 이 모든 게 내가 꾸는 꿈의 허상이더라도, 네가 안타까웠다. 험한 말을 늘어놓게 만든 원인이 꼭 나인 것만 같아, 좀 슬펐다. 네 마음이 어떤지, 눈으로 읽지 않아도 이젠 다 알 것 같은데. 잔뜩 골을 내고 상처입힐 말을 내뱉는다고 이미 시작된 마음이 사라질 순 없는데. 네 말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가만히 고갤 들었다. 슬쩍 눈을 감고 그대로 태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주 잠깐, 입술의 촉감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을 뜨자, 마주 닿아오는 네가 눈에 들어왔다.
“……!”
놀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병신아.”
“…….”
“왜 이렇게 속상하게 굴어?”
“…….”
“꿈이라도 맘 아프잖아.”
나를 내려다보는 태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양 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녀석이 내 목덜미를 꾹 누르는 게 느껴졌다. 기운이 쭈욱 빠지고 시야가 혼미해졌다.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지듯이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네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하아, 진짜, 돌겠네.”
태오가 인상을 썼다. 한숨을 뱉는가 싶더니 나를 쳐다봤다.
“너 진짜 되게 이상한 거 알아?”
“…….”
“똑바로 봐. 내가 누군지.”
목덜미를 누르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자 태오 얼굴이 흐릿해지면서 엘런의 얼굴로 바뀌었다.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홀로그램처럼 외모가 싸악 바뀌는 걸 보자, 등골이 싸해졌다. 놀란 표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남았는지, 엘런이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상처라는 걸 받는다고.”
손가락을 휙휙 움직이자, 양쪽 손목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던 것이 간단히 풀렸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정신만 또렷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봐왔던 엘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라서 좀처럼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태오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못된 장난을 하려고 했던 게 분명한데. 도중에 왜 그만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딴 괴상한 옷까지 입혀놓고. 음란한 장난도 서슴없이 했으면서.
“너 진짜 기태오 좋아하는구나.”
태오에 대한 내 감정을 타인의 입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감정을 읽힌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그 새끼 실체를 알고도 좋아할 수 있어?”
“무슨 말이야?”
“조금 어지러울지도 몰라.”
엘런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침대 밑바닥으로 깊게 가라앉는 것같이. 몸이 천천히 추락한다. 몽환적인 어지러움이 핑 돌았다. 이대로 영영 꿈 밑바닥까지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온통 새까만 어둠 밑으로 추락하는 몸뚱이가 이상하게 내 것 같지 않았다.
여긴 좀 전 꿈의 연장선일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을 꾸는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다. 금방이라도 코피를 쏟을 것같이, 현기증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헤집는다. 나는 눈을 도로 감았다. 아득하게 의식이 멀어졌다가 순간 눈이 떠졌다. 꽉 잠겨 있던 뇌가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온 것같이 가뿐했다. 이곳이 꿈이라는 자각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몸을 일으켰다. 눈앞엔 금박 장식을 두른 세 개의 문이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괜찮냐?”
꺼졌던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느낌이 사라졌다.
“여긴 네 꿈이야.”
“아까 거긴?”
“내 꿈.”
“그게 가능해?”
“보시다시피.”
엘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잘 봐, 하고 손가락을 가리켰다. 능숙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발밑에서 검고 탁한 문이 쑤욱 하고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음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문을 본 순간 나는 작게 눈을 깜박였다.
“이 문 너머에.”
“…….”
“기태오가 지웠던 네 기억이 있어.”
꿈에서 깨고 나서 기억이 없었던 게 언제부터였지. 생각해보면 꿈을 기억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꿈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좀 과한 꿈을 꾸긴 했어도 그게 기태오와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대체 엘런의 속셈을 모르겠다. 무슨 의도로 내게 이 문을 보여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삭제된 기억들이 저 문 너머에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유가 뭐야?”
“…….”
“나한테 저 문을 왜 알려준 건데?”
엘런은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순간이동 하듯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눈을 맞추던 엘런이 내 쪽으로 고갤 기울였다. 닿을 듯 말 듯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깨어날 시간이야.”
스르륵 눈이 떠졌다. 반사적으로 벽시계에 시선을 돌렸다. 고작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 믿기지 않았다. 꿈에서 느껴지던 것들이 여전히 얼떨떨하기만 한데, 현실은 별다를 것 없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동안 모호하기만 하던 꿈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생각해보면, 기태오와 한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꿈을 꾼 적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기억은 잠에서 깨기 전 기태오 손에 지워졌으니, 기억이 날 수가 없었던 거다. 어째서 그 긴 시간, 한 번의 의심도 안 했던 걸까. 내 방문을 넘어 들어온 네가, 무슨 마음인지. 하나도 모르면서.
애초에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을까. 기태오가 내 머릿속에서 삭제했던 기억을 안 봤더라면, 지금 이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은 내 몫이 아니었을까. 절망적이었다. 내게 보이지 않는 네 마음을 어째서 다 안다고 자부했을까. 꿈이 아닌 현실에서 밤을 보내면서 넌 얼마나 나를 같잖고 우습게 여겼을까. 수치스럽게도 난 널 좋아했는데. 마음이 보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너라면 나를 보여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결국, 그 꿈들 때문에 네 실체를 알게 됐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학원 강사가 칠판에 글씨를 써넣을 때마다 분필 가루가 공기 중에 옅게 떠다닌다. 소란스러울 것 없는 단조로운 학원 강의실에서 나는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기태오를 만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가방을 메고 몸을 일으키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학원 강사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재빠르게 학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내 앞에 멈춘 택시에 올라타 목적지를 말했다. 기사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랬을까. 어째서 기태오는 내 꿈에 들어와 그따위 취급을 했을까. 병신같이 그 녀석이 시키는 짓에 저항 한 번 않고 하란다고 다 하고 있던 나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날 깔아뭉개면서 내 우위에 섰다고 기뻐했을까. 멋대로 가지고 놀면서 재미를 느꼈을까. 날 시궁창 걸레만도 못한 취급을 할 거였으면, 애초에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았어야지.
속이 메스꺼웠다. 금방이라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나는 차창을 조금 열었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뜨끈한 바람이 얼굴에 아무렇게 달라붙었다. 나는 쏟아지는 바람에 머릴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불투명한 눈꺼풀 안으로 기태오가 떠올랐다. 그게 싫어서 눈을 떴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엔 기태오가 가득 차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요금을 지불하고 집 앞에서 내렸다. 탁 하고 문을 닫는 순간, 누군가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꿈에서만 봤던 엘런이 눈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옅은 금발 머리카락 아래로 선명한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약간 놀란 눈동자가 멈칫하더니 휘어진다. 시원스런 미소를 매달고 엘런이 아는 척을 해왔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
“실제로 만나니까 신기하네.”
정말 신기하기라도 한 듯 엘런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엘런의 팔을 잡았다. 탄탄한 근육의 질감이 손바닥 안에 꽉 차올랐다. 엘런의 생각을 읽으면 아까 꿈에서 했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활자에 시선을 옮기려는 순간 엘런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낚아채 그대로 끌어당겼다. 바짝 몸이 밀착되자, 곧바로 눈동자가 맞닿아왔다.
‘빵! 빠아앙!’
자동차 한 대가 요란한 경적 소릴 내면서 등 뒤를 빠르게 지나갔다. 엘런이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조심하지.”
“놔.”
빠르게 팔을 빼냈다. 괜히 험상궂게 인상이 써졌다.
“말했잖아, 난 너한테 악감정 없다고.”
“…….”
“그냥, 네가 기태오한테 당하는 게 보기 싫었어. 그뿐이야.”
꿈에서 깨기 전 엘런은 모든 것을 나에게 고백했다. 기태오가 꽤 오래전부터 내 꿈에 들락거렸던 것. 질 나쁜 장난을 수도 없이 저질렀던 것. 내 기억을 감쪽같이 지우고 나를 농락했던 것까지. 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날 엿 먹이고 싶어 날 좋아하는 척 연기를 했다고 했을 땐 소름이 쫙 끼쳤었다.
엘런은 녀석의 만행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태오가 삭제하고 버린 내 기억들을 모아놓은 룸으로 나를 안내했던 거고, 거기서 나는 모든 것을 보고 말았다. 지워진 기억을 손바닥으로 만지는 순간 놀랍도록 빠르게 흡수되어 잃었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킬 수 있었다. 기태오가 내 꿈속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머릿속으론 다 알고 있으면서, 심장은 자꾸만 다른 이유를 만들고 싶어 했다. 기태오가 아니라, 차라리 엘런이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 이 모든 진실을 왜곡한 거라면 좋겠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스스로도 기가 찼다.
“차라리 말하지 말지, 왜. 말했어?”
엘런이 잠깐 망설이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고갤 들었다. 그리곤 작게 숨을 고르곤 눈을 마주쳐왔다. 웃음기가 가신 엘런의 얼굴은 차분하고 단정했다.
“닮아서.”
“뭐?”
“내가 아는 사람 닮았어, 너.”
“이 새끼야, 알아듣게 말해.”
엘런이 어째선지 씁쓸하게 웃었다.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