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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균열 (24/37)

23. 균열

“요즘 뭔 일 있냐?”

형준이가 종이 포장을 벗긴 내 몫의 햄버거를 건네며 물었다. 그것을 받아들면서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가만 보면 형준인 비상하리만치 촉이 좋다. 표 내고 싶지 않은 감정이나 기분까지 나보다 먼저 알아차리곤 내 상태를 살폈다.

“그냥, 더워서.”

“하긴, 공부만 하기엔 너무 덥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 있으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형준이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물티슈와 여분의 냅킨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경민이가 형준이 옆에 앉았다. 빨대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가지러 갔다가 챙겨 온 모양이다. 어째선지 경민인 잔뜩 상기된 얼굴로 히죽거렸다.

“야, 봤냐. 저기. 미니스커트.”

경민이가 턱짓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형준이가 고갤 돌리고 그쪽을 바라보자, 얼른 팔을 잡아당기면서 아, 쫌! 대놓고 보지 말고. 목소릴 죽여 속삭인다. 들고 있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슬쩍 시선을 옮겼다. 상큼하게 포니테일로 머릴 묶은 여자애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맞은편에 앉은 단발머리와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쌍까풀진 큼지막한 눈동자가 시원스럽게 웃었다. 시선을 내리자 미니스커트 아래로 예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존나 예쁘지 않냐?”

흥분한 경민이가 큼지막하게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면서 물었다. 형준이가 힐끔 여자애를 쳐다봤다. 예쁘네.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빨대를 꽂은 콜라를 내 앞쪽으로 옮겨준다. 경민이는 대놓고 보지 말라고 자기가 말해놓고 틈만 나면 여자애를 쳐다봤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여자애를 쫓다가 당황해 얼른 고갤 돌렸다.

“아. 씨발, 눈 마주쳤어.”

좋아 죽겠는 모양인지 귓불이 달아올라 있었다. 보통은 다 저렇겠지. 여자애를 보고 두근거리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설레고. 저렇게 예쁜 애라면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남자애라면. 누구나 경민이처럼. 나는 가만히 햄버거를 내려다봤다. 벌겋게 모습을 드러낸 토마토가 비죽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주문할 때 빼달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점원이 까맣게 잊고 매뉴얼대로 만들었나 보다.

“왜 안 먹고?”

형준이가 사이드 메뉴로 딸려 나온 치즈스틱에 케첩을 뿌리며 물었다.

“토마토 안 뺐나 봐. 그대로 들어 있어.”

인상을 쓰자, 형준이가 치즈스틱을 내려놓고 햄버거를 든 내 손목을 당겼다. 패티와 양상추 사이에 낀 토마토를 살짝 앞니로 물고 가볍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쏘옥 하고 토마토가 빠지자, 녀석이 그러쥐고 있던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맛있다는 듯이 토마토를 한입에 넣고 얼른 먹어. 한다. 토마토가 쏙 빠진 햄버거를 한 입 깨물었다.

“쟤, 번호 따볼까?”

경민이가 목이 타는지 콜라를 쭉쭉 빨면서 물었다.

“백퍼 까인다에 한 표.”

“나도.”

번호 따다가 거절당하면 그 수모를 어떻게 견디려고. 나 역시 형준이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경민이는 우리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겁도 없이 경민이가 몸을 일으켰다.

“번호 꼭 따고 만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경민이를 보고 우린 피식 웃었다.

“형준아, 저거 까이는 데 만 원.”

“액수가 넘 부족하지 않냐?”

“그럼 10만 원. 콜?”

“미친 새끼. 크큭.”

그 순간 형준이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뻗어 냅킨을 집어 들었다. 뭐가 묻었는지 내 입술을 냅킨으로 닦기 시작했다.

“가만있어 봐.”

입술이 싸악 쓸리는 게 느껴졌다.

“넌 그렇게 안 생겨선, 햄버거 먹을 땐 꼭 묻히고 먹더라.”

“…….”

“할튼, 존나 손 많이 가.”

그랬나. 잘 모르겠다. 이렇게 녀석들과 웃고 떠들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온통 다른 데 가 있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촬영 쉬는 날이라고 했는데. 부족한 잠을 잘까. 아니면 대본이 닳게 리딩 연습을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은 할까. 난 아직도 간밤에 했던 짓만 생각하면 몸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또 멍 때리네?”

“어?”

“계속. 무슨 일 있는 사람처럼.”

“…….”

“혼자 앓지 말고 말해, 새끼야.”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고갤 돌려 경민이를 쳐다봤다. 쑥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힌 녀석이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입력하는 게 보였다. 까일 줄 알았는데, 번호를 땄나 보다. 보통의 연애는 다 저렇게 시작되는 거겠지.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은 것일 텐데, 기태오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이상하게 떳떳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좀 쓰렸다.

“어떡해, 미친. 나 번호 땄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경민이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우릴 향해 다가왔다. 여자애들이 3:3으로 만나는 게 어떠냐고 했다는데, 아주 먼 나라 이야기처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살폈다. 밥 먹고 도로 학원에 들어가 지난번 빠졌던 보강까지 받으려면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았다.

잔뜩 흥분해 있는 경민이 이야기를 듣다가 잠깐 빠져나왔다. 커브를 꺾자 남자 화장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단축번호를 눌러 핸드폰을 귀에 댄 상태였다. 컬러링도 없는 삭막한 신호음이 일정하게 고막을 두드렸다.

-어, 형….

목소리가 어째선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칸막이 화장실 맨 끝 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자다가 깼어.

“그럼 더 자.”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물었다.

-어디야?

“밥 먹으러. 학원 근처 맥도날드.”

-…… 언제 와?

“보강까지 있어서 좀 늦어.”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는지 문 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잠깐 나온 거라 애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밥은 먹었어?”

-조금.

먹는 거 엄청 좋아하는 앤데. 괜히 속상하다.

“갈 때 뭐 사갈까?”

-아니.

“…….”

-그냥 빨리 와.

네 목소리에 가슴께가 떨렸다.

-보고 싶어….

그 울림이, 내 것과 같아서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애틋하게 내려앉는 단어 하나가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학원으로 돌아왔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잠을 못 잔 탓인지, 자꾸만 졸음에 겨운 하품이 쏟아졌다. 턱을 괴고 노트에 뭔가를 적는 척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얄팍한 잠속을 들락거리며 억지로 잠에서 깨려고 애썼지만, 한번 깊게 감긴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깊은 수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몰래 눈치를 보면서 자는 잠이 이렇게 달콤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눈 밑으로 캄캄한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꿈 안에 들어왔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꿈 안으로 들어온 순간, 좀 전까지 새까맣게 지워졌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아마도 나는 이 자각몽을 꾼다는 걸 현실에선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꿈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깨끗하게 기억을 잘라낸 것처럼, 백지상태였다.

“아으.”

어째선지 나는 침대 위에 묶여 있었다. 손목과 발목은 굵은 밧줄에 칭칭 감겨 잔뜩 당겨져 고정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고갤 숙여 몸 상태를 살폈다. 눈에 들어온 건 내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흰 셔츠는 죄다 단추가 떨어져 나가 활짝 벌려져 있고, 가슴께로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여성용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허리 아래로 미니스커트가 입혀져 있었다. 체크무늬에 길이가 너무 짧아 조금만 움직여도 안이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허벅지에 반쯤 걸쳐진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앙증맞은 리본이 매달린 여성용 팬티가 허벅지에 말려 안타깝게 걸려 있었다.

나는 힘껏 팔을 당겨봤다. 뭐든 내 뜻대로 될 것 같던 이전의 꿈과는 다르게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양쪽 팔을 당길 때마다 손목이 강렬하게 조여들었다. 시뻘겋게 손목이 물드는 게 보였다. 나는 조금 더 힘을 줘 팔을 당겼다. 튼튼한 밧줄은 전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달린 손목을 당길 때마다 연한 살이 긁히고 조여들어 붉게 멍들어 갔다. 얼얼할 정도로 팔에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간힘을 쓸수록 밧줄은 점점 더 단단하게 조여댈 뿐이었다.

나는 하던 짓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룸 안은 지금껏 본 적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밧줄과 가죽, 쇠사슬이 벽면에 종류별로 걸려 있었다. 크기가 제각기 다른 패들이나 가죽으로 만든 긴 채찍 같은 것을 본 순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놀란 건 음란하기 이를 데 없는 성기 모양의 딜도가 종류별로 진열된 선반을 봤을 때였다. 보통의 성기 크기의 것에서부터 시작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크고 육중한 것이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게 너무 생생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꿈이라면 깨면 그만이었다.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하원 강의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번쩍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좀 전 그 괴상한 룸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소리가 났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끼익ㅡ.’

문이 열리는 소리가 누군가의 비명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심호흡을 골랐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고막을 갈랐다.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새까만 어둠이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나는 빨리 꿈에서 깨고 싶었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팔다리를 사정없이 움직였다. 숨통을 조이듯이 살을 파고드는 로프의 집요함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둠을 뚫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Hallo? Süße!”

“…….?”

“Willkommen in meinem Traum!”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그가 지껄이고 있었다.

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지할 뿐이다. 지금껏 나는 어떻게 꿈을 꾸고 어떻게 잠에서 깼을까. 자각몽을 꾸게 된 건 분명 최근이고, 그것이 이런 터무니없는 꿈을 꿔도 좋다는 뜻은 아닐 텐데. 확실한 건 이전에 꿨던 자각몽이랑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통제할 수 있었던 어떤 버튼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꺼져버린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결박당한 몸이 알 수 없는 열기로 뜨거웠다. 뭉근하면서도 음란한 열기가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 가 닿기 힘든 곳까지 열기를 퍼트리는 것만 같았다. 탁한 숨결이 입술을 벌릴 때마다 토해졌다. 이 상황에서도 브래지어를 한 가슴이 아무렇게 오르내렸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쓸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탁류가 뇌를 흔들어놓고 있었다.

누군가 침대 곁에 앉는 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옅은 금발 머리를 한 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를 본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챘다. 언젠가 만났던 버스정류장. 무대에서 손가락 하나로 나를 조종하던 얼굴, 형준이인 척 보건실에 왔었던 일까지. 생각해보면 엘런은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내 꿈에 나타났다. 나와 어떤 접점도 없는 그가 또다시 나를 이런 난잡한 곳에 가뒀다.

“흥분돼?”

흉부를 지나 미끄러지듯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묶인 팔다리를 흔들며 저항했지만, 그의 손가락이 닿는 어떤 곳도 방어할 수가 없었다. 불쾌하고 괴로운 생각과는 다르게 피부에 닿는 촉감만으로 성기 끝에 피가 몰려 난감했다. 느릿하게 배꼽 주변을 어루만지면서 꾸욱 하고 배를 눌렀다. 아찔하게 치미는 현기증 탓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한껏 달아오른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엉덩이 안쪽이 음란하게 비벼졌으면 좋겠단 생각이 점점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달뜬 숨을 쉬면서 팔다리를 엉망으로 흔들었다. 로프에 묶인 손목이 시뻘겋게 멍들어 가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으. 흐. 으.”

그가 꾸욱 누른 배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의 생각을 읽으려고 흐릿해진 시야를 들어 올렸다. 낯선 문장들이 그의 머리 위로 피어올랐다. 그가 지껄이던 말처럼 문장들이 하나같이 낯설었다. 간간이 섞인 한글도 보였지만, 의미를 알아차리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 순간 그가 옆구리를 쓸면서 천천히 손가락을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민감해진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

“…….”

“재밌을 거야.”

서늘한 손가락이 금세 브래지어 위를 더듬거렸다. 레이스를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이 브래지어 위로 젖꼭지를 건드렸다. 하읏,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졌다. 음란하게 젖꼭지를 비틀자 상체가 들썩거렸다.

“하아. 하. 안 돼. 하지 마.”

목소리가 신음과 섞여 야릇하게 흘러나왔다. 헐떡이는 가슴께가 점점 더 거세게 오르내렸다. 그의 손이 양쪽 젖꼭지를 가리고 있던 브래지어를 밀어 올렸다. 판판한 가슴 위로 두 개의 젖꼭지가 딱딱하게 서 있었다. 브래지어에 쓸렸던 탓인지 통통하게 부어오른 연분홍 젖꼭지가 묘하게 쑤시고 간질거려 자꾸만 안달이 났다.

“하아. ich will essen.”

그가 갑자기 고갤 숙여 젖꼭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그대로 맞닿아왔다. 죽여버린다고 욕을 하고 떨어지라고 버럭 소릴 질렀지만, 엘런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혀를 내밀어 오른쪽 젖꼭지를 핥는 게 느껴졌다. 흥분의 열기가 잔뜩 고인 젖꼭지에 혀가 닿자 등이 잔뜩 휘었다. 뜨겁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성기가 얇은 스커트를 들추고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감각을 억누르느라 입술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젖꼭지 민감하구나, 빨아주니까 좋아?”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그가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나는 있는 힘껏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씨발, 꺼져!”

눈을 깜박이던 그가 얼굴에 튄 침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손바닥에 묻은 침을 혀로 할짝거리며, 야릇하게 웃었다. 나는 그만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변태 새끼에게 완전히 먹힐 것만 같았다. 어서 이 꿈을 끝내야 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학원 강의실로 재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묶인 팔다리를 당겨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썼다. 뭔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묶인 사지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 그가 내 턱을 그러쥐었다.

“최면이라고 알아?”

“…….”

“아주 오랫동안 넌 그 최면에 길들여져 있었어.”

“개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풀어!”

난동을 부리듯 묶인 몸을 흔들며 발광을 하자, 턱을 끌어당겨 그대로 내 목덜미를 꾸욱 눌렀다. 어지러운 현기증과 함께 견디기 힘든 감각이 온몸을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순간 눈이 스르륵 감겼다. 우습게도 불같이 치밀어 오르던 화가 순식간에 수그러들고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졌다. 마치 명상을 하듯 마음을 모조리 비운 것 같았다. 살갗 밑을 배회하던 나른한 흥분감도 더는 몸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가 나지막이 귓가에 대고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난 기태오야.”

“…….”

“눈을 뜨면 넌 나를 기태오로 보게 될 거야.”

“…….”

“그러니까, 기태오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잘 기억해.”

목덜미를 누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서서히 눈을 뜨자, 눈앞이 핑 도는 것처럼 잠깐 시야가 흐릿했다. 평온하던 감각이 불식간에 사라지고, 다시금 견디기 힘든 열락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휘감는 게 느껴졌다. 강도가 이전보다 더 세졌는지, 바짝 선 성기에선 쿠퍼액이 흘러나와 얄팍하게 덮고 있던 스커트를 물들이고 있었다. 자꾸만 허리 밑이 들썩거렸다. 발기한 성기를 어딘가에 비벼대고 싶었다. 잔뜩 문질러서 시원하게 한 발 뽑고 싶었다.

“형.”

어째선지 기태오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해?”

음란한 옷차림으로 침대에 묶인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다가 깜짝 놀라 태오를 쳐다봤다. 활짝 벌려진 셔츠 안엔 여성용 브래지어가 잔뜩 말려 올라가 젖꼭지가 다 드러나 있었다. 허벅지 중간에 걸쳐진 레이스 팬티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미니스커트를 잔뜩 들어 올리고 쿠퍼액을 흘리고 있었다. 거기서 발정 난 개마냥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끙끙거린 걸 봤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워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그, 그게 아니고, 읏….”

부끄러워 한껏 눈꺼풀을 내려 시선을 피하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에도 엉덩이 안쪽이 미칠 듯이 좀이 쑤시고 간지러워 딱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뒷구멍으로 자위하고 싶어서 그래?”

“……?”

“이 구멍에, 어떤 걸 넣어야 할지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

태오의 손이 쑤욱 하고 스커트 밑으로 들어와 건들기만 해도 움찔대는 입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크고 단단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다가 아래위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쿠퍼액이 순간 튀었다. 양쪽 젖꼭지가 찌르르르 당기면서 금방이라도 몸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너무 비좁아서 제대로 늘려야겠어.”

태오가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다가가 진열장 문을 열었다. 꼿꼿하게 서 있는 성기 모양의 딜도가 종류별로 주욱 늘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크기며 모양이며 하나같이 그로테스크해서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태오는 눈으로 그것들을 훑으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이상하게 엉덩이 안쪽에서 뭔가가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축축하고 흥건하게. 마치 흥분한 여자의 질처럼 입구를 적시는 체액 탓에 침대 시트가 금세 얼룩져버렸다.

이쪽으로 걸어온 태오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들고 온 것을 와르르 침대에 쏟아놓곤 다리 쪽에 자릴 잡고 앉았다. 나를 완전히 눕히고 결박당한 양쪽 무릎을 세워 M 자로 벌렸다. 저절로 양쪽 손목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짧은 스커트 밑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린 레이스 팬티를 바라보던 태오가 가볍게 손으로 찢어발기곤 아래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축축하게 젖기 시작한 입구를 간질이듯 어루만지면서 나를 쳐다봤다.

“잠깐 만졌다고 젖은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하읏.”

“Oh, mein Gott! 얼마나 음란하길래 넣자마자 손가락 두 갤 삼켜?”

말랑말랑해진 입구 안으로 태오의 손가락이 쑤욱 밀고 들어왔다. 내벽이 애타듯 녀석의 손가락을 쭉쭉 빨아 당기는 것 같았다. 좀 더 내벽 깊숙하게 숨겨진 은밀한 곳을 건들고 문질러주었으면 싶었다. 또 하나의 손가락이 쑤욱 하고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뻐근한 느낌에 미간이 약간 구겨졌다. 깊숙하게 밀고 올라온 크고 긴 손가락이 전립선을 은근슬쩍 건들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그곳에 닿을 듯 말 듯 만져주고 있어 애가 탔다. 허벅지 안쪽과 꼿꼿하게 선 성기가 움찔거릴 때마다 흔들렸다. 안을 충분하게 풀어준 손가락이 한꺼번에 쑤욱 빠져나갔다. 이미 모든 감각이 성욕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빨리 어떻게든 안달이 난 몸을 태오가 어떻게 해줬으면 싶었다.

“하으. 읏.”

손가락이 빠져나가 허전해진 입구에 미약한 진동으로 덜덜 떨리는 뭔가가 맞닿아 왔다. 크기는 보통 모양의 성기인데, 전원 버튼을 누르자 은근하고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어 살갗에 닿자 기분이 묘했다. 태오는 능숙하게 딜도를 입구에 문지르면서 재밌다는 듯이 입술을 놀렸다.

“잘 받아먹어.”

가느다랗게 떨리는 딜도가 입구를 간질이듯이 가르면서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축축하게 젖은 내벽에 무리 없이 박혀들었다. 태오가 강렬하게 찔러 넣어줄 때마다 전립선이 뭉개지듯 눌려서 참지 못하고 정액을 토해냈다. 태오가 기묘하게 입꼬릴 당겨 웃더니, 딜도의 진동 모드를 좀 더 강하게 조절했다. 꾸욱 눌러 박힌 딜도가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맞닿아 진득하게 눌러진 전립선이 마구잡이로 비벼지고 있어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하으. 그만, 하, 지…으읏. 안, 안 돼. 핫.”

강렬한 충격으로 몸에 열이 올랐다. 심각하게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서 건들지도 않은 성기에서 또다시 정액이 품어져 나왔다.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엉덩이가 경련했다. 폐가 파열되는 것 같은 고통. 심장이 제 속도를 잊고 격하게 뛰었다.

“이제 시작인데, 엉덩이 힘줘!”

찰싹, 하고 살을 때리는 파열음이 크게 울렸다.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큼지막한 손바닥이 다시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경직된 엉덩이에 자동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 때였다. 태오가 들고 있던 리모컨으로 진동 세기를 최대치로 올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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