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촬영장
집 나온 설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영상을 찍기 위해 봉쇄한 도로 위를 몇 번이고 달렸다. 힘들면 대역을 써도 좋다고 감독님은 말씀해주셨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다. 딴건 몰라도 몸으로 구르는 건 자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선 난 설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잘하든 못하든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꿈에선 이깟 거 아무것도 아니지만, 처음 몰아본 오토바이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기계를 다루는 게 어렵다기보다 속도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매니저 누나가 오토바이 타는 걸 연습해두는 게 좋겠다고 언질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촬영이었다. 속도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오케이 싸인이 빨리 떨어졌다. 긴장감에 굳어 있던 어깨가 딱딱했다. 헬멧을 벗기도 전에 오강빈이 번개같이 달려와 나를 부둥켜안았다.
“아. 새끼, 완전 잘했어!”
들떠 있는 오강빈은 나보다 더 기뻐하는 눈치였다. 나는 헬멧을 천천히 벗었다. 여친이랑 헤어진 탓에 만취해 촬영이고 나발이고 NG만 내던 그날 이후 오강빈과 가까워졌다. 선배 행세하는 꼰대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원시원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천성이 쾌활하고 악의가 없었다. 술버릇은 좀 고약했지만,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됐다. 대사를 맞추면서 서로의 연습 상대가 돼주거나, 밥을 함께 먹거나, 촬영 중간중간 틈이 나면 심심찮게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다
“아침 준비됐습니다. 이쪽으로 이동해주세요!”
좀 전까지 허기진 줄도 몰랐는데, 코너를 돌아 준비된 밥차를 본 순간 식욕이 감돌았다. 생각해보니 새벽부터 지금까지 잠도 못 자고 촬영에만 매달렸구나, 싶었다. 시꺼멓던 주변이 어느 틈에 환해져 있었다. 밥차 앞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식욕을 돋우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강빈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 들면서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다음 촬영 일산 세트장으로 간다더라?”
좀 전까지 신나서 펄쩍 뛰던 사람이 갑작스레 풀이 죽어 있었다. 새하얀 얼굴이 좀 안돼 보였다.
“왜?”
“그 기집애 일산 살아.”
오강빈이 아련하게 속눈썹을 감았다 떴다.
“되게 좋아했나 봐?”
“헤어지고 나니까 알겠더라.”
케이터링 형식으로 준비된 밥차 앞에서 담아온 음식을 간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 의자를 빼고 앉아 생수병 마개부터 땄다. 오강빈이 어떤 식으로 여자친구와 헤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다 참아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걔가 날 받아주고 있었어.”
“…….”
“너도 네 여친한테 잘해. 내 꼴 나지 말고.”
자동으로 선규호가 떠올랐다. 나가기 전 방에서 잠깐 봤던 얼굴이 떠올랐다. 손끝에 닿던 촉감. 온기. 안달 날 것같이 나를 설레게 하던.
“나, 여친 없어.”
“다 속여도 난 못 속인다!”
“…….”
“틈만 나면 핸드폰 달라고 유화 누나 뒤꽁무니 따라다니는 거 다 알거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촬영이 있는 동안엔 핸드폰을 반납하고 있던 터라,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매니저 누나를 졸라 핸드폰을 받아내곤 했었다. 이토록 누군가와 절실하게 닿고 싶다고 느낀 건 선규호가 처음이었다.
“이쪽 애는 아닌 거 같고, 학교 친구?”
나는 수긍하듯 고갤 가볍게 끄덕였다. 오강빈이 미트볼을 입에 넣으며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당연하다는 듯이 여자라고 단정 짓고 있는오강빈에게 딱히 내 성향을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선규호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예쁘냐?”
“어. 걔 땜에 돌아버릴 것 같아.”
알지, 알지. 그게 어떤 건지. 뭔가를 회상하면서 선배가 피식 웃었다.
“씬 하나 남았지?”
매니저 누나가 일정을 체크하면서 물었다. 일산 세트장으로 넘어와 씬 2개를 찍고 난 후 다음 촬영을 위해 대기를 타고 있었다. 대선배님들 사이에 끼어 촬영을 하고 있으면 기가 싹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꽤 촬영이 길어지고 있어 점심시간이 지난 줄도 몰랐다. 매니저 누나가 시간 날 때 밥 먹는 게 좋겠다면서 차 문을 열었다.
“도시락이라도 사다 줄 테니까 차에서 잠깐 쉬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을 틀어놓아 시원하게 식혀진 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대로 엎어졌다. 촬영이 나보다 빨리 끝난 오강빈은 다음 스케줄 때문에 일찍 촬영장을 떠났다. 그 뒤 나는 몇 장면을 연달아 찍었다. NG가 거의 없는 베테랑 선배님들의 열연 속에서 그나마 대사가 적어 튀지 않고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 근육이 뻐근했다. 냉기 서린 공기에 빠르게 몸이 적응했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밑으로 선규호가 끼어들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 속눈썹, 입술, 그리고 맞닿던 촉감. 눈감으면 잠들 줄 알았는데, 선규호가 떠올랐다. 빠르게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아까 매니저 누나에게 건네받은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촬영 중간 휴식 시간에 톡을 보냈는데, 아직 답이 없었다. 화면의 숫자 1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학원일 테지.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선규호의 옆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어려운 문제를 풀 때면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곤 했다. 나는 대답 없는 액정화면을 바라보며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형, 뭐 해]
[왜, 답도 없어.]
[보고 싶은 건 나뿐이지?]
[하아. 네 생각만 나.]
[목소리 듣고 싶어.]
다음 문장을 만들려다가 멈췄다. 잠잠하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액정화면에 뜬 선규호를 본 나는 가만히 입꼬리를 당겼다. 톡을 확인했는지 선규호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핸드폰을 고쳐 들고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기태오, 아주 재밌게 논다?
전파를 타고 넘어온 목소리는 어째선지 형이 아니었다.
-형이랑 연애질하면 근친상간 아닌가?
엘런의 목소리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위협적인 스트레스가 심장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짜증과 걱정이 한꺼번에 뇌를 지배했다. 도무지 형의 핸드폰이 어째서 엘런 손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만 가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하나같이 나쁘고 불건전한 생각들이었다. 엘런이 이렇게까지 저돌적으로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형 꿈에 끼어들었을 때만 해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건. 더 위협적이었다.
“너 뭐냐?”
공격적인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네가 왜 형 핸드폰을 들고 있어?”
-설명할게. 화내지 마.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엘런 때문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엘런이 어떤 새낀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규호한테 무슨 짓을 했을까 봐 더럭 겁이 났다.
-태오야.
싫다. 네가 나를 이렇게 부르는 거.
-문 좀 열어봐.
차창 밖으로 엘런이 보였다. 벌컥 차 문을 열자, 엘런이 씨익 웃었다. 지면을 달구던 한여름의 열기가 훅 끼쳐왔다. 엘런은 커다란 몸을 구부려 성큼 차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더위에 익은 손이 빠르게 문을 닫았다. 녀석과 함께 녹아들던 후덥지근한 열기가 뚝 끊겼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고갤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너 뭐야?”
엘런이 가볍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가까이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짙은 쌍까풀 밑으로 또렷한 동공이 나를 짓눌렀다. 옅은 금발 머리카락이 땀에 약간 젖어 있었다. 에어컨 냉기에 익숙해진 나완 다르게 태양열에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뮌헨에서 뭘 먹고 자랐는지, 깡말라 볼품없던 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커다래진 눈에 들어왔다.
“형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내가 꼭 무슨 짓 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한다?”
벌써 무슨 짓 한 건 아니고? 묻고 싶은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솟구쳤다. 형의 꿈에 들어와 저질렀던 이상한 짓거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선규호와 엘런. 둘이 같이 있는 것만 상상해도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나는 엘런을 노려봤다.
“형… 어딨어?”
엘런이 형을 반희용처럼 만들었을까 봐, 심장 끝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말해. 새끼야. 선규호 어딨냐고?”
반사적으로 엘런의 멱살을 꽈악 움켜쥐었다. 주먹을 쥐고 있는 반대편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앙, 더 조여봐. 나 발기했어.”
“개새끼!”
멱살을 놓으려는 찰나, 우악스런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너 뭐 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엘런이 나를 당겼다. 아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에 부딪혔다. 놀란 얼굴로 곧장 잡고 있던 멱살을 패대기쳤다. 엘런이 카시트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나는 벌레 보듯이 엘런을 쳐다봤다.
“너 미쳤어?”
순간, 이 새끼를 죽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새된 목소리가 분노와 함께 터져 나왔다. 하핫, 하고 가볍게 웃던 엘런이 갑작스럽게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어째선지 케이스가 눈에 익었다. 엘런이 윙크를 하면서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하곤 걸려온 전화를 받아 보란 듯이 스피커를 켠다. 그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여보세요?
형 목소리였다. 단숨에 선규호라는 걸 알았다.
“네, 말씀하세요.”
엘런이 마치 전화 올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 상황이 재밌는지 입꼬리가 다시금 당겨졌다.
-횡단보도에서 핸드폰 주워주신 분 맞나요?
“맞아요. 그렇잖아도 폰이 바뀌어서 곤란하던 참이었어요.”
-아, 저도요. 지금 교환 가능할까요? 어디쯤이시죠?
“여기가 어디냐면요?”
설마 선규호를 여기로 부를 셈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눈이 커다래졌다. 내 표정을 살피던 엘런이 피식 웃는 게 보였다.
“그럴 게 아니라, 제가 그리로 갈게요.”
-아, 괜찮겠어요?
“네, 위치 말씀해주세요.”
-여기가 어디냐면 아까 횡단보도…,
선규호가 한참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자, 알겠다는 듯이 엘런이 작게 속삭였다.
“알 것 같아요. 네, 이따 뵙죠.”
엘런이 눈을 접으며 작게 웃었다. 곧이어 전화를 끊는 엘런이 보였다.
“네 형이 오라는데, 같이 갈래?”
이제야 알 것 같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여기까지 온 거였다. 이유가. 분명해졌다. 형한테 접근하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할 줄이야. 답 없는 새낀 건 알았지만, 현실에서 대놓고 만나려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선규호와 만날 약속을 했으니 곧 있으면 형을 만나러 갈 것이다. 손 놓고 둘이 만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궁금하다며? 네 형 어딨는지.”
“입 닥쳐.”
“왜? 내가 선규호 만난다니까 불안해?”
참았던 주먹을 날렸다. 얼얼할 정도로 녀석의 턱을 세게 때렸다. 눈앞에서 엘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가리 닥치라고.”
입가를 훔치던 엘런이 바람 빠지듯이 웃음을 흘렸다. 손등에 피가 묻어 나왔다. 이맛살을 찌푸리던 엘런이 고갤 홱 돌려 나를 쳐다봤다. 입술이 터졌는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든 게 엉망이다. 그냥 개꿈 한 번 꾼 셈 치고 일어난 거였으면 좋겠다.
“형한테 말하지 마.”
녀석을 친 주먹이 화끈거렸다.
“불안해?”
엘런의 말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먹에 힘을 주며 녀석을 쏘아봤다. 엘런이 내 쪽으로 고갤 들이밀면서 씨익 웃었다. 덩치만 컸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옳고 그름을 무시하는 태도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도 여전했다. 짓궂게 내 눈을 들여다보며 즐거운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말했지? 나도 껴줘.”
“…….”
“그럼, 아무 말도 안 할게.”
불길함이 엄습해왔다. 녀석이 흘리고 있는 비릿한 웃음 탓에 속이 메스꺼웠다. 좋은 건수 하나 건진 얼굴로 엘런이 내 귓가에 얼굴을 붙였다.
“나도, 네 형이랑 놀고 싶어.”
씨발. 욕이 절로 나왔다. 속이 한꺼번에 뒤틀리는 것 같았다. 엘런의 얼굴을 거칠게 귀에서 떼어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담배가 말렸다. 매니저 누나한테 담배 피는 걸 들킨 이후 완전히 끊겠다고 맹세하고선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엘런은 형을 반희용 대용품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분위기를 풍긴 것도 맞고. 꽤 오랫동안 꿈에서 형을 괴롭혀온 것도 사실이었다.
“공범끼리 떠벌릴 일은 없잖아, 안 그래?”
잔뜩 들떠 있는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확실히 말해두지 않으면 저 녀석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진심이 통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선규호를 두고 너와 그럴 일은 없다고, 단단히 못을 박고 싶었다.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지금이 아니면 어쩌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내가 선규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규호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감정에 대해서.
“엘런.”
“…….”
“나, 선규호 좋아해.”
“…….”
“친구나 가족 같은 게 아니라. 그런 의미로 사랑해.”
철없이 빛나던 눈동자가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그런 의미로 사랑하는 건 뭔데?”
“…….”
“꿈에서 할 짓 못 할 짓 다 했으면서, 이제 와서?”
“…….”
“정신 차려, 태오야.”
녀석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툭툭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기묘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네 형.”
“…….”
“반희용처럼 만들 순 없잖아, 안 그래?”
* * *
강이준이 천천히 핸들을 꺾어 차를 도로 쪽으로 붙였다. 편의점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옅은 금발 머리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태워줘서 고마워.”
보조석 문을 막 열려는 순간,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냉큼 낚아챘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벌컥 차 문을 열고 강이준이 차에서 내렸다. 편의점에 서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강이준이 보였다. 에휴 저 오지랖. 그냥 핸드폰만 바꿔서 학원 들어가면 되는 걸. 일을 참,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신종 사기네, 뭐네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점심 먹는 동안 신랄하게 깠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벌써 핸드폰을 교환했는지 강이준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슬쩍 편의점 쪽을 보자, 금발 머리가 나를 보고 살짝 고갤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곱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나도 얼른 고갤 숙여 인사했다. 남자가 핸드폰을 흔들며, 고마워요. 하고 입 모양을 만드는 게 보였다. 그 때, 강이준이 벌컥 보조석 문을 열고 나를 쳐다봤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명령하듯 말했다.
“타.”
“대체 뭐라고 하고 핸드폰을 바꾼 거야? 이상한 말 한 거 아니지? 아까 식당에서 지껄이던 말, 설마 했어?”
“잔말 말고. 어서 타기나 해.”
강이준이 강제로 나를 보조석에 밀어 넣곤 문을 탁, 닫아버렸다. 얼른 차창에 붙어 편의점 쪽을 바라봤다. 그사이 가버렸는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적어도 고맙단 인사는 하고 싶었는데. 핸드폰을 돌려받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벨트 매. 학원 앞까지 데려다줄게.”
“고맙단 말도 못 했잖아.”
“저런 양아치 같은 새끼한테 무슨 감사 인사야?”
“그런 사람 아니래도?”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몰라서야.”
손을 뻗은 강이준이 안전벨트를 쭈욱 잡아당겨 바르게 매준다. 시선이 가깝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벨트 같은 거 하루 이틀 매준 것도 아닌데. 기분이 묘했다. 괜히 태오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은 뭘까.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정보 빼돌려서 협박하던 놈들 뉴스에서 못 봤어?”
“내가 무슨 국정원이야? 정보는 무슨.”
“카톡 문자 가지고 협박하는 새끼들이 허다한데. 어린이 아니랄까 봐, 아주 태평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사람 아니래도.”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겠지.”
나는 가만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태오랑 주고받았던 카톡, 문자들이 갑자기 신경 쓰였다. 락을 걸어놓긴 했어도 카톡은 미리 보기로 볼 수 있었을 텐데. 그사이, 태오한테 문자라도 왔다면. 얼른 락을 풀고 카톡을 살폈다. 태오에게서 온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줄줄이 이어진 문장들이 어째선지 낯 뜨겁다. 그 남자가 이걸 봤다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평범한 연애를 하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남들 하는 연애와 별다를 것 없는데도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도 나를 상처입힌 적 없는데, 꼭 상처받은 기분이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밀어내려고 서둘러 톡을 보냈다.
[미안. 톡 지금 봤어.]
[핸드폰 잃어버릴 뻔했는데, 다행히 되찾았어.]
[강이준이 신종사기단이라고 하면서 ㅋㅋ 대신 찾아줬는데.]
[아직도 내가 앤 줄 알아.ㅠㅠ]
[아, 강이준이랑 같이 점심 먹었거든.]
[암튼. 핸드폰은 무사해.]
답 없는 문자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너도 그랬을까. 답 없는 문자를 보내고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날 생각했을까. 보고 싶다던 문장처럼, 네 마음이 나와 같았을까. 나는 다시 문자를 만들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태오야. 고작 문자 하나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하루에도 몇 겹의 감정들이 오르내렸다. 태어나 처음 가져보는 낯선 감각들이 얼떨떨했다. 심호흡을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애달프고 안타까운 감정이라는 걸, 기태오가 아니었으면 난 알지 못했겠지. 그러는 사이 강이준이 몰던 차를 천천히 멈췄다.
“들어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고마워.”
밤이 내려앉은 새벽 두 시. 손을 놀릴 때마다 스프링노트 위로 샤프심 소리가 사각거렸다. 고만고만한 난이도를 푸는데 자꾸만 실수했다. 답안지와 맞지 않는 답이 나왔다. 이상했다. 책상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공부하는 건 익숙한 일인데도, 집중력이 바닥난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문제들을 풀고 있기가 힘들었다.
겨우 한 페이지를 풀고 해답지를 꺼내 비교했다. 내가 풀어놓은 답과 일치하지 않는 숫자들. 익히 알고 있는 문제를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풀이과정을 눈으로 훑으면서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틀렸다고 생각하니 한심했다. 허공에 뱉어낸 한숨들이 틀린 답만큼 늘어가고 있었다.
손을 뻗어 탁상용 달력을 들춰봤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날짜를 가만히 쳐다봤다. 불과 몇 달 남지 않는 시간을 헤아려보면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목표 대학, 성적, 등급, 현실적인 내 위치. 공부는 당연한 거고, 목표한 대학에 붙는 것도 당연한 거였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불안하다고 느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이깟 문제 몇 개 틀렸다고 수능을 망칠 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늘 해왔던 당연한 공부가 하나도 재미없다는 거였다.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와중에 기태오가 끼어들었다. 뭘 하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내 생각은 할까. 기집애들이 집적거리는 건 아닐까. 목표 대학이나 성적, 등급이 흔들릴 만한 여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신경 쓰게 되는 건 우습게도 기태오였다.
살면서 누군가를 신경 써본 적이 있었던가. 어릴 때부터 손안에 감겨든 마음들을 간단히 눈으로 읽었다. 그 사람의 기분이나 느낌, 품고 있는 어떤 속내든 활자로 쏟아져 눈으로 들어왔다. 앞뒤 다른 동전처럼 속과 겉이 다른 무수한 사람들…. 내 눈을 지나쳐간 마음들에 내 마음을 할애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다 보이는 마음에도 이렇게 무덤덤하던 난데. 하나도 보이지 않는 기태오 앞에선. 왜 이렇게 안달이 날까.
집어삼킬 것 같은 눈동자. 혀에 닿던 입술. 뜨겁게 안던 팔과 우리가 닿았던 몸의 흔적들. 가슴께를 흔들고 지나온 감정이 몸 안에서 열을 내는 것 같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아.”
나는 그대로 문제집에 코를 박았다. 넌 아무래도 촬영이 늦어지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새벽에 나갈 때 억지로라도 일어나 얼굴 좀 봐둘걸.
‘똑똑.’
누군가, 내 방문을 작게 두드렸다. 책상에 엎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이런 식의 노크를 해오는 건 기태오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천천히 손잡이가 돌아갔다. 곧이어 조심스레 열렸던 문이 반듯하게 닫혔다. 문에 등을 기댄 기태오가 그곳에 서서 나를 쳐다봤다. 우리의 시선은 자석처럼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진정되지 못한 숨이 너를 흔들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퇴폐적인 눈매가 야했다. 녀석이 천천히 이 입술을 열었다.
“이리 와.”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숨에 다가가 그대로 녀석의 품을 파고들었다. 허리에 감긴 단단한 팔이 나를 꽉 조였다. 탄탄한 근육이 나를 휘어 감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빠른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맞댔다. 네 입술이 뜨겁게 나를 물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네 혀가 나를 핥기 시작했다. 등줄기로 야릇한 감각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좀 더 너를 끌어안았다. 다급하게 쏟아내는 숨결. 눈빛. 다시 맞닿는 입술. 촉감. 입술이 떨어진 순간, 녀석이 앓는 소릴 냈다. 미간이 금세 찌푸려져선 참기 힘든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키스만으론 못 참겠어.”
장난처럼 몸이 붕 떠올랐다. 녀석이 어느 틈에 번쩍 나를 안아 그대로 침대에 던지다시피 내려놨다. 탄력 좋은 매트리스 위로 넘어진 몸을 일으키려는데, 일말의 틈도 없이 기태오가 나를 덮쳤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잡아 벌리곤 그대로 머릴 밀어 넣었다. 녀석의 머리 때문에 티셔츠가 불룩하게 늘어났다. 배꼽 근처를 혀로 핥는 게 느껴졌다. 간지러워 몸이 저절로 동그랗게 말렸다.
“하핫, 간지러워.”
녀석의 머릴 밀치며 말리려고 했지만 막무가내다. 입술에 닿은 살결이 뜨겁게 빨리는 게 느껴졌다. 혀로 핥으면서 점점 위로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져 가슴께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녀석이 혀로 젖꼭지를 핥았다. 꼿꼿하게 선 젖꼭지가 금세 녀석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녀석의 손이 내 것을 넘봤다. 간지럽던 몸이 점점 흥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녀석의 입술이 부드럽게 젖꼭지를 물고 혀로 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어 불룩해진 내 티셔츠를 위로 잡아당겼다. 턱밑까지 끌어 올리자, 발기한 젖꼭지를 빨고 있는 기태오가 눈에 들어왔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유두를 혀로 천천히 쓸어 올리면서 나를 올려다봤다. 빨간 혀가 내 것을 좀 더 느리게 짓누르고 있었다. 허벅지에 뭔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딱딱하게 굳은 것이 느리게 문질러지고 있었다.
“기태오.”
“…….”
“네 꺼 섰어.”
녀석이 물고 있던 젖꼭지를 살짝 뱉어놓고 바로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춰왔다. 그러면서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너 땜에 발정 나서 그래.”
“변태 새끼.”
푸스스 웃으며 장난을 걸자, 녀석이 바로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묻는다.
“그래서 싫어?”
“…….”
“말해봐, 형.”
“저리 가. 병신아.”
괜히 부끄러워 녀석의 턱을 쳐냈다. 꿈적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이 입꼬릴 당기며 작게 속삭인다.
“여기, 부끄러워서야? 아니면 흥분해서 그래?”
“…….”
“빨개져서 자꾸 만지고 싶어.”
손가락으로 오른쪽 귓불을 느리게 어루만지는 게 느껴진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가 뜨거워 슬쩍 눈을 내렸다. 귓불이 더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녀석이 고갤 숙여 만지작대던 귓불을 입술로 머금었다. 혀로 조심스레 핥는 게 느껴졌다. 야릇한 촉감에 속눈썹이 떨렸다.
“으읏.”
입술 밖으로 젖은 신음이 아무렇게 흘러나왔다. 귓불을 핥으면서 녀석이 다시 속삭였다.
“네 소리 되게 야한 거 알아?”
“…….”
“그게 날 미치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