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불안
저녁은 간단히 시켜 먹었다. 도우미가 없으니 생활하는 게 불편했다. 내일 촬영이 있어 새벽같이 나갈 걸 고려해본다면, 아무래도 도우미를 다시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형의 입맛이나 기호에 맞게 준비해주는 윤 여사가 있다면 좋겠지만. 이대로 있다간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할 거 같았다. 오전에 출근했으면 좋겠단 문자를 간단히 남기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대본을 집어 들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면서 대사를 눈으로 훑었다.
달깍, 욕실 문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샤워를 마친 형이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며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도 선규호 냄새가 맡아졌다. 청결하고 산뜻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소파 쪽으로 다가온 형이 내 옆에 털썩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반듯하게 이마를 덮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 갸름한 턱선. 목울대. 보일 듯 말 듯한 쇄골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형 쪽으로 자세를 고쳐 잡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노곤하게 풀린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졸려?”
“…으응.”
숨결과 함께 쏟아지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젖은 머리칼을 만졌다. 하지 말라고 핀잔을 줄 줄 알았는데, 어째선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섬세한 속눈썹이 단정했다. 감히 가 닿을 수 없는 것을 만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형을 바라보면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손을 내려 얼굴선을 더듬었다. 매끈한 살결이 손등 위로 부드럽게 스쳤다. 만지면, 닿고 싶고. 키스만 해도 거기가 설 것 같았다. 마치 짐승처럼 선규호를 탐하고 싶은 욕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자극했다. 뺨에 닿은 색기가 귓불을 지나쳐 나른한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삼켰다. 또 하려고 하면, 형이 그땐 나를 상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제가 필요한 순간임이 분명한데, 선규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나를 짐승으로 만들고 있었다.
“방에 데려다줄게.”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작게 소곤거렸다. 선규호가 간지러운 듯 입꼬리를 살짝 당기면서 푸스스 웃었다. 그리곤 느슨하게 감겼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공주님 안기로 데려다주려고?”
“그런 거 좋아했어?”
“하핫. 그럴 리가.”
장난을 걸고 싱겁게 웃는 입술이 예뻤다. 등과 다리 사이로 벌린 팔을 밀어 넣어 그대로 형을 안아 몸을 일으켰다.
“야. 야. 너!”
당황한 선규호가 갑작스레 허공 위로 몸이 붕 뜨자, 내 목에 팔을 감아왔다. 젖은 입술이 내 쇄골에 닿는 게 느껴졌다. 선규호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에 곤혹스러운 건 내 몫이었다. 사내 녀석치곤 가벼운 몸무게 탓에 신경이 쓰였다. 원래 몸이 약했다. 자주 코피를 쏟았고, 툭하면 병원에 실려 갔던 몸이었다. 생각할수록 선규호한테 몹쓸 짓만 한 하루였다. 2층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그만 내려달라는 말 대신 나를 꽉 끌어안았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라가니 형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놓지 마.”
들릴 듯 말 듯, 귓가에 닿는 나지막한 너의 목소리에 솜털이 서는 것 같았다. 빠르게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형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침대에 형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었다. 주춤하고 놀란 형의 설익은 입술을 빨았다. 혀가 닿는 순간, 쿵쾅거리는 심장이 욕심을 내고 있었다. 형이 내 얼굴을 잡고 천천히 맞닿아 엉켜 들었던 입술을 떼어냈다.
“기태오.”
낮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진지했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해.”
“왜?”
머뭇거리는 눈동자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이유인지 선규호의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너도 남자면 알 거 아냐.”
“가만있어.”
“…….”
“남자면 다 아는 그거, 해결해줄게.”
선규호가 다릴 접어 몸을 구부리며 나를 밀쳤다. 빨갛게 물든 귓불이 눈에 들어왔다. 엉거주춤 오므리고 있는 두 다리가 뭘 감추고 있는지 다 보였다. 하아. 폐부를 가르고 새어 나온 숨이, 이성을 완전히 놔버리는 신호일 줄은 몰랐다. 더는 손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바람이 헛되던 순간이었다. 형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바로 눕히고 그 위로 올라갔다.
[10분 후면 도착해.]
새벽 두 시 십오 분. 문자를 확인하면서 액정화면의 시계를 응시했다. 매니저 누나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할 것 같았다. 알몸으로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고갤 내려 잠든 선규호를 쳐다봤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호흡이 꽤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입술을 내려 형의 매끈한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흐음. 태오.”
설핏 잠이 깬 모양이다. 잠덧 하듯 내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더 자.”
“으응….”
손가락을 내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풍성하게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정수리에 입을 맞추면서, 작게 속삭였다.
“다녀올게, 형.”
허리에 감긴 팔을 신중하게 풀어 내려놓고, 얄팍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에어컨의 온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곤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씻고 나와 옷을 입었다. 어차피 스타일리스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해줄 터였다. 스냅백을 아무렇게 눌러썼다.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공들여 잘 가꾼 정원을 따라 큼지막한 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지이잉-’
때마침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거의 다 와간다는 매니저 누나의 문자일 것이다. 가볍게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수신된 문자를 클릭했다.
[조심해. 엘런이 이번엔 널 부술 거야.]
발신자 표시 제한 문자였다. 그림자처럼 얼굴을 숨기고 보내온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저만치 자동차 불빛이 이곳을 비추었다. 매니저 누나가 온 모양이었다. 찜찜한 기분으로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차가 서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눈이 떠졌다. 산뜻한 청량감.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같이 개운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생각 없이 허릴 움직이다가 하으으, 하고 앓는 소릴 냈다. 태오와 잠을 잔 일이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도우미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단 이유로 학원도 빠지고 과외도 다 밀어놔서 오늘만큼은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식탁 위로 정갈한 한식이 차려져 있었다.
의자를 빼고 앉자 엉치뼈 위로 날 선 아픔이 느껴졌다. 살짝 미간이 구겨졌다. 까놓고 말해 기태오만 탓할 게 못 됐다. 좋다고 달려든 녀석을 두 팔 벌려 껴안은 건 나였다. 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입 떠먹었다. 윤 여사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어젯밤 배달시킨 음식에 비하면 한결 나았다.
새벽 무렵, 잠결에도 느껴지던 태오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행여 내가 깰까 봐, 한껏 숨을 죽인 목소리로 ‘다녀올게, 형.’ 하고 속삭이던 기태오가 생각났다.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던 소리. 깰까 봐 조심스럽게 닫히던 문소리까지. 잠깐이라도 일어나 얼굴이라도 봐둘걸. 녀석의 표정을 못 본 게 좀 아쉬웠다.
밥을 한 숟갈 떴다. 기태오는 아침 밥 먹었을까. 설마 굶기면서 촬영하진 않겠지. 매니저 누나가 꽤 깐깐하게 태오를 챙기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지만,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이이잉-’
누군가 톡을 보내는지 핸드폰이 잘게 떨렸다. 물을 마시려다 컵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뻔히 바쁜 거 알면서도 이미 심장은 너였으면 좋겠다고 두근거리고 있었다.
[엄빠 없다고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강이준이 보낸 톡이었다. 눈가에 실망감이 감돌았다. 김빠진 콜라처럼 낮게 한숨을 뱉었다.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빠르게 문자를 찍었다. 강이준이 톡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곧바로 톡이 올라왔다.
[점심에 갈 테니까. 밥이나 먹자.]
[왜?]
[할 말도 있고. 전해줄 것도 있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고3이야. 몰라?]
바로 톡이 이어서 올 줄 알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무료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젓가락으로 의미 없이 밥알을 들었다 놨다 했다.
-어이, 선규호 어린이?
운전 중인지, 스피커로 통화를 하고 있어 감이 조금 먼 느낌이었다. 나는 턱을 괴고 인상을 썼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럼 좀 성장 좀 해봐. 형이 만족할 만큼.
“키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골내고 있는 내가 재밌어 죽겠는 모양이다.
-시간 많이 안 뺏을게. 밥만 먹자. 밥만.
강이준이 한가하게 밥이나 먹자고 전화를 한 건 아닐 테고. 분명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엄빠 없다고 사고치는 건…. 좀 전의 톡이 생각났다.
“아빠가 형한테 나 감시하라고 했어?”
-왜, 감시받을 짓이라도 했나?
돗자리 펴도 되겠네.
“아니면 말고.”
-얼굴 본 지 좀 됐잖아. 내가 걱정돼서 그래.
“…….”
-공부하고 있어. 시간 맞춰서 학원 근처로 갈게.
“바쁘다니까.”
-이따 전화나 받아.
뚝하고 전화가 끊겼다. 아무래도 아빠가 강이준에게 나를 부탁한 것 같았다. 이제 몇 달 후면 나도 어엿한 성인인데, 아빠도 강이준도 너무 애 취급이다. 심지어, 기태오랑 잠도….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강이준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혹여라도 아빠가 알게 되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발, 아무 생각 말자. 핸드폰을 집어 들고 2층 계단을 올랐다.
학원을 빠져나오면서 손목시계를 봤다. 열두 시 오 분이 막 지나던 참이었다. 슬쩍 고갤 들자, 푸른 물감을 새파랗게 풀어 놓은 하늘이 보였다. 막 삶은 듯한 흰 구름이 그림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쨍한 날인데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시원했다. 기어이 강이준은 나를 불러냈다. 어차피 먹는 점심 같이 먹자는 말, 식당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발걸음을 옮겨 횡단보도 앞에 섰다. 빨간 신호등으로 바뀐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라 좀 기다려야 했다. 일부러 과외를 떠올렸다. 빠진 시간을 보충받으려면 선생에게 연락해 보강 시간을 잡아야 했다. 학원에서 본 모의고사 성적이 그닥 좋지 못했다. 수학에서 실수로 문제를 두 개나 놓쳐버렸다. 생각해보니 밀린 인강도 들어야 했다. 머릿속에 온통 해치워야 할 공부로 가득한데, 습관처럼 나는 기태오를 떠올렸다. 고3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를 밀어내고, 기어이 기태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 없이 조용한 폰을 마른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래도 핸드폰 하려면 눈치가 보일 테지. 촬영장이 어떤 곳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태오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작품이 거듭될 때마다 녀석의 인지도는 점점 오를 것이다. 유명세를 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톱스타 반열에 오르는 것 역시 머지않은 미래의 일일 것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건너편 사람들을 쳐다봤다. 저 사람들 역시 언젠간 기태오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알아볼 게 분명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빨갛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강이준이 왜 이렇게 늦냐고 한 소리 할 것 같았다. 신호등을 사이에 두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랐다. 제법 큰 대로변의 횡단보도라서 건너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틈에 초록 신호등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순간,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상대편도 부딪힌 충격 탓에 핸드폰을 놓쳤는지 그쪽 것도 나뒹구는 게 보였다. 저만치 떨어진 핸드폰을 내 것과 함께 누군가가 주워 들었다.
수그리고 있던 상체를 들어 올린 누군가가 한 걸음 다가왔다. 태오만큼 큰 키가 압도적이라 고갤 들어 올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옅은 금발의 머리카락이었다.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선명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단순한 오해였다는 걸 알았다. 좀 전에 주워든 핸드폰을 선뜻 내 쪽으로 건네주었다.
“죄송합니다. 액정 괜찮아요?”
핸드폰을 받으면서 사과를 했다. 어찌 됐건 내 쪽의 실수가 분명했다.
“네, 멀쩡해요.”
고갤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럼, 하고 그가 나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꽤 바쁜 모양인지 서둘러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곧 신호가 바뀔 터였다. 나도 빠르게 횡단도보를 건너면서 바지 뒷주머니에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크림파스타 괜찮아?”
메뉴판을 보던 강이준이 슬쩍 이쪽을 보고 물었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문을 기다리고 있던 점원에게 같은 걸로 주세요, 하고 친절한 미소를 보였다. 나는 빤히 강이준을 쳐다봤다. 오늘은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손가락이 유리 포트에 담긴 생수를 따라 내 앞에 놓아 준다. 말끔한 슈트에 행커치프로 잔뜩 멋을 부린 강이준은 아마 나 말고도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봐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내가 뭘?”
“감시하는 거 아니랬잖아.”
찔리는 구석은 있는 모양인지 먼저 말을 꺼낸다.
“누가 뭐랬나?”
쭈욱 입술을 빼고 골난 표정을 짓자, 강이준이 피식 웃는다. 내 쪽으로 손을 뻗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꾸욱 누른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이라 멈칫했다. 머릴 뒤로 빼려는데 못 움직이게 턱을 그러쥐었다.
“아무한테나 입술 내밀지 마.”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이 싸악 하고 입술을 훔친다. 나른하고 오묘한 손놀림에 저절로 강이준의 이마 위를 쳐다봤다. 정수리 위로 올라오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널 그런 눈으로 보면 어쩌려고 그래?’
눈동자를 깜박였다. 다음 문장이 머리 위로 떠오르려는 찰나, 입술을 감싸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강이준과 잘 어울리는 금태 안경이 반듯하게 올라가 코에 걸렸다. 그런 ‘눈’이란 게 뭘까. 강이준과 그런 ‘눈’은 절대 매치가 안 되는데. 속마음이 거짓일 수는 없는 건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맞다, 하고 강이준이 가방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중앙에 붉은 실링왁스가 압인된 봉투를 내밀며 물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돼?”
나는 건네받은 흰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가만히 열어보자, 북 표지를 배경으로 세련된 디자인의 초대장이 눈에 들어왔다. ‘밤과 함께 우린 모두 꿈을 꾼다’ 책 제목 아래, 저자 ‘강이준’이라고 찍힌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날짜, 시간 따위를 적어놓은 문구와 함께 단순한 약도 이미지도 있었다. 형이 건넨 건 출간기념행사 초대장이었다.
“형, 책 냈어?”
“보시다시피.”
활짝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 강이준 신작 낸 거야?”
“까분다.”
강이준은 눈을 휘며 즐거운 듯 웃었다. 덤덤한 척 초대장을 주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걸 안다. 신작이라니. 3년 만이었다. 이 책을 완성하려고 긴 시간 방황했을 터였다. 뭐든 냉철하게 잘 해낼 것처럼 굴어도 은근 허당인 사람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강이준이 나를 아는 시간만큼 나 역시 강이준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좀 전 눈에 들어왔던 마음들이 이해가 안 가. 형.
“올 거지?”
내 대답을 기대하는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나는 일부러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평소와 별로 다를 거 없게. 버릇없고 멋대로고 그냥. 강이준이 알고 있는 선규호 그대로.
“내가 좀체 바빠서 말이지. 스케줄이 분 단위로 있거든. 토요일 오후 다섯 시면, 과외랑 겹칠 것 같긴 한데….”
핸드폰 액정화면을 켜고 시선을 내렸다.
“어?”
액정화면을 들여다본 순간, 뭔가 이상했다. 얼른 핸드폰을 앞뒤로 뒤집어 봤다. 분명 같은 기종에 같은 케이스가 맞는데, 내용물이 달랐다. 내 핸드폰이 아니었다. 그러다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이건 여기 들어오기 전 횡단보도에서 부딪혔던 그 사람 폰 같았다. 어째선지 잠금장치조차 없었다. 화면을 손으로 누르자 자연스럽게 인터페이스가 열렸다.
“왜, 과외 빠지기 곤란해?”
생수를 한 모금 삼킨 강이준이 눈을 깜박이며 물어왔다.
“아니. 나 아무래도 핸드폰 바뀐 거 같아.”
“누구? 기태오?”
“그건 아니고. 아까 여기 오다가 횡단보도에서 모르는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그때 바뀌었나 봐. 케이스가 완전 똑같아서 내 건 줄 알았지.”
“전화 빌려줘?”
“괜찮아, 이 사람 잠금장치 안 걸어놨어. 전화 걸면 받겠지.”
나는 홈 화면의 전화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해 빠르게 내 번호를 입력했다. 곧바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컬러링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음악 소리가 조금 길어진다고 생각하는 사이,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아마 그일 것이다. 큰 키에, 옅은 금발 머리를 한.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