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위태로운 꿈 (19/37)

18. 위태로운 꿈

버스정류장에서 멍하니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나는 우산도 없는지 젖은 교복 차림으로 버스가 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서 주머니의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젖은 속눈썹을 내려 가만히 물이 고인 물웅덩이를 쳐다봤다. 살갗을 파고드는 낯선 추위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우산을 쓴 채 버스정류장 안으로 들어왔다. 우산을 접는 동작이 유난히 컸다. 큰 키 아래로 옅은 금발 머리가 눈에 띄었다. 포마드 스타일로 넘긴 머리카락 탓에 반듯한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외국인인가. 슬쩍 이쪽을 쳐다보는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검은 눈동자가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외국인은 아니었다. 염색이었구나. 유난히 붉은 입술이 비현실같이 여겨졌다. 괜히 멋쩍어 버스가 오는지 고갤 돌렸다. 그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나와는 상관없는 척 먼 곳을 응시했다.

그 때였다. 그가 나의 목덜미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게 느껴졌다. 어떤 말도 없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홱 고갤 돌려 그를 쳐다봤다. 불쾌한 감정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 채 목소리를 높였다.

“뭐 하는 거죠?”

상대방의 머리 위로 당연한 듯 보여야 하는 감정들이 드러나지 않았다. 살이 닿았고 체온도 분명히 느꼈는데, 보통 이런 일은 처음이라 놀란 눈을 깜박였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건 태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그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내게 윙크를 날렸다. 호선을 그린 입술선이 재밌다는 듯 벌어지면서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데, 어째선지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치미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가까이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벌어진 거리만큼 다가와 고갤 숙이더니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schön sein.”

그리곤 능숙하게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었다. 때마침 온 버스에 그가 올라탔다. 버스가 떠나는 걸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손에 든 우산을 내려다봤다. 말끔하게 접힌 우산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점점 빗줄기가 거세지고 바람이 불었다. 물웅덩이에 고인 물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목이 서늘했다. 묘하게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코피를 쏟을 때같이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만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이 떠졌다.

꿈이구나….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가슴이 가파르게 뛰어댔다. 마치 오랫동안 뭔가에 쫓기다가 일어난 것처럼 뛰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째선지 낯선 소파에 모로 누워 있었다. 잠이 덜 깼는지 몸이 축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뇌가 묵직했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팔에 힘을 주는데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위인가.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여긴 어떤 룸 안인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바로 보이는 벽엔 큼지막한 디스플레이용 TV가 걸려 있었다. 방 안을 아우르고 놓인 디귿 자 모양의 가죽 소파와 커다란 테이블이 이 룸을 채우고 있는 전부였다. 창도 하나 없는 구조로 입구인 듯 보이는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룸 안을 감도는 조명은 금방이라도 수명을 다해 꺼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나는 무기력하게 누워 내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생각하려 애썼다.

그 순간, 정면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틈 사이로 시끄러운 음악이 고막을 찢을 듯이 달려들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성큼성큼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곤혹스런 소음이 뚝 끊겼다. 시선을 옮겨 이쪽으로 걸어오는 누군가를 쳐다봤다.

“Bist du wach?”

조명을 등지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통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큼지막한 키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무릎을 접고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이제야 말을 걸어온 그가 눈에 들어왔다. 옅은 금발 머리,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붉은 입술…. 본 적이 있던 얼굴인가. 어째선지 낯이 익었다. 뭐라고 입술을 떼려는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난감했다.

“Halt still…. 움직이기 힘들 거야.”

마치, 내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그가 피식 웃었다. 뭐가 재미있는지 짓궂은 눈매가 천진난만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노려보면.”

“…….”

“나 흥분되는데.”

기가 찼다. 옴짝달싹 않고 누워 노려보는 게 고작인 나를 두고. 이게 가위라면 빨리 깨고 싶었다. 그 순간, 내 시야 가까이 그가 검지를 뻗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그란 원형이 일정한 속도로 느릿하게 회전했다. 자석에 이끌리듯 손끝을 따라 눈동자가 함께 움직였다. 호흡이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아무 이유 없이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공기가 폐부에 차올랐다가 빠지는 사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해졌다.

“걱정 마. 강제로는 안 해.”

어째선지 그의 목소리가 아득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졸음이 오는 것처럼. 시야가 이상하게 흐릿흐릿했다. 눈에 힘을 주려고 애쓸수록 진득한 무언가가 송두리째 나를 끌어 내렸다.

“곧 있으면, 태오가 올 거야.”

그가 익숙한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태오를 알고 있던 것처럼, 발음하는 이름이 자연스러웠다.

“웬만하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

“협조 좀 해줘야겠어.”

천천히 손가락을 늘어뜨려 내 목덜미를 꾸욱 눌러왔다. 가까스로 힘을 주고 있던 눈이 완전히 풀리는 게 느껴졌다.

“선택권은 줄게.”

“…….”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억겁 같은 잠이 나를 내리눌렀다. 속수무책으로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Das wird lustig.”

그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였다. 붉고 선명한 입술이 호선을 긋는 게 설핏 감긴 눈꺼풀 사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아마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 같았다.

* * *

2층으로 무작정 뛰었다. 붐비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다급하게 계단을 밟았다.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거칠게 뱉어졌다. 계단을 다 올라서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2층 역시 혼돈의 도가니였다.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들이 아무렇게 무더기로 길을 막고 흐느적거렸다. 중앙 스테이지를 중심으로 광분에 싸여 소리지르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절로 한숨이 쏟아졌다.

색색별의 현란한 조명이 머리 꼭대기 위에서 사정없이 회전하는 통에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까 녀석이 서 있던 난간을 쳐다봤지만 그사이 어디로 내뺐는지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비슷한 뒤통수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옅은 금발을 하고 서 있는 뒤통수를 당겨 보면 어김없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고갤 돌려 중앙 스테이지를 바라봤다. 사내들이 알몸에 작스트랩만 걸친 채 흘러나오는 비트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때였다.

“헤이, 태오!”

중앙 스테이지 건너편. 각양각색의 술이 종류별로 진열된 고급스런 칵테일 바에 앉아 손을 흔드는 엘런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이 굴고 있어,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성큼성큼 걸어가 다짜고짜 녀석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이 새끼!”

집어삼킬 듯이 거칠게 엘런을 바짝 잡아당겼다. 잔뜩 인상을 쓰고 눈을 부라리며 녀석을 쏘아봤다.

“규호 어딨어?”

“3년 만에 보는데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씨발, 잡소리 집어치우고. 형 어딨냐고!!”

엘런은 여유로운 얼굴로 씨익 웃으면서 뭐가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교묘하게 입꼬릴 당기면서 작게 속삭였다.

“네 형은 알고 있어?”

“……!”

“네가 매일 밤, 꿈에 들어가서 존나 데리고 논 거.”

나도 모르게 멱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멋대로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너한테 남창처럼 다리 벌린 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

그만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나갔다. 녀석의 왼쪽 턱이 사정없이 돌아갔다. 홱 고개가 꺾인 녀석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혈압이 수직으로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죽일 듯이 발로 찼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무자비하게 차버린 얼굴은 이미 피떡이 되어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곤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

“야. 야! 기태오.”

나는 완전히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등에 매달린 누군가를 밀치고 숨통을 끊어놓을 기세로 무참히 발길질을 해댔다. 잔뜩 얻어터진 엘런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저만치 떨어져 나갔던 누군가가 다시 등에 달라붙었다. 말리려고 나를 잡는 줄 알았는데, 귓가에 대고 누군가가 입술을 달싹였다.

“재밌어?”

“……”

“사람 패는 기술은 여전하다!”

즐겁다는 듯이 웃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고갤 홱 돌렸다. 말끔한 얼굴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엘런이 눈에 들어왔다. 좀 전까지 죽일 듯이 내가 팼던 엘런을 내려다봤다. 바닥에 고꾸라져 있던 엘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말끔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을 꽉 쥐고 엘런을 노려봤다.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주먹을 쥐고 있는 손에 핏줄이 곤두서 있었다.

“패고 싶으면 대줄게. 자.”

엘런은 장난스럽게 얼굴을 들이밀면서 지껄였다. 바보같이 헤르셔의 영역을 순간 잊고 말았다. 천진난만한 얼굴의 엘런이 주먹을 쥐고 있는 내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봐. 분 풀릴 때까지 때려도 돼!”

“……”

“반성 많이 했다고 했잖아….”

“……”

“두 손으로 목 졸라볼래?”

내 손을 자기 목으로 가져가 진짜로 목을 조르려고 힘을 주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내 손을 거칠게 빼내곤, 미쳤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런은 웃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기태오.”

정신병자 같은 새끼. 이젠 녀석을 노려볼 힘도 없었다. 엘런을 상대하는 동안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나는 기진맥진한 기분으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한껏 힘을 썼더니 정신이 멍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엘런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녀석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바텐더가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마가리타 한 잔을 놓아주었다. 나는 투명한 잔에 찰랑이는 라임색 액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진정됐어?”

“꺼져. 새끼야.”

“자, 마셔.”

나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새콤한 신맛이 강하게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선규호는 어딨을까. 여기가 형의 꿈이 아니라면. 형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떻게든 엘런에게 형의 행방을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방심한 틈을 타 녀석이 내 어깨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발가락부터 타고 올라와 재빠르게 몸이 굳기 시작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엘런이 어깨에서 손을 떼자 완전히 돌처럼 굳어선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은 굳었지만 빠르게 돌고 있는 뜨거운 피는 당장이라도 솟구쳐 오를 것만 같았다. 엘런이 피식 웃으면서 보란 듯이 칵테일 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존나 멍청한 새끼.”

엘런이 내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 히죽거렸다. 다시금 바텐더가 내려놓은 마가리타를 들어 삼키곤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느릿하게 감겼다가 떠진 눈동자가 차갑게 굳은 내 몸처럼 냉랭하게 나를 노려봤다.

“잘 봐, 네 형이 오늘 밤 어떤 씹새끼들에게 따먹히는지….”

시끄러운 비트가 멈추자 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 작스트랩만 입고 춤을 추던 사내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인파 속을 지나다녔다. 손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춤에 돈을 꽂으면서 발기한 성기를 은근슬쩍 건드렸다. 대놓고 드러난 엉덩이를 주무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휘익! 휘익!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사이에 선규호가 보였다. 새하얀 알몸에 핑크색 작스트랩을 입고 사내새끼들 틈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허리춤에 돈을 찔러준 새끼들이 껄떡거리면서 형의 보드라운 엉덩이와 발기한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더러운 손이 능글맞게 앞뒤를 건드렸다. 형은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심장이 타버릴 것 같았다. 형을 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때, 단정한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형이 나를 쳐다봤다. 우리의 눈동자가 동시에 마주쳤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당장 몸을 일으켜 형에게 가고 싶었지만 엘런의 최면에 걸려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형이 나를 알아보고 이쪽으로 달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형은 나를 보고도 무반응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손님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냐. 네 형은 너한테 관심 없는 것 같은데.”

씨발. 씨발. 씨발!

눈앞에서 남창처럼 엉덩이를 다 드러내고 허리춤에 지폐를 잔뜩 매단 채 스테이지로 올라가는 형이 보였다. 끈질기게 형의 엉덩이를 만지던 손길이 겨우 떨어졌다. 화려한 조명이 켜지자 끈적한 리듬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맞춰 사내들이 몸을 흐느적거렸다. 형도 그들과 같이 음란하게 몸을 흔들었다. 눈을 감으려 해도 이미 시선은 형에게 박힌 채 떨어지지 못했다.

“네 형, 젖꼭지 존나 야하다.”

“……”

“뒷구멍도 젖꼭지처럼 핑크색이냐?”

더러운 새끼가 계속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최면을 풀려고 머릴 굴려봤지만, 엘런이 다시 내 어깨를 같은 손가락으로 눌러야 최면이 풀리지 그 외의 어떤 방법도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나 아닌 딴 새끼가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만 봐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데.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리듬에 맞춰 몸을 나른하게 움직이던 형이 스테이지의 다른 사내들처럼 입고 있던 작스트랩을 천천히 끄집어 내리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천이 밑으로 내려갈 때마다 보드라운 음모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꿈이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손에 힘을 줘보려고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쓰는데 엘런이 피식거렸다.

“훗, 용쓰네. 기태오.”

“…….”

“무대에서 아무 새끼랑 섹스할건데. 네 눈깔 튀어나오겠다.”

눈알의 실핏줄이 죄다 터진 기분이었다. 엘런은 내 입에 억지로 독한 보드카를 들이부으면서 마치 선심 쓰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상심할 거 없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옷 위로 술이 죄다 쏟아졌다. 독한 술이 몸을 적셔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좋아, 네 형이 첫 번째 섹스 상대로 저기 빨간 머리를 지목하면 무사히 돌려보내 줄게.”

“…….”

“딴 놈 고르면 이 새끼들 모두에게 뒷구멍 다 벌려야 할 거야.”

* * *

얼마나 지났을까.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고막을 찢어내는 것 같았다. 그 소음 탓에 강제로 눈이 떠졌다. 아찔하던 현기증이 머릴 짓누르고 있어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땐 내 몸이 전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손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표정조차 내 것이 아니었다. 기묘한 차림새로 원치 않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이 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뛰어 내려왔다. 흥분해 소릴 지르는 사람들 곁으로 천천히 걸었다. 요염하고 자극적인 포즈로 허리춤에 매달린 지폐를 보란 듯이 엉덩이를 흔들었다. 마치 TV를 보듯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현실감이 없었다. 몽환적인 공기와 은근한 흥분이 살갗을 교묘하게 타고 흘렀다. 여기저기서 저급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내 몸은 프로그래밍 된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인파 속을 걸었다. 저질적인 손길들이 자꾸만 엉덩이를 만져댔다. 히죽대는 면상에 주먹을 꽂아 박살을 내도 부족할 판에, 어째선지 나는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다. 몸이 제 마음대로 방향을 틀었다. 누군가가 지폐를 팬티 사이에 찔러주면서 은근슬쩍 성기를 더듬거렸다. 불쾌한 감정이 들었지만, 이미 내 육체는 음란한 손길에 익숙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앞으로 걸었다.

그 때였다. 딱 하고, 기태오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짧은 순간, 서로의 시선이 동시에 얽혀들었다. 그러나 그 시선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듯이 고갤 돌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태오를 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기태오를 잡고 싶었다. 지금 이건 내가 아니라고. 뭔가 잘못됐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를 바라보는 네가 느껴졌다. 나는 무감하게 너를 지나쳤다. 너를 모르는 것처럼. 마치 상처 입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는 기계처럼 무대 위로 올라왔다. 쏟아지는 강렬한 조명 탓에 나를 향해 소릴 질러대는 관중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기태오의 시선이 끈질기게 나를 쫓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숨고 싶었다. 네가 이런 나를 보고 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기계처럼 음악에 맞춰 능글능글한 움직임으로 팔다리를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생각을 조율하고 있는 대뇌가 고장이라도 난 듯 어떤 생각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무대 위로 옅은 금발 머리가 올라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처럼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이크를 낚아챘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란한 비트의 음악이 서서히 멈추고,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가 분명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자유분방함과 여유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를 외면하려고 애쓸수록 시선이 붙들렸다. 마이크를 입술 가까이 대고 그가 고갤 돌려 무대 밖을 쳐다봤다.

“얘, 되게 꼴리게 생겼죠?”

그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지자 객석의 사람들이 들썩이게 소릴 질러댔다. 그가 내 턱을 그러쥐고 은근하게 어루만졌다. 퓨즈가 나간 듯 시야가 캄캄해졌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니 이번엔 시력을 잃은 장님처럼 칠흑 같은 암흑이 나를 맞이했다.

“이번 내기에서 기태오가 지면.”

“…….”

“얘 데리고, 단체 빠구리 뜰 수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죠?”

그의 말에 홀 안은 금세 광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소릴 질러대는 탓에 뇌가 부서질 것 같았다.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도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극도의 두려움에 턱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다시금 내 턱을 당겼다. 들릴 듯 말 듯한 웃음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내뱉어지고 있었다. 귓가에 누군가가 입술을 붙이는 게 느껴졌다. 솜털이 곤두섰다.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고막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약속대로 선택권은 줄게.”

“…….”

“골라봐.”

돌림빵당하기 싫으면 잘 골라야 할 거야. 비릿한 웃음과 함께 내 어깨를 꾸욱 누르는 게 느껴졌다. 뇌 안 가득 흘러들어 오고 있던 탁류가 일순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새까맣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몸의 감각이 온전히 돌아왔다. 손가락을 꿈틀거리자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마치 지독한 가위에 눌렸던 몸이 가까스로 풀린 것 같았다.

나는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온도가 만져졌다. 시선을 올려 그의 정수리를 살폈다. 머리 위로 그가 감추고 있는 생각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기태오와 무슨 내기를 했는지, 내가 왜 이런 시답지 않은 꼴로 서 있는지,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피식 웃으며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와우, 놀라운데?”

“…….”

“지금, 날 고른 거?”

활기를 띤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정말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다.

“엘런!”

내가 그를 불렀다.

“너 뭐냐?”

미치광이같이 웃던 입술이 멈칫했다.

“Was?”

당황한 그가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노려봤다. 사태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지, 물음표를 매단 의문들이 튕겨 나왔다. 꿈이라는 걸 자각한 걸까. 하. 미친. 내가 지금 몇 겹의 꿈 안에 집어넣고 최면을 걸었는데. 이걸 깬다고? 활자들이 빠짐없이 눈앞에 들어왔다. 생각을 굴리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내 꿈에서 뭐 하냐고! 이 씨발 새끼야!”

* * *

형의 올곧은 눈동자가, 엘런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다 아는 얼굴이었다. 형의 말에 엘런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쉽게 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최면이 걸릴 정도면 여기까지 선규호를 끌어들이기 위해 몇 겹의 꿈을 거치고 또 거쳐 데려왔을 터였다. 웬만해선 꿈이라는 걸 자각하기 힘든 공간임이 분명했다. 근데 그걸 깨고 선규호가 아무렇지 않게 엘런을 위협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험악하게 일그러진 엘런의 표정이 여기서도 잘 보였다. 나를 놀리던 여유는 다 어디로 사라지고 형의 물음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픽 하고, 웃음이 샜다. 선규호가 그러쥐고 있던 엘런의 목을 놓고 그대로 그의 오른쪽 어깨를 눌렀다. 엘런이 사용하는 최면의 방식. 그걸 똑같이 선규호가 하고 있었다.

“꺼져라.”

순간, 눈을 의심했다. 손가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엘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꿈을 설계한 장본인이 사라지자 이곳의 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견고한 공간에 금이 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꿈은 완전히 무너질 터였다. 형이 꿈을 자각했으니, 머지않아 잠에서 깰 것이었다.

굳어 있던 내 손가락이 풀렸다. 엘런이 소멸하자, 발버둥 쳐도 소용없던 최면이 간단하게 풀려버렸다. 서둘러 형에게 가고 싶었다. 촉박한 시간이 무섭게 나를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전속력으로 몸을 날렸다. 저만치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선규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 눈동자를 본 순간 심장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야, 선규호.”

“…….”

“너 땜에 내가….”

힘껏 끌어안은 선규호가 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시체처럼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반듯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새하얗게 굳어가는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곧 꿈이 끝나고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는 걸 알았다. 애석하게도 형은 내 품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머릴 감싸고 빠르게 형의 목덜미를 눌러 형의 기억을 빠르게 삭제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런 것뿐이라 속상했다. 괜히 몸 어딘가가 차가운 형의 몸처럼 시렸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곳에 더는 머물 수 없다는 걸. 꿈이 끝나버렸다는 걸 알았다.

< 3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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