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너 없는 곳 (15/37)

14. 너 없는 곳

찌는 듯한 폭염이 연일 이어졌다.

발코니 창 너머 무력하게 쏟아지는 강렬한 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고3에게도 여름방학은 찾아왔다. 수시와 정시를 모두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방학임에도 하루가 빠듯했다. 학원에선 특강이 이뤄졌고 과외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시간을 늘렸다.

아침부터 짜인 학업 스케줄을 소화하려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야 가능했다. 윤 여사가 짠 엄선된 식단 앞에 앉아 삼시 세끼를 해결해야 했고, 아버지가 고용한 트레이너에게 규칙적인 운동까지 지도받았다. 여름은 점점 나를 지치게 했다.

그 무렵, 태오는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 탓에 거의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단순한 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초반부터 녀석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화면 속에 태오가 나올 때면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극 중 인물에 완전히 몰입한 기태오는 그냥 설구였다. 내 눈에도 설구로밖에 안 보일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런 걸 재능이라고 하는 거다. 감히 흉내 낼 수도,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닌. 타고나는 것. 뮤비 때도 알아봤지만, 기태오는 카메라만 들이대면 딴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표정에 담고 있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언어가 아닌 감정으로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그때도 나는 어렴풋이 느꼈었다.

“공부는 잘돼가?”

어째서 강이준이 내 옆에 앉아, 복숭아 껍질을 까고 있는지 모르겠다. 윤 여사가 준비한 쟁반을 통째로 받아들더니 집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달큼한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저걸 먹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냥, 하는 거지 뭐.”

“여유 있네?”

“좆까.”

“입 거친 건 여전하구만, 선규호 어린이.”

“아. 진짜. 그렇게 부르지 좀 마.”

인상을 쓰고 강이준을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재밌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쳐다봤다. 홑꺼풀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나는 핸드폰을 그러쥐고 문자가 왔는지 확인했다. 촬영이 많이 바쁜가. 아까 보낸 문자를 아직 읽지도 않았다. 눈꺼풀을 내려 사라지지 않은 숫자를 응시하다가 화면을 껐다. 손안에 담긴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가슴이 폐도 아닌데 답답한 공기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것 같았다.

“때 지난 반항이냐? 왜 이렇게 골났어?”

날이 예리한 과도로 잔뜩 무른 복숭아 살을 잘라 접시에 담으면서 강이준이 물어왔다. 나는 속눈썹을 내려 껍질이 잘 발린, 살점이 붉은 복숭아를 바라봤다. 그러게. 왜 이렇게 골이 나는 걸까.

“왜 왔어? 직장인이 일은 안 하고.”

“휴가잖아.”

강이준이 귀엽게 입술을 말아 올리면서 즐거운 듯 뚝뚝 잘려 나간 복숭아를 접시에 능숙하게 담기 시작했다. 글 쓰는 사람의 예민한 손가락이 어울리지 않게 복숭아 하나를 완벽하게 해체해놨다. 과즙이 묻은 손가락을 물티슈로 닦아내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시 한 번 닦는다. 그리곤 포크로 복숭아 한 점을 쿡 찔러 내 입술 가까이 가져왔다.

“더러워.”

안 먹겠다고 고갤 흔들자, 완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강이준이 한마디 했다.

“야, 난 네 똥 기저귀도 치워줬거든!”

“언제 적 구라야.”

“이게 머리 굵어졌다고 아주 맞먹으려 들지?”

“몰라, 귀찮아.”

만사가 귀찮았다. 손안에 든 핸드폰이 잠잠하다는 걸 자꾸 신경 쓰는 내가 짜증스러웠다. 기민하게 반응하는 이런 태도가 낯설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어디 아프다거나, 기태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라면. 쓸데없는 삽질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걔, 물건이던데?”

내가 안 먹겠다고 한 복숭아를 입속에 쏙 넣으며 강이준이 운을 뗐다. 달달한 과즙 향기가 아무렇게 퍼졌다.

“기태오. 제대로 대박 났더라?”

강이준이 기태오를 입에 담는데,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둘이 인터뷰 때문에 안면 튼 사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강이준 입에서 나온 기태오의 이름이 낯설었다. 나는 강이준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무래도 나보다 이쪽 업계에 빠삭할 거고, 기태오의 평판이라든가 앞으로의 미래라든가 나는 모르는 것들을 강이준라면 알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얼굴로 강이준을 쳐다봤다. 오늘 중으로 이걸 먹여야 하는 미션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강이준이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를 내 입으로 다시 가져왔다. 벌려봐. 슬쩍 눈꺼풀을 내리고 입꼬리를 올린다. 안 먹으면 얄짤없다, 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슬쩍 입을 벌리자, 복숭아를 조심스레 먹여준다. 한 입 깨물었다. 물컹한 살점이 녹듯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달콤한 과즙이 혀를 달게 적셨다. 강이준이 입술에 묻은 과즙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훔쳤다. 예쁘네, 선규호 어린이…. 머리 위로 떠오른 활자가 사르륵 사라진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강이준은 내 입술을 훔친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쪽 소리 나게 빨곤, 장난스럽게 웃는다.

“아직도 애구만, 흘리고 먹고.”

귀여워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가. 재미없어.”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굳이 강이준 입으로 듣지 않아도 기태오가 얼마나 잘나가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드라마 시작하고 CF도 이미 두 개나 찍었다. 몽생미셸에서 화보 촬영을 찍을 거란 이야길 기태오 입으로 직접 듣기도 했다. 벌써 차기작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다는 것도….

기태오가 어떻게 생겼더라. 갑자기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 얼굴을 봤더라. 그렇게 자주 들락거리던 꿈속에서도 기태오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아무런 꿈도 없이 잠을 자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순간, 가만히 머리카락을 만져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가락이 단정했다.

“어이, 선규호 어린이.”

“…….”

“이제 가자.”

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형이 왔구나. 기태오한테 온 마음을 뺏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왜 강이준이 왔는지. 세상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 * *

상대 배우가 대본도 숙지를 못 한 상태에서 과음을 하고 현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촬영하는 내내 애를 먹었다. 정통 배우는 아니고 아이돌 활동을 하다가 작년인가 은퇴하고 연기 쪽으로 전향했다고 하던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연기엔 그닥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계속 NG를 내면서도 마치 무대 인사를 하듯 밝고 경쾌한 얼굴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괜한 분란을 만들어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학원 다닐 땐 연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현장에서 촬영이 거듭될 때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배우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가 실감했다.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는 배우들이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수없이 다양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트러블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유지되는 건 서로를 위한 배려라는 힘 때문일 것이다. 술 마시고 연기하고 있는 오강빈의 NG를 참아주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지만. 참, 민폐라고 생각했다.

“야. 가서 물 좀 떠 와.”

연이은 NG에 참다못한 감독이 10분 휴식을 외치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이 새끼 봐라. 어디서 선배를 꼴아봐?”

한 주먹도 안 되는 게. 참 다채롭게 깝치고 있었다. 매니저 누나가 얼른 생수병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어서 갖다 주고 상황을 종료시키려는 속셈이라는 걸 알았다. 담담하게 생수병을 그에게 건넸다. 눈 밑이 과음으로 인한 숙취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술 냄새가 진동했다. 여친이랑 깨져서 더 망나니가 된 것 같다고 수군거리던 스텝들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돌 시절 함께 활동했던 멤버랑 여자친구가 대놓고 바람을 피웠다고. 그런 식으로 이별을 통보받으면 돌아버리겠지. 누구라도.

선규호가 떠올랐다. 꽃같이 아름다운 선규호가 나 아닌 딴 놈이랑 바람을 피운다면. 그냥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얼굴을 볼 수 없어 미칠 것 같았다. 목소리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화상통화를 해도 보고 싶고 그리운 건 마찬가지였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오강빈이 다 마신 페트병을 내 머리 위로 냅다 던졌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만일 내가 선규호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선배고 나발이고 오강빈은 지금 병원행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숨통이 간당간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갈 뻔한 주먹을 가까스로 참았다.

“존나,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어.”

시뻘겋게 술이 오른 눈으로 오강빈이 내 뺨을 툭툭 쳤다.

“잘하자, 씨발.”

어금니를 잠깐 물었다. 그리곤 슬쩍 입가에 미소를 보이곤 볼을 치던 손목을 잡아 내 쪽으로 당겼다. 꽉 잡은 손목을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강렬하게 쥐었다. 그리곤 오강빈을 안는 척 목덜미를 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여기까지 해라. 손모가지 분질러버리기 전에.”

귓가에 대고 똑똑히 입술을 놀렸다. 덜덜 떠는 오강빈이 눈에 다 보였다. 이런 새끼들은 말이 필요 없다는 걸 안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담고 매니저 누나를 불렀다.

“누나, 선배님 쉬시게 의자 좀.”

“나는 괘, 괜찮…,”

“제가 딱 붙어서 시중들게요. 대본 연습 좀 도와줘요, 선배님.”

“그, 그게. 난….”

장난삼아 손을 들어 올리자, 갑자기 오강빈이 머릴 감싸면서 알았다고 소리쳤다. 자존심도, 줏대도 없이 힘 앞에서 치졸해지는 오강빈을 보고 있자니,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이 별로였다. 나는 매니저 누나에게 대본을 부탁했다. 빨리 집에 가려면 오강빈이 더는 NG를 내면 안 됐다. NG를 안 내게 하려면 오강빈이 제대로 대사를 암기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하다 하다 이런 꼴통 새끼 때문에 내가 대본까지 봐줘야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대본을 들고 달려온 오강빈 매니저가 숙취해소제와 알약 두 알을 먹이고 연신 내게 사과를 했다. 편의점에서 이제 막 돌아와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태오 씨, 미안해요. 얘가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아뇨. 선배님이 많이 힘드셔서 그런 거 알아요.”

“개뿔, 알기는.”

약을 삼킨 오강빈이 인상을 쓰면서 한마디 하자, 매니저가 오강빈 마빡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쳤다. 딱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픽 하고 났다.

“너 이 새끼. 정신 못 차렸지. 왜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고 그래? 기태오 씨가 사람이 좋아서 널 이 정도로 봐준 줄 알아.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딴 사람 같았어 봐, 넌 고소감이야.”

“나도, 협박…,”

눈동자만 굴려 오강빈을 쏘아봤다. 흠칫 놀란 오강빈이 눈을 피했다. 그러면서 얼른 대본을 끌어당겨 펼쳤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대본을 보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물었다.

“선배, 여기 암기는 했어요?”

“보면 몰라? 술 마시느라 촬영 있는 줄도 몰랐어.”

기가 찬다. 아주 막사는구나, 이 사람.

“딱 세 줄이네. 이것만 암기해요.”

“머리가 나빠서 암기 잘 못 해.”

“그래도 외워요. 이거 끝나야 나 집에 가요.”

선규호가 기다려요.

가만히 있어도 떠오르는 선규호의 모습에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형만 생각해도 이렇게 좋아 심장이 들뜨는데. 오강빈은 사랑하고 있던 여자에게 상당히 불건전한 방법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촬영장에서의 태도가 정당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분명 오강빈과 바람난 여자친구도 서로 좋아 미칠 것같이 서로에게 집중했던 순간이 있었을 텐데. 자꾸만 남의 연애사에, 나와 선규호를 대입해보고 있었다.

좀 전 망나니같이 굴던 오강빈은 손에 대본을 쥐고 군말 없이 암기하기 시작했다. 숙취해소 드링크가 효과가 나타나는지 퀭하던 낯빛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대사를 맞춰봤다. 표정이나 시선 처리도 몇 번씩 연습했다. 버벅거리며 대사를 틀리던 오강빈도 서서히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목소리 톤이 정리되는 게 느껴졌다. 어느 틈에 오강빈은 설구 친구 ‘윤도’로 변해 있었다.

저녁 아홉 시쯤, 촬영이 끝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촬영이 빨리 끝났다. 오강빈이 맛깔나게 윤도 역을 소화해서 암울했던 촬영장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오강빈이 뜻하지 않은 애드리브를 치는 바람에 촬영장을 폭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감독이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웃으면서 오케이 싸인을 했을 땐 진심으로 오강빈과 나는 기뻐했다.

차 안에 들어와 그대로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뼈가 노쇠한 노인처럼 온몸이 아팠다. 이렇게 힘에 부치는데 카메라만 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뛰고 구르고 별짓을 다 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우스웠다. 천천히 차가 움직였다. 낮과 다르게 밤이 되자 날씨가 꾸물꾸물했다. 차창 너머 먹구름이 두터운 층을 이루고 낮게 배회하는 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여기.”

촬영 들어가기 전 압수당한 핸드폰을 이제야 돌려받았다. 얼른 전원부터 켰다. 나도 모르게 초조했는지 자꾸만 아랫입술을 손톱으로 잡아당겼다. 부팅이 끝나자마자 얼른 톡부터 열었다. 형에게서 온 미확인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과외가 늘었어.]

[방학이 더 빡센 거 같아.]

요즘 형은 공부에 잔뜩 매진하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 자고 일어나서 학업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담담하게 문자를 보냈지만, 꽤 힘들 터였다.

[넌 오긴 오냐?]

문자 아래,

[얼굴도 생각 안 나, 이젠.]

라고 쓰인 문장을 눈으로 가만히 쓸었다. 그리곤 작게 속삭였다. 나도.

그리고 다시 눈을 내린 순간. 뭔가가 내 안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속눈썹을 깜박여, 다시 한 번 문장을 눈에 새겨 넣었다.

[보고 싶어….]

서둘러 나는 얼른 선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이 부드럽게 귀에 감겨왔다. 제레미의 타이틀곡인 ‘바람을 지나’였다. 내가 출연했던 그 뮤직비디오의 음악이 이렇게 형의 컬러링이라는 사실에 오늘도 안도했다. 선규호가 하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나는 의미를 붙이고 싶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컬러링을 골랐을지 몰라도. 지금 이 곡을 듣고 있는 나는 이미 의미를 붙여버렸다. 형도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러니 어서 받아, 형.

* * *

어둑어둑한 밤하늘이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강이준이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차창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맞닿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하염없이 쏟아져 흩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그냥 나가면 다 젖겠다.”

“…….”

“형이 안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아, 그냥 들어갈게.”

“감기 걸리면 나 아저씨한테 욕먹는다.”

나는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우산을 챙겨 든 강이준이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활짝 우산을 펴고 큼지막한 보폭으로 보조석 쪽으로 다가왔다. 밖에서 문을 잡아당기자 세찬 빗방울이 아무렇게 안으로 튀었다. 강이준이 얼른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끌었다. 팔을 가득 당긴 탓에 몸이 가깝게 겹쳐졌다. 탁, 하고 등 뒤로 보조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강이준이 예리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안색이 별론데?”

“알잖아, 나 여름엔 약한 거.”

강이준의 길쭉길쭉한 손가락이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헝클었다.

“선규호 어린이, 이젠 좀 클 때 되지 않았나.”

“뭐래.”

“여름 타는 거 그만둘 때도 됐잖아.”

“좆까.”

가운뎃손가락을 번쩍 들자, 맙소사, 내가 애를 잘못 키웠어. 엉덩이 팡팡 때리면서 키워야 했는데. 하면서 킬킬거렸다. 보통의 어른처럼 점잔 빼고 무게 잡고 잔뜩 어른 행세할 줄 알았던 강이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진짜 변한 게 없는 것 같았다. 그게 묘한 위안이 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길을 뚫고 대문 앞까지 우산을 씌워준 강이준이 내 손에 우산을 넘겨주면서, 씨익 웃었다.

“들어가. 아프지 말고.”

“…….”

“에어컨 작작 틀고.”

“…….”

나는 고갤 끄덕여주었다. 고마워, 이준이 형. 속으로만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강이준이 다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을 함께 보내온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익숙함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는 건 함께 보내왔던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직하고 있는 추억의 부피가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강이준에게 함부로 치대는 거고 강이준은 다 알면서 받아주는 것이다.

“가. 한눈팔다가 사고 내지 말고.”

“형 없다고 울지 마라.”

“아, 쫌!”

“들어가, 선규호 어린이!”

맨날 애 취급이지. 벨을 누르자, 윤 여사가 금방 문을 열어주었다. 대문을 통과해 현관까지 한참 걸었다. 빗물이 아무렇게 튕겨 여름용 슈트가 흠뻑 젖어버렸다. 걸을 때마다 구두 위로 굵은 빗방울들이 떨어졌다. 현관문 앞에서 우산을 천천히 접었다. 물기 묻은 우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훅, 하고 기태오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깜짝이야!”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내게 몸을 기울여 그대로 입을 맞춰왔다. 뜨거운 입술이 무방비하게 닿아오는 게 느껴졌다. 놀란 얼굴로 녀석을 황급하게 밀쳤다.

“너, 미쳤어?”

녀석을 지나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2층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내 심정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혼탁한 노란색 같다. 깨끗하지도 밝지도 않은, 무거운 어둠이 한 방울 떨어져 언제 시커먼 검정색으로 변할지 모를 아슬아슬한 색. 눈을 감으면 절벽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아찔함이 느껴졌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절별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셔츠 단추를 불안하게 더듬었다.

오늘, 강이준이 왔던 건 어머니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매년 이맘때면 강이준은 나를 데리고 어머니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는 추모의 집으로 향했다. 꽤 거리가 있는데도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버렸다. 손만 닿으면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실상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나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는 차에 뛰어들었다.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다섯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수술 도중 심장이 멎어 그대로 돌아가셨다. 여섯 살. 한여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째서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넜는지 어딜 가고 있었던 건지. 내 머릿속 어디에도 그날의 기억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병실에서 깨어난 후로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 깨끗하게 누가 밀어버린 것처럼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추모의 집에 놓인 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 사진은, 아버지가 대학교 2학년 때 캠퍼스에서 찍어준 사진이라고 했었다. 축제 마지막 날 찍었던 사진을 건네주면서 고백을 했다고 했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엄마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기가 가득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죽음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친척들이 모이기만 하면 모두 짜기라도 하듯 속으로 한마디씩 하는 말이 있었다.

‘지 애미 잡아먹은 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셔츠 단추를 풀었을 때. 문이 열렸다. 기태오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나, 옷 갈아입는 거 안 보여?”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인상을 썼지만, 등 뒤로 성큼성큼 다가온 기태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껴안아 왔다. 축축하게 젖은 얇은 셔츠 너머 뜨겁게 뛰는 심장 소리가 나를 짓눌렀다. 곧바로 내 뒤통수에 입을 맞추곤 천천히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잘 보여….”

가느다란 숨이 뱉어졌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장난치지 마.”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려고 하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손이 단숨에 자길 보도록 나를 돌려세웠다. 시선이 뜨겁게 얽혀들었다.

“바람피우냐?”

순간 모든 생각이 정지했다. 절대 웃을 분위기도 뭣도 아닌데 풉 하고 웃음이 샜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태오가 너무 진지해서 어이가 없었다. 나는 녀석의 이마를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아얏, 하고 엄살을 부리는 기태오를 노려봤다.

“헛소리 또 해라.”

“그게 아니고.”

“아니면 뭐?”

“내가 존나 까는 선배 있잖아. 설구 친구 역 맡은….”

연기 더럽게 못한다고 기태오가 틈만 나면 욕하던 사람이라 누군지 알고 있었다. 사건 사고를 끊임없이 몰고 다닌다며 기태오가 치를 떨던 사람이었다.

“여친이 바람피웠대.”

“그래서?”

“둘이 깨졌어.”

“병신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기태오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난 네가 바람나면 죽여버릴 거야.”

“…….”

“진짜야, 둘 다 총으로 쏴버릴 거야.”

내내 울적했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녀석이 하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웃긴지 스스로는 모르는 것 같지만, 이상하게 침울했던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녀석에게 가만히 기댔다. 마주 안아오는 온기가 나를 안심시켰다. 어머니 기일이었다는 말. 강이준이 매년 위로한답시고 달려와 함께 추모의 집에 간다는 말. 여섯 살 때 사고 이후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서 기일만 되면 울적해진다는 말을 담담하게 꺼냈다. 괜히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녀석이 고갤 숙여 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년부턴 나하고 가. 강이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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