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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묘한 관계 (13/37)

12. 묘한 관계

기말고사가 끝나자 교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짤막한 여름 방학을 보내고 나면, 9월엔 수시 원서를 넣어야 했다. 원하는 대학을 등급별로 구분 짓고 가능성이 있는 대학을 가늠해 여섯 개의 원서를 접수할 수 있었다. 그 탓에 수시를 준비하는 녀석들은 틈만 나면 담임에게 불려 갔다. 상담은 매시간 심각하게 이뤄졌다. 인생의 기로에 서서 미래를 결정 짓는 중대한 순간임에도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이 TV 속 화면처럼 멀게 느껴졌다. 생기부가 어떻고 등급이 어떻고 담임이 나를 앉혀놓고 뭐라고 늘어놓는 말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계처럼 네. 네. 하고 고갤 끄덕였다. 꾸벅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빠져나와서도 멍했다. 복도를 걷는데, 마치 우주 한복판을 걷는 것처럼 발밑으로 중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적응되지 않는 낯선 느낌은 교실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버릇처럼 기태오 자릴 눈으로 확인했다. 평소엔 책상에 자주 엎드려 있는데, 오늘은 꼿꼿하게 허릴 펴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뒷문으로 들어오는 걸 봤는지 슬쩍 눈동자를 내게 맞춰왔다. 잠깐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녀석이 작게 입꼬리를 당기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웃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상담 갔다 오냐?”

앞자리에 앉은 형준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물어왔다.

“어.”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음 수업 교과서를 빼 들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에어컨 바람이 미적지근했다. 틀어줄 거면 좀 세게 틀지. 차라리 창문을 여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 들었다. 그 때 책상 밑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낮게 진동했다. 나는 얼른 오른손을 책상 밑으로 가져가 핸드폰을 뺐다.

액정화면에 카톡이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안 봐도 누구지 알았다. 조심스럽게 문자를 확인했다.

[나 오늘 방송국 가는 날이라 이번 수업 끝나면 가.]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면서 했던 말이다. 오디션에 보기 좋게 합격한 녀석은 대본 리딩 연습 차 방송국을 들락거렸다. 오늘은 대본 리딩 말고도 무슨 매거진 인터뷰도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빠르게 손가락으로 문자를 찍었다.

[알고 있어, 병신아.]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빠르게 카톡이 날아 들어왔다.

[이번 시간 째.]

[그냥 존나 아프다고 해.]

[보건실에서 한 시간만.]

보건실에서 한 시간만. 속으로 따라 읽으며 간청하는 문장을 느리게 눈으로 바라봤다. 다분히 무슨 의도인지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 기태오는 내게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이런 기태오의 당돌함이 좋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문자를 만들었다.

[왜?]

짤막하게 물었다. 뭐라고 답이 올지 궁금했다. 반 아이들이 이렇게 잔뜩 있는 교실에서 기태오와 은밀한 카톡을 나누고 있다는 게 조금 묘했다. 한 템포 느리게 녀석에게서 답이 왔다.

[같이 있고 싶어.]

숨결이 흔들렸다. 서둘러 심호흡을 했다. 매 순간 기태오는 정직하게 말로 감정을 드러냈다. 생각하고 있는 걸 생각으로만 두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 구체화시켰다.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원하는지. 망설일 틈도 없이. 마치 내가 알아채주길 바라는 것처럼.

[병신.]

나는 욕을 하고 핸드폰을 도로 책상 밑으로 넣어버렸다. 귓가가 마치 불에 달궈진 것처럼 달아올랐다. 이게 다 더위 탓이지. 손으로 빠르게 부채질을 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형준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이 아저씨처럼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누구야?”

“스팸.”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하는 거 봐라.”

형준이가 뭐라고 하든 말든 교과서를 넘겼다. 기태오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서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기태오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수업 종이 치려면 2분 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먼저 수업을 째고 보건실로 내빼는 게 분명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녀석이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걸 가만히 쳐다봤다. 그런 나를 빤히 보고 있던 형준이가 별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또 조퇴하나 보네. 며칠 전에도 하지 않았냐?”

“…그랬나?”

“할튼, 뮤비 하나 찍고 존나 연예인 행세네.”

“지 꼴릴 때마다 학교 째고. 고3이 말이야, 면학 분위기 모르나?”

화장실에 다녀왔는지 의자를 빼 앉으며 경민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무슨 사내새끼들이 이렇게 남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기태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녀석들이 한심했다.

때마침 수업 종 소리가 울렸다. 마치 문밖에서 대기 타고 있었던 것같이 앞문이 열렸다. 수학 선생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금세 가라앉았다. 샤프를 집어 드는데, 책상이 잘게 떠는 게 느껴졌다. 카톡이 들어온 모양이다. 기태오일 것이다. 나는 수학 선생 눈을 피해 조심스레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빨리 와, 형♡]

* * *

나이 지긋한 보건 선생의 취향인지 모르겠다. 낮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재즈가 흘러나왔다. 유리창 안으로 스며드는 볕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나는 잠깐 생각했다. 머리가 아파서요. 대강 아픈 곳을 짚고서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알약 두 알과 간이용 침대를 배정받았다. 나는 맨 끝 칸으로 걸어가 새하얀 면목 커튼을 걷어 안으로 들어갔다. 보건 선생은 유독 3학년에겐 관대했다. 진짜 몸이 아파서 오는 녀석이든, 꾀병을 부리는 새끼든. 한 시간쯤 쉴 수 있게 침대를 내어주었다. 고된 입시를 준비하는 녀석들을 위한 배려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이용해먹는 것 같아 조금은 멋쩍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르륵, 보건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만 듣고서도 선규호라는 걸 알아차렸다. 뛰어왔는지 약간 빠른 숨소리가 커튼 너머로 다 느껴졌다.

“3학년인데요. 선규호요.”

보건 선생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선규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열이 있네, 약은 먹었니?”

“아뇨.”

“일단 해열제 먹고, 열 안 떨어지면 병원 가는 게 좋아. 알지?”

선규호가 꼬박꼬박 대답을 하고선 간이용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커튼을 조금 젖히고 선규호가 이쪽으로 오는 걸 보고 있다가 얼른 손목을 낚아챘다. 놀란 눈동자가 마주치는가 싶더니, 금세 휘어졌다. 해사한 웃음이 선규호 얼굴 위로 떨어졌다.

선규호가 커튼 안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얼른 닫았다. 곧바로 침대에 걸터앉아 선규호의 가느다란 허릴 잡아끌었다. 내 다리 사이에 가두고 좀 더 허릴 끌었다. 선규호가 내 양쪽 어깨에 손을 짚고서 나를 내려다봤다. 고갤 젖히고, 그 눈동자를 마주 봤다. 빛을 받아 색이 옅어진 고동빛 동공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는 재즈의 선율을 타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목마른 사람처럼 선규호를 쳐다봤다.

어깨를 짚고 있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선규호의 손끝에 닿은 머리카락들이 부드럽게 휩쓸렸다. 그 간질간질한 촉감에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형의 뺨에 가져갔다. 아까 보건 선생이 했던 말이 신경 쓰여, 열이 있나 확인해봤다. 곧바로 손을 옮겨 이마에 짚었다. 열을 품고 있는 체온이 손바닥에 닿는 게 느껴졌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선규호의 눈동자가 야릇했다. 나는 그대로 선규호의 목덜미를 감싸고선 내 쪽으로 당겨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너 열 있어…. 알아?”

연약한 귓불에 입술이 닿을 때마다 심장 끝이 조이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선규호가 고갤 들어 올렸다. 그리곤 작게 웃으면서 입 모양만으로 대답했다.

‘별거 아냐.’

나는 침대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형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고선 고갤 숙였다. 그리곤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촉감만 감도는 입술을 떼어냈다. 시선이 다시금 뜨겁게 부딪쳤다. 날 바라보는 선규호의 눈빛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껴졌다. 이번엔 입술에 입을 맞추려고 고갤 비스듬히 숙이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벨 소리가 울렸다.

요란하게 울리던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더니, 보건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안 선생. 휴게실이라고? 마침 잘됐네. 지난번에 부탁했던 거 가지고 왔는데….”

보건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잠깐 통화를 멈춘 보건 선생이 이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금방 올 거야, 말썽 일으키지 마라. 알았지?”

“네!”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크게 대답을 했다. 보건 선생이 짧게 웃고선, 계속 통화를 이어 나갔다. 어, 안 선생…. 문이 탁, 하고 닫혔다. 슬리퍼 소리가 완전히 멀어졌다는 걸 알았을 때 큭, 하고 선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방비하게 웃고 있는 선규호가 예뻐서 나는 잠깐 숨을 참고 쳐다봤다.

“아픈 사람 목소리가 왜 그렇게 우렁차?”

“…….”

“꾀병인 거 백퍼 들켰다, 어쩔래?”

아름다운 눈매가 귀엽게 휘어져 나를 쳐다봤다. 입가에 걸린 즐거운 웃음이 예뻐서, 나는 그대로 고갤 숙여 형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형이 나를 똑바로 보고 눈을 깜박였다. 예기치 못한 내 행동에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그 놀란 눈꺼풀에도 입술을 부딪쳤다. 속눈썹에 쪽, 콧날에 쪽, 다시 입술을 찾아 입을 벌렸다. 혀를 내밀어 부드럽게 녹아드는 입술을 핥았다.

형이 눈을 감고 내 목에 팔을 감아왔다. 천천히 입술을 벌리고선 혀를 내밀어 내 혀에 야릇하게 비벼댔다. 탁한 숨을 뱉어내며 축축한 형의 혀를 내 입안에 머금었다.

“읏, 으으.”

세게 혀를 빨 때마다 선규호가 앓는 소릴 냈다. 그 소리가 너무 야해서 나는 자꾸만 선규호를 자극하고 싶었다.

“흣, 아으, 읍. 으읍.”

혀가 얽히고 입술이 닿을 때마다 황홀했다. 현실에서 선규호와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허릴 조금 더 당겨 안았다. 다리 사이가 열이 올라 부푸는 게 느껴졌다. 형도 나처럼 몸이 달아오를까. 내가 이렇게 잔뜩 세우고 있는 것처럼 형도 흥분했을까. 입술이 떨어졌다. 차오른 숨을 토하는 선규호가 너무 야해서, 자꾸만 야한 짓을 조르고 싶었다.

* * *

“설구 역 오디션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오디션은 어땠나요?”

강이준은 이 바닥 생리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말끔하게 넘긴 머린 일부러 깐깐한 인상을 주기 위한 무기 같았고, 유리알이 투명한 안경은 어떻게 봐도 도수 따윈 없어 보였다. 꿈에 관한 칼럼을 썼다고 했던가. 예리하고 날카로운 외까풀의 눈은 정교하게 재단하듯 시종일관 얼굴이나 목, 때론 가슴과 팔다리를 훑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기보단 직업병 같았다.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감독님께서 설구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이 있었거든요, 진짜 머릿속이 까마득해지는 거예요. 순간, 이 질문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 시간 이십 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인터뷰 질문에 답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지만, 칼럼니스트이자 J&J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는 강이준을 대하는 건 좀 불편했다. 그와 함께 온 포토그래퍼가 사진을 몇 장 찍기 시작했다. 사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강이준이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왔다. 포즈나 얼굴 표정, 각도 같은 걸 직접 손봐주면서 강이준이 내 턱을 잡고 중얼거렸다.

“카메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시선을 멀리 던져봐요.”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인지, 작품을 찍으러 온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요구 조건대로 실행하다 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매니저 누나가 연신 머릴 조아리며 인터뷰 기사 잘 뽑아달라고 부탁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형에게서 문자라도 와 있지 않을까 괜한 기대감에 심장이 떨렸다. 서둘러 꺼진 핸드폰의 전원을 눌렀다. 부팅되는 짧은 시간조차 아까웠다. 일곱 시 반에 시작했던 인터뷰가 이렇게 늦게 끝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벌써 시계는 열한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부팅이 끝난 핸드폰을 얼른 쳐다봤다. 카톡이 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얼른 문자를 확인했다.

[인터뷰 한다며? 대박!]

[강이준이 기사 쓰면 넌 대박 남! 이건 내가 장담함!]

[ㅋㅋㅋ쌩까지 말고 연락해라.]

형이 카톡을 한 줄 알았는데, 제레미였다. 괜히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열은 내렸나. 미열이긴 해도 갑작스레 확 열이 올라 응급실에 몇 번 실려 간 적이 있어서 괜히 선규호가 걱정됐다. 서둘러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이 아무렇게 귓가에 감겨왔다.

오래도록 전화를 귀에 대고 있는데 받지를 않았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소리샘 퀵 보이스로….’ 딱딱한 안내 멘트가 나오고 나서도 나는 쉽게 전화를 끊지 못했다. 이유 없이 불안했다. 엄만 아저씨와 부부 동반 모임에 가셨으니 집에 없을 게 뻔하고…. 그러다 윤 여사가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윤 여사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 윤 여사는 바로 전화를 받아주었다.

“형 좀 바꿔주세요.”

-규호 학생 자고 있어요. 열이 심해서 병원 갔다가….

괜히 불안했던 게 아니었다. 심각한 얼굴로 빨리 돌아가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약을 먹고 잠들었을 것이다. 보건실에서 이유 없이 열이 났던 게 아니었다. 괜찮다는 선규호의 웃음에 너무 쉽게 간과해버렸다. 그렇잖아도 틈만 나면 형을 노리는 몽마 새끼 때문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는데. 나는 심란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기태오라고.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

매니저 누나가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강이준이 입을 열었다. 깊게 빤 담배를 느릿하게 뱉어내자 새까만 허공으로 먼지처럼 연기가 흩어졌다. 인터뷰할 땐 꼬박꼬박 존대하던 예의는 싹 다 밥 말아 먹었는지 강이준은 대뜸 반말을 해왔다. 어차피 이번 인터뷰 이후론 볼 일도 없는 사람인데 일일이 신경 쓰는 것도 짜증 나 대강 고갤 끄덕여줬다.

“열아홉이니까, 규호랑 동갑이네?”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규호. 선규호를 말하는 건가?

“놀랄 거 없어. 규호 아버지랑 우리 아버지, 대학 선후배 사이거든. 이번 인터뷰도 아저씨가 부탁해서 들어준 거고.”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아저씨. 부탁. 그런 단어들이 엿 같았다.

“기사는 나쁘지 않게 쓸 거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그렇지 적당히 성의 표시만 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어째서 의심하지 않았을까. 잘 생각해보면 연기학원도 아저씨 빽이 없었다면 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내 힘으론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레미의 뮤직비디오에 내가 발탁된 것도 아저씨의 입김이 들어간 게 아닐까. 이번 오디션에서 설구 역을 따낸 게 과연 내 힘이었을까. 천천히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우리 앞에 섰다.

“그럼, 규호한테 안부 전해주고.”

강이준이 차에 올랐다. 뒤꽁무니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차를 노려봤다. 매니저 누나가 내 앞에 차를 세우더니 얼른 타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찬밥처럼 차에 올랐다. 울화가 치밀어 올라 죽을 것 같은데,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재혼 상대의 자식에게 마지못해 호의를 베풀고 있는 아저씨일까. 청탁 땜에 하기 싫은 인터뷰를 진행했던 강이준일까. 아니면, 방송국에 드나든다고 뭐라도 된 것처럼 굴었던 내 자신일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 맞나 보다. 좋은 집에서 부족한 거 없이 선규호와 살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집 자식인 것도 아닌데. 호적 역시 나는 친아버지 밑에 있었다.

핸드폰이 진동 모드로 울리기 시작했다. 도로를 내달리던 차가 미끄러지듯 커브를 꺾었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등이 휘황하게 불을 밝히고 나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진동이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나 보다.

“태오야, 전화 오잖니, 얼른 받아!”

매니저 누나의 말에 마지못해 핸드폰을 받았다. 잠에서 막 깬 목소리라는 걸 알았다. 조금 칭얼거리듯 말끝을 늘이는 선규호가 작게 속삭였다.

-전화 온 거 이제 봤어.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약 먹고 잤다가….

선규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괜히 속상했다.

* * *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내 방으로 들어온 태오가 그대로 어깨에 얼굴을 묻고 나를 끌어당겼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팔에 힘을 줘 잔뜩 끌어안고서 낮은 숨을 뱉어냈다. 나는 가만히 등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아주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다 느껴졌다. 그 두드림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기태오의 긴 한숨 소리가 위태롭게 귓바퀴에 닿아왔다. 불안했다.

“왜 그래…?”

“…인터뷰가 고됐어.”

“…….”

“처음이라서 그랬나 봐.”

습기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가 축축했다. 한껏 풀 죽은 얼굴 탓에 괜히 나까지 심란했다. 나는 당겨 안은 등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주었다.

“곧, 익숙해질 거야. 머지않아 우주 대스타가 될 거야. 그땐 나도 번호표 뽑고 대기 타고 있어야 겨우 널 만날지도 몰라.”

우스갯소리를 하자, 기태오가 천천히 몸을 떼어내고 나를 쳐다봤다. 열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데일 듯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왔다. 나는 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발꿈치를 들었다. 슬쩍 눈을 감고서 기태오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닿아오는 촉감을 느끼곤 발꿈치를 내리면서 눈을 떴다. 기태오가 내 목덜미를 그러쥐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나처럼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간지러운 숨결이 부드럽게 뭉개졌다.

뺨에 닿았던 입술이 귓불로 옮겨갔다. 달아오른 숨결과 입술의 촉감과 야릇한 기류가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목선을 타고 입술이 흘러내렸다. 뜨거운 혀가 닿아오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연약한 살결이 빨리는 게 느껴졌다. 입술 새로 탁한 숨이 흘러나왔다. 잔뜩 물고 핥던 입술이 목에서 떨어지는 순간. 기태오가 바짝 내게 입술을 부딪치려 했다.

“…안 돼.”

얼른 입을 틀어막고 고갤 가로저었다.

“왜.”

“…감기 옮아.”

기태오를 보내고 4교시를 채 넘기지 못하고 조퇴를 했다. 열이 오르고 있는데 코피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정신이 아찔했다. 보건실에서 받아먹은 해열제가 아무 소용없었다. 병원에 다녀와서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침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앞으로 감기가 점점 심해질지도 모르는데, 입술을 맞대면. 분명 옮기고 말 터였다.

“상관없어.”

기태오가 대꾸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올곧음이. 그 맹목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심장 밑이 아득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빈말도 거짓말도 아닌. 속마음을 자꾸만 보란 듯이 내보인다. 타인의 속마음은 활자로 읽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음으로 느끼는 거라는 걸 기태오 때문에 알게 됐다. 정직하게 맞대어오는 기태오 때문에 나도 내 마음을 보이고 싶었다.

“나 아픈 거 싫다고 했지?”

“…….”

“나도 너 아픈 거 싫어.”

“…….”

“나 때문에 아프면 안 돼.”

기태오가 내 목을 당겨 깊게 껴안아 왔다. 정수리에 입을 맞추는 게 느껴졌다. 애틋한 촉감에 심장이 덜걱거렸다. 나는 느릿하게 고갤 들어 올리고 녀석을 쳐다봤다. 어째서 모든 감정은 심장을 통과하도록 만들어 놓는 걸까. 실제로 감정을 조율하는 곳은 뇌의 편도체인데, 아무런 연관도 없으면서 마음이 흐르면 이토록 뜨겁게 심장이 뛰어댄다.

“목에 키스 마크 남겨도 돼?”

“…야!”

“그럼 키스할래?”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에 체념하듯 생각했다.

‘그래, 감기를 옮기는 것보다 낫지.’

고갤 옆으로 빼고 목을 녀석에게 내밀었다. 빨아도 좋다는 의미로. 해, 라고 속삭이자, 단숨에 기태오가 옷을 잡아당겨 쇄골 윗부분에 깊게 입술을 박아왔다. 그리고 살을 잔뜩 물고 빨기 시작했다. 짜릿한 쾌감이 빨린 부분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입술로 잔뜩 살을 빨면서 혀로 문지르는 게 다 느껴졌다. 의도적으로 강하게 빨아 당겨 짙은 멍울을 만들었다. 한참을 빨다가 입술이 떨어졌다. 빨린 곳이 얼얼했다. 막 만들어진 키스 마크를 바라보고선 기태오가 만족스럽다는 듯 소곤거렸다.

“영역표시 완료.”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태오의 매니저 누나가 내게 잔뜩 의상들을 안겨주었다. 다음 촬영 때 입어야 될 것들이라면서 번호를 틀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카메라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는 세트장에 서서 기태오가 대본을 쳐다보고 있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마 나는 촬영장 스태프쯤 되는 모양인지 멀리서 태오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쉬는 타임엔 태오 주변에 사람이 붐볐다. 카메라 셔터가 끊임없이 터졌다. 부드러운 얼굴로 기태오가 웃었다. 행여 이쪽을 봐줄까 손을 흔들었지만, 기태오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먼발치에서 기태오를 쳐다봤다.

촬영이 시작되고 카메라가 천천히 배우 주변을 돌았다. 상대 여배우가 발랄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팔을 감으면서 태오에게 뭐라고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꼭 둘은 연인 사이같이 다정해 보였다. 갑자기 키스 신이라도 찍으면 어쩌지.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무슨 일인지 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

다시 조명에 불이 들어왔을 때. 여배우가 앉아 있던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걸 느꼈다. 기태오가 음흉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순간 내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셔츠만 입고 팬티를 허벅지에 걸친 채 성기를 음란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두 손으로 성기를 가렸다. 기태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야릇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다리 벌려봐. 좆 세웠는지 보게.”

명령하듯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오므리고 있던 두 다리가 천천히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혀 무릎이 활짝 벌어졌다. 감추고 싶은 치부가 훤히 드러났다. 카메라로 다 찍히고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아찔함이 엄습해왔다. 태오는 절제된 동작으로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더니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성기만 꺼냈다.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가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활짝 벌려진 다리 사이로 들어와 입구에 성기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제대로 구멍 벌려.”

움찔거리는 애널에 쿠퍼액이 잔뜩 문질러졌다. 그러면서 기태오가 입을 열었다.

“카메라 보이지? 이제부터 네가 내 좆집인 거 인증할 거야.”

기태오가 혀를 빼고 기묘하게 웃었다. 꼭 그때 같았다. 버스에서 졸다가 꿨던 꿈. 그 꿈에 나왔던 기묘한 그것이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나는 온몸을 버둥거렸다. 나를 제압하려고 뻗어온 손에 셔츠가 쭈욱 잡아당겨졌다. 목 아래로 쇄골이 훤히 드러난 순간, 기태오의 모습을 한 그것이 파르르 떨며 손을 놓았다. 마치 뭔가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그 틈을 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나는 무작정 뛰었다.

촬영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새하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맨 끝에 문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문을 열고 또 열었다. 통로를 지나 가로막힌 또 다른 문을 열어젖혔다. 미로 같은 새하얀 복도를 겨우 빠져나오자 둥둥 떠 있는 금박 장식의 새하얀 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규호!”

기태오의 목소리였다. 고갤 돌려 뒤를 바라보니 반듯한 얼굴로 기태오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 돼! 문 열면 위험해!”

“…다가오지 마.”

“나야, 기태오. 경계할 거 없어.”

“널 어떻게 믿어?”

“형. 이리 와. 날 믿지 않으면 누굴 믿을 건데?”

손잡이를 막 놓으려는 찰나, 또 다른 기태오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가까이에 있는 기태오와 똑같이 생겨서 도무지 누가 진짜 태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뒤에서 걸어오는 기태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곤 같잖다는 듯이, 팔을 들어 올려 내 앞에 서 있는 기태오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까아아아악!”

눈앞의 기태오가 머릴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새까맣게 살갗이 타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되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완전히 소멸된 그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몇 번이고 눈동자를 깜박였다. 대체 저게 뭐였을까.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태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내 턱을 조심스럽게 잡고 눈을 맞춰왔다.

“감기 옮긴다고 키스도 못 하게 하더니. 여기서 뭐 해?”

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바스라질 것 같던 심장이 겨우 진정되는 걸 느꼈다. 우리만 알고 있는 말이었다.

“대체 몽마 새끼랑 어디까지 놀아난 거야?”

태오가 삐딱하게 고갤 숙이고 내 다릴 내려다보면서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으악!”

뛰어오면서 팬티도 버리고 왔는지 매끈한 두 다리 사이로 성기가 부끄럽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계속 이런 상태였다니. 손가락으로 얼른 셔츠를 잡아당겨 앞을 가렸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대체 팬티는 왜 벗고 돌아다녔을까. 생각할수록 얼굴이 자꾸만 달아올랐다.

“이리 와.”

기태오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더니 둥둥 떠 있는 문들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순식간에 문이 열렸고, 그 안으로 우린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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