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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욕실 (9/37)

8. 욕실

아침부터 코피가 났다. 세면대로 떨어지는 코피를 보곤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떤 이유도 없이 코피를 쏟는 날이면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몸을 구부려 찬물로 흐르는 코피를 씻어냈다. 그러다가 가만히 고갤 숙이고 붉은 방울들이 떨어져 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어떤 징조를 알리는 것처럼 핏방울은 세면대를 타고 흘러들어 갔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무리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만큼 몸 관리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뇌가 흔들리는 것 같은 현기증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착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코피가 멎을 때쯤 다시 얼굴을 씻었다. 감은 눈 안으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간밤의 꿈이 끼어들었다. 장면들은 하나같이 깨진 파편처럼 맥락도 없이 나를 덮쳤다. 흐릿하고 형체도 없이 지나가던 꿈.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차가운 수돗물에 얼굴을 씻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계속해서 꿈자리가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대부분의 꿈은 블라인드 너머 보이는 실루엣처럼 또렷하지 않아 답답했다. 생각이 날 것 같다가 이내 사라지는 꿈 때문에 일어나서도 기분이 찝찝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피까지 봤더니 마음이 심란하다.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머리카락 아래 내 얼굴이 낯설다. 턱선 밑으로 시선을 내려뜨렸다. 쇄골 밑으로 뭔가 자국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거울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잠옷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벌레에 물린 자국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묘한 울혈이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그것을 꾸욱 눌러보았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아프거나 가렵거나. 어떤 통각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맨살을 만지는 거와 다름없었다. 신종벌레인가. 잔뜩 잡아당긴 잠옷을 내려놓고 나는 욕실을 빠져나왔다.

태오는 먼저 나간 것 같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연일 계속되고 있는 폭염 덕분에 몸이 점점 축나는 기분이었다. 쨍쨍 내리쬐는 볕 아래로 들어서자마자 등줄기로 땀이 배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서 막 나온 경민이가 눈에 들어왔다. 양손에 바나나 우유를 들고선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형준이 새끼 먼저 갔어.”

“그래서 이리로 왔냐?”

“어. 아직 버스 안 탔을 것 같아서,”

경민이가 내게 바나나 우유를 건네면서 원 플러스 원. 하곤 빨대를 꽂아 주었다.

“빨아봐, 존나 목에 촥촥 감겨.”

“아침부터, 어감이 좀 그렇다?”

“뭘 상상하는 거?”

“상상은 무슨.”

“형이 존나 신박한 딸감 찾았는데 공유해줘?”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진지한 톤으로 경민이가 물었다. 녀석 머리 위로 넘실거리는 마음이 보였다. 무방비하게 솟아오른 문장들을 습관처럼 좇았다.

존나 사랑스러운 나의 컬렉션을 공개해, 말어. 잠깐, 그거 보여주면 내 취향 다 눈치까는 거 아니야? 젖가슴 페티시 있는 거 들키긴 싫은데. 아 씨발.

아침부터 저 에로 마왕이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젖가슴 페티시라니. 이젠 친구 녀석의 페티시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대체 밤에 뭘 본 거야, 이 새낀. 나는 대답 대신 얼른 녀석을 밀쳤다.

“더워, 떨어져.”

“쬐그만 게 존니 힘은 변강쇠지? 어?”

금방 헤드락을 걸어오는 경민이 때문에 몸이 아무렇게 휘청거렸다. 녀석이 몸을 꽈악 조여대면서 항복을 요구했다.

“알았다고, 빨리 놔.”

“소원 하나 들어주기다.”

“떨어져, 새끼야.”

녀석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를 놓아줬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목에서 마른기침이 새어 나왔다. 경민이가 장난스럽게 내 등을 쓸어주면서 입을 연다.

“괜찮냐? 무슨 기침을 그렇게 해.”

“꺼져.”

이게 병 주고 약 주고.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경민이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았다. 다시금 경민이 머리 위로 말랑말랑한 문자들이 피어올랐다.

아, 진짜 규호 새낀 기침했다고 이렇게 빨갛게 되냐. 딴 새끼들은 생각만 해도 더러운데, 얘가 이러면 왜 귀엽지? 형준이가 존나 규호 귀엽다고 지랄하는데. 그 지랄병이 옮은 건가. 그보다 어떻게 봐도 규호 가슴 사이즈가….

얼른 경민이에게서 떨어졌다. 대체 왜 거기서 내 가슴 사이즈를 생각하는 건데.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려 녀석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아, 왜 때려?”

인상을 구긴 경민이가 나를 노려본다. 좀 전까지 머리 위로 잔뜩 만들어내던 문장들이 말끔하게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뛰어, 버스 왔어.”

* * *

형의 빠듯한 스케줄 중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이 수요일이었다. 매주 수요일엔 여덟 시쯤 연달아 과외가 있었다. 평소 형이랑 함께 다니는 녀석들이 늦게까지 야자를 해서 형 혼자 집에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종례가 끝나고 나서 임주한이랑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올라가는 대신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주한이 뒤에서 뭐라고 나를 불렀지만 무시했다. 본관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검게 페인트칠이 된 정문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후 여섯 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이 새파랬다. 밤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듯이 뜨거운 태양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자릴 지키고 있었다. 그 덕에 정수리가 익는 기분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찡그리고 바라봤다. 비가 온다고 했던 일기예보는 오늘도 꽝인 것 같았다. 교문 담벼락에 기대서서 형을 기다렸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서기를 맡고 있어 출석부를 교무실에 갖다 놓고 나오느라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빼꼼 고개만 내밀어 저 멀리 본관 건물을 쳐다봤다. 사내새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그 무리 틈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형이었다. 유독 새하얀 교복이 눈이 부셨다. 단정한 머리카락이 아무렇게 바람에 날렸다. 한쪽 어깨에 백팩을 걸친 채 교문을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얼른 손을 내밀어 형의 가방을 낚아챘다.

“앗, 깜짝이야!”

동그란 눈동자가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씨익 웃었다.

“가자.”

내 것과 함께 형의 가방을 겹쳐 어깨에 메고 얼른 형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간질간질한 맥박이 손바닥 안으로 느껴졌다. 나는 조금 더 형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영문도 모르고 형이 나를 따라 걸었다. 나는 대로변으로 직진하는 대신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아는 사람만 아는 지름길이었다. 평소와 다른 길로 접어들자 형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려세웠다.

“어디 가는데?”

“집.”

“…….”

“심심하잖아, 어차피 방향도 같은데.”

형의 가방을 흔들어 보이면서 가방 셔틀 할게. 하고 말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미친 새끼. 하고 욕을 했다. 나는 지그시 형을 내려다봤다. 선명한 눈동자가 나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조금 삐친 척 볼멘소리로 물었다.

“싫냐?”

“…….”

“싫냐고.”

“…….”

“형이니까 같이 가고 싶은 건데….”

“알았다고. 병신아.”

마지못해 허락하는 형의 뺨이 달아오른 게 보였다. 나는 잡고 있던 형의 손목을 장난스럽게 흔들어댔다.

“뒤질래?”

형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나는 꽉 잡은 채 앞서 걸었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미친놈, 형이 한마디 했지만 포기한 듯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골목길이 생각보다 짧았다. 두 갈래로 갈라진 길 중 한쪽으로 꺾자 익숙한 버스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와. 2년 넘게 다녔는데 지름길을 몰랐네.”

정류장 벤치에 앉은 형이 더운 듯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 확인하고 나서 형 앞으로 다가왔다.

“금방 올 거 같아, 조금만 참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형이 더운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옅은 열기가 뺨을 붉게 물들였다. 꿈속에서 야한 짓을 할 때면 형은 내 밑에서 저렇게 얼굴이 붉어졌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열기가 오른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싸악 하고 쓸었다.

“왜? 뭐 묻었어?”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던 형이 눈을 깜박였다. 심장 끝이 저릿했다. 쿵쿵 울리는 맥박 소리가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얼른 손가락을 떼어냈다.

“어. 눈썹 빠졌어.”

거짓말을 했다.

“그래?”

별로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이 형은 덥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고 다시금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조금 닿는 것만으로 이렇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니. 제대로 선규호에게 감긴 것 같았다.

“야, 버스 온다!”

때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형이 몸을 일으키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부드럽게 감겨오는 다섯 개의 손가락을 나는 가만히 그러쥐었다. 어째선지 부서질까 봐 조심스러워 꽉 잡지 못했다. 버스 안이 혼잡했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정거장은 더 가야 사거리가 나와 사람들이 내릴 것이다. 가까스로 자릴 잡았지만 잡을 손잡이가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지지대를 잡고 한 손으론 형의 허릴 끌어당겼다. 놀란 얼굴이 나를 쳐다봤다. 조금 더 내 쪽으로 형을 끌어당겨 나를 잡도록 했다.

“넘어지면 곤란하잖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피식 웃던 형이 고갤 작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양손으로 내 허릴 잡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자꾸만 시끄럽게 뛰기 시작했다.

“하… 더워.”

형이 발꿈치를 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버스 안이 후덥지근했다. 에어컨을 틀어놓았어도 사람이 너무 많아 별로 시원하지 않았다. 더위에 약한 형이 내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선규호가 힘겨운 듯 내 어깨에 얼굴을 비벼댔다. 그 나른한 감촉에 심장이 꽉 조이는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 다음 정거장에선 사람들이 내릴 거야.”

“…어.”

나른한 형의 대답에 심장 밑이 간지러웠다. 감정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형을 당겨 내게 기대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음 차를 탈걸. 허리춤을 움켜잡고 내게 머릴 기댄 형을 내려다보며 나는 조심스레 호흡을 골랐다. 허락 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조바심이 들었다.

사거리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한차례 내렸다. 형을 끌고 한산해진 버스 뒷자리로 자릴 옮겼다. 너무 더워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형 쪽으로 에어컨을 손봐주자 냉기 서린 바람이 콸콸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하아, 살 것 같아.”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하는 형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더위 엄청 탄다.”

“땀 흘리는 거 싫어. 찝찝해.”

“알아. 싫어하는 거.”

나는 손을 뻗어 형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양 볼이 달아오른 형이 느슨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더위에 지친 얼굴로 형이 나른하게 말한다.

“욕조에 물 가득 받고 들어가고 싶어.”

“나도 끼워줘.”

“미쳤냐?”

“원래 형제끼리 목욕 같이 하잖아.”

그런가, 대답하며 선규호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귓불이 붉게 물드는 게 보였다. 나는 형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같이 하자, 목욕.”

* * *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빗방울에 교복이 젖어들었다. 하나둘 떨어지던 빗방울이 내릴 때쯤 되자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 안으로 들어가 하늘을 쳐다봤다. 시커멓게 모인 먹구름이 장대 같은 비를 뱉어내고 있었다. 기태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흥건하게 손바닥이 젖는 게 보였다. 지나가는 소나기로 생각했는데, 언제 그칠지 알 수 없었다.

“비가 그칠 거 같지 않아.”

태오가 손을 거두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비가 올 거란 일기예보를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게 아쉬웠다.

“뛰어갈까.”

태오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집까지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어차피 씻을 거잖아.”

“…….”

“가자, 형.”

녀석이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쏟아지는 빗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빗방울이 금세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살면서 빗속에 뛰어든 적은 처음이었다. 녀석이 내 손을 단단하게 잡았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시야를 가렸지만 상관없었다.

“미친놈 같아.”

“뭐 어때. 미친놈 하지 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잔뜩 비를 맞고 있는데,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현관문에 다다를 때까지 녀석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현관에 신발을 벗어두고 잔뜩 젖은 채 2층으로 올라갔다. 몸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녀석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나에게 다가왔다. 한꺼번에 비를 잔뜩 맞았더니 입술이 덜덜 떨렸다.

“추워?”

“조금.”

오들오들 떨며 대꾸하자 안 되겠네. 하면서 내 손목을 끌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태오가 욕조에 물을 받기 위해 온수 방향으로 수전을 들어 올렸다. 수압 좋은 물이 세차게 쏟아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성큼성큼 다가온 녀석이 교복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댔다. 녀석의 손에 단추가 하나씩 풀렸다. 얼른 그 손을 움켜잡았다.

“…내가 풀게.”

손으로 단추를 만지작대는 동안 녀석도 자신의 교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같, 같이 씻으려고?”

“어.”

“나 누구랑 같이 씻어본 적 없어.”

“그럼 젖은 채로 밖에서 기다려?”

“아래층 쓰면 되잖아.”

“거긴, 싫어.”

태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나도 아래층을 사용하는 건 싫었다. 형제들은 함께 목욕도 한다고 하는데, 한 번쯤은 괜찮겠지. 딱 봐도 표 나게 좋은 녀석의 몸에 비해 왜소한 내 몸이 비교되는 것만 빼면 좋을 텐데. 녀석이 거칠게 셔츠를 벗어젖혔다. 물기가 묻은 탄탄한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빤히 봐?”

“내가 어, 언제?”

“지금도, 여기….”

눈 밑을 살짝 어루만지면서 기태오가 눈을 맞춰왔다.

“얼굴 빨개.”

“비, 비 맞아서 그래.”

“뺨이 차가워.”

손바닥이 뺨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똑같이 비를 맞았는데, 맞닿은 체온이 따뜻했다. 좀 더 만져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손이 떨어져 나갔다.

“빨리 벗어. 감기 걸리겠어.”

나는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흠뻑 젖은 교복 셔츠를 벗었다.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었다. 팬티를 잡아 내리는데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같은 남자끼리 알몸을 보는 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빠르게 팬티를 벗고 얼른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차오른 물이 출렁거렸다. 교복 바지와 속옷을 모두 벗은 녀석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시선이 자동적으로 몸의 중심으로 쏠렸다. 경민이가 기태오 거기가 엄청 크다고 했던 게 거짓말이 아니었다. 팔뚝을 흔들면서 이만하다고 했던 게 과장된 게 아니었다. 저걸 달고 어떻게 걸어 다니지?

“또 쳐다본다.”

“아니거든.”

피식 웃으면서 기태오가 욕조에 엉덩이를 붙였다. 연기학원에서 하라는 연기는 안 하고 몸만 만들었는지 탄탄한 근육이 시선을 끌었다. 가슴 근육과 복근이 조각해놓은 것처럼 매력적이었다. 근육이라곤 하나 없이 밋밋한 내 몸이 괜히 부끄러워졌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돼?”

“뭐가?”

“이거.”

손가락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꾸욱 누르자,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말았다.

“하핫, 간지러워, 형.”

의외의 반응이 재밌어서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되게 민감한가 보네, 하면서 옆구리를 쓸자 화들짝 놀란 기태오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순간 시선이 맞닿았다.

“이리 와.”

“…….”

“똑같이 복수해줄 거야.”

“야, 야. 기태오!”

첨벙, 소릴 내며 욕조 안으로 뛰어든 녀석이 복수랍시고 나를 간지럼 태우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간지러. 하지, 하하하.”

기태오가 겁도 없이 간지러움을 태우는 통에 나도 모르게 발로 녀석의 가슴팍을 거침없이 날려버렸다.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진 녀석이 머릴 움켜쥐고 고갤 숙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했다. 많이 아픈지 녀석이 앓는 소릴 냈다. 얼른 녀석에게 다가갔다.

“아윽. 피 나는 것 같아.”

“자, 잠깐만. 봐봐.”

감싸 쥐고 있는 머릴 조심스레 살폈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지만, 손으로 만져보니 조금 부어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손바닥으로 부풀어 오른 곳을 조심스럽게 문질러줬다. 녀석이 내 허리에 팔을 감아 당기면서 나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어지러워.”

그러게 왜 장난을 쳐서. 많이 안 다친 게 다행이지, 피라도 철철 흘렸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만 해도 섬뜩한 기분이었다.

“태오야, 어지러우면….”

녀석은 대답 대신 내 허릴 좀 더 끌어당겼다. 맨살에 녀석의 얼굴이 맞닿는 게 느껴졌다.

“안아줘, 형.”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어리광을 부렸다. 나는 부풀어 오른 머릴 문질러주면서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만 떨어져, 네가 애냐.”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있는 녀석을 밀쳤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가슴께에 닿는 녀석의 숨결이 뜨거웠다.

“조금만.”

널 만지면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기태오는 그냥 기태오일 뿐이었다. 그동안 나는 널 왜 그렇게 경계했을까. 네게 닿아 있어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 타인의 마음을 읽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처음이었다. 그냥. 네 체온이 내게 닿아 있을 뿐이었다. 네가 고갤 들어 나를 쳐다봤다. 자세하게 녀석을 본 적은 드물지만, 새삼스럽게 녀석의 눈동자가 꽤 크단 생각이 들었다.

“얼른 씻고 나가자, 약 발라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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