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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94화 (94/95)

94화

대외적으로 권지하는 아직 미혼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율은 혹시나 여자 눈에 아기가 권지하의 아이들로 보이지 않을까 퍼뜩 걱정이 됐다.

“네, 네… 아기들은 저… 제 동생들이에요.”

“네? 진짜요?”

“스무 살 차이 나는 동생이에요. 그러니까 늦둥이요! 하하….”

다율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여자는 처음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수긍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모르고 순하게 잠들어 있는 아기들의 머리카락은 다율처럼 황금빛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까 매니저님하고 많이 닮았네요!”

“그렇죠? 주변에서 다들 그래요. 배우님도 그렇게 말하시고요.”

다율의 수인생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왔다. 권지하도 옆에서 끄덕끄덕하며 우리 매니저의 동생들이 참 예쁘다고 한마디를 보탰다. 명연기자의 그럴싸한 연기는 일반인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그러시구나. 실례했어요!”

다행히 여자는 더 깊게 캐묻지 않고 자기 돗자리로 돌아갔다. 다율은 자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에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제 성별이 다행이었다.

“우릴 싸맨다고 될 일이 아니네요. 아기가 문제구나. 앞으로는 일관되게 동생이라고 하는 게 낫겠어요.”

“난 다율이랑 애 낳았다고 떠들고 다니고 싶지만, 그럼 잡음이 많아지니까 참을게.”

“네. 제발 참아 주세요.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니까요.”

다율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제 손목에 두른 팔찌를 매만졌다. 예전에 권지하가 사랑을 전하며 채워 준 팔찌였다.

저걸로 우리가 하나라는 걸 확인하는 건가.

권지하는 최근 들어 그 팔찌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다율의 성격상 눈에 띄는 커플링을 거절할 것을 알기에 팔찌를 권했고 결과적으로 다율이 무척 기뻐했지만, 혼인 신고는 못 해도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지금은 확실히 결혼반지를 끼우고 싶었다.

그뿐 아니라 결혼식도 못 치른 상황에서 아이들을 낳게 했는데 이 순서가 맞나 가끔씩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율은 배우님이 바쁘시니 결혼식은 다음에 하자고, 자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지만 권지하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다. 다율에게 기억에 남는 결혼식과 화려한 반지를 선물해 줘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호텔 예식장 같은 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자 하면 다율은 세상에 소문 다 낼 일 있냐고 거절할 것이다.

“흠….”

조언을 구할 곳은 두 군데였다. 가족들, 그리고 다율의 할아버지.

***

간만에 평창동 집에 이무기 수인 가족들이 모였다. 거실 소파에 앉은 가족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결혼식? 그래. 하고 넘어가야지. 너희 부부나 다름없는, 아니 부부보다 더한 사이 아니니. 그런데 식도 없이 얼렁뚱땅 살림 차리고 애들 낳았잖아. 보는 눈 많다고 다율이가 조심스러워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럼 거기에 맞춰서 방법을 찾으면 돼.”

권지하의 어머니는 결혼식에 적극적이었다. 다만 문제는 어디서 치러야 다율이 안심하고 식을 치를 것인가였다.

“속리산에서 치르는 건 어때? 거기 통나무 오두막도 있다며.”

누나가 의견을 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곳이다 보니 다시 찾으려면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가야 할 것 같아. 또 애들 데리고 가기 힘든 곳이기도 하고.”

“그렇긴 하다. 나는 처음에 지율이 하율이 할아버님 댁에서 치를까도 생각했었다만 그것도 좀 아닌 것 같아. 수인들은 깊은 산속에 은신하고 사는데 우리가 대규모로 이동하고 식장까지 꾸미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겠어. 무엇보다도 그런 특이한 곳에서 야외 웨딩을 치르면 업체들이 심상치 않게 여길 거다.”

아버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가족들은 깊은 고민에 빠진 끝에 다율의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마트폰으로 증손주 사진을 받아 보는 데 흠뻑 빠진 할아버지는 핸드폰 사용법을 금방 익히셨다더니, 정말로 즉각 전화를 받았다.

“사장어른. 저 지하 애비입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잘들 지내시지요.

“물론입니다. 별 탈은 없으시고요?”

-늙은이야 별일 있겠습니까. 지율이 하율이 잘 자라나 걱정뿐이지요.

“다름이 아니라 이제 지하랑 다율이 정식으로 부부의 연 맺어 주려는데 결혼식장이 문제입니다.”

권지하의 아버지는 왜 자식들이 평범한 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없는지, 또 속리산에서 화려한 야외 웨딩을 할 수 없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음… 저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가족만 출입할 수 있으면서도 결혼 전문 업체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만한 공간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곳이 어디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평창동 사돈댁이 딱 좋습니다.

“저희 집이요?”

의외의 아이디어에 가족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예. 사돈댁 마당이 굉장히 넓기도 하고 잘 관리돼 있지 않습니까. 요새 젊은이들 야외 결혼식을 많이 한다던데 거기를 잘 꾸미면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출장 요리사들 미리 불러서 음식 준비해 놓으면 잔치 장소로 손색이 없을 거고요.

기막힌 아이디어에 가족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바로 이거다 싶은 권지하가 적극 찬성의 뜻을 비쳤다.

-이 노인네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다율이가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바라는 바도 그와 같았다. 그날 가장 행복해야 할 존재는 다율이었다.

***

이제 남은 관문은 프로포즈였다. 권지하는 해외 명품을 취급하는 셀러를 통해 컬러 다이아몬드를 주문했다. 색깔은 다율이 가장 좋아하는 자연을 닮은 녹색으로 고르고 링 사이즈는 다율이 잘 때 몰래 재서 알맞게 주문했다.

그리고 반지가 한국에 도착한 날, 권지하는 가족들을 총동원해 일을 꾸몄다.

[형. 아버지랑 어머니가 갑자기 오신대요. 아기들 보고 싶다고 하시면서 저는 바깥에 나가서 형 만나라는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맞아. 오늘 다율이 형 만나야 돼. 지금 집 앞으로 데리러 갈 거야.]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지하가 다율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서 타.”

다율은 영문도 모르고 차에 탔다.

“저희 어디 가요?”

“서울에서 제일 좋은 호텔로 갈 거야.”

“네?”

“아기들 본다고 집 안에만 있었잖아. 그러면 형이 속상하거든.”

곧이어 차가 도착한 곳은 서울 시내에 새로 개장한 특급 호텔이었다. 로비부터 작은 소품까지 모두 고급스러웠으며, 복도에 디퓨저를 놓았는지 은은한 향기가 났다. 예약한 최상급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오니 한강이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뷰와 더불어 화려한 인테리어가 번쩍번쩍 빛이 났다.

“와…!”

다율은 이렇게 좋은 호텔은 처음 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미리 세팅되어 있는 욕조 안 장미 꽃잎에 스파클링 와인까지 이 호텔은 빠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권지하와 사는 집 안도 충분히 호사스러웠지만 이렇게 외출해 고급스러운 환경을 누리니 이 나름대로 맛이 살았다. 다율은 새하얗고 보송한 침구에 누웠다가 사진을 찍고, 맛이 끝내주는 웰컴 프루츠를 먹으면서 호텔을 즐겼다.

“형. 오늘 특별한 날 아닌데 우리 왜 이런 데 왔어요?”

“특별한 날 맞아.”

“응? 내가 모르는 기념일이 있나. 형 데뷔일, 우리 처음 만난 날, 팔찌 받은 날, 우리 생일, 집에 돌아온 날… 다 아닌데?”

“다율아.”

권지하가 다율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세상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였다.

“형?”

“널 이제 평생 내 걸로 만들려고 하는데, 괜찮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차피 넌 나한테 구속돼 있지만 그걸 확실히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보이는 징표로 말이야.

권지하는 속마음을 감춘 채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다율에게 입 맞췄다. 그러면서 주머니 속 반지를 꺼내 다율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자연스럽게 끼웠다. 열정적인 키스가 오가는 중 손가락에 낯선 촉감이 와 닿자, 다율이 눈을 반짝 떴다.

“어…?”

손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초록빛으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결혼하고 싶어. 결혼식 하면서 가족들 앞에서 영원하자고 맹세해 줬으면 좋겠는데.”

“형….”

“나는 너 없이 한순간도 못 살아. 그걸 가족들 앞에서 이야기할 거야. 다율이는?”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해요, 무조건 해요…!”

다율이 권지하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려 왔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며 가슴이 뻐근해졌다. 권지하는 다율의 등을 토닥이며 사랑스러운 뺨에 끝도 없이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하얀 손을 잡아 올려 손가락 마디마디 키스했다. 마침내 입술이 네 번째 손가락에 닿았을 때 다율은 펑펑 울었다. 그 눈물이 사랑스러워 권지하는 다율에게 아주 긴 키스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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