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92화 (92/95)

92화

권지하가 요즘 새로 만든 취미는 다율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기였다.

“들려요?”

“응. 들려.”

권지하의 말에 의하면 다율의 배 너머로 콩닥콩닥, 아주 작은 심장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얼핏 듣기로는 말 같지 않은 소리였으나 수 킬로미터 바깥의 기척도 느낄 수 있는 이무기 수인의 특성상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 또 발로 찬다.”

동그스름하게 솟아오른 다율의 배 안쪽에 조그마한 발바닥 자국이 보였다. 네 개의 발바닥이 꼬물거리며 발길질을 하자, 권지하가 이것 보라며 난리를 피웠다. 다율은 배 속 아기들이 일으키는 태동도 귀여웠지만 거기에 일일이 반응하는 권지하가 더 귀여웠다.

“아, 좋다.”

권지하가 다율의 배를 어루만지다가 뽀뽀를 했다.

“아기들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다.”

“아직 보름이나 남았는걸요.”

“보름밖에 안 남은 거지.”

“그런가?”

배가 많이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다율은 출산을 불과 보름 앞두고 있었다. 다람쥐의 특성상 임신 기간이 짧기 때문에, 아기들은 아주 작게 태어날 예정이었다. 또한 수인화와 인간화를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꼬리와 귀를 달고 지낼 것이다.

권지하는 다율을 닮은 아기 수인 두 마리가 꼬리와 귀를 달고 집 안을 돌아다닐 걸 생각하면 반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감도 잡히지 않아, 촬영장에서도 늘 아기들 생각만 했다. 그야말로 다람쥐 바보가 따로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예요. 다율이 잘 있죠?”

-그럼. 지금 또 잔다. 막달이라 그런지 잠이 늘었네.

권지하는 촬영장 대기실에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낮 동안 혼자 있을 다율이 걱정된 그는 부모님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부모님은 평창동 집에 거처를 잡고 아침저녁으로 다율의 집을 오가며 그를 보살펴 주었다.

처음에 다율은 괜히 부모님께 신세를 지는 것 같다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막상 같이 지내다 보니, 부모님과 이전보다도 훨씬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권지하의 아버지는 요리를 도맡아 다율을 정성껏 먹이고 살을 찌웠다. 틈틈이 시간이 나면 수인 이유식 조리법도 알려 주었다.

어머니는 다율을 친아들처럼 대해 주며 말벗을 자처했다. 권지하의 어렸을 적 모험담과 말썽을 부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율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은 권지하의 누나가 찾아왔다. 그녀와 남편은 임신 축하 선물을 바리바리 사 들고 왔는데, 아기 옷과 신발 외에도 다율의 옷이 한 보따리였다.

“아기 옷이 아니라 제 옷이네요?”

“다율이 귀여우니까.”

의류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누나는 요새 다율만큼 비율이 좋고 귀여운 모델이 없다며, 너는 어떻게 배가 나와도 예쁘냐고 극찬을 했다. 권지하는 다율은 자기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누나는 다율이를 독차지하지 말라고 으르렁댔다.

“나 평창동에서 며칠 묵고 갈래. 매일 여기 출퇴근할 거다.”

“뭐?”

“엄마, 아빠, 나랑 같이 출퇴근해. 낮에 다율이 보자.”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평창동 집에 눌러앉아, 권지하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 결과 다율은 누나와 보드게임을 하며 아침을 시작하고, 아버지가 차려 준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어머니가 정성껏 해 주는 마사지로 저녁을 보냈다.

꿈같은 나날이었다.

시간은 날개를 단 듯이 빠르게 흘러 드디어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다. 수인 병원에서 제왕절개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날짜를 당기거나 늦출 수도 있는 상황이라, 온 가족은 며칠 동안 긴장 상태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율이가 배 아프다고 하면 바로 병원으로 튀어가야 할 수도 있어.”

어머니의 말에 권지하는 소위 출산 가방이라 불리는 큼직한 짐 가방에 필요한 물품과 아기용품을 넣어 챙겼다. 그리고 밤새도록 다율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48시간 동안 잠을 설친 가족들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잠든 시각이었다. 다율은 배가 욱신거리는 고통에 눈을 떴다.

“끙… 형, 거기 있어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권지하가 퍼뜩 일어났다.

“다율아, 아파?”

“나 배… 배 아파.”

다율이 볼록 나온 배를 움켜쥐고 낑낑댔다. 권지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율을 안아 들었다.

“다율이 아프대! 다들 일어나요!”

“뭐?! 다율이가?”

“아기 나오려나 보다.”

“얼른 병원으로 가자.”

가족들이 우당탕 일어나 출산 가방을 챙기고 차 두 대에 나눠 탔다. 다율은 권지하의 차 뒷좌석에 어머니와 함께 탔다.

“기대 누워. 힘들잖니.”

“네, 어머니….”

다율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힘들게 숨을 쉬었다. 권지하는 카레이서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병원까지 질주했다. 다행히 새벽이라 차는 막히지 않았고, 당직 의사가 곧바로 다율의 상태를 봐 주었다.

“지금 당장 수술에 들어가야 합니다. 몇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요. 기다리세요.”

의사가 침착하게 설명하며 권지하에게 수술동의서를 내밀었다. 권지하는 보호자란에 제 이름을 기입하며 심호흡을 했다.

다율은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권지하의 손을 잡았다.

“형.”

“다율아.”

“무사히 다녀올게요.”

다율이 의젓하게 웃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이마에 키스를 해 주고 그를 수술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수술실 문이 열렸다.

“선생님!”

간호사가 이동식 인큐베이터를 밀며 걸어 나왔다. 인큐베이터 안에는 똑같이 생긴 아기 수인 두 명이 누워 있었다. 아기들은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칭얼대고 있었지만, 다율을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동물 귀와 통통한 꼬리가 영락없는 다율의 자식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아기들은 권지하를 닮아 콧대가 오뚝하고 윤곽이 뚜렷했다. 간호사는 기가 막힌 미남들이라며, 이렇게 예쁜 아기들은 처음 본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했다.

“다율이는, 산부는요. 무사합니까.”

“네. 지금 상태 아주 좋아요. 지금은 회복실에 계신데, 곧 일반 병실로 이동하실 거예요. 그때 인사 나누시면 됩니다.”

아기들이 신생아실로 떠나고, 권지하는 병실로 가 다율을 만났다. 침대에 누운 다율은 파리한 안색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형.”

“다율아.”

권지하가 다율을 껴안으며 탄식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기… 우리 아기 봤어요?”

“당연히 봤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뻐. 우리 다율이 다음으로 예쁘더라.”

“내 눈에는 제일 예쁘던데.”

다율이 생긋 웃었다. 권지하는 땀에 젖은 다율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그를 소중하게 꼭 껴안았다.

“고생했어. 이제 키우는 건 내가 다 할게.”

“정말요?”

“응. 뭐든지 나한테 맡겨. 내가 다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해 주니까 너무 든든하다. 형은 분명히 최고의 아빠가 될 거예요.”

다율은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권지하의 목에 팔을 둘렀다.

***

아기들은 수인의 특성상 빠르게 뒤집기를 하고 기기를 시작했다. 아직 귀와 꼬리는 전혀 컨트롤하지 못해 24시간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권지하는 이 모습도 사랑스럽다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다율이 너도 어릴 때 이랬을까?”

“그랬겠죠. 그때는 핸드폰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을 못 찍었지만요. 이랬겠구나, 하고 상상에 맡길게요.”

“지율아, 하율아. 이리 와.”

권지하가 박수를 치자 바닥을 기던 아기들이 고개를 돌렸다.

“압, 압.”

“아바….”

제 아빠인 것을 아는지, 아기들은 뒤뚱거리면서 열심히도 기었다. 다율도 권지하도, 아기들의 그런 모습이 눈부실 만큼 사랑스러웠다.

“읏차.”

“예쁘다.”

각각 지율과 하율을 안아 들고,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아, 맞다. 형. 내일 할아버지가 평창동으로 오신대요.”

“그게 내일이었어? 그럼 내가 터미널까지 모시러 가야겠다.”

“응. 부탁 좀 할게요.”

다율의 할아버지는 손주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며, 잠시 산을 떠나 서울로 달려오겠다 말한 상태였다. 평창동에 권지하의 부모님과 누나도 있으니 거기서 다 같이 모임을 갖는 게 좋겠다며, 할아버지는 들뜬 티를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할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평창동 저택에 나타났다. 다율은 권지하의 어머니와 함께 아기들을 안고 바깥으로 나가 할아버지를 맞이했다.

“할아버지!”

“다율아. 정말 대견하다.”

“아기들 좀 보세요. 예쁘죠.”

올망졸망한 다람쥐 손주를 본 노인은 밀려오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예쁘다. 우리 황금다람쥐 가문의 10대손들, 너무 귀엽고 씩씩하구나.”

감동에 젖은 와중, 대문으로 권지하의 아버지와 누나가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하 아버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지하 누나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다율이 할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권지하의 가족들과 할아버지가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