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할아버지가 차려 준 밥을 먹고 일찌감치 대문 밖으로 나왔다.
“잘 지내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갈게요, 할아버지.”
다율은 눈이 그렁그렁한 채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서울 갈 일 있으면 연락하고 가마.”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권지하가 씩 웃었다.
돌아가는 차 안, 다율과 권지하는 간밤의 추억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만에 찾은 속리산의 아름다운 풍경. 할아버지와의 재회.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허락받고 손주 이름까지 받아 온 것. 모든 순간이 다율에게는 선물이었다.
“어… 그나저나 형, 형네 부모님께도 한번 들러야 하지 않을까요? 아기 소식도 전해야 하고요.”
다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그거 내가 말 전해놨어. 당장 오시겠다는 거, 너 안정 취해야 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어.”
“네? 벌써 알고 계시다고요?”
“응. 안 그래도 헌터 놈들 체포 건으로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었거든.”
“헌… 헌터요.”
다율이 흠칫했다. 권지하는 운전대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다율의 손등을 쓸어 주었다.
“걱정 마. 특별법이 시행돼서 세 놈 다 철창행이래. 이전에 한 짓거리까지 다 들통나서 가중처벌 받을 거라고, 수십 년간 세상 구경 하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
“정말요….”
“어머니가 국회 앞에서 농성하고 단식한 게 다 이날을 위해서였나 싶다면서 감격하셨어.”
“…너무 기뻐요.”
“아, 맞다. 아버지는 보약 한 제 보내겠대. 용한 한의사한테 지은 거라 몸에 확실히 좋을 거야.”
권지하의 말에 다율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사랑해 주고 있다. 이렇게 오늘도 행복은 커져만 간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맹 실장과 약속한 2주가 지났다. 권지하가 세상에 나타날 시간이 된 것이다.
<권지하 기자회견>
YU엔터테인먼트는 한 호텔의 그랜드볼룸을 섭외해 기자회견장으로 꾸몄다. 초대받은 기자들이 서로 더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취재 경쟁을 벌이는 통에 말다툼, 몸싸움이 빚어지기까지 했다.
잠수를 탔던 권지하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등장할지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앞서 무기한 활동 중단을 선언한 바 있기에, 혹자는 권지하가 은퇴를 선언할 것이라 예측했고, 누군가는 권지하가 뜻밖의 폭탄선언을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기자회견 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은 결혼설, 이민설, 건강 이상설로 게시판을 달궜다. 여전히 식지 않은 화제성을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기자회견장으로 나가기에 앞서, 권지하는 대기실에서 다율과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다율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권지하의 넥타이를 매 주면서 길고 긴 키스를 했다.
“배우님… 오랜만에 이렇게 불러 보니까 이상하네요.”
“저도요. 이 매니저님.”
“기자회견 한다니까 괜히 떨려요.”
“나도 그래요. 하지만 내가 우리 이 매니저님보다 더 떨면 안 되겠죠.”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대기실로 맹 실장과 백장훈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안녕… 그래. 다율 씨, 정말 오랜만이야.”
맹 실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처음 권지하가 다율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기절초풍한 인물 중 하나였다. 매니저와 연예인이 비밀리에 동거 중, 아니 동거는 원래 했고… 연애 중이었다니.
지척에 스캔들 상대가 있었는데도 몰랐다는 사실에 맹 실장은 경악을 했고,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은 후에는 두 사람을 축복해 줬다. 그리고 진심으로 다율의 눈치를 봤다. 이 회사의 기둥인 권지하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다율뿐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기에.
백장훈 역시 권지하가 다율을 잃어버리고 나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았으므로, 두 사람을 격하게 축하해 줬다. 그는 권지하가 연예계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인물이었다.
권지하가 회견장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배우님! 권지하 배우님!”
“여기 좀 봐 주십시오. 잠시만요!”
서로 자기 카메라를 봐달라며 기자들이 경쟁을 벌였다. 권지하는 아무 말 없이, 포토 타임도 갖지 않고 그대로 착석했다. 마이크 하나만을 앞에 둔 그는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표정이었다.
“그간 심려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그가 한마디를 꺼내자 장내는 권지하의 말을 노트북으로 받아 적는 소리로 가득 찼다.
“갑작스러운 개인 사정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지금은 문제가 해결돼 다시 활동에 나설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펼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권지하는 담담하게 입장을 밝혔으나, 기자들은 그리 점잖지 못했다. 그들은 사방에서 손을 들며 자신이 먼저 질문을 하게 해 달라고 난리를 쳤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 개인 사정이라는 게 대체 뭔가요? 건강 이상설부터 사업을 벌였다가 망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결혼설도 있었는데요.”
“그런 일들은 아니었습니다.”
권지하가 딱 잘라 대답했다. 한 기자가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배우님, 천재욱 배우와 폭행 시비에 휘말렸다는 이야기 사실입니까?”
천재욱이란 이름에 권지하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프로페셔널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소문이 있습니다. 천재욱 배우가 권지하 배우님한테 폭행당했다고요.”
“글쎄요. 검찰 송치 중인 범죄자와 제 이름이 나란히 언급되는 게 불쾌하네요.”
천재욱은 현재 수인권특별법 위반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연예계에 유례없는 수인 매매 범죄자의 탄생에 기자들은 최근 그쪽 취재에도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저도 듣기는 했습니다. 제가 천재욱 배우를 경찰에 신고했다, 이전부터 천재욱이 연예계 수인들 정보를 팔아 치우고 있었는데 제가 그걸 저지했다. 그 과정에서 몸싸움이 일어났네 어쨌네 하는 루머도 돌더군요.”
“루머라고 일축하시는 겁니까?”
“그럼 기자님은 저더러 그게 사실이니 인정하라고 압박하시는 겁니까? 아니죠?”
권지하가 정중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띠자, 질문한 기자는 묘한 서늘함에 흠칫했다.
“아, 그…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입장 표명을 부탁드리는 겁니다.”
“전 범죄자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됐습니까?”
권지하의 기세에 눌린 기자가 쭈뼛거리며 물러나자, 다른 기자가 손을 들었다.
“배우님! 이제 차기작으로 뵐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실제로 새로운 작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권지하는 현재 킨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감독과 긴밀한 미팅을 갖고 있는 중이었다. 이 역시 다율이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큰 뜻을 품고 돌아오셨을 것 같은데요. 혹시 포부를 여쭤봐도 될까요?”
“포부라고 하면… 글쎄요. 흑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싶습니다.”
권지하가 당당하게 말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단상 아래에 권지하의 매니저로서 서 있는 다율은 가슴이 뿌듯했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내 배우라니. 그리고 내 사람이라니, 믿기지가 않아.
언젠가는 올려다만 보았던 인물이고 멀게만 느껴졌던 인물이, 지금은 날 끔찍하게 사랑한다. 바로 내 곁에서 날 떠날 수 없다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다율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다율은 민들레 홀씨가 제 콧잔등을 간질였던 지난봄을 떠올렸다. 짝사랑에 지쳐 하루하루가 힘들던 그 시절, 그때도 기자회견을 했었다. 갑작스러운 재채기에 다람쥐로 변해 버려 곤란을 겪었었지.
그때와 지금 똑같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우리는 권지하와 이다율, 배우와 매니저라는 것.
하지만 다른 점이 훨씬 많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인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혹독했던 계절과 안타까운 시간을 지나, 다율의 마음에는 이제야 진정한 봄이 오고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권지하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율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갈까요. 이 매니저?”
“네. 배우님.”
두 사람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인터넷 뉴스 조회수 1위를 달성했다. <여전히 사이좋은 배우와 매니저>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댓글창은 돌아온 권지하와 다율을 향한 지지와 열광으로 가득했다.
ㄴ배우님 옆에 다율 매니저 있으니까 이제야 배우님 돌아온 거 실감 나요
ㄴ그러고 보니까 매니저님도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습니다!
ㄴ둘이 꼭 한 세트 같아 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