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한참을 올라가다가, 둘은 느닷없이 한옥 한 채를 마주쳤다. 크지는 않았지만 위엄이 있고 근사한 집이었다. 다율은 눈이 번쩍 뜨였다.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 여기예요.”
다율이 권지하의 등에서 내려 집으로 한 발 다가섰다. 그때 대문이 활짝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다율을 보고 크게 놀랐다.
“다율아!”
“할아버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이눔아. 어디 가서 뭘 하길래 소식이 없었냐.”
“흐흑… 흑.”
눈물 가득한 상봉이 끝나고, 할아버지는 시커먼 옷을 입은 권지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저 사람은 누구냐?”
“아… 그게.”
“누군데 너랑 같이 여기까지 왔어.”
“저… 소개드릴게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할아버지가 눈썹을 꿈틀대며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뭐라고?”
“저랑 평생… 함께하기로 했어요.”
“너 그럼 저… 저 남자랑 짝짓기를 한 게냐?!”
할아버지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다율은 극도로 보수적인 할아버지의 성향을 알기에, 죄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네.”
“하, 나 참. 어이가 없군. 손님이니 가만 세워둘 수도 없고… 일단 안으로 드시게.”
할아버지는 잔뜩 찌푸린 낯으로 권지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율의 짝이 될 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권지하 역시 두뇌 회전이 빨라 할아버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잘 보일 수 있을까. 권지하는 마당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집을 슥 훑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집안에 어필할 만한 포인트가 무엇일까 궁리했다. 그때 마침 권지하의 눈에 정리하다 만 도토리 무더기가 보였다. 지금은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모으는 계절. 할아버지 혼자서 많은 양을 창고에 차곡차곡 저장하기에는 힘이 달린 게 틀림없었다.
“어르신. 괜찮으시다면 제가 저 도토리 좀 정리해드려도 될까요?”
“어? 뭐, 그러게나.”
일단 손님이기는 하지만 마침 혼자 정리하기에 힘이 부친 참이었기에 할아버지는 승낙했다. 또한 권지하의 생각처럼 그를 시험해 볼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권지하는 무거운 도토리 자루를 깃털처럼 가뿐하게 들어 올려 창고에 넣었다. 흩어진 도토리들도 잘 주워다가 부대 자루에 깔끔하게 집어넣었다. 내친 김에 창고 안도 말끔하게 청소했다. 시원시원하게 일을 처리하는 권지하를 보며 다율은 박수를 쳤다.
할아버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고생했네. 차라도 한잔해. 좋은 찻잎이 있어.”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합니다.”
다율과 권지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마루에 공손히 앉으며 권지하가 자기소개를 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권지하라고 합니다.”
“흠… 그래.”
할아버지가 찻잎을 꺼내려 하자, 권지하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차를 우려드려도 될까요?”
“자네가?”
“제가 다도를 좀 합니다.”
“허, 젊은 사람이 의외로군.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권지하가 주전자와 숙우, 다건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극에 여러 차례 출연한 경험이 있어 다도를 따로 배웠었다.
품위 넘치게 차를 우리는 권지하의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는 감탄을 했다.
이 젊은이 예사 사람이 아니군. 기백이 넘치면서도 아주 우아해. 이래 가지고는 내가 꼬투리를 못 잡겠는데.
“드십시오.”
권지하가 할아버지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끝내주는 차의 향기에 할아버지는 살짝 마음이 녹을 뻔했다. 그러나 하나뿐인 손자를 처음 보는 놈에게 닁큼 건네줄 수는 없는 법. 오기가 샘솟았다.
“알다시피 내가 다율이를 많이 아껴. 자네가 다음 관문을 통과한다면 인정해 주겠네.”
“어떤 관문입니까.”
“바로 바둑이야.”
할아버지가 마루 한구석에 놓인 바둑판을 가리켰다. 힘도 예의범절도 갖췄겠다. 하지만 만약에 멍청한 놈이라면 순순히 내 손자를 넘길 수는 없다. 그런 심산이었다. 권지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회는 단 한 판밖에 없다네.”
“알겠습니다.”
권지하가 검은 돌을 잡고 할아버지가 흰 돌을 쥐었다. 다율이 초조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 가운데 대국이 시작되었다.
권지하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일전에 천재 바둑기사 역할을 맡은 적이 있어, 프로기사에게 집중적으로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권지하에게 대패를 당했다.
“이럴 수가. 속리산 인근에서 최고로 바둑 잘 두는 수인이 나인데, 자네는 대체….”
“운이 좋았습니다.”
권지하가 겸손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쯤 되니 할아버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 좋지, 머리 좋지, 얼굴은 매끄럽게 잘생겼지, 차 마실 때 보니까 품위도 있지.
“끄응….”
완벽하다. 흠 잡을 데가 없어.
할아버지는 조금 고민을 하다가 호구 조사를 해 보기로 했다. 다율이가 여기까지 데려왔다면 이미 수인인 사실은 밝혔을 터, 이씨 집안이 얼마나 유서 깊은 가문인지 엄중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다율이한테 이야기 들었겠지만 우리는 그 고귀하고 희귀하다는 황금다람쥐 가문일세. 다율이는 무려 9대 독자고 말이야. 집안을 이끌어 나갈 책임이 막중하다고 할 수 있지.”
“실은 저도 사륭 권씨 집안 사람입니다
“뭐? 사륭 권씨면… 설마 이무기 수인?”
할아버지가 경악했다. 권지하는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제가 18대손입니다.”
이무기 권씨라면 할아버지도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아주 뼈대 굵은 수인 집안 중 하나였다.
한때 권씨 집안은 왕실을 보위하는 존재들이었다. 특히나 조선 시대에는 임금님들이 앞장서 사륭 권씨 집안의 가주들을 가까이 두고 나랏일을 보살피려 했다. 권씨 집안 사람들의 영험한 예지력과 영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조선 말엽 외척들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간신배들이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는 바람에 권씨 집안은 궁에서 쫓겨났고, 이후 산골 깊은 곳으로 숨었다고 들었다. 그게 다율의 할아버지가 듣고 자란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단한 명문가의 아들이 빠짐없이 잘나기까지…! 그렇다면 마지막 관문이다.
“다율이는 대를 이어야 해. 알맞은 다람쥐 짝을 찾아서 결혼해야 한다네.”
“그 문제라면 걱정 마십시오.”
“뭐?”
“이미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것도 다람쥐 쌍둥이를요.”
놀랄 노 자였다. 할아버지는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애, 애를 가져?”
“다율이는 체질상 아이를 가질 수 있더군요. 저희 이무기 수인은 성별 상관없이 임신을 시킬 수 있고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이가 들어섰습니다.”
“하이고….”
“할아버지. 증손주가 생긴 거예요. 기뻐해 주세요.”
다율이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사실 할아버지의 눈에는 다율이 아직도 어린애로 보였다.
애가 애를 가졌다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 황금다람쥐 가문의 대를 훌륭하게 이은 것도 사실이다.
다율이 떠나간 이후로 쓸쓸했던 할아버지로서는 곧 태어날 증손주들이 기대되기도 했다. 다율이를 닮았다면 분명 착하고 귀여울 것이고, 저 시커먼 놈을 닮았다면… 음. 허우대 좋고 인물 멀쩡하겠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졌다. 너희를 받아들이마.”
“할아버지!”
다율이 할아버지의 품에 꼭 안겼다. 가족의 품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
그날 저녁, 다율과 권지하는 할아버지가 차려 준 저녁밥을 먹었다. 하룻밤 묵었다 가기로 했으므로 시간이 넉넉해 그들은 직접 도토리묵을 쑤었다. 탱글하고 말랑한 도토리묵을 흡입하는 할아버지와 다율을 보며, 권지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애들 이름은 지었나?”
“아뇨. 아직 좋은 이름을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지어 주랴?”
“그래 주신다면 더없이 영광일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서재에서 화선지와 붓을 꺼내 왔다.
“자네 이름의 한자가 어떻게 되는가.”
“이를 지에 연꽃 하 자 씁니다.”
“이름 좋군. 흠. 쌍둥이라고 하니 두 사람 이름에서 각자 한 글자씩 따서 지으면 어떻겠나?”
할아버지가 붓글씨로 이름을 써 나갔다.
“지율이, 하율이 이렇게 말이야.”
두 이름이 너무도 맘에 들어 다율은 손뼉을 쳤다.
“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기들 태어나면 한번 들러서 보여 주게나.”
“물론이에요, 할아버지. 아기들 데리고 꼭 놀러 올게요!”
다율이 환하게 웃었다.
세 사람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손님방에서 자던 다율은 한밤중에 목이 말라서 깼다. 그런데 옆에 누워 있어야 할 권지하가 없었다.
“형 어디 갔지….”
다율은 비몽사몽간에 문을 열고 나왔다. 어두컴컴한 마당을 보니 할아버지와 권지하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올겨울은 그럭저럭 난다 쳐도, 결국은 집수리를 해야 돼. 이제 손주들도 놀러 오고 할 테니 정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슨, 됐네.”
“제가 손주사위 아닙니까. 꼭 제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음… 정 그렇다면 한번 상의해 봅세.”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다율의 마음이 뿌듯해졌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이 집에 온다면 어떨까. 이 공기 맑고 물 깨끗한 산속의 할아버지 댁에서 추억을 만들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다율은 손바닥으로 배를 쓸어 보았다. 얼른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