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권지하가 복귀를 고민하기로 한 기간은 약 2주였으므로, 둘은 휴가 아닌 휴가를 갖게 되었다. 아직은 병원 갈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율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고, 그 점은 권지하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율의 발바닥을 간지럽게 마사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삼시 세끼 밥시중을 들며 중간중간 견과류 파이를 만들어 주고 밤에 다율을 씻기는 게 권지하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던 어느 날, 다율이 말을 꺼냈다.
“음… 형, 있잖아요.”
“응.”
“저 가고 싶은 데가 있어요.”
“어디?”
“고향이요.”
“고향이라면… 속리산?”
“네. 정말 오랫동안 못 가 봤거든요. 요즘따라 많이 가 보고 싶네요.”
아기를 가지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안정을 찾았지만, 이상하게도 다율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 갔다. 눈을 감으면 속리산의 나무와 풀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고 밤하늘의 별이 보이는 듯했다.
외롭지만 행복했던 혼자의 삶. 물론 외로움 따위 느낄 겨를 없는 지금이 더욱 소중하지만, 그래도 향수병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건 정든 고향을 너무 갑자기 떠났기 때문이리라.
“그럼 가자.”
“진짜요?”
“응. 대신 차 타고 오래 가는 거 무리일 수 있으니까 이번에 병원 갈 때 의사 선생님한테 확인해 보고.”
“좋아요!”
두 번째 병원 방문일.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다고 쑥스럽게 산부 수첩을 내미는 다율을 보고, 간호사는 참 신중한 아빠들이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오늘은 초음파를 볼게요.”
“네.”
베드에 누운 다율은 다소 긴장이 됐다. 태어나서 처음 초음파를 받아 보는 것이기도 했고, 그게 아기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더욱 떨렸다.
“차가워요.”
다율의 배 위로 의료용 젤이 덧발렸다. 곧 초음파 기구가 다율의 배에 닿으며, 모니터에 흑백 화면이 떴다.
“잘 있네요. 여기 보이세요? 이 점 같은 게 아기들이에요.”
“아….”
다율은 멍해졌다. 화면 안에는 강낭콩보다도 자그마한 점 두 개가 보였다. 생각보다도 훨씬 작고 너무나 연약해 보여서, 다율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틋하죠?”
“네… 믿기지가 않아요. 저게 아기들….”
“아기들은 인간 몸에 다람쥐 귀와 꼬리를 달고 태어날 거예요. 여기 아주 작지만 꼬리가 자라고 있네요. 보이세요?”
의사가 화면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처럼 조그마한 아기들에게는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꼬리가 달려 있었다. 자신을 꼭 닮은 모습에, 다율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보여, 보여요… 흑.”
“다율아.”
권지하는 다율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 역시 다율을 빼닮은 아기들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평생토록 지켜 줘야지. 이 다람쥐 세 마리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하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간단한 여행 정도는 괜찮아요. 다만 중간중간 충분히 쉬어 주세요.”
의사의 조언을 듣고 권지하는 다율을 위한 간식과 쿠션, 혹시 모를 비상약품을 잔뜩 준비했다.
여행이 결정된 후, 다율은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속리산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나의 작은 오두막은 무사할까. 그곳의 공기는 여전히 맑고 깨끗할까.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드디어 여행 가는 날 아침이 밝았을 때, 다율은 활기차게 일어나 콧노래를 불렀다. 도시락 싸기는 다율의 몫이었다. 권지하가 일어나기 전에 선수를 쳐 버린 것이다.
지하 형이 좋아할 만한 도시락을 싸겠어. 해 보자!
하지만 다율의 솜씨는 변하지 않았고, 도시락의 모양새는 처참했다. 호두 가루를 뿌린 정체불명의 요리, 얼기설기 어설프게 뭉친 주먹밥, 못생기게 썰린 과일이 도시락을 가득 채웠다. 예전에 지하와 소풍을 갔을 때 쌌던 도시락에서 전혀 발전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권지하는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아낌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두 사람은 정오가 되기 전 차에 올라 서울을 빠져나왔다. 속리산까지는 길이 제법 멀었으므로, 휴게소가 나올 때마다 내려서 휴식을 취했다. 권지하는 다율이 혹시 어디라도 불편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다율은 고향을 찾는다는 즐거움에 평소보다도 더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쉬다가, 가다가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속리산 초입에 닿았다. 이제는 더 이상 차가 진입할 수 없는 곳까지 도착했기에, 둘은 차에서 내려야 했다.
“여기에서 좀 걸어서 올라가야 해요. 산 중턱에 집이 있었거든요.”
다율이 가리키는 곳은 우수수 떨어진 단풍으로 뒤덮인 산허리였다.
“업어 줄까?”
“아니에요. 형, 저 무거워요. 게다가 산길인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무슨 소리야. 업혀.”
권지하는 강경했다. 다율과 권지하는 한참의 실랑이를 펼쳤고, 결국 다율이 졌다. 그는 권지하의 등에 업혀 산을 올랐다. 권지하는 다율을 업고도 힘들지 않은지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권지하에게서 나는 향기와 산속의 나무들이 뿜어내는 냄새가 만나 천국 같은 감미로움이 다율을 감쌌다.
그리웠다. 이 나무와 풀들, 지저귀는 새들과 흙냄새가.
다율은 싱긋 웃으며 도시락 통과 보온병 손잡이를 꼭 쥐었다. 권지하가 다율을 추슬러 업고 마저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이 별로 춥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그런데 산 진짜 외지고 깊다.”
“네. 그래서 학교도 못 다녔어요. 그게 너무 아쉬웠어서 저는 애들은 꼭 좋은 곳에서 교육받았으면 해요.”
그래서 학군이며 내 교복 입은 모습 이야기를 그렇게 했구나. 권지하는 다율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깊게 이해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 줄 거야. 우리 아가들은 네가 원하는 대로 키워야지.”
다율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권지하는 요즘 남몰래 부동산을 알아보고 있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넓고 쾌적한 데다가 공원을 끼고 있어서 환경은 좋았다. 하지만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학군 면에서는 별로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권지하는 틈틈이 다율이 원하는 조건에 맞추어 공인중개사와 함께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서울 안에 거대 공원과 우수한 학군을 동시에 끼고 있는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권지하의 재력과 열정이라면 못 해낼 것도 없었다. 후보지도 두어 군데 골라놓은 참이었다.
바위에 앉아 쉬다가 올라가다를 반복하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덧 산 중턱에 도착했다. 아주 자그마하고 소박한 오두막이 그곳에 있었다.
“그대로야! 어떡해.”
다율은 권지하의 등에서 뛰어내린 다음 오두막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려 했다.
“천천히 가자. 뛰면 안 돼.”
다율은 감격 가득한 눈빛을 하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열려 있었다. 수인 헌터에게 쫓겨 도망갈 때 문을 잠그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안쪽에 습기가 차고 나무가 상했을 텐데 어떡하지.
이 집은 아주 긴 시간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가 엉망일 것이란 생각에 다율은 걱정이 되고 속이 상했다.
그런데 막상 안쪽으로 들어가니, 다율의 작은 침상도 조그마한 해먹과 앉은뱅이 테이블도 모두 그대로였다.
“어…? 가구도 바닥도 다 멀쩡해.”
이상했다. 집이 이렇게까지 멀쩡하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누가 이 집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다율이 의구심을 느끼며 집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권지하가 말을 걸었다.
“다율아. 여기 메모가 있어.”
“네?”
“어른 글씨 같은데, 읽어 봐.”
권지하가 하얀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낯익은 글씨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에. 할아버지…!”
[요즘 통 소식이 없어서 들러 봤다. 보면 연락 다오.]
메모에 쓰인 날짜는 불과 며칠 전이었다. 건너편 산봉우리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여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율이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꼭 안아 주었다.
“할아버지가 이 근처에 계셔?”
“흑… 네. 저 건너편에 사시는데, 못 뵌 지 엄청 오래됐어요.”
“그럼 여기까지 온 김에 할아버지 뵙고 갈까?”
“네. 너무 뵙고 싶어요.”
다율이 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아버지를 만나면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권지하도 소개해 줘야 하고, 인간 세상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름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아기다람쥐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다율과 권지하는 오두막은 다음에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둘은 차를 타고 산을 빙 둘러 다른 산봉우리로 통하는 등산로 앞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다율을 독립시키기 위해, 다율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더 깊은 산속으로 둥지를 옮겼었다. 다율도 두세 번 가 본 게 전부라, 할아버지의 집까지 가는 길이 곧바로 생각나지는 않았다. 또한 산세도 다율이 있던 곳보다 가팔라 신중하게 산을 올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지하는 다율을 업은 와중에도 산을 잘 탔다. 그 역시 수인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자연에 오면 더 힘이 솟는 경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