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88화 (88/95)

88화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너야. 네가 이제야 겨우 돌아왔는데 어떻게 널 놔두고 밖에 나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제 위험하지 않잖아요. 혼자 집에 잘 있을 수 있어요.”

“그건 안 돼. 내가 걱정돼.”

권지하가 다율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다율이 큰 눈을 끔뻑이며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셨다.

“형…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거 좋아하면서.”

“너만큼 좋아하지는 않아. 다율아, 난 아기들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는 활동할 생각 전혀 없어.”

권지하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은퇴도 할 거야.”

“뭐라고요?”

은퇴라니, 그건 다율에게 있어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언제나 스크린 안에서 그리고 브라운관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 권지하가 자신 때문에 은퇴라니. 그건 기쁘기에 앞서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저 때문에 은퇴를 한다고요? 어떻게 그래요.”

“왜 못 해. 나한테는 지금 너밖에 안 보이는데. 돈이고 시간이고 다 너한테 쏟아붓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

“저는 형 발목 잡고 싶지 않아요.”

“발목 잡다니,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네 옆에 있고 싶은 것뿐이야.”

“싫어요. 난… 난 형이 더 많이 빛났으면 좋겠어. 흑상예술대상 받았으면 좋겠다고요!”

다율이 눈물을 찔끔 매달고 소리쳤다. 권지하의 소원 중 하나인 흑상예술대상 수상. 그걸 목표로 하고 달려온 세월이 너무나 아까웠다.

이건 아니야. 어떻게든 이 사람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해.

다율은 결국 어색하게나마 연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기왕 흐른 눈물이 있기에 거기에 보태 어흑흑 우는 소리를 냈다.

다율의 눈물에 약한 권지하가 화들짝 놀라며 다율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왜 그래. 울지 마.”

“형, 나는 형이 나 때문에 활동 못 하는 거 너무 싫어요. 흐… 흐흑.”

다율의 연기는 뻣뻣하고 억양이 어색했다. 나 발 연기요, 하고 이마에 써 붙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지하의 눈에는 다율의 눈물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천하의 그도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알았어. 정 그러면 일단 너 안정 찾을 때까지 보름만 지켜보게 해 줘. 그러고 나서 실장님하고 이야기할게.”

다율도 그 정도 선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기에, 두 사람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알았어요. 꼭 약속 지켜요.”

“응. 우리 다율이가 하는 말인데 따라야지.”

다율은 억지로 쥐어짜 낸 눈물을 닦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새 나 연기력이 좀 늘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은 덤이었다.

권지하는 그날 오후 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활동 중단에 대해서는 다시 숙고하고 있으며 복귀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다고 여운을 남겼으며, 다율 대신 휴직을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최소 1년은 휴직해야겠던데요. 몸이 많이 안 좋아서요.”

어차피 권지하가 회사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입장이므로, 맹 실장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권지하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실 다람쥐 수인의 임신 기간은 45일 정도로 무척이나 짧지만, 권지하는 일부러 기간을 넉넉히 잡았다. 출산이 끝나면 또 집에 붙들어 두고 널널하게 시간 보내게 해야지. 무리하는 꼴은 못 본다.

“그럼 제가 준비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제발 연락 줘! 기다릴게.

맹 실장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하고 권지하는 전화를 끊었다. 다율은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권지하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다율이 이제 1년 동안 회사 안 가도 돼.”

“진짜요?”

“그리고 나는 천천히 생각해 보고 복귀 결정하겠다고 했어. 잘했지?”

“형 최고.”

다율이 권지하의 뺨에 뽀뽀를 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의 얼굴을 붙들어 입술을 겹쳤다. 한입에 삼켜 버리고 싶은 통통한 입술. 장밋빛으로 상기된 볼.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어디서 솟아났는지 알 수가 없다. 권지하는 요즘 들어 믿지 않던 신의 존재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아무래도 다율을 보고 있자면, 신이 존재한다는 걸 믿게 된다. 신이 나에게 다율이를 보내 준 건 아닐까.

“다율아. 우리 키스 좀 더 할까?”

권지하가 질척하게 물었다. 다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권지하가 다율의 목 뒤를 받치며 자연스럽게 그를 감싸 안았다. 소파에서 한참 동안 키스하던 권지하가 다율의 뺨에 손을 댔다. 손등으로 얼굴을 가볍게 쓸고, 쇄골로 내려온 손이 더 아래를 향했다.

적당히 차가워서 기분 좋은 손길이 다율의 가슴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다율은 아찔한 느낌이 들 때마다 솔직하게 신음하며 권지하의 손길에 자신을 맡겼다. 안 그래도 뜨거운 몸이 더욱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의사 말로는 안정기까지는 참아야 한댔지.

이대로 다율을 잡아먹고 싶었지만, 권지하는 인내를 해야 했다. 다율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질척하게 키스를 반복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실로 향했다. 권지하가 다율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욕조에 그를 눕혔다.

권지하가 등 뒤에서 다율을 끌어안고, 다율은 권지하를 의자 삼아 온몸에 긴장을 풀었다. 권지하의 손이 다율의 무릎, 허벅지 안쪽을 자유롭게 헤집었다.

“으읏,….”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감각이 조금씩 깨어났다. 다율은 입술을 깨물면서 끙끙댔다. 권지하가 작은 돌기를 희롱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아기를 가진 이후로 자주 돌기가 빳빳해지고는 해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대놓고 만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리 더 내 줘.”

“아… 형. 지하 형.”

“다율이 목소리도 예쁘네.”

권지하가 다율의 귓바퀴를 깨물며 더 깊은 곳으로 손길을 옮겼다.

“아, 아기… 아기 때문에 안 돼요.”

“나도 알아. 지금 죽도록 참고 있어.”

“하아… 하아.”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원하는 만큼 몸을 겹칠 수 없으니, 서로를 만지고 더듬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기본적으로 동물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만져 줘야 기분이 좋은지쯤은 귀신같이 파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단 소리였다.

“그럼 우리 키스부터 다시 해 볼까요…?”

다율이 권지하의 입술을 찾아 깊게 입 맞췄다. 찰박이는 물소리와 수증기로 욕실 안이 가득 찼다.

***

촉촉이 젖은 다율을 안고 나와, 권지하는 갈색 머리를 잘 말리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안았지만 그래도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 되었으므로, 그는 다율에게 우유와 물을 가져다주고 폭신한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고마워요. 형.”

“고맙긴.”

이불에 돌돌 말린 다율이 권지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좋다.”

“더 좋은 일 할까?”

“어떻게요?”

“네가 보고 싶다고 했던 내 데뷔작, OTT에 떴어.”

“헉!”

다율은 너무 놀라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권지하의 데뷔작은 계약 문제로 인해 블루레이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다율이 입사하기 전 OTT에서도 내려간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그 영화를 보고 싶다고 데굴데굴 구르던 다율이 눈에 밟혀, 권지하는 영화제작사와 또 소속사와 논의를 거친 끝에 작품을 OTT에 유통하기로 결정했다.

“그… 그, 전설로만 내려오던 사극 지하. 왕자 지하. 달빛 아래 검술 하는 지하 볼 수 있는 거예요?”

다율은 열성 팬 모드가 되어 침대를 발로 팡팡 찼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잘 봐.”

권지하가 OTT에 접속해 큰 TV 화면에 영화를 띄웠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권지하는 데뷔작부터 본인의 연기와 비주얼에 대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배우라면 민망해할 법도 한 제 데뷔작을 보면서 흡족하게 웃었다.

“저 때 비운의 왕자 역할이었지. 비주얼이 장난 아니네.”

“와… 너무 멋있어. 움직일 때마다 칼날 빛나는 것 좀 봐. 어떡해!”

권지하가 정적에게 쫓겨 궁궐 담벼락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 나오자, 다율은 거의 비명을 질렀다.

“저 몸짓 좀 봐! 미쳤어!”

이윽고 팬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명대사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죽기엔 아까운 달빛이구나.

“으아악!”

다율이 이불을 움켜쥐며 열광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쳐다보다가 그의 코끝을 톡 쳤다.

“나보다 쟤가 좋아?”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너무 열광하잖아. 질투 나는데?”

불만 가득한 표정의 권지하를 보며 다율은 웃음을 터뜨렸다.

“형. 저 왕자님도 형이니까 멋있는 거예요.”

“진짜야?”

“그럼요. 저 대사도 형이 해서 멋있는 거고요.”

권지하는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다율에게 진하게 키스했다. 다율은 설탕보다 더 달콤한 키스를 받으며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다람쥐는 자신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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