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어… 환자분 황금다람쥐셨죠?”
“네. 황금다람쥐요.”
“혹시 그러면 반인반수 증상이 나타난 이후에 관계가 있었나요?”
다율이 끄덕이며 권지하와 풀 빌라에 갔던 날짜를 알려 주자, 간호사는 대충 알 것 같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이건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릴게요. 반인반수화가 발정기의 전조였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임신했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만약 임신이면 엑스레이 찍어도 되는지 결정해야 하니까, 임신 확인이 우선이에요.”
마음의 준비는 하고 갔지만 막상 전문 인력의 입에서 임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율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얼마 안 있어 다율의 진료 차례가 돌아왔다. 권지하가 다율을 부축해 진료실로 들어가자 인상 좋은 여의사가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그녀라고 해서 권지하의 얼굴을 모를 리는 없었지만, 프로페셔널하게 감정을 감춰 준 덕에 다율은 약간이나마 안심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우선 임신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절차에 따라 피를 뽑고, 다율은 진료용 베드에 누웠다.
진료를 마친 두 사람은 초조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5분이 꼭 5년처럼 느껴졌다. 대기용 소파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다율을 권지하가 감싸 안아 주었다.
“이다율 님, 보호자분. 이리로 와서 화면 같이 보실게요.”
“네.”
두 사람은 진료 데스크 앞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의사는 환한 얼굴이었다.
“축하드려요. 쌍둥이네요.”
“지, 진짜요?”
“네. 지금 이다율 님 배 속에 아기가 둘 있어요. 그리고 아기들의 동물적 특성은 다율 님을 따라 다람쥐가 될 확률이 큽니다. 수인과 수인이 결합했을 때는 낳는 쪽의 몸에 맞게 아기들이 발달하거든요.”
“아… 진짜로 제 안에.”
다율은 너무도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직감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한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권지하가 다율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고마워, 다율아.”
“형….”
“너무 자랑스럽다.”
권지하가 다율을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의사는 생각했다. 지금껏 수많은 수인 커플을 보아왔지만, 이번 임신은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고 행복한 케이스가 될 것 같다고.
“이건 유산방지제고요. 이건 산부 수첩입니다. 아빠들 정보, 아기들 정보 작성해서 다음 진료부터는 이거 보여 주셔야 해요.”
병원 데스크에서 간호사가 약과 수첩을 건넸다. 권지하가 짐을 받아 들고 함께 병원을 나서는데, 다율이 중얼댔다.
“어… 이름이 있어야 되네?”
“뭐가?”
“산부 수첩이요. 아기들 이름 적어야 돼요. 아기 1, 아기 2 이렇게 쓰면 안 된대요. 태명 꼭 지어서 쓰라는데요.”
다율이 수첩을 보여 주었다.
“진짜네. 그럼 우리 빨리 아기들 이름부터 지어야겠다.”
“이름….”
다율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율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 준 것이었다. 많을 다에 밤 율 자를 써서, 밤을 많이 먹고 행복해지라는 뜻이었다.
다율은 새삼스럽게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따금 보았던 먼 친척들도 그리웠다.
어떤 존재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는 건 그 존재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다율아, 하고 불러 주는 목소리에는 모두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 다율이. 왜 울어?”
지금 권지하가 다율을 부를 때처럼.
“…내가 정말 아빠가 되었구나 싶어서 너무… 감격스럽기도 하고 기분도 이상하고… 할아버지도 보고 싶어요.”
권지하가 눈물을 흘리는 다율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쓸어 줬다.
“그랬구나. 우리 다율이.”
“아기들한테 얼른 예쁜 이름 지어 주고 싶어요.”
다율이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이제는 다율이 받은 사랑을 아기들에게 돌려줄 차례였다.
권지하와 다율은 아기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고민에 빠졌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밥을 먹으면서도, 씻으면서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랜 고민 끝에 거실 소파에 앉아 가족회의를 열었다.
“뭐라고 짓죠? 딱 이거다 하는 이름이 생각이 안 나요.”
“부르기 좋으면서도 뜻이 있어야 할 텐데. 다율이 네 생각은 어때?”
“음… 누가 봐도 우리 아기다 할 이름이었으면 좋겠는데… 저, 혹시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지으면 어때요?”
다율이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래. 조금 더 천천히 짓자. 좋은 뜻을 담아가지고.”
“아기들아. 얼른 예쁜 이름 지어 줄게.”
다율이 아직은 납작한 배를 쓰다듬으며 애틋하게 웃었다. 권지하가 다율을 뒤에서 감싸 안고 다율이 자신에게 편히 기대도록 했다.
권지하의 커다란 손이 다율의 배를 덮었다. 아직 하나도 불러오지 않아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지만, 권지하는 다율의 몸 안에 싹트고 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안녕. 나는 지하 아빠야.”
자신 역시 아기들의 아빠라고 인사시켜 주기 위해, 권지하는 정성껏 다율의 배를 향해 속삭였다. 사실 아직도 이 안에 아기가 두 마리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율과 자신을 반반 닮았을 아이들. 막연하게 상상은 해 보았지만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니 아기들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 다율이 무릎에 누울래.”
“그래요.”
권지하가 다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그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권지하의 얼굴과 다율의 배가 맞닿았다.
“이렇게 하면 심장 소리 들릴까?”
“아직은 아니지 않을까요.”
“들린다고 믿을래.”
권지하가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렸다. 다율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살며시 웃었다.
이게 바로 행복일까.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은 평화로운 원상태로 돌아왔다. 다율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그 옆에는 권지하가 있다.
…그런데 형 요새 스케줄이 없나? 맨날 내 옆에만 붙어 있어.
다율은 권지하가 어제도, 그제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생각해 냈다. 지금쯤은 작품을 완전히 마쳤을 때이니, 언론 인터뷰며 화보 촬영이 집중될 시기였다. 다른 배우들이 그러하듯 권지하도 촬영장을 비울 때 더욱 바빴으니까.
다율은 요 얼마간 완전히 세상 소식을 끊고 살았기 때문에 권지하의 활동 중단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신이 없어 팬 카페며 TV를 볼 시간도 없었고, 아기들 태교를 하느라 가끔 명화가 담긴 책을 들여다보거나 이따금 산책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가 어떻게 뒤집어졌는지, 맹 실장과 백장훈이 얼마나 애가 타 시름시름 죽어가는지 다율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권지하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보니 백장훈이었다.
받지 말까 했지만 전화가 워낙 끈질기게 울렸다. 어차피 매니저인 그가 전화를 걸어올 일이라고는 스케줄 문제겠거니 싶어, 다율은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장훈이 형. 저 다율이에요.”
-다율이? 너 다율이 맞아? 큰일 있었다며.
“네. 그래도 지하 형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어요.”
-그랬구나. 다행이네. 그런데 지하는 어디 갔어.
“지금 씻으러 갔어요. 무슨 일인데요? 급한 스케줄 있어요?”
다율의 말에 백장훈은 잠시 대답하지 않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율이 너… 혹시 지하한테 어디까지 들었어?
“네? 듣다니요. 저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그나저나 지하 형 요새 왜 스케줄 안 뛰어요?”
-아… 진짜 아무것도 말 안 했나 보네.
“무슨 소리세요. 형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다율이 표정을 굳혔다. 백장훈은 진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활동 중단 선언, 다율을 찾겠다며 막무가내로 스케줄을 거부한 일, 그로 인한 팬들의 염려 등. 백장훈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율을 걱정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율이 네가 지하한테 말 좀 잘 해 주면 안 될까. 맹 실장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요새 죽을 맛이다.
“그런 일이… 일단 알겠어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형.”
전화를 끊고 난 다율은 심란해졌다. 자신을 찾아 헤매고 다닌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활동 중단 선언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해 보니 [권지하 원인불명 활동 중단]이며, [권지하 건강 이상설],[이대로 은퇴하나 논란의 권지하] 같은 타이틀을 단 기사가 무더기째로 나왔다.
“이게 다 뭐야….”
모든 영화와 드라마, 광고를 고사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돌아올지 전혀 여지를 남기지 않았었다는 점. 특히 킨 영화제 수상 감독의 시나리오까지 거절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 나자 다율은 마음이 무거웠다.
형은 정말 많은 걸 희생했구나. 자신이 가지고 누려 왔던 걸 다 내려놓을 생각이었던 거야. 천생 배우라고 불릴 만큼 천직에서 행복하게 일하고 있었고, 또 일 욕심이 많았던 권지하였다는 걸 알기에 다율은 더욱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자신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활동을 재개하지 않는 건 무슨 심리란 말인가. 다율은 속이 다 답답했다.
때마침 권지하가 욕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가운 차림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서, 권지하가 다율에게 다가와 가볍게 키스했다. 하지만 다율은 키스를 받아 주지 않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다율아.”
“…형. 활동 중단했었어요? 나 방금 장훈이 형한테 들었어요.”
“그건,….”
“어떻게 활동을 중단할 수가… 형, 나 때문에 활동을 중단할 건 없어요. 일해야죠.”
다율이 걱정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자 권지하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