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내가 널 지켜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힘들어했고… 하마터면….”
권지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율은 몸을 일으켜 권지하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아니에요. 괜찮아.
다율이 고개를 젓자 권지하는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다람쥐의 등을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연약한 몸, 뜨끈한 온기가 새삼스럽게도 애틋했다.
“네가 사라지고 나서 나 정말 많이 후회했어. 왜 집에 일찍 오지 않았을까 하면서. 이미 널 찾기엔 늦은 건 아닐까 하고 너무 초조했어.”
“….”
“내 세상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다율이 네가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닌데. 난… 난.”
권지하가 다율을 끌어안았다. 다율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다율아, 난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다율 역시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우리 형 없이 아무것도 못 해요. 형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형이 아니면 다 싫어요.
“사랑해. 내 다람쥐.”
권지하가 다율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다율의 눈물을 말려 버릴 만큼 다디단 키스였다.
다율은 한참을 울었다. 히끅거리며 울던 다율의 감정이 조금 진정되자,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이 되고 싶어.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니까.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 형을 그리워했던 마음, 그리고 우리 사이에 생겨난 아기다람쥐 이야기도.
지하 형한테 할 말이 많아요. 제발, 제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펑 소리와 함께 다율은 인간으로 변했다.
“다율아!”
권지하가 다율을 끌어안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발에는 빨갛게 피가 흐르고, 몸은 극도로 야위어 있는 다율의 모습이 권지하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형….”
다율이 권지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사람.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던 모습이다.
“형, 울지 마요.”
권지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서늘한 몸뚱어리와 다르게 그의 눈물만큼은 뜨거웠다.
그것은 연기로 흘리는 눈물이 아닌 진짜 눈물이었다. 다율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쳐, 눈물이 되었다.
“울지 마….”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다율이 힘없이 말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나 다시는 집 안 나갈게. 울지 말아요.
***
한참 동안 울고 나서, 다율이 말했다.
“저 씻고 싶어요.”
권지하는 기꺼이 다율을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커다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다율이 좋아하는 라벤더향 입욕제를 풀어 주었다.
“이리 들어와서 앉아.”
“네.”
다율은 권지하가 안아 드는 대로 얌전히 몸을 맡겼다. 권지하는 욕조에 들어간 다율에게 물 온도는 괜찮은지, 물에서 나는 향이 좋은지 물었다.
“전 좋아요. 형하고 있으면 뭐라도… 다 좋아요.”
다율이 싱긋 웃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뺨에 키스하고 오랫동안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입욕제를 푼 물 안에서 쉬면서 다율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배고프다, 오늘은 잠 못 잘 것 같다, 아까 형을 만났을 때 너무 놀랐다. 자신을 보호해 준 남매는 참 착한 아이들이었다.
조잘조잘 떠드는데 진짜로 다율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정말 뭐 좀 먹여야겠다. 안 되겠네.”
권지하는 다율을 물에서 꺼내 샤워기로 온몸을 헹군 다음 가운을 입혔다. 그런 다음에 갈색 머리를 보송하게 말려 주었다. 다율의 다친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제 무릎에 올린 채로 모든 일을 했다.
다율을 안아 들고 욕실 밖으로 나온 권지하가 다시 구급 키트를 찾았다.
“발에 붕대 감자.”
소독약과 연고를 덧바르고 붕대를 칭칭 감으니, 걸어도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다율이 어설프게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걸을 수 있어?”
“네.”
“그럼 식탁 가서 앉아 있자. 내가 뭐라도 만들어다 줄게.”
권지하와 다율이 주방으로 향했다. 다율은 식탁 의자에 앉아 권지하가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잠시 보글보글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맛있어 보이는 죽이 다율의 눈앞에 등장했다.
“뜨거우니까 식혀서 먹자.”
“형이 먹여 줘요.”
“그럴까?”
권지하가 다율의 옆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죽을 한술 떠서 호호 식힌 다음, 권지하가 다율의 입에 죽을 넣어 주었다.
“맛있어요.”
“정말?”
“형이 해 줘서 더 맛있어.”
“다행이다. 입맛 없는 건 아니라서. 한동안은 내가 주는 대로 잘 먹고 살 다시 찌워야 돼.”
“그럴게요.”
다율이 권지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곧이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 권지하는 다율의 마른 등을 쓸어내렸고, 이따금 머리카락을 만져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율이 제 몸을 감싼 권지하의 손을 잡아끌어 제 배에 가져다 댔다. 아랫배에 손바닥을 밀착시키고 부드럽게 문지르자, 권지하는 그 뜻을 오해했다.
“다율아, 오늘은 안 돼. 너 몸 나을 때까지는 참아야 돼.”
“그거 아니에요. 내 배… 혹시 느껴져요?”
“…뭐가?”
“가만히 만져 보세요.”
다율이 작게 속삭이며 권지하의 손목을 꼭 잡았다. 그 역시 수인 혼혈이었기 때문에 직감이나 동물적인 감각이 살아 있었다. 다율의 마르고 납작한 배 너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 생명력은 아직 작고 연약했으나 뚜렷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하는 손바닥을 통해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다율아, 설마.”
“맞아요.”
“아기… 아기들이.”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 여기 아기들이 있다는 걸. 황금다람쥐 수인은 저 같은 수컷도 아기를 가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둘이나 가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권지하가 다율을 끌어안았다. 너무 벅차고 기뻤다.
“고마워. 너무 고마워.”
“형도 고마워요. 나한테 아기다람쥐를 선물해 줘서. 그리고 형과 인생을 함께 살아가게 해 줘서 고마워요.”
다율 역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 이 아기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웠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권지하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자신의 집으로. 이제 아기들은 안전하고 편안한 집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날을 기다리며 무럭무럭 커 갈 것이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려 다율의 뺨을 적셨다. 불안과 초조함이 아닌, 기쁨이 빚어낸 눈물이었다.
“내가 지켜 줄게. 너도 아기들도, 다.”
권지하가 다율을 품에 안은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시 슬프게 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너랑 나는, 행복할 거야.”
“믿어요.”
다율과 권지하는 서로를 안고 밤을 지새웠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이 솟아나면 입을 맞췄다.
다음 날, 다율은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산속에서의 무리한 생활이 골병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하지만 권지하가 오전 내내 침대에서 마사지를 해 주고 약을 발라 주니 오후에는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병원 간다고 생각하니까 떨리네요.”
“나도.”
두 사람은 오늘 수인 병원을 찾기로 했다. 다율의 치료가 첫 번째 목적이었고, 임신 확인도 함께 하자는 게 두 사람의 의견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예전에 예약을 했다가 연기했던 일이 있어 바로 진료가 가능했다.
수인 병원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에도 딱 하나만이 존재했다.
“예전에 꼬리랑 귀 나오는 것 때문에 예약했었는데. 기억나?”
“맞아요. 형 한가해지면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이런 일로 가게 될 줄이야….”
“나도 몰랐어.”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다율도 따라 웃었다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접수부터 했다.
권지하를 알아본 간호사들이 흠칫 놀랐다. 어떻게 수인 병원에 연예인이 그것도 잠적한 권지하가 와 있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무척이나 당황한 그녀들에게 권지하는 함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제가 저 환자 보호자입니다. 프라이버시 보호 부탁드립니다.”
그의 진지한 부탁에 간호사들은 이내 호기심을 거두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인적 사항 써 주시고요, 예진실로 모실게요.”
다율은 아직 발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라 걸음이 느렸다. 권지하가 그를 예진실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다율은 겨우 의자에 앉아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디가 안 좋으신가요?”
“원래 여기 처음 예약했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반인반수화가 돼서였는데요, 그 증상은 사라졌어요. 대신에 최근… 심하게 얻어맞아서 온몸이 아프고, 발이 긁혀서 피가 많이 나요.”
“그렇군요. 혈압부터 재고 간단하게 설문 작성할게요.”
기초적인 예진이 이어진 후 다율이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 실은 그리고 임신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