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경찰을 부르는 것으로 선회하거나 말로 타협을 볼 줄 알았는데, 권지하가 손마디를 두둑 꺾었다. 의외의 행동에 박중호는 당황했다. 수인 헌터는 권지하의 기세에 짓눌려 아까부터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수인들을 겁박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덩치 좋은 성인 남자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는 게 그의 등신 같은 점이었다.
“이미지 관리할 시간에 네놈들 죽도록 팰 거야. 너랑 너.”
권지하가 박중호와 수인 헌터에게 차례로 삿대질했다. 그러고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무게를 실은 주먹을 날렸다. 먼저 박중호의 얼굴을 무참히 갈겼다. 연속 세 대를 얻어맞은 박중호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런 그에게 발길질이 가해지자 수인 헌터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왜, 왜 이래.”
“왜냐니. 내가 그걸 설명해 줘야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해?”
권지하가 수인 헌터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그의 배를 걷어찼다. 엄청난 괴력에 헌터는 나자빠지고 말았다. 꼴사납게 넘어진 그에게 권지하가 발길질을 퍼부었다.
“어디 갔는지 불어.”
“모, 모른다니까…!”
그때 권지하의 트렌치코트 자락을 타고 조그마한 것이 올라와 어깨까지 도착했다. 권지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군데군데 먼지와 피가 묻었지만 분명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다율이 여기 있었다.
“…다율아.”
다율의 눈망울이 젖어들었다. 권지하는 어깨에서 조심스럽게 다율을 들어 올린 다음, 양 손바닥에 올리고 이마를 맞댔다.
“내가… 내가 왔어. 이제 괜찮아.”
권지하가 다람쥐의 뺨을 적시고 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가 다율이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저기 봐요, 저기!
다율이 앞발을 들어 권지하의 등 너머를 가리켰다. 박중호가 굵직한 나무줄기를 휘두르려고 폼을 잡고 있었다.
“야!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
하지만 권지하가 빨랐다. 권지하는 엄청난 속도로 다율을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몸을 숙였다.
주머니 안으로 들어온 다율은 앞발로 옷감을 꼭 쥐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권지하가 격렬하게 움직일 때마다 주머니 속에서 다율은 이리저리 나동그라졌다.
힘을 내요, 형. 형이 이길 거야.
크게 헛스윙을 한 박중호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권지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중호의 고간을 걷어찼다. 그러자 박중호는 온 산이 떠나가라 고함을 치며 비틀거리더니, 손을 더듬어 커다란 돌멩이를 주웠다. 무식하게 돌을 내리치려는 박중호의 손목을, 권지하가 우둑 꺾었다.
“으아악!”
관절이 완전히 잘못돼 버렸는지 박중호는 팔을 쥐고 고통 섞인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워. 너희 입부터 틀어막아야겠다.”
권지하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로프와 나이프, 등산용 수건들을 가지고 왔다. 우선 세 놈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은 후 로프로 놈들을 결박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반항을 하는 놈이 있으면 다시 주먹세례를 퍼부어 가면서, 권지하는 세 남자를 굵은 나무에 꽁꽁 동여맸다.
몸이 묶이자, 놈들은 반항을 멈추고 비굴하게 굴기 시작했다.
“살려, 살려 줘.”
입이 수건으로 틀어막힌 터라 헌터는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요.”
“저희도 이러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거든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남자들이 수건을 씹어 가며 엉엉 울었다. 권지하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놈들이 역겨웠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은 새끼들.”
저따위 파렴치한 때문에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다람쥐가 얼마나 겁에 질려 했을지. 그 생각을 하자 권지하의 머릿속으로 차가운 분노가 몰려왔다.
“그냥 묻어 버릴까. 그래, 그게 맞겠다.”
권지하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삽을 가져왔다. 그가 땅을 파기 시작하자, 남자들이 읍읍거리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벌레가 바둥거리는 것만도 못한 광경이었다.
“아, 맞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 내가 잘못 생각했네.”
권지하는 다율이 들어 있지 않은 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부터 내가 아는 건강원에 전화를 할 거거든? 멧돼지 수인 세 마리 발견해서 잡아놨으니까 가져가시라고. 참고로 그분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화된 상태를 더 선호하셔. 처리하기 쉬우니까 말이야.”
수인 헌터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멧돼지 수인 역시 요새 떠오르는 사냥감 중 하나였다.
“아, 안 돼.”
“살려 줘요.”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남자들이 비굴하게 빌었다. 힘이 약한 다율은 멋대로 짓밟아 놓고서 자기들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태도가 싹 바뀌었다. 권지하는 그런 놈들의 태도에 토악질이 나면서도 우스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너무도 잘 통하는 단순한 족속들이었다.
“내가 왜 너희 사정을 봐줘야 하지?”
차갑게 내뱉은 권지하가 키패드를 터치했다.
“네. 사장님, 접니다. 오랜만이죠. 멧돼지 세 마리 잡아놨어요. 인간화한 채로 있으니까 참고하시고요. 돈은 필요 없습니다. 아, 곧바로 오신다고요.”
남자들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하나씩 실신했다. 극도의 공포에 몰린 것이다. 세 놈이 차례로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 권지하는 피식 웃었다.
“등신들아. 전화 걸지도 않았어.”
권지하가 손바닥을 털며 혀를 쯧쯧거렸다. 다율이 주머니 바깥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다율아.”
다율이 살금살금 주머니 바깥으로 나오더니 옷자락을 타고 올라와 다시금 권지하의 어깨 위에 앉았다. 권지하는 다율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고 조그마한 몸뚱어리를 어루만졌다. 다율은 비로소 안심하고 그 서늘한 손바닥에 저를 맡길 수 있었다.
***
권지하의 육촌 형과 해결사들이 한 박자 늦게 도착했다. 그들은 미리 입을 맞춰놓은 대로 건강원 직원인 척했다. 먹음직스럽네, 제일 살찐 놈부터 목을 따네 어떻네 품평을 해대자 실신했다가 깨어난 남자들은 다시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형, 고마워.”
“아니다. 매니저님 찾아서 다행이야.”
권우석이 권지하의 어깨에 올라탄 다율을 보며 씩 웃었다. 다율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럼 뒤처리 부탁해.”
“이미 경찰 불렀어. 애잔한 놈들, 운도 나쁘지. 하필이면 수인권특별법 시행일에 맞춰서 이 짓거리 하다가 잡히냐.”
“그러게 말이야. 어머니 말로는 지금까지 저지른 짓거리 다 소급해서 처벌받을 거라던데.”
“자업자득이지 뭐.”
권우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권지하는 그와 악수한 다음 산을 천천히 내려왔다. 다율이 혹여라도 다칠까 봐 다람쥐의 몸을 조심히 받쳐 든 채로.
한참 걸어 내려오자 다시 마을이 나왔다.
“다람쥐야!”
멀리서 소년과 소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달려왔다.
“혹시 너희가 아까 나한테 전화했던 애들이니?”
“어…? 맞아요. 아저씨가 다람쥐 주인이에요?”
“응. 너희 덕분에 다람쥐 찾았어. 정말 고마워.”
권지하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인사했다.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람쥐의 얼굴이 밝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안녕.”
“안녕히 가세요! 다람쥐도 잘 가!”
“안녕!”
다율은 남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비록 인간화한 상태가 아니라 고맙다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남매도 그 뜻을 알아들었기를 바라면서.
남매를 뒤로하고 다율과 권지하는 차에 올랐다.
“지금 사람으로 못 변하는 거지?”
다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석에 앉으면 안전벨트 못 하니까 내 셔츠 주머니에 들어와 있어.”
다율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지하의 가슴팍을 타고 주머니를 찾아 파고들었다. 셔츠 주머니는 다율의 몸과 사이즈가 잘 맞아 아늑하고 편안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형한테 들려줄 이야기가, 난 너무나도 많아.
다율은 뭐라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피곤하고 졸렸다. 죽도록 시달린 몸에 안정감과 평화가 찾아오니 졸음이 밀려왔다. 다율은 권지하의 은은한 향수 냄새를 맡으며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다율은 침대 위였다. 아직은 다람쥐 상태였고, 권지하가 옆에서 연고와 소독솜으로 자신을 치료해 주고 있었다.
“아파도 참아.”
권지하가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다율의 발을 닦아냈다. 너무 아파서 다율이 움찔거리자, 권지하는 자신이 더 아프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퉁퉁 부은 발에 연고를 발라 준 다음, 권지하는 주방에서 물을 한 그릇 가져왔다. 다율에게 주니 꿀꺽꿀꺽, 아주 잘 마셨다.
“목말랐구나. 배도 고프지? 냉장고에 잣죽 있으니까 그거 가져다줄게.”
권지하가 다시 침대를 떠나려 했다. 그러자 다율이 자그마한 앞발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다율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옆에 있을게.”
권지하가 다율의 옆에 나란히 몸을 눕혔다. 그러고는 다율을 향해 돌아누우며 말했다.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다율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