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어디 갔니, 다람쥐야.”
“나와 봐라. 얼굴 좀 보자.”
멀지 않은 곳에서 헌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는 박중호가 함께 있는 듯했다. 다율은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려다 보니 빠르게 도망갈 수 없었다.
또한 며칠간 먹은 것 없이 피폐하게 지내서일까, 네 발 모두 말을 듣지 않았다.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것도 숨이 차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다율의 눈에 산장이 하나 보였다. 등산객들을 위해 관리공단에서 만들어 놓은 대피소처럼 보였다.
저 안에 들어가서 숨을까? 아냐. 들어와서 안쪽을 뒤지면 난 끝장이야. 그래도 지금 난 너무 지쳤는데 저기 숨어서 한숨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다율은 갈등 끝에 빼꼼 열린 문틈을 통해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간이침대와 구급 키트, 소화기 등이 갖춰져 있었다. 다행인 점은 어른 머리 높이에 창문이 하나 나 있어, 여차하면 바깥으로 도망을 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만 쉬자. 너무… 너무 힘들어.
다율은 침대 밑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파묻었다. 다람쥐의 눈망울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형 보고 싶다. 아기다람쥐 이야기도 들려줘야 하는데, 우리 만날 수 있을까?
다율은 이 상황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에다가 자신은 부상을 입은 몸. 거기에다가 체력까지 바닥을 치고 있다.
***
횡천 요금소를 지나면서, 권지하는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평소에 신을 믿지도 않는 주제에 하늘에 빌고 싶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줘. 내가 갈 테니까 잘 숨어만 있어 줘.
그리고 마침내 권지하가 아이들이 알려 준 마을에 들어선 때였다. 차를 몰고 가던 그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포착되었다. 천재욱이 길가에서 통화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담배를 버리고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저 새끼 쫓아가야 돼.
권지하는 급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천재욱의 뒤를 밟았다.
딱히 발소리를 숨길 생각은 아니었기에, 천재욱은 금방 미행을 눈치챌 수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온다는 사실에 흠칫한 천재욱은 소심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엄청난 힘이 실린 주먹에 턱이 날아갔다.
“으아악!”
너무 아팠다. 천재욱은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 누구… 권지하?!”
“그래. 나 권지하야. 그것도 모르냐?”
권지하가 천재욱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 재차 주먹을 날렸다. 코를 정통으로 얻어맞아, 천재욱은 코피를 줄줄 흘렸다. 고통이 과해 머리가 다 울리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일단 상대방에게 납작 엎드려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참으로 비굴한 태도였지만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본능이 발동했다.
“자, 잘못.… 살려 주세요.”
몇 대 때린 것 가지고 바로 꼬리 내리긴. 권지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율이 어디에 뒀어.”
“모, 몰라요.”
“모르긴 뭘 몰라.”
다시금 권지하의 매서운 주먹이 천재욱의 얼굴을 무참히 때렸다.
“아, 알려드릴게요. 제발 그만 때리세요, 제발…!”
이빨이 몇 개 나가 발음이 불분명했다. 권지하는 그에게 윽박을 질러 똑바로 말을 하라 했다.
“저기 산… 산으로 갔어요. 헌터 형님이랑 제 친구랑요.”
“길 안내해.”
“네?”
“넌 지금부터 내 길잡이가 되는 거야.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맞아 죽고.”
권지하가 광기 넘치는 눈빛을 띠며 말했다. 인간의 눈빛이 아닌 듯 묘한 빛깔조차 감돌았다.
지, 지금 뭐야. 눈이… 파란색으로 변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천재욱이 눈을 비볐다.
“헉!”
뭐라고 생각을 이어나갈 새도 없이 주먹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장이 꼬이는 느낌에 천재욱은 항복을 선언했다.
“죄, 죄송합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는 어느새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권지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권지하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더러운 것을 떼어 내는 듯한 거친 움직임이었다.
“너랑 붙어 다니는 버러지 새끼들이 있는 데로 안내해. 당장.”
“아, 알겠습니다.”
“당장 전화해서 합류하겠다고 말하라고.”
“그럴게요, 제발 그만 때리세요.”
“전화해서 허튼소리 하기만 해 봐.”
권지하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냈다. 천재욱은 식겁하며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
다율은 간이침대 아래에서 오들오들 떨며 한참을 보냈다. 바깥 상황이 어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섣불리 나가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마음 푹 놓고 잠을 자기엔 불안했다.
헌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설마 내 근처에 있진 않겠지. 다율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희미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이보다 확실한 인기척은 없다. 지금 누군가가 이 산장 바로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율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해하는 인간의 것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중턱에 있는 산장.”
헌터가 누군가와 위치를 공유하는 소리에, 다율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중간쯤 올라오면 보여. 오두막처럼 생긴 거. 어. 이쪽 좀 뒤져 보려고. 아까 산 아래쪽에서는 중호가 허탕 제대로 쳤어.”
이쪽을 뒤진다니 나는 정말 끝났구나. 다율은 울고 싶었다.
“너도 합류한다고? 어, 그럼 좋지. 어차피 중호도 이쪽으로 올 거거든. 그래, 알겠다.”
제발 여기는 뒤지지 말아 줘. 살고 싶어.
다율이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세상일이 뜻처럼 되는 게 아니었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좀 들린다 싶더니 결국 문이 열렸다. 다율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흠… 이런 데 숨어 있진 않겠지.”
수인 헌터가 오두막 안에서 뒷짐을 지고 걸어 다녔다. 그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다율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탈출하고 싶지만 이 안을 휘젓고 다니는 남자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다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수인 헌터가 다율이 숨은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결국 들켰구나 싶어 다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헌터는 침대 밑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대자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피곤해 죽겠네. 재욱이랑 중호 올라올 때까지 한숨 때릴까.”
차라리 남자가 잠든다면 탈출하기가 쉽지 않을까. 다율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남자가 곯아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뒤척거리기만 할 뿐 잠들지 않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다율은 극한의 긴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소리라도 내서 들킬까 봐 너무 겁이 났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형님.”
“어, 중호냐?”
수인 헌터가 일어나 오두막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다율은 지금으로서 가장 안전한 탈출로인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서랍장이 있어 창문 높이까지 올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 버티고 있다가 타이밍 맞춰서 나가자.
다율이 결심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재욱아? 너 얼굴이 왜 그,….”
“으악!”
바깥에서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다율은 그 와중에 선명하게 들리는 한 목소리를 캐치했다.
“다율이 어디 있어. 이 개새끼들아.”
형…! 형 목소리다.
다율은 열린 창문 틈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권지하가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바로 지척에 서 있었다. 그는 천재욱의 양손을 뒤로 꺾어 결박하고 있었으며, 그런 권지하의 등장에 박중호와 수인 헌터는 화들짝 놀란 모습이었다.
“다율이 어디 뒀는지 당장 불어.”
“저희도 모른다니까요!”
천재욱이 소리를 지르자 권지하가 그의 팔을 꺾어 버렸다.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천재욱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구르고 꺽꺽댔다.
“이 새끼는 모른대. 너흰 알겠지?”
권지하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우, 우리도 몰라! 잡다가 놓쳤어!”
“그럼 찾아내.”
“야, 말이 되냐? 어떻게 찾아!”
박중호가 흥분해 고함을 질렀다. 어디 믿는 구석이 있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가 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 들었다. 햇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는 칼은 잘 갈린 티가 났다. 박중호는 땅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더니 흐흐 웃으며 말했다.
“불만 있으면 덤벼, 새끼야.”
자신들이 수적으로 우세인 데다가 무기까지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박중호는 호기가 일었다. 권지하가 가까이 접근해도 막무가내로 찔러 버리면 그만이란 생각이었다.
“못 덤비겠지? 너 지금 쫄았냐?”
박중호가 킬킬 웃었다.
“알겠다. 난 막 나가도 그만이지만 넌 연예인이라 함부로 굴었다가 골로 가잖아. 귀한 이미지 관리하셔야겠다 싶은 거야, 안 그래?”
“아니.”
권지하가 비소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