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다율은 지금 혹독한 야생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다율은 배가 고팠다. 엄청난 긴장감에 시달리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체력을 심하게 쓰느라 몸에 에너지가 다 고갈되어 있었던 것이다.
배… 배가 고파. 어디 먹을 것 없나?
다율이 절뚝거리며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하지만 알밤도 도토리도 보이지 않았다. 발 빠른 다람쥐들이 겨울잠을 위해 벌써부터 식량을 수거 중인 듯했다. 밤송이 안이 텅 비어 있는 걸로 봐서 그랬다.
어떡하지. 먹을 게 없어. 도토리, 밤이 이렇게 털렸다면 과일도 구하기 힘든데.
다율은 초조한 발걸음으로 한 시간 넘게 숲을 돌았다. 하지만 찾아낸 것이라고는 도토리 한 알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알이 작은 것이었다. 아마 다른 다람쥐들이 가져가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이거라도 먹어야지 별수 없다. 잘 숨어 있다가 도망치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해.
다율은 차갑고 딱딱한 도토리를 갉아 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파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며칠이 흘렀다. 다율은 산속에 있는 게 조금씩 힘들어졌다. 밤이 되면 동굴에서 숨어서 자고, 낮에는 도토리를 주우러 간간이 외출을 했지만 수확은 없었다. 배도 고프고 날씨는 추워 자꾸만 찬 이슬이 내렸다.
못 먹으니까 너무 힘들다. 형… 지하 형, 보고 싶어.
다율은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곳은 깊은 산속. 권지하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곳이었다.
오늘도 다율은 으슥한 바위틈에서 잠을 청했다. 꼬리를 몸에 한 바퀴 두르고 웅크렸는데도 추웠다. 피로와 배고픔에 지친 몸은 빠르게 잠에 잠식당했다.
다율은 꿈속에서 아주 행복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들판, 푸른 잔디밭에 권지하가 앉아 있었다. 그는 눈부시도록 환하게 웃으며 작은 아기다람쥐 두 마리와 놀아 주고 있었다. 언젠가 다율이 막연하게 꿈꾸었던 미래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의 상상과 다른 게 있다면, 아기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점이었다.
‘아빠.’
‘응?’
다율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아기다람쥐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일어나요. 우리랑 만나야지.’
다율은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가 좋은데, 이대로도 괜찮아.’
‘아냐. 일어나야 돼요. 어서요.’
아기다람쥐들이 다율의 양손을 하나씩 붙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난 여기서 그냥 편안하게 쉬고 싶어.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싶은데….’
‘안 돼!’
‘일어나!’
그때 다율의 눈이 반짝 뜨였다. 눈꺼풀을 열자마자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다율은 캑캑거리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먹은 것이 없으니 토할 것도 없었다. 헛구역질만 할 뿐이었다. 그때 다율은 몸의 이상을 감지했다.
설마.
다율은 앞발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를 만져 보았다. 배는 평소와 같이 납작하고 날씬했지만, 동물의 본능이 다율에게 말했다.
지금 이 안에 아기가 있다고. 그것도 두 마리나. 다율은 아기다람쥐를 임신한 상태였던 것이다. 꿈속에 나온 그대로였다.
형과 나의 아이야. 이 안에 아이들이 있어.
다율의 눈망울에 투명한 눈물이 맺히더니 이윽고 또르르 떨어졌다.
이 아이들을 지켜야 해. 어떻게든 형을 만나서 이 아이들을 보여 줄 거야.
다율은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산속에 숨어 있느니, 민가로 내려가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오던 길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로 가서 구조를 요청하자. 지하 형하고 연락만 되면 돼. 그러면 형이 날 구하러 와 줄 거야.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랐지만, 다율은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걷는 게 아니라 기다시피 산을 내려오면서 추위와 싸웠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저 멀리 민가가 몇 채 보였다. 집에 불도 켜 있고 자동차도 한 대 보였다.
저 집을 목표로 가 보자. 다율은 목표를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동이 터 오르면서 새벽의 추위가 더욱 심해졌다. 결국 해뜨기 직전, 다율의 체온은 급격하게 낮아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마침내 산기슭 아래로 내려온 다율은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이제 몇백 미터만 더 가면 인간의 집에 닿을 수 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날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안고 다율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을 때였다.
부스럭, 인기척이 났다. 다율은 깜짝 놀라며 주춤했다.
“어! 오빠, 저것 좀 봐. 다람쥐다.”
“진짜네.”
다율의 눈앞에 서 있는 건 어린 소년과 소녀였다.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율을 관찰하고 있었다.
“근데 다쳤나 봐. 발에서 피가 나.”
“다람쥐야, 너 아파?”
다율은 고민했다. 이 작은 인간들이 자신을 도와줄 것인가? 그건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율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곧 남매가 다율 앞에 쪼그려 앉아 다람쥐의 발을 살폈다.
“엄청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우리 집에 가서 치료해 줄까?”
“그래. 그러자.”
소녀가 다율의 몸을 조심스럽게 제 손바닥 위로 올렸다. 미미한 온기에 다율은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행이야, 날 도와줄 사람을 찾았어. 곧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린 다율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 오빠! 다람쥐 기절했어.”
“어떡해. 빨리 데려가서 치료해 주자.”
남매는 집을 향해 달렸다.
***
“끼잉….”
다율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에서는 열이 났으며, 긴장감과 불안함이 심박수를 올려 편하게 쉴 수 없었다.
반쯤 눈을 뜬 다율은 흐릿한 시야로나마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눈앞에 보이는 건 평범한 디자인의 가구 몇 점과 장난감, 인형이었다. 그리고 다율의 등 뒤로는 포근한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나 지금 수건 위에 누워 있는 건가?
내가 왜 낯선 곳에서… 이러고 있지.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났다. 산속에서 배를 곯다가 민가로 내려왔다. 필사적으로 산을 기어 내려온 끝에 어린 남매를 만났다. 그러고 나서 의식이 끊겼으니, 아마 그 남매가 자신을 여기로 데려다 놓은 모양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여동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율이 눈을 뜬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모았다.
“오빠, 이리 좀 와 봐. 다람쥐 눈 떴어!”
“진짜로?”
“어어! 다람쥐 살아났다!”
남매는 오두방정을 떨더니만 곧 작은 그릇에 물을 떠 왔다.
“너 물 마실 수 있어?”
다율은 앞발 하나 꼼짝할 수 없이 지친 상태였으므로, 이렇다 저렇다 의사 표현도 하지 못했다.
“안 되겠다. 내가 도와줄게.”
여동생이 다율의 몸을 감싸 안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물그릇에 얼굴을 파묻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막상 물을 보니 걷잡을 수 없이 목이 말라, 다율은 물을 할짝였다. 목을 축이자 조금 기운이 도는 듯했다.
“와. 물 잘 마시네. 다람쥐야, 너 밥 먹을래?”
“야. 너는 왜 아까부터 다람쥐한테 말을 걸어. 네가 말 건다고 다람쥐가 ‘그래, 나 밥 좀 줘.’ 이렇게 대답하겠냐?”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그냥 주는 게 낫겠다.”
“어제 사 온 과자 있잖아. 그거 주자.”
남매가 잠시 방 밖으로 나가더니, 옥수수와 감자로 만든 과자를 한 움큼 가져왔다. 다율은 그릇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아삭아삭, 과자를 먹어 치웠다. 지친 몸에 먹을 것이 들어오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잘 먹네.”
“많이 배고팠나 보다.”
아이들이 안쓰럽다는 듯 다율의 등을 쓸었다. 다율은 이 아이들이 선량하며, 단순한 호기심으로 자신을 주워 온 게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짓궂은 장난을 치지도, 인형처럼 가지고 놀지도 않으면서 챙겨 주기만 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아이들을 믿고 지하 형에게 연락을 취해 볼까? 그래, 그렇게 해 보자.
다율은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자신의 정체부터 밝히기로 했다.
마침 아이들이 사용하다 만 것인지 도화지와 색연필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율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다음, 색연필이 있는 곳까지 기어갔다.
“어? 다람쥐야. 뭐 해?”
“…색연필을 쥐는데?”
다율은 두 앞발을 이용해 색연필 하나를 끌어안은 다음 도화지에 글자를 썼다.
[수 인]
“어? 글자 썼어. 다람쥐가 글자를 썼다고.”
“오빠. 수인이 뭐야?”
“그냥 다람쥐가 아니라 속에 사람이 들어 있는 걸 말해.”
“헉.”
여동생은 놀라워했고, 오빠는 그래도 수인에 대한 지식이 좀 있는 듯했다. 다율은 뒷발로 수인이라는 글자를 찍어 가리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수인이구나. 이제 알겠다. 우리 말도 다 알아듣고 있겠네.”
다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옷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옷장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여기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잽싸게 옷을 주워 입을 생각이었다.
다율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람,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