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숨 막혀. 너무 갑갑해.
다율은 입 안에 들어찬 재갈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몸을 옥죄듯 가둔 케이지도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손발이 노끈으로 칭칭 묶인 채 트럭 짐칸에 실려 있었다.
커다란 케이지 안에 갇힌 데다가 위에 검은 천을 덧씌워,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짐짝처럼 보일 테다. 그 점이 다율을 더욱 절망케 했다.
아까 집 앞에서 붙잡혔을 때, 죽도록 반항해 봤자였다. 남자 세 명을 상대하기에 다율은 너무나 약했다. 헌터들은 쓰러진 다율을 발로 걷어차고 짓밟았다. 얼굴이 퉁퉁 붓도록 발길질을 쏟아낸 다음, 그들은 다율이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차에 실었다.
윽, 아파.
다율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까 남자들에게 두들겨 맞을 때 신발이 한 짝 벗겨진 탓에 발에 상처가 났다. 아까부터 흐르던 피가 멈추지 않아 이제는 바짓단까지 질척하게 적실 정도였다. 어둠 속에 갇혀 있어서 숨도 막혀 왔다. 하지만 지금 다율은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아팠다.
형… 지하 형.
이대로 죽기 싫어. 형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아… 형.
다율의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삶이 끝나 버린다는 게 너무나 허무하고 또 분노스러웠다. 비참함과 슬픔이 가득 차 몸 밖으로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
오늘은 권지하와 배우들, 전 스태프가 촬영 종료 기념 회식을 하는 날이었다. 권지하는 회식 중간에 적당한 핑계를 대고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너무 늦게 들어가면 다율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파트에 도착해 집에 들어섰을 때, 집 안 공기는 유난히도 썰렁했다. 평소라면 쪼르르 달려 나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야 할 다율이 보이지 않자, 권지하는 기분이 묘했다.
“다율아?”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대답은 없었다. 욕실에 있나 싶어 그쪽을 살펴보았으나 물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다람쥐로 변해서 잠들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소파, 침대, 쿠션 사이를 뒤져 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다율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불안감이 슬슬 밀려와 초조함을 자아냈다. 권지하는 핸드폰을 들어 다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지척에 있는 식탁 위에서 다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뭐야. 핸드폰 놔두고 나갔나?”
핸드폰 옆에 지갑과 뜯지 않은 마스크 한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하는 현관으로 향했다. 다율이 평소 즐겨 신는 슬리퍼가 보이지 않았다. 이 집 안에서 다율과 신발만 감쪽같이 사라진 셈이었다.
잠시만. 아까 동네 마트에서 카드를 썼던데.
권지하는 서둘러 핸드폰을 열어 보았다. 약 한 시간 전 집 근처 마트에서 카드 결제가 승인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결제가 1시간 전이네.”
그렇다면 나간 지 최소 한 시간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럼 왜 안 돌아올까. 권지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나가는 것조차 극히 꺼리는 사람이 어떻게 한 시간 넘게 밖에 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핸드폰도 챙기지 않은 채로.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생각이 자꾸만 불길한 쪽으로 미쳤다. 권지하는 인상을 확 구긴 다음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다율이 스스로 집을 나갈 리는 없다. 오히려 집 밖에 나가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다율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갔다. 혹시 사고가 난 건가? 권지하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아니면 혹시….
설마 수인 헌터인가.
다율에게 해코지를 할 만한 인물이라면 그쪽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과 무관한 일이기를, 다율이 단순하게 동네를 산책 중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지 않는 법. 그대로 마냥 집에서 다율을 기다릴 수 없었던 권지하는 황급하게 마트로 뛰어갔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말았다.
무참하게 으깨어진 청포도 한 송이와 다율의 슬리퍼 한 짝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다율이 바깥에 나갈 때마다 쓰던 모자도 함께였다.
권지하는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슬리퍼와 모자를 주워 들어 품에 안았다.
머릿속의 이성의 끈이 끊기는 기분이었다. 아니, 하얀 여백으로 바뀌는 것도 같았다. 여유롭게 논리를 정립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어떤 새끼야. 누가 다율이를 건드렸어.
뜨거운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심장에 불이 난 것만 같아 뭐라도 잡고 부숴 버리고 싶었다.
헌터 놈들이 틀림없다. 잡는다. 그리고 죽여 없애 버린다. 어떻게든 뒤를 쫓는다.
완전히 눈이 뒤집힌 채, 권지하는 땅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피가 맺혀 방울방울 흘렀지만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 다율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새끼가 다율을 위협하고 있는지 알아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
같은 시각 다율이 탄 트럭이 갑자기 멈춰 섰다. 덜컹, 소리가 나면서 다율이 갇힌 케이지가 짐칸 안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이런 썩을. 바퀴에 펑크 났다.”
가래 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리산에서부터 다율을 쫓던 헌터의 것이었다.
“귀찮게 됐네요, 형님. 거래장까지는 한참 더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횡천시까지는 꽤 걸리니까. 얼른 타이어부터 갈자.”
다율은 청각에 집중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차바퀴에 펑크가 났고, 남자들은 잠깐 차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의 목적지는 아마도 수인 매매 시장이 열리는 횡천시.
“공구 박스 좀 가져와 봐라. 짐칸에 있어.”
“예, 형님. 아… 근데 어디 있지?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맡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다율은 지금이 도망칠 기회임을 깨달았다. 남자들의 신경이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차가 멈춰 선 바로 이 순간만이 답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꽁꽁 묶인 신세다. 게다가 케이지 안에 갇혀 있다. 빠져나가려면 몸집이 작은 다람쥐로 변해야 한다. 다율은 비로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어디 재채기 유발할 만한 거 없나?
다율은 고개를 돌려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다른 물건들을 살폈다. 케이지를 덮고 있는 시커멓고 너덜너덜한 천이 아주 더러웠다.
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은 느낌이라, 다율은 힘껏 상체를 일으켜 천에 코를 파묻었다. 숨을 흠뻑 머금으니 먼지며 섬유 조각이 인정사정없이 피어올랐다.
“푸엥취!”
펑, 소리와 함께 다율이 작은 다람쥐로 변신했다. 손발을 옥죄고 있는 노끈이며 좁은 케이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율은 케이지의 창살 사이를 재빨리 통과했다.
“방금 짐칸에서 뭔 소리 안 났냐?”
“어, 이상한 소리 들은 것 같습니다.”
남자들이 발소리를 내며 짐칸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케이지를 덧씌운 천을 벗기는 순간, 다율은 풀쩍 뛰어 도로로 몸을 날렸다.
“어어, 저기 봐라. 저 쥐새끼!”
“잡아!”
남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도망치는 다율에게 삿대질을 했다. 다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렸다. 어두운 국도 변, 인적은 드물고 가로등조차 없는 외진 길 옆에는 밭이 펼쳐져 있었으며 그 너머에는 산이 있었다.
저기까지 가자. 산으로 숨으면 날 못 찾을 거야.
다율은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던 그날처럼 뛰었다. 인간일 때 입은 부상이 수인화된 몸에도 영향을 미쳐 뒷발의 발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다율이 달려 나갈 때마다 흙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네 발이 모두 찢어질 듯 아파왔고 호흡이 모자랐지만 다율은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을 추격해 오는 남자들의 소리가 너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가장 떠오르는 장면은 권지하와의 감미로운 추억들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다고 생각했던 첫 고백의 순간, 바닷가에서 일출을 맞이하면서 난 얼마나 행복했었나.
같이 불꽃놀이를 보면서는 가슴이 터져 나갈 것처럼 황홀했고, 여름휴가를 보내면서는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슴이 충만했다.
그러자 오기가 끓어올랐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아직 형과 못 해 본 게 너무 많아. 난 우리 형하고 평생토록, 더 많은 걸 하면서 살아갈 거야. 이대로 허무하게 잡혀 죽을 순 없어…!
다율의 뜀박질이 더욱 빨라졌다. 어두운 밤이라 남자들은 자그마한 다율을 제대로 추격하지 못했다. 그저 욕설을 뇌까리며 엉뚱한 수풀이나 바위 뒤를 찾아댈 뿐이었다.
그때 다율의 눈에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들어왔다. 다율은 소리를 최대한 죽여 나무에 올라탔다. 그리고 재빠르게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