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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79화 (79/95)

79화

권지하는 요즘 들어 시름시름 아픈 다율을 걱정 중이었다. 재택근무가 힘든 것인지 다율은 일찌감치 잠이 들어 출근 시간 직전에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권지하 생각에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갑갑한 삶이 이어지기 때문에 피로와 권태가 누적된 듯했다.

어젯밤만 해도 평소 자신이 귀가하면 쪼르르 달려 나와 키스를 퍼붓던 다율이 너무나 혼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깨울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피곤한 안색이었다.

다율 역시 제 몸이 이상하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자주 피곤하고 졸렸으며, 툭하면 낮잠이 자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와 꼬리. 그게 툭 튀어나와 다율을 곤란하게 했다.

원래는 술이나 발정 때문에 의식이 혼탁할 때만 귀나 꼬리가 튀어나왔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다율이 그 현상을 경험했을 때는 발정이 다가올 때와 술을 너무 많이 마셨을 때였다.

그런데 오늘은 양치를 하다가 난데없이 귀가 뾰롱 튀어나왔다.

“헉. 이게 뭐야.”

다율은 너무 놀라 잠이 다 깼다. 그런가 하면 바로 다음 날은 권지하와 야식을 먹다가 귀와 꼬리가 튀어나왔다. 의식이 또렷한데도 난데없이 그런 현상이 일어나자 권지하도 다율도 염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왜 이럴까요?”

“여러 번 그랬어?”

“네. 제 의지랑 상관없이 튀어나와요.”

“한번 수인 의사한테 가 보자.”

“그래야겠죠?”

전국적으로 수인 의사는 극히 드물었다. 서울 시내에 겨우 두세 명이 존재할 뿐이라, 진료를 보려면 예약을 꼭 해야 했다.

문제는 다율이 혼자 외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권지하가 동행을 해야겠는데 촬영 때문에 낮 시간이 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가기 어렵겠어요.”

“하… 걱정되는데.”

“괜찮아요. 재택근무 중이니까.”

“내가 촬영 뺄게.”

“그건 절대 반대예요. 배우님은 촬영장에 있어야죠. 귀랑 꼬리 있다고 일 못 하는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촬영 마무리되면 같이 병원 가요.”

권지하는 계속해 다율을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우겼으나 다율의 반대로 인해 병원행은 미뤄졌다.

그렇게 해서 다율은 귀와 꼬리가 수시로 튀어나오는 일을 감수하며 재택근무를 이어나갔다.

***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어느덧 초록 이파리들이 하나둘 사그라들고 나무들이 주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또한 창문을 열 때마다 후끈하게 들어오던 바람에도 선선함이 듬뿍 묻어났다.

“가을 다 됐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담. 다율은 새삼 세월이 빠르게 느껴졌다. 즐겁게 휴가를 보낸 지도 벌써 한 달 이상 흘렀다니, 그 점도 믿기지 않았다.

그때 정말 즐거웠는데. 특히 풀 빌라에서….

다율은 그때의 격정적인 날들을 생각하며 혼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 정신 차리고 밥이나 먹자.”

계절이 변해서인지 요즘은 입맛도 변했다. 다율은 시도 때도 없이 과일을 찾아댔다. 물론 견과류도 입에 달고 살았지만 희한하게 요즘은 과일을 깎아 먹는 게 그렇게 좋았다.

청포도, 수입 망고, 체리 같은 외국 과일에 부쩍 관심이 늘었으며 하우스 귤 또한 최근 다율이 좋아하게 된 과일이었다. 수박이나 복숭아는 끝물이라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럼 오늘도 과일 타임을 가져 볼까.

다율은 냉장고로 향해 과일 칸을 열었다.

“비었잖아?”

다율이 특히나 애착을 갖고 있는 청포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다율은 아쉬움에 탄식했다. 어제 신난다고 몇 송이를 먹어 치웠던 걸 잊었다.

“먹고 싶은데….”

다율은 벽시계를 봤다. 아직 권지하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 촬영이 끝나는 크랭크업 날이므로 뒤풀이가 있을 예정이라고 아침에 말을 했었다. 그렇다는 말은 아주 늦게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밤에는 과일 가게가 문을 닫을 텐데.”

차마 누구한테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율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상하게도 청포도가 너무 당겨,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못 먹으니까 포기하자.”

오늘은 글렀다. 다율은 시무룩한 얼굴로 냉장고를 닫고 계속 일을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가 되고 퇴근을 했는데, 여전히 청포도 생각이 아른아른했다.

“뭐지? 청포도 귀신이 씌었나.”

나 오늘 왜 이래? 다율은 청포도에 사로잡힌 수인처럼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여덟 시, 아홉 시. 다율이 청포도와의 싸움에서 버티며 시간은 흘러갔다.

곧 있으면 집 앞 마트가 닫을 시간인데. 어떡하지?

다율은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스름이 깔리다 못해 컴컴했다.

“나갔다 올까?”

다율이 벌떡 일어났다. 아주 잠깐 집 앞에 다녀오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비록 권지하와 함께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척 가까운 마트였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다녀올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고, 다율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영화를 보러 나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썼던 모자를 눌러쓴 다음, 권지하가 준 카드 한 장만 달랑 챙긴 후 신발을 신었다.

약간 떨렸지만 그래도 이왕 마음먹은 것 잘 다녀오자 생각하며 다율은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몇 시인가 정확히 보려고 핸드폰을 찾는데 주머니에 든 게 없었다.

“아차, 핸드폰.”

청포도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핸드폰을 안 챙겼다. 오늘따라 마스크도 안 썼다.

그래도 바로 집 앞이니 별일이야 있겠어?

다율은 초조해지는 자신을 다잡았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1층에 거의 다 도착한 시점이었으며 다시 올라가기에 다율의 집은 너무나 고층이었다.

다율은 마트까지 총총걸음으로 가 청포도를 여러 송이 사는 데 성공했다. 권지하의 카드가 신나게 긁혔다. 형이 놀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외출했다는 사실에 대견해할지도 몰라.

다율은 영수증과 포도 봉지를 받아 들고 환하게 인사하며 마트를 빠져나왔다. 절로 콧노래가 나와 말도 안 되는 멜로디를 허밍하며 다시 아파트로 향했다. 비록 길은 어두웠지만 마음은 밝았기에,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씩씩하게 걸었다.

“어?”

그때였다. 다율의 머리가 간지럽다 싶더니만 귀가 뿅 튀어나왔다.

“또 이러네… 자꾸 귀가 튀어나와.”

다행히도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모자가 살짝 불룩해질 뿐 별다른 티가 나진 않았다. 다율은 손목에 봉지를 걸고 손으로 모자를 꾹꾹 누른 다음 다시 봉지를 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았을 때, 어떤 사람과 정통으로 어깨를 부딪쳤다.

“아!”

다율이 딱히 잘못한 것은 아니었기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귀가 튀어나온 상황에서 길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아 일단 사과를 하려던 참이었다.

“죄송….”

다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너무 길이 어두워 상대방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뚜렷하게 들렸다.

“찾았다.”

헉.

그 수인 헌터의 목소리였다. 속리산에서, 동해 촬영장에서 자신을 잡으러 왔던 그 위협적인 인물.

“쥐새끼 면상 좀 볼까?”

그가 다율의 모자를 휙, 벗겼다. 귀가 찬 공기에 드러나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율은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지만 주차되어 있던 차량에 퇴로가 막혀 버렸다.

서둘러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 버린 다율은 이를 딱딱 부딪쳤다.

“사, 살려.”

“뭘 살려 줘. 큭큭.”

수인 헌터가 비열하고 음산하게 웃으며 딱!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젊은 남자 두 명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다율의 양팔을 결박했다.

다율은 남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한 명은 촬영장에서 마주쳤던 보조 촬영자였고, 한 명은 천재욱이었다.

“읍!”

수인 헌터가 다율의 입에 청테이프를 붙였다. 이제 다율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툭. 다율이 들고 있던 봉지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청포도가 나뒹굴었다. 거칠게 반항하며 몸부림치는 다율, 그리고 그런 다율을 끌고 가려는 남자의 발에 청포도가 짓밟혀 탱글탱글했던 열매는 진창이 되었다.

“으읍! 읍!”

다율은 어떻게든 청테이프를 뜯어내고 남자들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두 명을 상대하기란 어려웠다. 또한 공포에 질린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다율은 속으로 외쳤다. 형, 지하 형…! 살려 줘. 나 구하러 와 줘. 제발.

하지만 다율의 외침은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그러니 더욱 격하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더럽게도 발광하네. 야, 얌전히 좀 있어라. 어차피 뒈질 건데 힘은 왜 빼냐? 어?!”

천재욱이 다율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다율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천재욱이 다율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몇 차례 따귀를 얻어맞자, 충격과 공포가 다율을 휩쌌다.

“이제야 기가 좀 죽나?”

천재욱과 박중호는 킬킬거리며 다율의 머리채를 잡았다. 다율은 그대로 상가 뒤편으로 끌려가 인적 드문 샛길로 빨려 들어갔다.

길에 남은 것이라고는 엉망이 된 포도 몇 송이, 끌려가다 벗겨진 신발 한 짝, 그리고 흙투성이가 된 모자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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