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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78화 (78/95)

78화

어느 날 밤, 다율을 소파에 앉혀 놓고 권지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율아. 밖에 안 나가려는 거 이유가 있지?”

“아… 그게.”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언젠가 날아올 질문이기도 했다. 다율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아니면 숨겨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서로 확실한 연인이 된 지금, 솔직하게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무작정 도망치며 이게 이 사람을 위한 거라고 우겼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고 반성한 이후였기 때문이었다.

다율은 잠시간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실은요.”

다율은 오랫동안 숨겨 왔던 이야기를 드디어 털어놓았다.

속리산에서 잘 살다가 왜 갑자기 서울로 쫓겨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갑자기 다율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수인 헌터. 건강원에 팔려가 끔찍하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울컥해 가끔씩 말을 멈췄다.

그럴 때마다 권지하는 다율을 묵묵히 기다려 주며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젖은 눈가에 키스해 주었다. 그러면 다율은 다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헌터를, 동해 촬영장에서 다시 마주친 거예요. 그래서… 그 헌터가 절 잡으러 올까 봐. 그 과정에서 형한테 피해가 갈까 봐… 인연을 끊으려 했…어요.”

다율이 덜덜 떨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결론을 듣고 그를 꼭 안아 주었다.

“그동안 혼자서 속 썩이느라 고생했겠네. 정말 많이 힘들었겠어. 나한테도 말 못 하고, 아무한테도 말 못 해서 너무 아팠을 것 같아.”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에 다율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또 권지하라는 존재가 단단한 버팀목처럼 느껴져 울컥했다.

“형…!”

다율이 권지하의 목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권지하는 다율의 등을 깃털 같은 손길로 매만지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감히 다율이를 건드려? 그의 속에는 불길이 치솟다 못해 용암이 흘렀다. 분노가 극에 달해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지만 다율이 겁을 먹을지도 모르므로 가까스로 감정 표현을 자제했다. 배우인 게 이럴 때만큼 감사할 수 없었다.

그 새끼랑 일당들, 다 없애 버린다.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박살을 내서 뼛가루까지 한 톨 남기지 않는다.

다음 날, 다율은 늦게까지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권지하와 밤 깊은 시간까지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느라 늦잠을 잔 탓이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내려앉혔다.

다율은 권지하가 몇 번 더 입을 맞추고 이불을 턱 아래까지 덮어 주는 동안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깊게 잠들었다는 걸 확신한 권지하는 침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는 거실 창가에 서서 육촌 형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몇 번 신호가 가지 않아 권우석이 전화를 받았다.

“형, 지난번에는 고마웠어. 덕분에 다율이 금방 찾을 수 있었지 뭐야.”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나 부탁 좀 하려고. 형 친구들 중에 특수한 일 하는 친구들 있다고 했지. 손 좀 빌리고 싶은데.”

-무슨 일로?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놈들이 있어서.”

권우석은 권지하에게 뭐든지 해결해 주는 흥신소 직원을 몇 명 소개해 주었다. 말하자면 정말로 ‘뭐든지’ 해결해 주는 존재들이었다. 말로든, 주먹으로든.

권지하는 다율에게 수인 헌터의 인상착의를 들은 상태였다. 하지만 놈의 이름이나 주소, 구체적인 신상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유일한 단서는 그 빌어먹을 놈이 아마도 전국을 무대로 수인 납치와 암거래를 벌이고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절대 얌전하고 은밀하게 활동하지 않을 테니 이곳저곳에 제 흔적을 싸지르고 다녔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한 새끼가 더 있다면 촬영장까지 쫓아와 보조출연자인 척했던 젊은 놈. 그놈 역시 대담하게 다율을 쫓아다녔으니 어떤 흔적을 남겼을지 모른다.

그놈이라면 신상을 터는 건 문제도 아니다. 멍청하게도 필름에 제 면상을 남긴 데다가 보조출연자로서 계좌니 실명을 모조리 적고 갔을 테다.

다만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다면 그것은 헌터 놈과 젊은 놈이 어떻게 다율 앞에 갑작스럽게, 몇 달 만에 나타났는지. 누가 제보를 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뜬금없이 나타날 수 있는 건가? 권지하는 그 부분이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뿌리를 캐내는 것보다 겉으로 드러난 두 새끼를 잡아 족치는 게 우선이었으므로, 육촌 형을 통해 수인 암거래 시장에 침투할 생각이었다.

이다음으로 전화할 사람은 매니저 백장훈. 권지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장훈이 형. 부탁 좀 할게요. 다율이 관련해서인데요.”

***

다율은 부스스 일어나 권지하가 차려놓은 토스트와 오믈렛으로 배 터지게 아침 식사를 했다.

“오늘이 휴가 마지막 날이네요.”

“아쉬워?”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모르겠어요. 눈 깜짝할 새 다 없어졌어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 차기작 들어가기 전에 또 휴가 생길 거야.”

다율은 진심으로 권지하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이 흘러가는 게 아까웠다. 또한 앞으로 바쁜 권지하 때문에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서글프기도 했다.

당분간, 아니 어쩌면 아주 길게 외출을 자제해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다율아. 집에 혼자 있는 거 심심하지 않아?”

“많이요.”

“일하는 거 좋아하지?”

“…형이랑 같이 다녀서 좋은 것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일을 안 하면 기분이 처지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전 사실… 여건만 허락하면 다시 형 매니저로 복귀하고 싶어요.”

다율이 솔직한 속내를 내비쳤다.

“알아. 그래서 내가 장훈이 형한테 말을 해뒀어.”

다율의 눈이 커졌다. 뭘 부탁했을까?

“로드 뛰지 않고도 다율이가 날 서포트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어. 다율아, 내 재택 매니저로 복귀해 줘.”

“형 매니저로요?!”

“응. 팬 카페 관리도 하고, 홍보 기사 작성도 하고. 어때?”

다율이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좋아!

혼자 쓸쓸하게 집 안에 남겨질 다율을 위해, 권지하는 다율에게 아주 힘든 일을 시킬 예정이었다. 우울할 틈이 없도록.

다율의 복귀는 바로 다음 날 시작되었다. 일찌감치 세트장으로 떠나는 권지하를 길고 긴 키스로 배웅한 다율은 아침 아홉 시가 되기 30분 전 작은방 책상에 앉았다.

율무차 한 잔을 올려놓고 노트북을 켜니 마치 회사에 출근한 기분이 들었다.

“신난다. 매니저 복귀야!”

다율은 팬 카페에 오랜만에 접속해 건의게시판과 등급 업 업무를 시작했다. 간만에 해 보는 일이라 잠시 헤맸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감각이 돌아와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좋아. 이다음에는 이메일 회신 시간이다.”

그동안은 홍보팀에서 대직을 해 주었다고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권지하의 홍보 기사를 담당해야 한다. 다율은 토닥토닥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영화 촬영에 관한 홍보 자료를 작성해 기자들의 이메일로 발송했다.

얼마 가지 않아 접수 이메일이 답신으로 도착했다. 컨펌 메일에 다시 답장을 하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때였다.

“아… 형 보고 싶다.”

촬영에 방해가 될까 봐 권지하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더니 마음이 헛헛했다. 내내 붙어 지내 있던 후유증이었다.

“재택도 좋지만 로드매니저가 더 좋아.”

권지하와 24시간을 함께하던 그때가 다율은 정말 소중했다. 촬영장에서, 또 도로에서 얼마나 떨리고 행복한 순간이 많았던가. 한때는 예능도 같이 찍고 팬미팅 MC까지 보았으니 추억은 헤아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놈의 수인 헌터만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우린 같이 있겠지.

다율은 울적해지는 기분을 띄우려 혼자 파이팅을 외치고 다시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막바지 촬영으로 바빠진 권지하는 새벽녘에 나가 자정이 다 될 무렵에나 들어왔다. 다율은 그때마다 거의 잠들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든 입술이라도 겹치고 짧게 이야기를 나눈 다음 꼭 끌어안고 잤다.

낮이 되면 다시 다율은 혼자가 되었다. 그는 쓸쓸함을 잊고자 더욱더 일에 매진했다. 어찌 되었든 밤이 되면 권지하는 돌아왔고, 그러면 다율이 낮 동안 쌓아왔던 심심함과 외로움은 싹 날아갔다.

한편 권지하는 육촌 형과 계속해서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또한 뭐든지 다 해결해 주는 일꾼들이 무서우리만치 빨리 정보를 알아낸 덕에 다율을 위협했던 수인 헌터의 범위를 점차 좁혀나갈 수 있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놈들의 특성상 바로 근황을 뒤쫓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유력한 용의자가 서너 명으로 좁혀드는 성과가 있었다.

“조만간 놈들 사진 구해 올게. 미친놈들이 단합대회를 연 모양이야. 거기서 기념 촬영 한 사진을 빼 오면 돼.”

육촌 형의 말에 권지하는 토악질을 할 뻔했다. 헌터끼리 단합대회를 열 정도라니. 거기에서 벌였을 짓이 뻔했다. 수인 사냥을 얼마나 잘했는지 얼마나 큰 돈을 만졌는지 자랑질이나 해댔을 것이다.

미친놈. 사진만 구하면 다율이한테 보여 주고 그 면상을 제대로 알아내야지. 그렇게만 되면 내가 가진 힘을 총동원해서 바다에 담그든 산속에 파묻든 최대한 고통스럽게 골로 보내 줘야겠어.

안 그래도 다율이가 요새 툭하면 피곤하고 아프다는데, 더 이상은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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