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다람쥐임을 알리고 나자 좋은 점 하나. 유별난 도토리 요리 미식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고 살아야지, 다른 걸 먹고 살면 되나?
다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찝찝함이 사라지고 나니 그 자리는 상쾌함과 후련함이 채웠다.
“어서 오세요.”
서울로 진입하기 전, 두 사람은 유명한 도토리묵 전문점에 들어갔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낮술을 마시는 사람, 단체 여행객들로 가게 안이 붐볐다.
<아직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은 집>이라는 이색적인 현수막이 인상적이었다.
“도토리 정식 2인분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쪽으로 앉으세요.”
다율과 권지하가 창가 자리에 앉자,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에 여러 가지 밑반찬과 묵사발을 가져왔다.
“이상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주머니가 선글라스를 쓴 권지하를 힐끔 봤다.
“꼭 연속극 나오는 사람처럼 생겼어.”
“하하.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별일이네요.”
권지하의 뻔뻔한 대답에 아주머니는 의심을 거두고 사라졌다. 다율이 메뉴판 사진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데, 권지하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어린이 메뉴도 있네.”
“어, 네. 그렇네요.”
“나중에 애들 데리고 와도 되겠어.”
“애들이요?”
“응. 애들.”
누구 애를 말하는 거지? 설마 아기다람쥐?!
아직 다율은 수컷인 자신도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권지하가 너무 놀랄 것 같아서였다. 서로가 수인임을 알았으니 조심스럽게 데이트를 하면서 정보를 교류하면 좋지 않을까. 다율은 아직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다.
정작 권지하는 포유류인 다율이 아기이무기를 낳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아무래도 아기다람쥐가 태어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율의 마른 배를 쳐다보았다.
푸짐하게 도토리묵과 전, 밥을 먹고 다시 차에 오른 두 사람은 내비게이션에 숙소 주소를 입력했다. 간만의 귀가 여정은 익숙한 길이라 다율도 마음이 편안했다.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또한 다율의 마음을 잔잔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 노래, 팬미팅 때 불렀던 노래네요.”
“맞아.”
“…저 생각하면서 부른 거죠?”
봄날 피크닉을 갔을 때는 이 노래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 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해 마음이 아프기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팬미팅 때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고 이제는 확신한다.
권지하의 마음속에는 이다율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내 목소리로 들으려니까 민망한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권지하는 볼륨을 키웠다. 부끄러움이나 머쓱함을 모르는 성격 탓도 있었고, 다율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사랑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라라라-.”
다율이 노래의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멜로디가 아주 개판이었으나, 권지하는 애정의 힘으로 음치의 노래를 견뎌냈다.
***
“와! 집이다!”
“집이 그렇게 좋아?”
“네. 며칠이지만 떠나 있었더니 그립더라고요.”
다율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오두방정을 떨며 들뜬 티를 냈다.
“여행지보다 집이 더 낫나?”
“어… 물론 부모님 댁도 즐거웠고 풀… 빌라도 좋았지만 집이 최고예요.”
풀 빌라라는 단어를 뱉을 때 다율은 살짝 망설였다. 야릇한 장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얼굴 왜 빨개졌어?”
“저, 저요? 날이 더워서 그런가. 세수해야겠다.”
“같이 씻어.”
권지하가 다율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열이 오른 몸에 시원한 손길이 닿으니 짜릿했다.
“같이 씻다니요! 어떻게 그래요.”
“왜. 우리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인데.”
“에이, 정말!”
다율은 휙 뒤돌아 권지하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러자 권지하가 다율의 손바닥을 질척하게 핥았다.
“으악!”
다율이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지만 이미 권지하는 다율의 온몸을 칭칭 휘감은 뒤였다. 과연 뱀은 뱀이었다.
예전에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요리조리 피해 다닐 수 있었지만, 이제는 권지하를 설득할 말이 없었다. 결국 권지하와 같이 씻으러 들어간 다율은 세 시간 뒤에야 터덜터덜 욕실 밖으로 나왔다.
“머리 말리자.”
“으응….”
“보송하게 말리고 자야 감기 안 걸리지.”
축 늘어진 다율을 침대에 앉히고, 권지하가 드라이어를 틀었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바람을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 쐬어 주며, 그는 다율의 머리를 정성껏 말려 주었다.
어느 정도 물기가 가신 다음 수건으로 마무리를 하고, 권지하가 다율을 침대에 곱게 눕혀 주었다.
“우리 다율이 잘 자.”
“형도.”
여행이 길고 또 격렬했던 탓일까. 여독이 몰려와 다율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다율은 꾸벅꾸벅 졸다가 까무룩, 의식을 놓쳤다.
다율의 꿈은 지극히 편안했다. 권지하와 손을 잡고 나란히 울창한 숲속을 걷는 꿈이었다. 바람은 시원했으며 이따금 불어오는 미풍이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다.
햇빛이 두 사람이 걷는 길에 나뭇잎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그게 참 아름다웠다. 다율은 권지하와 함께 그 나뭇잎 아래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맑은 하늘을 바라봤을 때, 나무에서 도토리 하나가 또르르, 떨어졌다. 정확히 다율의 이마를 콩! 때리면서였다.
‘어? 도토리가 떨어졌어요.’
‘다율이가 주워 봐.’
이상할 정도로 귀엽고 모양이 예쁜 도토리였기 때문에 다율은 욕심이 났다. 굳이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후후 숨결을 불어다가 먼지를 떨었다.
‘도토리가 너무 예뻐요. 어쩜 이렇게 동글동글 귀엽지?’
꼭 집에 가져가야겠다는 마음이 든 순간, 또다시 도토리 하나가 다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지하가 그것을 주웠다.
‘이 도토리도 예쁘네. 다율이 가져가.’
‘그래야겠어요, 형.’
다율이 두 번째 도토리를 소중하게 주워 마찬가지로 먼지를 떨었다. 도토리 두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좀 묘하다 싶을 정도로 가슴이 충만해졌다.
‘나 기분이 너무 좋은데… 형도 그래요?’
다율이 권지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권지하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우리 이거 집에 가져가서 키워요.’
‘그래. 키우자.’
이미 다 열려서 땅에 떨어지기까지 한 도토리가 자랄 리 없는데도 다율은 큰 소리로 도토리를 키우자 했다. 권지하도 전혀 그 문장이 어색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푸릇푸릇 잔디가 자라 있는 들판에 피크닉 매트가 깔려 있고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매트 근처에는 처음 보는 아기다람쥐들이 꺄륵거리며 두 사람 주변을 뛰어다녔다. 다람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그게 제 새끼라는 것을 다율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온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털 색깔 때문이었다. 또한 유난히 풍성하고 빵빵한 꼬리 모양에서도 그런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율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권지하는 아기다람쥐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작은 몸을 들어 살살 비행기를 태워 주고, 간식을 아이들 입에 넣어 주었다. 지극히 정다운 아빠의 모습에 다율은 흐뭇하게 웃었다.
꿈속이지만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존재의 온기. 그리고 이 사람을 사랑하기 잘했다는 기쁨. 그리고 아이들 아빠가 권지하가 틀림없다는 사실이었다.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 언젠가 다율이 갖고 싶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모습. 다율은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다율아. 일어나. 영화 봐야지.”
“으음… 아기들이 저렇게… 응….”
“아기?”
“두 마리.”
“뭐가 두 마리라는 거야.”
“쌍둥이인가….”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눈도 못 뜨는 다율을 보며, 권지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겨우 다율을 깨운 권지하는 아침 내리 만든 진수성찬으로 다율을 실컷 먹이고 TV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여 주었다. 가볍게 볼 수 있으면서도 찡한 내용이라 다율이 무척 좋아했다.
“잠든 사람의 연인인 척하다가 그 동생과 사랑에 빠지다니… 되게 특이한 내용이네요.”
“근데 재미있지?”
“네. 엄청!”
다율은 권지하가 나오는 영화 외의 영화, 즉 외국 콘텐츠 같은 것은 거의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나 프랑스풍의 귀여운 영화를 틀어 주면 무척 좋아했다.
다만 극장에 가는 것은 극도로 꺼려 했다. 유명 블록버스터 영화나 로맨스 기대작이 갓 개봉을 했지만 다율은 극장행을 거부했다. 다만 아주 늦은 시간대에 하는 심야 영화는 보러 갔다.
심야라서 관객도 극히 적고, 커플석에 앉아서 마음껏 애정 행각을 펼칠 수 있었기에 권지하로서는 흡족했지만 이렇게나 밖에 나가기를 주저하다니. 예전의 다율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라 걱정이 됐다.
때로는 심야 영화를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어두컴컴하고 으슥한 골목을 힐끔거리기도 하는 모습에 권지하는 위화감을 느꼈다. 늘 밝고 명랑했던 다율은 무언가를 굉장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물었다. 연인으로서 다율이 두려워하고 겁내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서, 만약 자신이 도와줄 수 있고 방어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무찔러 주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