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독한 느낌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으나, 진득하게 꿀맛이 났다. 또한 향기 자체가 과일 특유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톤을 가지고 있어 마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맛있다!”
“맛 괜찮아?”
“네. 너무 맛있어요. 주스 같은데요?”
달콤하고 끈적하면서도 끝맛은 상큼했기 때문에, 다율은 예전에 마셔 봤던 레드와인보다 이게 훨씬 낫다 싶었다.
“어어, 다율아. 너무 빨리 마시지 마.”
권지하는 와인을 물처럼 원샷하는 다율을 말렸으나, 한번 입이 트인 다율을 어떻게 하기란 어려웠다.
“아버지 담금주 되게 독한데… 잠시만. 이거 몇 도라고 말을 해 주셨던 것 같기도 하고.”
권지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와인병을 건네면서 세 병 중에 지독하게 강한 놈이 있으니 주의하라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다율은 다음 잔을 스스로 콸콸 소리가 날 정도로 채우고 있었다. 아니, 잔이 넘칠 지경이었다.
“다율아. 이거 도수가 높을 수도 있어.”
“아니에요. 이거 주스 정도인 것 같아요. 엄청 달다니까요?”
와인의 달콤함에 홀딱 반한 다율은 호로록 잔을 비웠다. 두 잔이 석 잔이 되고 넉 잔이 되기까지는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급하게 마시느라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너 취하는 것 같은데.”
다율의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권지하가 다율의 얼굴을 손등으로 쓸며 평소보다 조금 더 온도가 올라간 상황을 체크했다.
“아니에요. 저 완전히 멀쩡한데요?”
다율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다음 잔을 또 마셨다. 마실수록 더 당기는 게 진짜 요물 같은 술이었다.
와, 나중에 아버님 만나면 몇 병 달라고 해야지. 진짜 못 견디게 맛있어…!
다율이 헤실헤실 웃으며 조금씩 정신을 놓았다. 워낙에 독한 술이라 자신이 취해 가는 줄도 모르고 다율은 빠르게 알코올에 점령당해 갔다. 갑작스러운 술기운에 다율의 몸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 어리석은 수인아. 적당히 마셔라!
뇌가 경고를 했지만 입이 배신자였다. 달콤함에 빠져든 혀가 또 한잔 와인을 맛봤다.
“…어….”
다율은 술에 정신이 팔려 권지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얼이 빠지다 못해 넋이 나간 권지하의 표정을.
“으흠. 너무 향기롭다.”
권지하는 와인잔에 코를 박고 눈을 감은 다율을 쳐다봤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동물 귀?
다율의 머리카락 사이로 통통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동물 귀가 한 쌍 솟아 나와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파는 머리띠를 쓴 것처럼. 색깔은 평소 다율의 머리색과 비슷한 밝은 갈색과 황금색의 중간이었다.
권지하는 눈을 한 차례 비빈 다음 다시 다율을 보았다. 여전히 다율의 머리에는 귀가 달려 있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군. 피크닉 떠났을 때 마주쳤던 황금다람쥐의 털색과 지금 다율의 귀 색은 똑같았다.
또한 집 안에서 발견된 헤어밴드. 거기 묻어 있던 정체불명의 가늘고 밝은 색깔의 털. 그것 역시 다율이 흘린 흔적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황금다람쥐였구나.
권지하는 귀를 내놓은 줄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는 다율을 빤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율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면서 손끝으로 살짝 귀를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귀가 움찔거리면서 앞뒤로 움직였다. 딱히 싫거나 예민해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흐음.”
혹시 기분이 좋은 건가?
권지하는 귀의 여린 살을 살살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양쪽 귀 모두 권지하의 손길을 따라 이쪽저쪽으로 움직였다.
“다율아.”
“네?”
어느새 머리와 귀를 부드럽게 만져 주는 손길에 취해, 다율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권지하의 품에 축 늘어져 있었다.
“기분 좋아? 내 손.”
“형 손… 음… 귀에 있는 거요?”
“응. 귀 만지는 손.”
“어… 다정다감하고 너무 좋아요. 머리카락이랑 동시에 쓰다듬으니까 더 좋,….”
다율은 말을 하다 말고 얼음처럼 굳었다.
머리카락 옆에 있는 귀. 이거 사람 귀 아니라 동물 귀인데?!
“아악!”
다율은 양손을 들어 귀를 가리며 벌떡 일어났다. 권지하가 다율의 허리를 잽싸게 붙들어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귀, 귀가 나왔어! 미쳤어!”
다율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다시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한번 튀어나온 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쫑긋 솟았으면 솟았지, 마음먹는다고 들어가지지가 않았다. 마치 예전에 한번, 숙소에서 헤어밴드로 누르고 자야만 했던 날처럼.
“어, 어떡해.”
권지하와 눈이 마주친 다율은 울고 싶었다. 이미 다 봐 버렸구나.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비밀을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다율도 마음의 준비가 되고, 권지하 역시 다람쥐란 동물에 호감을 가졌다 싶을 때 조심스럽게 밝히려 했는데.
“혀, 형….”
다율이 울먹이며 손을 내렸다. 통, 하고 귀가 제대로 드러났다. 다율은 두려웠다. 자신을 징그러워하진 않을까, 겁내진 않을까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야. 머리에는 귀가 있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달… 잠깐만. 나 엉덩이가 왜 이렇게 무겁지?
다율은 설마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상태에서 꼬리까지 튀어나왔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으로 볼 것도 없이, 반바지가 살짝 아래로 내려가고 등허리와 엉덩이가 만나는 지점에 권지하의 손이 닿았다.
권지하가 다율의 풍성한 꼬리를 살살 만지고 있었다.
“다율이 꼬리 나왔네.”
권지하가 달다 못해 꿀이 떨어지는 눈길로 다율을 보며 소곤댔다. 아찔해진 다율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왜 그래. 다율아, 괜찮아?”
갑자기 바닥으로 쓰러진 다율 때문에 권지하는 깜짝 놀랐다. 다율을 붙들고 얼굴을 살피자, 고운 얼굴이 온통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흑흑…!”
“다율이 왜 울어.”
“제가… 제가, 형… 나 수인이에요. 수인이라서… 그동안 속여 와서 미안해요.”
다율은 눈을 질끈 감고 권지하에게 고개를 숙였다.
짧은 순간 다율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이 다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다율이 두려워하는 것은 권지하의 냉대와 경멸이었다.
‘너 수인이었어? 실망이다.’
‘난 수인하고 연애하는 취미 없어. 내가 했던 말 다 취소할게.’
‘매니저 자리에 수인을 앉힐 순 없어. 이제 내 집에서 나가 줘.’
그런 말이 나올까 봐 다율은 너무나 겁이 나고 온몸이 떨려왔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권지하를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어려웠다.
“다율아.”
그런 다율을 붙들어 오는 강한 손길이 있었다. 권지하는 울고 있는 다율의 얼굴을 손등으로 쓸어 준 다음, 옆에 있던 휴지로 잘 닦아 주었다. 다율은 히끅거리면서 계속 눈물을 쏟았다.
“휴지 가지고 안 되겠네. 이리 와.”
권지하가 다율을 자신의 품에 가뒀다. 그의 옷에 직접적으로 눈물 콧물을 묻히게 된 다율은 울먹였다.
“이… 이 셔츠 엄청 비싼 건데, 제가 더럽히면 안 되는데…!”
“괜찮아. 이깟 게 뭐라고. 너보다 소중하진 않아.”
권지하가 다율을 끌어당겨 더 깊이 껴안았다. 서늘한 품이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포옹이었다.
배우님은, 아니 형은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구나. 여전히 날 사랑해 주는구나.
폭풍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다율은 서러움의 눈물을 콸콸 쏟아냈다. 훌쩍훌쩍, 콧물을 흘리는 다율에게 권지하는 일일이 휴지를 내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히끅거리던 다율의 숨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실컷 울었어?”
“…네.”
“이제 형이랑 말해도 돼?”
대화할 준비가 되었냐는 뜻이다. 다율은 마른침을 삼켰다.
“…네.”
자신이 수인인 것에 대해 드디어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타이밍이 왔다. 다율은 덜컥 두려웠고, 또 미안했고, 다시 몸이 떨리기도 했다. 그런 다율의 등을 토닥이며 권지하가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 정체 때문에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했던 거야?”
역시나 이 질문이 나오는구나. 다율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망쳐야만 했어요. 살기 위해서, 또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다율아.”
“….”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나? 난 네가 어떤 모습이라고 해도 사랑할 자신이 있다고.”
“…맞아요. 그랬었죠.”
다율의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 아파왔다.
지하 형은 내게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해 주었었지.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겁먹은 건 나였어.
다율은 나약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원망했다.
이 사람은 이렇게나 다정하고 또 마음이 넓은데, 왜 나는 믿지 못했을까.
“미안해요….”
다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해요, 형.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형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내가 수인이라도 날 받아들여 줄 텐데, 확신을 갖지 못했어요.”
다율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권지하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 사이에 은근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조금씩 형성되어 갔다. 넘쳐나는 애정과 믿음이 뜨거운 불길을 만들어 두 사람 사이의 열기를 훅 올렸다.
“다율아.”
권지하의 손길이 다율의 쇄골과 어깨를 쓸고, 이윽고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가슴으로 내려갔다. 다율은 눈을 내리깔며 권지하가 느릿하게 만져대는 감각에 도취되었다. 그런데 좀 느낌이 이상했다. 평소처럼 간질간질하면서 야릇한 정도를 뛰어넘어 발바닥부터 종아리, 그리고 허벅지까지 서서히 불길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아….”
왜 이렇게 나른하면서 또 예민해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