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어설프게나마 수영을 할 수 있게 된 다율은 수영 중독자처럼 풀에 머물렀다. 동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보니 몸으로 하는 일을 빨리 익히고 싶어 하고, 또 한번 익히면 잘 잊지 않는 게 수인들이었다.
여기 머무르는 며칠 동안 열심히 연습하면 인어처럼 헤엄칠 수 있을 거야. 헤헤.
다율은 다소 무리다 싶을 만큼 물에서 시간을 보냈다. 권지하가 중간중간 건져내서 컵라면이나 따끈한 어묵탕을 먹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물에 탐닉하는 모습이었다.
“너무 물에만 있지 말고 잠깐 나와. 떡볶이 먹자.”
“와! 떡볶이다!”
다율은 풀장에서 나와 씻고 몸을 말린 후 식탁으로 쪼르르 달려 나왔다. 권지하는 주방에서 프로페셔널하게 떡볶이를 만들며 맛있는 냄새를 풍겨냈다.
“저도 도울래요.”
“그럼 계란 좀 까 줄래?”
“좋아요.”
다율이 뜨거운 냄비와 칼에 손을 댔다가는 사고라도 칠까 봐, 권지하는 다율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달걀 까기를 시켰다. 하지만 다율은 지독한 요리 무능력자였으므로 달걀 껍데기를 깐 결과물은 형편없었다.
“우둘투둘해… 저 왜 이렇게 못하죠?”
권지하가 깐 달걀은 깔끔하고 매끄러운데, 다율이 깐 것은 달의 분화구가 따로 없었다.
“괜찮아. 다율이가 깐 게 더 맛있을 거야.”
권지하는 다율을 위로했지만 인간적으로 노른자가 다 보일 정도로 속살이 파인 달걀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권지하는 다짐했다.
안 그래도 자신이 요리와 살림을 도맡을 예정이었지만, 결혼하면 정말 다율에게는 주방 출입을 금지해야겠다고.
매콤달콤한 떡볶이에 어묵과 달걀을 버무려 먹고, 다율은 소파에 드러누워 권지하와 TV를 봤다. 영화 채널에서 권지하가 평소 좋아하는 감독의 대표작을 방영해 주고 있었다.
“저 감독님이 킨 영화제 수상하신 분이야. 나도 꼭 같이 작업해 보고 싶어.”
“형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킨 영화제도 진출할 거고요!”
“그렇게 말해 주니까 힘이 나네. 다율이 최고다.”
권지하가 다율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화면에 시야를 고정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자, 다율은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검색창에 들어갔다.
[스킨십 잘하는 법]
[진도 빼는 비결]
[애인과 풀 빌라]
[풀 빌라 끈적 분위기]
다율은 생각나는 모든 키워드를 동원해 서치를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검색을 하다 보니 낯 뜨거운 사진이 나오기도 했고, 이상한 사이트로 연결이 되기도 했다.
우와. 엄청나다.
다율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어른들의 세계에 몰두했다. 권지하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였다.
“뭐 해?”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뭘 열심히 보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절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율은 황급하게 핸드폰을 뒤집으며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굴었다. 얼굴도 빨개지고 표정도 어색했다. 사실 권지하는 아까부터 다율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5초에 한 번씩 감탄을 하길래 그런 다율을 구경 중이었다.
별 말도 안 되는 키워드로 잡 지식을 습득하고 있길래 가만히 놔뒀더니 약 20분을 인터넷 삼매경이라. 권지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거라도 있어?”
“그, 그런 게 아니라요…!”
“그렇게 궁금하면 내가 알려 줄게.”
“네?!”
다율은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다.
“이런 게 궁금했던 거 아니야?”
권지하가 몸을 일으켜 다율을 소파에 밀어 눕혔다. 그 위로 거대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서히 몸을 낮추는 권지하 때문에 다율은 기절할 것 같았다.
아무리 인터넷으로 열심히 스킬을 찾아본다 한들, 실전에서는 이렇게 밀리고 만다.
하필이면 영화도 끈끈하면서 달콤한 OST가 흘러나오는 대목이었다. 권지하의 손길이 다율의 뺨을 스친 다음 대범하게 목덜미와 쇄골을 만지자 다율은 몸을 떨었다.
또다시 수동적으로 휘말려든다…! 안 돼!
다율은 수컷 수인의 체면을 잃을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지금의 흐름을 멈추고 주도권을 자신이 가져오고 싶었으므로,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부모님이 선물해 주신 와인이었다.
“혀, 형. 우리 와인 마셔요!”
“지금 이 상황에… 와인?”
“네! 지금 당장 마시고 싶어요. 엄청!”
“다음에 마셔.”
권지하가 슥 몸을 낮추었지만 다율은 마치 007 요원처럼 그의 품 안을 빠져나와 데구르르 바닥으로 굴렀다. 액션 배우 뺨치게 화려한 액션에 권지하는 크게 당황했다.
주방으로 피신 온 다율은 숨을 고르면서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후우….”
일단 와인을 먹이자. 그러고 나서 배우님이 흐느적거리면 그때 내가 수컷답게 리드를 하는 거야.
“일단 와인하고 와인잔이….”
다율은 부모님이 선물해 주신 와인 세 병 가운데 무엇을 집어야 좋을지 고민했다. 너무 독한 건 입맛에 맞지 않을 듯했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순하면 권지하가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시중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알코올 농도가 쓰여 있지 않으니까 잘 모르겠네.”
와인은 수제 내추럴 와인이었기 때문에 공장식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개중에 <키위 와인>이라고 쓰인 택이 보였다.
“어? 키위로 만든 건가? 특이하다.”
다율은 포도가 아닌 키위로 만든 술이라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다. 워낙에 잘 못 먹어 본 과일 중 하나이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달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대 남성이 집에서 직접 담근 담금주만큼 독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다율은 몰랐다.
“좋아. 술은 이걸로 하자. 와인잔이 어디 있더라?”
다율은 열심히 찬장을 뒤져 투명한 와인잔 두 개를 찾아냈다.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하게 잔을 닦고, 서랍을 열어 보았다. 고급스러운 코르크 오프너가 하나 준비되어 있었다.
“다 됐다.”
준비를 단단히 마친 다음 모든 물건을 가지고 거실로 갔다.
권지하를 자빠뜨릴 생각에 들떠서, 다율은 와인의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와인바에 어서 오십시오.”
다율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와인병을 품에 안고 꾸벅 인사를 했다. 나름 역할극인 것 같아 권지하도 장단을 맞춰 주었다.
“저는 바리스타 이다율입니다.”
바리스타가 아니라 소믈리에 아닌가?
권지하는 용어 사용도 틀렸고,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엄숙한 표정을 짓는 다율이 그저 귀여웠다.
“안녕하세요. 오늘 추천해 주실 와인은 어떤 와인인가요?”
“키위 와인으로 준비했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죠.”
“키위 와인이요?”
“네. 아주 맛있을 겁니다. 제가 따드릴게요.”
다율은 응접실 테이블에 와인병을 올려놓고서 한참 동안 팔짱을 끼고 병을 노려보았다. 코르크를 어떻게 해야 멋지게 딸 수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끼릭끼릭. 다율은 코르크 따개를 마개에 꽂고 돌려 보았다. 나름 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봐서 때려 맞힐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시원하게 마개를 뽑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야 하지만, 다율은 그저 힘으로 승부를 보려 한 탓에 땀을 흘리며 낑낑거리게 되었다.
“저기. 바리스타님. 괜찮으세요?”
이마에 핏대가 솟은 다율을 보며 권지하가 걱정 어리게 물었다.
“괜찮… 괜찮지 않습니다.”
“내가 해 줄게. 이거 이렇게 하는 거야.”
권지하가 와인병과 오프너를 가져가서 간단하게 코르크를 빼냈다.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병이 열리자 다율은 권지하가 너무나 멋져 보였다.
“손님… 너무 멋지네요.”
“그럼 저랑 한잔하시죠.”
권지하가 다율을 무릎에 앉혔다. 따뜻한 몸과 서늘한 피부가 접촉하자 서로 기분이 좋았다.
쪽. 간단한 입맞춤이 오간 다음 권지하가 다율을 뒤에서 감싸 안은 채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다.
“우와….”
진한 향을 풍기는 담금주는 위험 물질 그 자체였지만, 다율은 노란빛의 액체가 마냥 아름답고 신비로울 따름이었다.
“키위 맛일까요?”
“글쎄. 발효하면 맛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키위 향이 나겠지?”
“키위는 거의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수입 과일인 키위는 속리산 출신인 다율에게 신비의 과일, 환상의 과일 그 자체였다. 다래라는 열매가 그나마 키위와 비슷하긴 하였으나, 그래도 맛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다율은 키위로 담근 술이란 게 어떤 맛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자. 한잔하세요.”
“형도요.”
“우리 건배할까?”
권지하가 묻자 다율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근데 뭘로 하죠?”
“음… 글쎄. 이루고 싶은 목표를 걸고 건배해야 하나?”
“연말에 흑상예술대상 열리잖아요. 흑상 대상 수상을 위하여 어때요?”
다율이 지극히 매니저스러운 발언을 했다. 하지만 다율의 발언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다. 이미 권지하는 복귀작으로 시청자들과 평론가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흑상예술대상 대상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흑상예술대상 대상을 위하여!”
“위하여!”
두 사람이 잔을 쨍, 부딪쳤다. 다율은 홀짝 소리를 내며 노란 액체를 한 모금 삼켰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