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두 사람은 풀벌레가 찌르르르 우는 길을 따라 걸었다. 달빛이 은은하게 땅을 비추어 준 덕분에 앉을 만한 바위를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와, 별 좀 봐요.”
“은하수네.”
다율의 눈에 사선 방향으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가 보였다. 새하얗게 빛나는 별무리가 꿈결같이 빛났다. 우주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기분도 들었다.
“배우님, 아니 형.”
“응.”
“…형을 만나게 된 건 제 인생에 가장 큰 행운 같아요.”
“나도야.”
“형한테도요?”
밤하늘을 보던 다율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권지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율을 자기 무릎에 앉혔다.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 왔어.”
“처, 처음부터요?”
“물론이지.”
다율의 가슴이 쿵쾅 뛰었다. 첫 만남에서 반한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면접장으로 네가 걸어 들어온 순간 알아봤어. 아, 나는 저 아이를 사랑하게 되겠구나 하고.”
“형….”
다율의 눈망울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권지하는 다율의 눈가에 쪽, 입을 맞춘 다음 그를 품 안에 안았다.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그러니까 다율아.”
“네.”
“매일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권지하의 고백에 다율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아직 둘은 정식으로 사귀지 않는 사이였다. 다율은 둘 사이에 애정이 넘쳐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허락하지 않은 상태였다.
두려움과 망설임이 다율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 또 위험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생각, 권지하 옆에서 영원히 행복하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다율을 짓눌렀다.
이제는 권지하에게 확답을 줘야 할 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데. 다율은 한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미안했다.
“무슨 생각 해.”
“…미안하다는 생각이요. 배우님, 아니 형의 고백에… 전 아직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하지 마. 그냥, 때가 되면 나한테 와. 오기만 하면 돼.”
그럼 영원히 놓치지 않을 거니까.
권지하가 다시금 다율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은하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가 이곳에 있었다.
다시금 입술을 겹치는 두 연인에게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풍경화 같은 여름밤이었다.
***
다율은 맛있는 냄새에 눈을 떴다.
“으음….”
대체 이게 무슨 냄새지. 얼큰한 듯 또 구수한 듯 장난이 아니다.
“라면들 드세요. 빨리 안 먹으면 불어요.”
텐트 바깥에서 들리는 건 매형의 목소리였다.
“앗! 라면!”
다율은 발딱 일어나 옆에서 자고 있는 권지하를 흔들어 깨웠다.
“배, 아니 형. 라면 먹으러 나가요!”
“라면? 그래.”
권지하도 몸을 일으켜 다율을 데리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햇볕이 쏟아지는 가운데, 커다란 타프 아래 매형이 코펠 여러 개를 이용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다인원이라 그런지 라면이 열 봉지도 넘게 동원되었다.
“다율 씨, 누나 좀 깨워서 데리고 와 줄래요?”
“아, 네. 알겠습니다!”
다율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누나의 텐트로 향했다.
“누나. 라면 드세요. 지금 한창 끓이고 있어요.”
“라…면… 다율이… 으음.”
누나는 잠이 좀처럼 깨지 않는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율을 봤다.
“얼른 일어나세요. 붇기 전에 먹어요.”
“다율이가 깨우면… 먹어야지.”
누나를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한 다율은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 한가운데 자연스럽게 앉았다.
“숟가락 젓가락 드릴게요.”
다율이 빠릿하게 수저를 집어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었다.
“다율이 많이 먹어라.”
“네!”
이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챙겨 주는 것도, 계란 노른자가 들었으니 국물을 듬뿍 먹으라고 권하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즐겁기만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도 캠핑 라면은 훨씬 맛있었다. 다율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두 그릇을 싹싹 비워냈다.
“그나저나 지하 너. 결정은 했냐?”
“집 말씀이시죠.”
부자간에 나름 진지한 대화가 시작되는 눈치라 다율은 살짝 그쪽을 봤다. 아버지와 권지하가 집을 주제로 이야기 중이었다.
“역시 다율이는 시골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공원을 낀 아파트도 대안이 될 수 있어요. 서울을 떠나긴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공원이 있다고 해도 서울하고 시골 차이는 엄청날 텐데?”
“학군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서울이 최고죠.”
이게 무슨 소리야. 배우님과 학군이 무슨 상관인데? 다율의 귀가 토끼만큼이나 쫑긋해졌다.
“그럼 서울에 있는 주택은 어떻냐.”
“평창동 거기요? 그 집도 괜찮죠. 리모델링만 한다면 좋은 집이니까요.”
“식을 급하게 올려야 하는 상황만 아니면 천천히 수리해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게 제일 낫지.”
그때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끼어들었다.
“아휴, 주택 같은 소리 말아. 평창동 그 집은 슈퍼 가려고 해도 10분이 넘게 걸리는데 신혼 때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젊은 애들은 대단지 아파트가 편하지. 평창동은 정원도 관리해야 하고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아.”
“아… 하긴.”
“그것도 그렇구려.”
똑 닮은 부자 두 명이 동시에 다율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율아. 아파트가 좋아, 주택이 좋아?”
“아파트가 좋으냐. 주택이 좋으냐?”
라면을 흡입 중이던 다율은 목에 사레가 들렸다.
“켁. 혹시 제가 살 집 이야기 중이셨던 건가요?”
“그렇지.”
“당연하지. 너랑 나랑 살 집.”
그제야 다율은 모든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꾸만 시골과 서울 중에 하나를 고르라던 말씀, 다율이 부동산을 알아보고 있을 때 권지하가 참견하던 것,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가족들이 알고 있다는 말까지.
나랑 배우님을 미래의 부부로 인정해 주고 있는 거였어?
다율은 기쁨과 쑥스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저, 저의 선택은….”
날카로운 눈매의 부자가 다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제 선택은… 지금 배우님과 사는 집입니다!”
“어라. 그럼 아파트가 좋다는 거냐?”
“한강도 시원하게 보이는 데다가 뒤로는 숲속 산책로도 잘 조성돼 있어서요. 참 좋아요.”
은근슬쩍 권지하와 같이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셈이라, 다율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권지하도 알아들었는지 살짝 웃으며 다율의 뺨을 꼬집었다.
“그럼 지하네 아파트로 최종 결론 난 거다.”
“평창동은 나 줘, 아빠.”
가만히 있던 누나가 면발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율이 별장으로 쓸 거야. 승하 넌 가만히 있어.”
“다율이만 예뻐하네.”
“어.”
“하긴, 나도 나보다 다율이가 더 예쁘다.”
누나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라면을 후룩후룩 먹고 쿨하게 집에 대한 미련을 떨쳤다.
“다들 고생 많았어. 이제 집에 가서 좀 쉬자.”
어머니의 말에 다율이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님, 아버님. 저희는 바로 여행지로 가려고요.”
“아, 맞다. 지하랑 다율이네는 풀 빌라로 놀러 간댔지?”
어머니가 아이쿠야 하면서 다율에게 남은 과일을 싸 주었다.
“이렇게 갑자기 간다니 아쉽네.”
아버지도 다율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운 내색이었다. 누나는 권지하를 설득하고 겁박하여 다율이와의 셀카를 얻어냈다.
“다들 즐거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그래. 곧 또 놀러 올 것 같은데 다시 보자.”
“네!”
권지하가 텐트를 철거하고 타프를 걷었다. 다율은 오리를 뒷좌석에 태우고 부지런히 물놀이 도구들을 챙겼다. 가족들이 탄 차가 먼저 떠나고, 두 사람은 여유롭게 캠핑카에 몸을 실었다.
“또 여행이다! 너무 신나요.”
“그렇게 좋아?”
“네! 그럼요.”
다율이 조수석 창을 열고 자연의 바람을 흠뻑 들이마셨다.
“공기가 달아요.”
“정말 행복했나 보네.”
“네. 풀 빌라에서는 또 얼마나 행복할지 기대돼요.”
다율의 기대를 채워 주기 위해 권지하는 우선 마트로 향했다. 가평 시내에 있는 마트 중 가장 크고 좋다는 곳에 도착한 두 사람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차에서 내렸다.
평일이고 휴가철 성수기를 조금 비껴간 시기였기 때문에 주차장은 한산했다. 그래도 다율은 주변을 경계하며 마트로 들어섰다.
와인은 아버님의 애장품 중 몇 병을 선물받았기에, 이곳에서는 고기와 먹거리 그리고 다율의 간식만 사면 됐다. 다율은 인스턴트 밥도 물도 아닌 견과류 코너부터 털기 시작했다.
“드셔본이다!”
캔에 든 종합 견과류를 발견한 다율이 입을 틀어막았다. 편의점 시급으로는 꿈꿀 수 없는 비싼 프리미엄 라인 <너도 나도 드셔본>이 함께 진열돼 있었다. 다율은 정신없이 물건을 쓸어 담아 카트에 집어넣고 경쾌하게 스텝을 밟았다.
“와인에 어울릴 만한 치즈도 사고, 또… 다율이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우리 비빔면 해 먹을까?”
“좋아요! 그리고 우리 백숙도 해 먹어요.”
다율이 카트를 앞에서 끌고 가며 다양한 식재료를 골라 담았다. 권지하는 다율이 사고 싶다는 건 다 사게 해 주며 뒤에서 카트를 밀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꼭 부부 같네. 아까 이야기 나눴던 것처럼 주택에 살까 아파트에 살까 딱 그 문제만 남은 부부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