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71화 (71/95)

71화

“우와… 너무 맑아요.”

마치 속리산에 있던 다율의 둥지 근처처럼 이곳의 자연은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얕아 보여도 생각보다 깊으니까 조심해야 돼. 자, 여기 튜브.”

권지하가 다율에게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오리를 건넸다. 다율은 오리의 목을 끌어안고 조심히 종아리부터 입수했다.

“앗, 차가워!”

“차갑지?”

“근데 너무 시원해요. 우와, 에어컨 바람보다 훨씬 좋아요.”

속리산에서 다람쥐로 살 적에 다율의 피서법은 계곡에 자그마한 발과 꼬리를 담그는 것이었다. 한바탕 찬물로 몸을 식히고 나서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면 더위가 싹 가시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때의 기분이었다.

“우와. 누나 수영 잘하신다.”

권지하의 누나는 수영 선수가 따로 없을 정도로 화려한 수영 솜씨를 뽐내며 계곡을 활주했다.

“부러워?”

“네. 저도 저렇게 수영하고 싶어요.”

“풀 빌라 가서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걱정 마.”

“진짜요?”

“그럼. 우리 밤낮없이 연습할 거야. 물다율 만들 거거든.”

“좋아요!”

자상한 권지하가 가르쳐 준다면 수영 배우기도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나처럼 멋지게 헤엄칠 날도 머지않을 테다.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적당히 따갑고, 물은 더없이 시원했다. 마치 속리산에 돌아온 기분. 모든 근심 걱정이 물러간 듯한 느낌에 다율은 해맑게 웃었다.

장난기가 살아난 다율이 권지하에게 물을 튀겼다.

“어, 나한테 물 막 튀기네?”

“네!”

다율은 꺄르르 웃으며 손으로는 폭포수처럼 물을 튀겼다. 권지하도 다율에게 물 공격을 했다. 두 사람의 웃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계곡을 울렸다.

“휴우. 잘 놀았다.”

한 시간 동안 찬물에서 첨벙첨벙 물장구를 친 다율은 결국 지치고 말았다.

“잠깐 쉬자.”

“네에.”

권지하가 축 늘어진 다율을 건져서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머리를 꼼꼼하게 털어 주고 얼굴도 보송하게 만들어 준 다음, 권지하가 다율을 데리고 텐트로 갔다.

텐트 바깥에는 아기자기한 가랜드가, 안쪽에는 밝게 빛나는 노란 랜턴이 달려 있어 분위기가 아늑했다.

“우와. 이런 건 언제 달았어요?”

“방금 달았지.”

“오늘 너무 재미있어요.”

“나도.”

이렇게 즐거운 날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오늘은 즐거웠다. 다율은 오랜 셀프 감금의 스트레스를 잊을 정도로 바깥바람을 흠뻑 쐬었고, 자연을 즐겼다.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했다는 사실이 다율을 깊이 위로했다.

“저 낮잠 잘래요.”

“그래. 그 전에 젖은 옷은 벗고.”

“그럼 나가 주세요.”

“싫은데.”

또 실랑이가 벌어졌다. 다율은 간신히 이겨서 텐트 안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물놀이하느라 젖은 옷은 바깥에 잘 마르도록 널어놓고, 미니 선풍기를 튼 텐트 안으로 들어가니 솔솔 잠이 쏟아졌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바깥에는 해가 다 져 있고 인공조명 하나 없는 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일어났어?”

권지하가 부스스해진 다율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해 주었다.

“너무 잘 잤어요. 꿈도 안 꿨네요.”

“모닥불 피워놨어. 얼른 나가자.”

“모닥불이요?”

모닥불이라면 낭만의 상징, 드라마나 영화에 꼭 나오는 소품이었다. 다율은 후다닥 뛰어나가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틈바구니에 쏙 꼈다.

가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중이었는데, 주로 권지하의 어머니가 최근 벌이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수인권 특별법안이 곧 통과될 것 같아. 내가 단식 투쟁 벌인 보람이 있다.”

다율이 슬쩍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음… 어머님. 특별법이라면 그게 어떤 내용인가요?”

“수인을 납치하거나 매매한 범죄자들한테 징역형을 구형할 수 있도록 법안을 발의하는 거지.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런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있거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면 구속해서 죄를 묻게 하는 거. 쉽게 말해서 소급 적용이야.”

“소급이요?”

“예전의 죄까지 처벌받는다는 뜻이야.”

법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다율이었지만, 지난날 자신을 괴롭힌 수인 헌터들이 처벌받을 수도 있다니 기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법안이 통과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 법이 실시되어 그 못된 헌터들이 줄줄이 감옥에 들어갈 날은 언제가 될까.

혹시 그 전에 내가 잡혀간다면….

“어머님. 그런 법률이 시행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음. 사실 지난 몇 년간 준비했지만 한동안 진도가 안 나갔거든. 그런데 요새는 급물살을 타고 있어. 본격적으로 국회의원들하고 시민단체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올 연말쯤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

“그렇군요. 연말….”

어서 그날이 되었으면 좋겠는걸. 다율은 아직도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초조했다. 그 전까지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비극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밝고 유쾌한 자리에서 나 혼자 우울한 티를 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다율은 적당히 웃으면서 분위기를 맞췄다. 마시멜로 꼬치를 모닥불에 구워 권지하와 나눠 먹기도 하고, 매형과 누나 그리고 부모님께 수줍게 권하기도 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율은 부끄럽지만 또 행복했다.

“이제 자자,얘들아.”

“네! 좋은 밤 되세요.”

다율은 하품을 하며 인디언 텐트로 돌아왔다. 에어 매트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여름용 홑이불을 매트리스 커버 삼아 위에 깐 다음, 권지하는 다율을 위한 캠핑용 미니 베개를 꺼내 주었다.

모기장을 치고 문을 열어두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다율의 몸을 선선하게 식혀 주었다.

“지상 낙원이네요.”

“그러게.”

두 사람이 슬슬 또 뽀뽀 무드를 잡아가던 때, 텐트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 누나!”

“나 혜현이랑 통화 중이다. 너희 얼굴 보여 달래.”

권지하의 누나가 영상통화 중인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화면 안에 김혜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어? 혜현 배우님, 안녕하세요!”

다율이 발랄하게 인사했고 권지하는 대충 손을 흔들었다.

“아! 나도 가고 싶었는데 이놈의 스케줄이 원수다. 나 빼고 지금 신났지?”

“배우님도 오셨으면 재밌었을 텐데. 다음에 같이 놀아요!”

다율이 배시시 웃었다.

“진짜 내가 CF만 아니었어도 다율이 보러 달려갔을 텐데 너무 아쉽다.”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다율이가 아닌데요.”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카메라 렌즈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야! 권지하!”

김혜현이 소리쳤지만 권지하는 다율을 물고 빠느라 여념이 없었다. 권지하의 누나는 킥킥거리며 다시 핸드폰을 들고 사라졌다.

“눕자.”

“네.”

권지하가 다율을 자리에 눕히고 선풍기를 다율 방향으로 고정시켜 주었다. 하지만 하도 잘 놀아서일까. 다율은 눈만 말똥할 뿐 하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 안 와?”

“네. 엄청 안 와요. 손톱만큼도 안 졸리네요.”

“그럼 차라리 밖에 나가서 밤하늘 구경할래? 산책하고 오면 졸릴 수도 있잖아.”

“좋아요!”

다율은 몸을 일으켜 권지하와 텐트를 빠져나왔다. 밤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바람이 더 차가웠다.

“춥지?”

“배우님이야말로요. 몸도 차가우신데.”

“난 괜찮아.”

“저도 몸이 늘 뜨끈해서 괜찮아요. 이것 보세요, 배우님.”

다율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권지하는 피식 웃더니 다율의 손바닥에 쪽, 입을 맞췄다.

“그나저나 우리 다율이, 언제까지 배우님이라고 부를 거야? 이제는 형이라고 불러 달랬잖아.”

“그건 부끄러워서 좀….”

다율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권지하를 올려다봤다. 눈꺼풀이 감겼다 열릴 때마다 갈색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났다. 그 안에는 권지하에게 품은 무한한 애정이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환하게 반짝였다.

권지하는 이 요망한 매니저를 이대로 한입에 삼켜 버릴까, 고민하다가 다율을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다율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읍!”

“형이라고 할 때까지 키스할게.”

“으응…!”

권지하가 집요하게 다율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커다란 손으로 다율의 목 뒤를 받치고 한 팔로 마른 허리를 휘감으니 다율은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형이라고 해 봐.”

권지하가 입술을 떼지 않고 속삭였다. 겨우 숨 쉴 시간이 주어진 다율이 헥헥거렸다.

“형이라고 해. 어서.”

“으음…!”

말을 해 보라고 하면서 정작 키스를 퍼붓는 권지하 때문에 다율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황홀한 키스가 이어지고, 끈적한 기운이 물이 올랐을 때 다율은 힘겹게 한마디를 꺼냈다.

“혀, 지하 형….”

그 소리에 권지하는 눈이 뒤집혔다.

“지금 뭐라 그랬어.”

“형…이라고 했는데, 읍!”

다시 입술이 틀어막힌 다율은 폭풍처럼 쏟아지는 키스를 감내해야 했다. 안 불러도 키스, 불러도 키스였다.

장장 30분에 걸친 키스 세례가 끝난 후에야 다율은 권지하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산책은 언제 하고 밤하늘은 언제 봐요?”

“아, 맞다.”

권지하는 다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겨우 정신을 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