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70화 (70/95)

70화

“얼굴이 쿠키만 하네.”

“네?”

“…동글동글.”

그녀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마치 쿠키가 아닌 다율이 먹음직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에 손을 얹어 제 쪽으로 당겼다.

“누나. 쳐다보지 마.”

“야, 닳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떻냐!”

누나의 파워풀한 눈빛과 목소리에 다율은 움찔했다.

“닳는다니까. 안 그래도 조그만데 사라지면 누나가 책임질 거야?”

“쓰읍.”

누나는 아쉽다는 듯 물러나며 빨간 입술을 축였다. 매형은 그러거나 말거나 존재감 없이 앉아 가끔씩 누나의 입에 쿠키를 넣어 주었다.

이렇게 아웅다웅하기도 하는구나. 부럽다. 난 외동이라서 한 번도 이래 본 적이 없는데….

황금다람쥐 가문은 워낙에 손이 귀한 집안이라, 어른들 말로는 다율이 태어난 것도 기적이라고 했다. 다율은 또래의 황금다람쥐 사촌이나 육촌, 팔촌 한 번 본 적 없이 어른들에 둘러싸여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독립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쭉 혼자 살았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평생의 운명인 줄 알았건만 다행히도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니 아기다람쥐를 많이 낳으면 좋지 않을까. 요즘 다율의 마음속에 비밀스럽게 자라난 소망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머릿속에 아기다람쥐 생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부쩍 늘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기들에 대한 욕심과, 부끄럽지만 아기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호기심도 엄청나게 자라났다.

희한한 점은 그럴 때면 동물 귀가 생겨나는 부위가 간질간질해진다는 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고 가끔은 등허리와 엉덩이를 잇는 부분, 즉 다율의 꼬리 부위가 뜨끈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더욱 아기 생각이 절실해졌다.

아기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활기찬 집안. 아기다람쥐들과 재미있게 놀아 주는 권지하. 다율은 이따금 그런 장면을 상상하며 구체적인 생각까지 해 봤다. 수컷이어도 임신을 할 수 있으니, 권지하만 협조하면 아기다람쥐를 낳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내 정체를 밝혀야 하는걸. 나는 사실 수인이고 당신과 아기다람쥐를 만들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 권지하가 놀라 자빠지지 않을까. 다율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샛길로 샌 다율이 심각해 보여, 권지하가 다율의 뺨을 콕 찔렀다.

“다율아.”

“네?”

그러더니 쪽. 그 뺨에 뽀뽀를 했다. 다율은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었다. 어떻게 부모님과 누나 앞에서 애정 행각을…! 으악!

“휴가 왔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있어. 그냥 평소처럼 지내도 돼.”

“어… 그… 그래도 돼요?”

다율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가 초점 없이 허공을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당사자가 민망할까 봐 배려해 주는 모습에 다율은 감동했다.

근데 정말 괜찮은 거 맞는지? 다율은 좀 의아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튿날, 다율을 포함한 온 가족은 근처 계곡으로 캠핑을 떠나기로 했다. 아버지와 매형은 아침부터 먹거리와 바비큐 장비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어머니와 누나는 그들을 감독했다.

다율도 역할을 하나 맡았다. 이날을 위해 가져온 오리 튜브에 바람을 불어 넣는 일이었다. 권지하가 창고에서 에어 컴프레서를 가지고 와 사용법을 알려 주자, 다율은 힘들이지 않고 오리를 부풀릴 수 있었다.

오리 튜브는 생각보다 훨씬 컸는데, 평균 키에 가까운 다율이 올라타도 될 만큼의 크기였다.

“이걸 입으로 불어서 해결하려고 했다니… 제가 참 어리석게 느껴지네요.”

다율의 자조 섞인 한탄에 권지하가 쿡쿡 웃었다.

“얘들아, 얼른 가자!”

“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마당으로 나갔다. 권지하가 아주 가끔 사용한다는 트레일러 달린 캠핑카, 매형의 무난하다 못해 뒤돌아서면 기억도 안 날 것 같은 평범한 SUV, 부모님의 차까지 세 대가 나란히 출발했다.

“너무 신난다!”

오리가 뚱뚱한 관계로 다율은 튜브를 뒷좌석에 태웠다. 운전석에 앉은 권지하는 조수석 차창을 열고 좋다고 환호하는 다율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한 20분쯤 갔을까.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진 계곡이 하나 나왔다. 깨끗하고 맑은 물이 콸콸 흐르면서도 성인 허벅지 높이를 넘지 않아 물놀이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 옆으로는 평평한 땅까지 널찍하게 펼쳐져 있어, 권지하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자주 캠핑을 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산… 공기… 계곡, 너무 좋아요.”

다율은 영화 촬영장에서 캠핑족 역할을 해 본 적은 있었지만, 진짜로 텐트를 치고 들어가 눕거나 코펠로 요리를 해 먹으면서 즐기는 캠핑은 처음이었다.

넓은 의미로 보면 다율의 다람쥐로서의 수인생 자체가 캠핑에 해당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거칠고 내추럴했다.

“그늘막부터 치자. 텐트도 미리 쳐 놓고.”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세 커플이 각각의 타프를 쳤다. 다율네는 인디언 텐트를 세우고 알록달록 기하학적 무늬가 인상적인 타프를 쳤다. 전체적인 모습이 아기자기하면서도 화사해서 다율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모습이었다.

“우리 텐트 예뻐요.”

“에어 매트도 깔아 줄게.”

권지하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푹신하고 부드러운 에어 매트를 만들어 주었다. 텐트 안에 방수포와 매트를 깐 다음 누워 보니, 다율은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식구들은 식사 준비 조와 텐트 설치 조로 나뉘어서 일을 했다. 식사 준비는 권지하의 아버지가 주도했는데 다율은 아버지가 고기를 손질하고 야채를 다지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배우님이 괜히 요리를 잘하시는 게 아니구나. 아버지 닮아서 그런 거였어.

다율이 눈망울을 반짝일 때마다 아버지는 다율의 입에 자두나 복숭아를 물려 주었다. 처음 팬미팅 준비를 위해 만났을 때는 무뚝뚝한 인상에 대나 이으라고 버럭하는 모습이 강렬했지만, 이렇게 보니 참 다정한 분이었다.

“접시 좀 닦아 줄래?”

“네!”

다율이 반질반질 윤이 나게 캠핑용 그릇을 닦는 동안 누나와 어머니는 그늘진 곳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수박을 먹었다.

“다율아. 대충 하고 이리 와.”

“아빠가 알아서 하실 건데 그냥 와서 우리랑 수박 먹자.”

“네! 조금만 더 닦고요.”

다율이 열심히 그릇을 닦으며 윤을 내려 하자 어머니가 직접 와서 다율을 데리고 갔다.

두 여자 사이에 앉혀진 다율은 양쪽에서 날아드는 수박을 정신없이 받아먹었다. 아이스박스에 넣어 왔더니 달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수박도 귀엽게 먹네.”

“네?”

“다율이도 알 텐데. 자기 귀여운 거.”

“아… 아니요.”

평소에 권지하가 귀엽다고 자주 말해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면전에서 남에게 칭찬을 받으니 너무나 쑥스러웠다.

“누나! 다율이 괴롭히지 말랬지.”

멀리서 매형과 타프를 점검하고 있던 권지하가 소리쳤다. 처음 보는 권지하의 소년 같은 모습에 다율은 그만 웃어 버렸다.

곧 맥주로 양념한 치킨 요리가 완성되었다.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밥 먹을 준비를 마쳤다.

“와. 바비큐네요!”

숯불 그릴 위에 온갖 돼지고기와 소고기, 버섯, 양파, 구워 먹는 치즈가 가지런히 놓였다. 개중에는 예쁘게 깐 알밤도 있었다.

“다율이가 좋아한대서 밤도 준비했어.”

“진짜 맛있어 보여요. 고맙습니다.”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로 그릴 위 재료들은 푸짐하고 다양했다.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것을 보랴, 군밤이 타지 않도록 굴리랴 다율은 바빴다.

“다 익었다.”

앞장서 고기를 굽던 권지하가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다율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너무 맛있어…!”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환상적인 맛에 다율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나는 입도 아니냐?”

누나가 권지하의 옆구리를 쳤다.

“나한테는 다율이 입이 제일 중요해서.”

“말이나 못 하면.”

어머니, 아버지, 매형이 와하하 웃었다. 다율은 이렇게 왁자지껄하게 둘러앉아서 고기를 먹는 게 처음이어서 이 모든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역시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좋아. 이 사람들과 가족이 된다면… 내가 배우님의 짝이 된다면 이런 시간을 또 가질 수 있는 걸까.

“아, 해.”

눈앞에 소담한 쌈이 들이밀어졌다. 권지하가 다율을 위해 예쁘게 싼 상추쌈이었다.

“맛있어요.”

쌈을 꿀꺽 삼킨 다율이 자기도 요령껏 상추에 고기를 얹어 권지하에게 건넸다. 권지하의 차가운 혀가 다율의 손가락 끝을 쪽 빨았다.

다율은 순간적으로 귀가 빨개지며 서둘러 권지하의 입에서 손을 뗐다. 권지하는 그게 못내 아쉬워 자꾸만 다율에게 쌈을 싸달라고 졸랐다.

“이제 배부르게 먹었으니까 치우고 물놀이하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권지하의 누나가 매형을 시켜 자리를 정돈하게 한 다음 물가로 뛰어들었다. 다율도 매형을 도와 뒷정리를 한 다음 살그머니 물가로 다가갔다. 물이 너무 맑아 바닥이 다 비쳐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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