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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69화 (69/95)

69화

때는 공사장 공용 숙소에서 쫓겨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숙식 제공의 로드 매니저 자리가 절실했던 다율은 전화로 면접을 예약하고 강남으로 향했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그때만 해도 낯설었던 YU엔터테인먼트 사옥 안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지원자들로 가득했다.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업계 경력이 10년이다, 15년이다, 맹 실장과 인연이 깊다 어떻다 스펙들이 짱짱했다.

난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연줄도 없는데 어떡하지. 떨어지는 것 아닐까?

다율은 소심한 마음을 품고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 명씩 면접장에 들어갈 때마다, 면접자들은 채 3분도 안 되어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뭐야. 관상 면접인가? 왜 이렇게 빨리 내보내.

딱 봐도 적임자를 찾지 못해 빠르게 내보내는 티가 났으므로 다율은 더욱 긴장이 됐다.

“다음. 이다율 님 들어오세요.”

“아, 네!”

차례가 되자 다율은 후다닥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로로 긴 테이블에 앉은 여러 사람이 무채색으로 보이고 단 한 사람만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게 뭐야. 저 사람은 누구길래 저렇게 아름답지?

깜짝 놀란 다율과 권지하의 눈이 마주쳤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자신을 보며 살짝 웃어 주던 권지하의 얼굴이.

“체온부터 재죠.”

“네?”

권지하의 미모에 넋이 나간 다율에게 직원들이 다가왔다.

“실은 저희는 체온이 높은 분을 찾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체온이요?”

황당해하는 다율의 이마에 직원이 비접촉식 체온계를 가져다 댔다. 삐이- 소리와 함께 38.9도라는 숫자가 뜨자 면접장이 술렁였다.

“지금 아프거나 감기 걸린 것 아니죠?”

“어… 저는 원래 체온이 높아요.”

수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인간과는 체질이 달라 다율은 일 년 내내 몸뚱이가 뜨끈했다.

“설마… 저 정도면 합격선인가요?”

다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을 때, 권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종은 내가 잴게요.”

그러더니 권지하가 성큼 걸어 다율의 앞까지 왔다. 가까이에서 본 권지하는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만큼 멋있었으며,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온통 까만 머리에 까만 눈, 눈처럼 하얀 얼굴에 색소가 옅은 입술. 그런 그가 살짝 몸을 숙여 얼굴을 들이대자 다율은 숨이 멎을 뻔했다.

“만져도 돼요?”

“어… 네, 네. 만…지셔도 됩니다.”

다율이 뻣뻣하게 끄덕이자, 권지하가 피식 웃으며 다율의 뺨을 감쌌다. 방금까지 눈밭에 서 있다 왔나 싶을 만큼 차가운 손이 다율의 따끈따끈한 뺨에 닿자, 두 사람 다 조그맣게 탄식했다.

“차갑다.”

“따뜻하다.”

권지하는 다율의 눈을 한참 바라보더니, 뒤돌아서서 면접관들에게 말했다.

“찾았네요. 드디어.”

***

“다율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아?! 아, 그… 저랑 배우님 첫 만남 회상하고 있었어요.”

“아. 그랬구나. 하긴 너희도 평범한 만남은 아니었지.”

어머니의 말에 다율은 입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지금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띵동.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어?”

“승하 왔나 보다. 다율이랑 지하가 가서 문 열어 줘.”

“어?! 네!”

다율은 권지하를 따라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여니 머리가 긴 권지하가 서 있었다.

“헉.”

닮아도 너무 닮았어. 특히 저 날카로운 눈매랑 드라이아이스 효과를 뿜어내는 듯한 냉한 이미지가.

“안녕하세요! 이다율입니다. 권지하 배우님 매니저예요.”

다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권지하의 누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귀여워….”

“네? 뭐라고요?”

“어서 와요. 누나도 매형도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매형도 왔다고? 다율은 그제서야 존재감이 희미한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한 마리의 양처럼 생긴, 초식동물 상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다율이에요.”

“반가워요. 전 지하 매형 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달려 나와 딸 부부를 맞이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권지하가 다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나 조심해.”

“네?”

“귀여운 걸 보면 잡아가는 습관이 있어.”

“뭐… 뭐라고요?”

“너 잡아가면 가만히 안 있을 거지만, 일단은 조심해.”

“켁.”

내가 귀엽나? 다율은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승하네는 밥 먹고 왔다고 하네. 그럼 이따가 다 같이 야식 먹기로 하고 일단은 좀 쉬자.”

“네. 안 그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권지하가 다율을 제 품 안에 가두더니, 2층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갔다. 다율은 어리바리 그의 손에 끌려 계단을 올랐다.

권지하의 방으로 올라온 두 사람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간지러워요!”

“간지러우라고 만지는 거야.”

권지하의 손길이 등과 옆구리를 만져대자 다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권지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율을 침대로 쓰러뜨렸다.

“배우님…! 아래에 부모님도 계신데.”

“뭐 어때서.”

“뭐가 어떻냐니요. 창피하잖아요.”

권지하는 냅다 다율을 끌어안고 좋은 냄새가 나는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어차피 우리 사이 다 아셔.”

“네?! 뭐라고요?”

소스라치게 놀란 다율이 권지하를 뿌리치고 일어났다. 놀라다 못해 경악한 다율을 보며 권지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다 아신다고.”

“어… 언제부터요? 얼마나 자세히?”

“전부, 모조리, 다.”

다율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다율 기준으로 권지하와 간질간질한 사이가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인데 어떻게 부모님이 다 알고 계신 걸까 싶었다. 실시간 중계를 한 게 아니고서야 그건 불가능한데…?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 일단은 지금 내가 급해.”

“뭐가 급하다는 거예요?”

“다율이 입술이.”

권지하가 다율의 허리를 껴안으며 체중을 실었다. 몸이 밀린 다율은 침대에 눕혀져 속수무책으로 뽀뽀 세례를 받았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웃음소리는 방 밖으로 새어 나갈 만큼 컸다.

“지하야. 다율아. 내려와서 맛있는 것 좀 먹어.”

아래층에서 두 사람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키스에 열중하고 있던 다율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권지하를 밀어냈다.

“네! 지금 내려갈게요!”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

권지하가 다율의 양 손목을 붙잡아 침대에 눌렀다. 꽉 눌린 채로 입술이 내려앉자 다율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읏…!”

살구색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인 권지하가 조금 움직여 다율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었다. 다율의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 으읏!”

“다율이 목에서 좋은 냄새 난다.”

권지하가 엷게 웃으며 다율의 귓불에 코끝을 스치고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다율은 바들바들 떨며 권지하의 목에 양팔을 둘렀다.

“얘들아. 안 나오니?”

어머니가 다시 한번 그들을 불렀다. 다율은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권지하를 제 몸에서 떼 냈다.

“이따, 이따가 마저 해요.”

“흠. 그래. 잠깐 쉬었다가 다시 하자.”

권지하가 물러났지만, 다율의 심장은 계속해 뛰었다. 거울을 보니 머리도 부스스하고 얼굴은 빨갛고 입술은 부었고 아주 가관이었다.

아이고, 적당히 해야겠구나.

다율은 급하게 머리를 수습하면서 권지하에게 물었다.

“저기, 배우님. 저 옷 좀 갈아입을게요.”

“어. 갈아입어. 나도 갈아입을 거야.”

“제 말은 뒤를 좀 돌아 주셨으면 한다는….”

“뒤는 무슨.”

권지하가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어 내렸다. 탄탄하고 넓은 가슴팍이 드러나자 다율은 꽥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손가락 사이를 충분히 벌려 시야를 확보했다.

그가 편안한 티셔츠로 갈아입는 동안 다율은 주섬주섬 캐리어에서 자기 옷을 꺼냈다.

“다율이는 왜 안 갈아입어?”

“배우님이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갈아입어요.”

“다율이는 내가 옷 갈아입는 거 구경했잖아. 그런데 왜 나는 구경하면 안 돼?”

“안 돼요! 보지 마세요!”

다율이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권지하를 위협하려 했다. 하지만 권지하는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더 해 보라는 듯 얄밉게 웃었다.

“화… 화장실 가서 입을 거예요!”

다율이 방문을 젖히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권지하는 훗 하고 웃었다.

“그래. 어차피 다 보게 될 사인데 뭐 어때.”

권지하와 다율이 아래로 내려가니, 누나 부부와 부모님이 이미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너희도 빨리 와서 먹어.”

“우와. 쿠키네요?”

어디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오늘의 야식 메뉴는 땅콩 쿠키였다. 다율은 그렇게 밥을 먹어놓고도 또 신이 나서 쿠키를 집어 먹었다.

“지하 아빠가 베이킹을 잘해. 내가 바깥으로 나돌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양반이 애들 키우면서 식사도 간식도 다 만들어 먹였거든.”

“아아. 그랬구나. 진짜 맛있어요, 아버님. 최고예요.”

“허허. 다행이네.”

아버지는 흐뭇한 티를 감추지 못하며 다율 앞으로 산더미처럼 쿠키를 쌓아 주었다. 다율이 닁큼 새로운 조각을 집어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자, 맞은편에 앉은 권지하의 누나가 다율을 빤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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