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휴게소를 나선 이후 다율은 차 안에서 말없이 호두과자를 먹었고, 한 시간여가 지나자 점차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냥 차종이 같은 것뿐이야. 그래, 말도 안 되지. 나랑 배우님의 휴가에 헌터가 쫓아온다는 게 말이 되나. 배우님의 숙소는 어디에도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 흔한 파파라치 한 명 뜬 적도 없는 데다가 장훈이 형도 각별하게 보안에 힘쓰고 있는걸.
그러니 헌터가 우리의 집을 알아냈을 리도 없고 뒤를 밟았을 리도 없잖아. 그냥 흔한 차종이야. 워낙에 평범한 트럭인데 내가 너무 예민해져 있나 보다.
다율은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다짐하며 창문을 열었다. 강원도라 그런지 서울보다 한층 온도가 낮은 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적셔 주었다. 공기 또한 맑아서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바람 좋네요. 어?! 저기 어머님, 아버님이세요!”
골짜기 길 끄트머리에 위치한 권지하의 집. 대문에는 벌써 권지하의 부모님이 나와 있었다. 이윽고 차가 멈추고 두 사람이 내리자 권지하의 어머니가 뛰어왔다.
“오느라 고생했어. 배고프지?”
그녀는 아들보다도 먼저 다율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아휴, 그새 좀 마른 것 같은데 밥을 잘 안 먹니?”
“아뇨. 잘 먹어요. 배우님이 카드 주셔서 잘 사 먹고 그래요.”
“그래. 하루에 밥값으로 천만 원씩 써도 우리 아들 카드에 흠 하나 안 나. 맛있는 거 보이면 무조건 사 먹어. 알겠지?”
어머니가 다율을 조몰락거리면서 예뻐하는 동안, 권지하의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반가운 티는 숨기지 못하는 듯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흠. 들어들 가자.”
“네!”
한번 와 봐서 그런지 정원이 친근하게 느껴져, 다율은 마치 제 집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무가 빼곡하게 심겨 있고 잔디가 잘 관리돼 있어 풀 내음이 솔솔 풍기는 마당은 정말이지 산뜻함 그 자체였다.
다율이 가족들을 따라서 안채로 들어가자, 권지하의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냉장고를 열어 과일을 썰기 시작했다.
“저도 도울게요.”
“손님은 돕는 거 아니야. 아, 물론 손님보다는 훨씬 가까운 사이지만.”
“네?”
“앉아 있으란 소리예요. 지하야, 뭐 하니. 매니저님 앉혀드려.”
어머니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권지하가 주방으로 와 다율을 납치해 갔다. 응접실 소파에서도 가장 푹신한 자리에 앉혀진 다율을 보며, 아버지가 핸드폰을 슬쩍 꺼냈다.
“흠흠. 내가 핸드폰을 새로 장만했는데 말이지.”
“와. 신상 모델이네요. 이거 카메라가 엄청 좋다던데요.”
“그런 의미에서 테스트 좀 해 볼까 싶은데 말이야.”
권지하의 아버지가 빠르게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셀카 모드를 만들었다. 한 프레임 안에 그와 다율의 얼굴이 나란히 담겼다.
“같이 좀 찍으면 어떨까.”
“와! 너무 좋아요. 제가 버튼 누를게요.”
다율이 손가락을 뻗어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박제되었다.
“저도 같이 찍죠.”
권지하가 그들의 등 뒤로 슬그머니 나타나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너도 끼려고? 이눔 자식, 욕심도 많긴. 나도 다율이랑 둘이서만 사진 좀 찍자.”
아버지가 역정을 내며 권지하를 퇴치하려 했다.
“다율이 닳아요. 아껴 주자고요.”
뻔뻔하게 받아치는 권지하를 보며 다율은 자기가 다 민망해 손사래를 쳤다.
“배우님. 저 괜찮아요. 아버님이랑 셀카 찍을래요.”
“흠. 나랑만 찍었으면 좋겠는데….”
“지하 너 욕심 좀 적당히 내! 과일 받아 가고.”
어머니가 주방에서 소리를 높였다. 권지하는 다율과 바짝 붙어서 셀카를 찍는 아버지를 불만 있는 눈으로 보다가 어머니의 불호령에 마지못해 주방으로 향했다.
제철 수박과 자두, 복숭아는 모두 부부가 직접 농사지은 것들이었다. 모양도 예쁘고 향기도 좋은 과일에 다율은 넋이 나갈 만큼 황홀했다.
“너무 맛있어요! 진짜진짜!”
포크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을 놀리며 과일을 해치우는 다율을 보며 부모님은 흐뭇하게 웃었다. 권지하는 간간이 그의 입가를 닦아 주고, 가장 예쁘고 모양이 좋은 수박 조각을 다율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천천히 먹어. 그렇지만 많이 먹어야 돼.”
“배우님도요. 얼른 드셔 보세요. 너무 맛있어요.”
두 사람이 달큼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과일을 권하는 동안, 어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이제 출발한다고? 알겠다. 우리끼리 밥 먹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다율이 귀를 쫑긋 세우자 권지하가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오늘 누나도 올 거야.”
“아. 누나분이요!”
우와. 그 엄청 예쁘고 얼굴 하얗고 차갑게 생긴 누나분을 드디어 뵙는구나. 신기하다.
다율은 권지하의 누나가 사진처럼 냉랭한 이미지일까 궁금해졌다. 동시에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초대받은 기분이 오묘하게 뿌듯하기도 했다.
“우린 승하 오기 전에 밥이나 먹자. 그나저나 다율아, 과일 배는 과일 배고 밥은 따로 먹을 수 있지?”
“그럼요. 자신 있어요.”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다율을 보며 어머니가 깔깔 웃었다.
식탁에는 과장을 약간 보태 호텔 뷔페가 차려져 있었다. 다율이 이름도 모르는 예술적 요리부터 눈에 익은 갈비구이, 냉채, 편육, 장어구이까지 합치면 메인 메뉴만 해도 열댓 개가 됐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센터에는 도토리묵 무침과 묵사발이 위치해 있었다.
“침 고여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어 보일 수가…!”
감동에 빠진 다율을 보며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솜씨 좀 발휘했다. 참고로 저 도토리묵은 유명한 데서 배송받아서 비법 양념장에 무친 거야.”
“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서 들자.”
다율은 수저를 들고 열심히 산해진미를 맛봤다. 부모님도 권지하도 그에게 반찬을 권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다. 다율은 밥을 두 공기나 먹으며 마음껏 회포를 풀었다.
통통. 부른 배를 두드리며 앉아 있자니 아버지가 매실차를 내왔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맛에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캬 소리를 냈다.
“정말 잘 먹어서 보기가 좋아.”
“맛있는 거 대접해 주셔서 진짜 고맙습니다.”
“지하 아빠 음식 솜씨 괜찮지?”
권지하의 어머니가 남편 자랑을 하듯이 말하길래, 다율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게 맞았다.
“어… 그런데 지난번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혹시 어머님 아버님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그러니까 첫 만남이요.”
언뜻 보기에 말수가 없고 무뚝뚝하며 집안 살림의 달인인 아버지. 그리고 외향적이고 수인권 운동가로 국회 앞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고 다니셨다는 어머니는 대조적으로 보였다.
딱히 비슷한 결의 사람들 같지는 않아, 다율은 이전부터 두 부부가 결혼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아, 이 양반이랑 나랑 만난 거? 그건 완전 우연이었지.”
권지하의 어머니가 웃으면서 남편의 어깨를 쳤다.
“내가 젊을 적에 등산을 그렇게 좋아했거든? 에너지가 막 넘쳐흐르는데 주체를 못 하니까 주말마다 등산을 다니면서 해소를 한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서 산속에서 길을 잃었어. 그것도 밤중에.”
“헉. 밤중에 산속에서 길 잃으면 진짜 위험한데요!”
산속 출신인 다율도 밤에는 함부로 골짜기를 나돌아 다니지 않았다. 그만큼 밤의 산은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날은 저물어 오고,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고, 내려가 본다고 시도는 하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지,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부스럭 나는 거야. 비명을 꽥 지르면서 돌아봤는데 세상에.”
“세상에?”
“태어나서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미남이 서 있는 게 아니겠어?”
흠흠. 권지하의 아버지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다율이 보기에도 그는 젊었을 때 굉장한 미남이었을 것 같았다. 지금도 권지하와 판박이가 따로 없으니, 예전이라고 해서 일반인의 외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지하 엄마를 하산하도록 도와줬지. 내가 산에는 정통해서 말이야.”
“아. 그러셨군요. 그때 인연으로 사귀게 되신 건가요?”
다율이 묻자 권지하의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연락처를 물으니까 이 양반이 딱 잘라 거절을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그런 거절을 개의치 않는 성격이야. 알겠지만 국회 앞에서 단식 투쟁도 하고 소싯적에는 삭발도 하고, 뭐 쉽게 말해 안 된다고 하면 할수록 불타오르는 성격이거든.”
“아… 그러면 어떻게 연애를 시작하신 건가요?”
“다음 주말에 가서 또 똑같은 장소에서 길을 잃은 척했지. 그러니까 나타나더라고?”
결론은 어머니가 다섯 번 길을 잃은 척했을 때, 아버지가 마지못해 어머니에게 연락처를 넘겼다는 스토리였다. 그 이후로도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국은 결혼해 남매를 낳고 산다는 해피엔딩에 다율은 감탄했다.
우연한 만남, 그리고 이어지기 쉽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자신과 권지하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첫 만남은 어땠더라.
다율은 몹시도 춥던 1월의 어느 날을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