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67화 (67/95)

67화

그런 노력 덕분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수도권 촬영이 중간쯤 진행되었을 때, 거대 세트장을 짓느라 잠시 여유가 생겼다.

“주연 배우님들, 2주간 휴식이에요.”

감독의 명에 의해 권지하는 뜻밖의 휴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백장훈을 구워삶아 어떤 스케줄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벽 방어를 한 그는 다율과 2주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수립했다.

“다율아. 형 휴가 생겼어.”

“진짜요?”

귀가한 다율에게 깜짝 통보를 하니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두 배가 됐다. 권지하가 나가고 나면 집을 혼자 지켜야 했기에 다율은 안 그래도 심심하고 쓸쓸하던 차였다.

“2주간 푹 쉬어도 돼. 우리 같이 보내자.”

“너무 좋아요, 배우님.”

“다율이 하고 싶은 거 있어?”

“어….”

어떡하지. 바깥에 나가는 건 무서운데…. 그렇다고 나 때문에 배우님도 외출하지 못하는 건 싫어. 자유 시간을 만끽하게 해드리고 싶은데.

다율이 작은 머리통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권지하가 바로 해답을 내놓았다.

“좀 프라이빗하게 보내면 어떨까? 우리 집도 가고 독채 풀 빌라도 가고. 그렇게 보내자.”

“어… 그러면 사실상 바깥 외출은 제대로 못 하는 셈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가족들 얼굴 본 다음에 너랑 오붓하게 지내고 싶어.”

“좋아요!”

다율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권지하의 부모님들은 너무나 멋지고 또 친절한 분들이셨기 때문에 꼭 다시 만나 뵙고 싶었다. 집 또한 깊은 산골에 있어 위험하지도 않고 굉장히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수인 헌터 따위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피서를 간단 생각에 다율은 신이 났다.

“어, 그런데 잠시만요. 풀 빌라는 저희 둘만 가는 거예요?”

“당연한 걸 묻고 있네. 거기는 가족들하고 안 가. 다율이랑 나만 같이 있을 거야.”

매일 같이 밥을 먹고 한 침대에서 자는데 풀 빌라 가면 뭐가 다른가? 다율은 살짝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터넷으로 풀 빌라에 대한 많은 것을 검색해 본 이후 권지하의 뜻을 알게 되었다.

“풀 빌라… 좋은 거구나.”

바다랑 다르게 수영하다가 뽀뽀도 할 수 있고, 알게 모르게 끈적한 분위기가 조성된다고 블로그에 적혀 있었다.

“나 너무 기대되는데?”

다율은 간만에 활기를 찾고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며 기뻐했다. 그러다가 가끔 정색하며 너무 짐승 같은 생각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얼굴이 시뻘게지고 야릇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아… 봐도 봐도 안 질린다.”

오늘도 풀 빌라에 대한 많은 것을 조사한 뒤, 다율은 소파에 편히 기대 <시티 오브 나이트>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재방송 편성표까지 뒤져가면서 꼬박꼬박 챙긴 덕에 벌써 네 번째로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미모면 미모, 연기력이면 연기. 미쳤다.”

다율은 감탄을 내뱉으며 해바라기씨 초콜릿을 한 알 입 안으로 골인시켰다. 상대 여배우 윤혜미의 어설픈 연기만 빼면 이 드라마는 완벽했다. 지금까지 권지하가 이뤄낸 어떤 필모그래피보다도 완벽하고 또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어? 배우님 오실 시간이네.”

벽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일곱 시. 슬슬 권지하가 돌아올 시간이 되자 다율은 집 안을 바삐 오가며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라고 해 봤자 거창한 건 아니었다. 마실 물을 떠놓고 에어컨 온도를 적당히 맞추는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야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고 싶었지만 그건 권지하가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다율이 요란한 잔칫상을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하필 그날 촬영이 지연되었었다.

새벽에야 귀가한 권지하는 식탁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다율을 봤고, 그날 이후 다율에게는 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대신 권지하가 늦는 날은 한도 없는 카드로 뭐든지 시켜 먹으라는 엄명을 받았다.

물론 다율의 성격상 그 카드는 잘 쓰이지 않았다. 권지하가 은은하게 압박을 주는 바람에 유명 호텔 셰프가 차렸다는 레스토랑에서 배달을 몇 번 시켜 먹기는 했지만 한도가 없다 보니 기별도 안 갔다.

띵동. 벨 소리가 울렸다.

“왔다!”

다율은 바쁘게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권지하가 양손에 짐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다율이 폴짝 뛰어올라 권지하의 목에 양팔을 감고 안겼다.

“잘 있었어?”

도망 안 가고 잘 있었군. 권지하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의 미소에 또 한 번 설렌 다율이 쪽. 가벼운 입맞춤을 선사했다.

“배우님 기다리면서 잘 있었어요. 그런데 이건 뭐예요?”

다율이 권지하가 들고 온 쇼핑백을 가리켰다.

“아, 이거 수영복.”

“웬 수영복이요?”

“풀 빌라 가면 이거 입고 같이 수영해야지.”

“아, 맞다.”

“지난번처럼 물에 빠지면 안 되니까 제대로 가르쳐 줄게. 나도 수영 썩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때 생각 고쳐먹었어. 우리 다율이랑 같이 수영 연습해야지 싶네.”

지난번 동해에서 다율이 물에 풍덩 빠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수영을 할 줄 몰라 허우적거리던 다율을 권지하가 건져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로 다율은 큰 위험에 빠져 구천을 떠도는 수인의 넋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 그럼 이건요?”

다율의 시선이 온통 알록달록 노랗고 주황색인 물건에 가 닿았다.

“이건 튜브. 수영 익히기 전에 물놀이하려면 튜브가 있어야지.”

다율이 쇼핑백 안의 물건을 펼쳐 보았다. 바닥에 늘어놓으니 물건의 정체는 초대형 오리 모양 튜브였다.

“오리네요?”

“응. 이게 올라타기 좋게 생겼더라고.”

“와, 얼른 불어 볼래.”

다율이 오리를 끌어안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욱, 후욱.”

열심히 숨을 모아 튜브에 바람을 불어 넣었지만, 튜브가 너무 큰 탓인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그냥 납작한 오리에서 조금 덜 납작한 오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헥헥.”

“안 힘들어?”

“괜찮, 허억.”

다율이 오리를 놓치며 쓰러졌다.

“숨 막혀, 헉헉.”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깨물어 버리고 싶었지만, 여린 살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다율의 입술을 쪽 빨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휴가 첫날은 날씨가 몹시도 맑았다. 여름 햇볕이 따갑고 바람도 뜨거웠으나 다율의 흥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간만의 외출에 들뜬 다율은 페인트칠 수준으로 얼굴과 드러난 팔다리에 선크림을 발랐다.

오리는 아직 납작 오리였지만 권지하가 에어 컴프레서로 바람을 넣어 주겠다고 약속한 상태였으므로 꼭 데려가기로 했다. 오리와 챙 넓은 모자를 챙기고 샌들을 신으니 외출 준비가 끝났다.

“그럼 가 볼까?”

“좋아요!”

바깥으로 나와 차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다율은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을 느꼈다. 차창을 열고 쌩쌩 달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그의 기분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제가 디제이 할래요.”

“그래.”

다율은 나름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비트가 빠르고 경쾌한 곡들을 틀었다. 가끔은 말 같지도 않은 랩을 곁들이는 바람에 권지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노래랑 랩은 네 영역이 아니구나. 그래도 괜찮아, 얼굴이 예쁘니까.

그 언젠가 와우 기획 임원진들과 똑같은 결론을 내리며 권지하는 다율이 아이돌이었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돌을 한다고 오디션을 또 한 번 봤다가는 그 기획사에 불을 지르리라고도 생각했다.

“휴게소다! 우리 호두과자 먹어요!”

“알았어. 멈췄다 가자.”

기가 막히게 휴게소 이정표를 읽어낸 다율이 차를 멈춰 세우자고 했다. 차가 속도를 줄여 휴게소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호두과자가 어디 있지?”

“저기 끝 쪽에 있는 것 같은데.”

차를 댄 곳과 호두과자 판매점이 꽤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둘은 상당히 긴 거리를 걸어가야만 했다.

“호두과자 100개 먹어도 되나요?”

조잘조잘 떠들던 다율의 눈에 낡은 트럭이 들어온 것이 그때였다. 남색의 트럭 차종을 알아본 순간, 다율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촬영장까지 쫓아왔던 인상 나쁜 수인 헌터. 그가 타고 다니던 트럭과 똑같이 생긴 차였다.

“다율아?”

다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따라오지 않자, 권지하가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다율이 평소 같지 않게 이상했다.

“왜 그래?”

이 더운 날씨에 다율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자신이 여러 번 부르는데도 듣지 못했는지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그… 그게,….”

권지하가 가까이 다가가 다율을 살피려던 때였다. 낡은 트럭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다율은 퍼뜩 놀라 권지하의 품을 파고들었다.

“다율아.”

“배, 배우님.”

헌터가 아니었다. 곧이어 트럭에서 내린 지극히 평범한 인상의 아저씨를 보고 다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 다율을 숨기듯이 안아 주고 있던 권지하가 다율을 부축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갑자기 왜 이래.”

“너무 더워서 몸이 놀랐나 봐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얼른 가요, 얼른.”

다율은 밝은 척하며 권지하에게 팔짱을 꼈다. 하지만 권지하는 방금의 다율이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는 점, 그리고 트럭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대체 저 트럭이 뭐길래?

권지하는 트럭을 눈여겨봤다. 다율이 자신을 떠난 이유와 트럭이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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