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66화 (66/95)

66화

그가 다율의 양어깨를 꽉 잡고 다독였다. 집이 넓다고는 해도 이 방 안에서 어딜 갈 것도 아닌데, 권지하는 어딜 가지 말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하듯이 짚었다.

…내 손목을 붙잡아 오던 배우님의 손길. 조금 강하고 거칠었어. 혹시 내가 다시 어딘가로 도망쳐 버릴까 봐 걱정이 되시는 걸까?

다율은 권지하가 움켜쥐었던 손목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영화 촬영 때 데이트를 나가 선물받았던 팔찌가 묶여 있었다.

“배우님….”

나도 떠나지 않을게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

갖은양념을 한 도토리묵 무침과 따끈한 잡곡밥, 온갖 반찬과 갈비찜이 출동해 식탁을 풍성하게 꾸몄다.

“도토리묵 너무 맛있어요!”

다율은 산더미처럼 쌓인 도토리묵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권지하는 다율에게 아예 접시 여러 개를 깔아 주었다.

“도토리묵 말고 이것도 먹어 봐.”

“와, 갈비다. 고기 너무 연해요. 밤도 달콤하고.”

다율은 밥공기 바닥이 깨끗하게 드러나도록 밥을 먹고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견과류 토핑까지 올려 야무지게 먹었다.

“와… 맛있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그런데 정작 배가 부르고 집에 적응이 되니 미뤄두었던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이렇게 권지하의 곁으로 돌아왔다 한들 근본적으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다율은 인간이 아닌 희귀종의 수인이라는 사실, 악덕한 헌터에게 쫓기고 있다는 점은 그대로이지 않은가.

…내가 수인이라는 진실을 숨기고 있는 이상 배우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나에게 속게 돼. 하지만 나는 인간으로 위장해서 언제까지나 헌터를 피해 살아가야 하지. 도돌이표야.

“무슨 생각 해?”

다율의 숟가락에 담긴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녹아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권지하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파에 앉아 권지하와 한 몸인 듯이 끌어안겨 있었지만, 다율은 자꾸만 딴생각이 들었다. 수인, 헌터, 다시 집을 나가게 되는 일이 있진 않을까. 그런 것들에 대하여.

속이 복잡하니 제아무리 권지하가 나오는 드라마라 해도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다율은 드라마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아이스크림 떠먹는 것도 잊었다. 그러다가 극 중의 권지하가 뱉는 대사가 귀에 제대로 꽂혔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어. 그런다고 변하면 사랑이야?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아.

남자주인공인 권지하가 여자주인공에게 강렬한 눈빛을 쏘며 사랑을 고백했다. 다율은 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날 사랑해 준다면. 배우님이 만약에 그런 사람이라면….

“다율아. 왜?”

다율의 유례없이 진지한 표정에 권지하가 조심스럽게 자그마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권지하의 눈빛에 다정함이 듬뿍 어려 있었기에 다율은 용기를 냈다.

“배우님. 있잖아요.”

“응.”

“제가 어떤 모습이라고 해도… 배우님은 절 사랑해 주실 수 있나요?”

다율은 질문을 해 놓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권지하는 바로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하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희한하고 별난 사람이라고 해도요?”

다율이 다시 물었다. 권지하는 잠시 침묵하더니 진중한 말투로 물었다.

“혹시 다율아. 그게 네가 나를 떠난 이유랑 관련이 있는 거야?”

다율은 입술을 꽉 깨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인정해도 될 것 같았다.

“다율아.”

권지하가 긴장으로 차가워진 다율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지금 바로 말해 주지 않을 걸 알아.”

“….”

“모든 걸 털어놓으려면 용기가 필요하겠지. 네가 나한테 쉽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날 떠나가지도 않았을 거야.”

“…맞아요.”

다율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권지하가 그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어떤 사정이 있어도 상관없어.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관계없고, 그 사정을 늦게 털어놔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아.”

“배우님….”

“다만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야.”

권지하가 다율의 뒷목에 손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휘감았다. 마치 뱀이 작은 동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똬리를 트는 자세와도 비슷했다.

다율은 답답하고 숨이 막혔지만 이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온몸을 옥죄어 오는 이 사람이 너무나 고맙고 또 애틋했다.

쪽.

권지하가 고개를 숙여 다율의 입술에 버드키스를 했다. 한 번, 두 번 짧은 입맞춤이 오갔다. 다율의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짧게 붙었다 떨어지던 입맞춤이 조금씩 길고 질척해졌다. 점막끼리 맞닿으며 축축한 소리가 났다. 다율은 눈을 꼭 감고 권지하의 목에 양팔을 감았다.

그러자 권지하가 다율을 소파로 밀어 넘어뜨렸다. 체중 차이가 많이 나는 둘이었기에 권지하가 다율 위로 올라타는 것만으로 자연스러운 결박이 이루어졌다.

“하아. 배우, 님.”

다율은 키스하는 내내 호흡이 달려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하면 되나 저렇게 하면 되나. 턱을 트는 각도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어설프게 낑낑대고 있는 다율의 아래턱을 권지하가 다소 강하게 잡았다.

조금 무서워. 배우님이 날 너무 원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나 역시도 너무나 뜨겁게 배우님을 원하는 것만 같아서.

다율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권지하와 눈을 마주쳤다. 바로 코앞에 마주한 까만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했다.

다율이 손을 뻗어 권지하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권지하가 체중을 실어 다율을 더욱 압박했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다율의 가슴 안에 있던 응어리가 풀려 나갔다.

날 기다려 줄 사람. 내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 준다고 약속해 주었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용기를 낼게요.

다율은 그대로 소파에서 잠들었다. 권지하는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다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밤을 샜다.

“다율아. 넌 이제 큰일 났어. 난 너 절대로 안 놔줘.”

권지하가 손을 들어 다율의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납작하고 마른 배가 얇은 티셔츠 너머로 잘 느껴졌다.

“으음….”

꼬물거리며 저한테 더 안겨 오는 다율이 만족스러웠다. 그래, 이래야 내 다율이답지. 그러니까 나 떠나지 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줄 테니까.

***

두고 온 짐과 현금 때문에 고시원에 한번 다녀와야 했다. 다율은 편의점 사장에게 깍듯하게 사과하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통해 사장과 대타 아르바이트를 연결해 주었다.

다율이 편의점 식구들과 인사를 하는 동안 권지하는 차도에서 그를 기다렸다. 소탈한 동네에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외제 차가 세워져 있으려니 행인들의 시선이 쏠렸다.

다율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황급하게 짐을 챙겨 고시원에서 나왔다. 그리고 차에 올라 말했다.

“집에 가면요, 배우님.”

“응.”

“저… 매니저 일은 못 할 것 같아요.”

다율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권지하는 알겠다는 대답만 할 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스케줄 같이 못 뛰어서 죄송해요. 그런데 제가… 외출하기가 좀.”

“거기까지. 자세히 말 안 해도 돼.”

권지하가 다율의 말을 잘랐다. 다율은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권지하가 못내 고마웠다.

짐까지 다 가지고 온 다율은 그야말로 집에 틀어박혔다. 권지하는 백장훈 매니저와 함께 동해 촬영장으로 떠났고, 이내 동해 촬영이 끝났다.

그다음에는 서울이나 경기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촬영이 이어졌다. 이른 새벽이나 아침 신이 많았기에 권지하는 새벽 3, 4시에 밖으로 나갔다. 다율은 잠이 덜 깬 와중에도 꼬박꼬박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다율이 형한테 뽀뽀.”

쪽. 눈도 다 못 뜬 다율이 권지하의 뺨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권지하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다율의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오늘도 잘 다녀오세요.”

“다율이도 재미있게 잘 기다려.”

권지하가 나간 다음, 다율은 새벽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활동을 시작했다. 세탁기에 빨랫감을 집어넣고 온 집 안에 걸레질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밑반찬을 몇 가지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에너지가 다 소진되지 않아 다율은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집안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활기차지지는 않았다.

원래 다율은 밖에 나가 지내야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었다. 당연하게도 산속을 뛰어다니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야생동물이었으니까.

물론 권지하의 집은 광활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넓고, 또 아늑한 둥지 같은 면도 있어 편하게 뒹굴거릴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바깥과는 느낌이 달랐다. 살랑거리는 바람, 쨍쨍한 햇볕, 흙냄새와 풀 내음이 그리웠다.

권지하는 밥을 잘 챙겨 먹으면서도 시름시름 여위어 가는 다율이 신경 쓰였다. 외출을 자제하다 못해 아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간다는 사실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권지하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외출을 꺼리는 점도 날 떠난 것과 연관 있을까.

권지하는 다율의 기분을 전환시켜 줄 방법을 찾느라 하루 종일 궁리를 했고, 무조건 자신이 시간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장에서 열연을 하며 빠르게 일정을 마치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아무 곳도 들르지 않고 칼같이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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