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해 뜰 시간이 되자 다음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왔다. 그녀가 눈 밑이 시커멓고 초췌해 보이는 다율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새벽에 진상 손님 왔었어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아니요. 그냥 좀 힘이 들어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다율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폐기 음료라도 마시고 나가지 그래요. 이제 갓 유통 기한 지난 것들이라 괜찮을 텐데.”
“그럴까요.”
아르바이트생이 다율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캔 커피였다. 권지하의 얼굴이 박혀 있는, 새벽 내내 다율이 백여 개는 팔아 치운 그 캔 커피.
“죄송한데 이건 안 마실게요.”
“다율 씨 커피 안 마시나? 이거 맛있던데.”
“맛이… 저한테는 너무 써요.”
다율은 커피를 사양하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섰다. 이제 막 동이 트려는 시간, 거리는 한산하고 이따금 버스가 지나가면서 나는 배기음 외에는 들려오는 소리도 없었다.
외로워. 나도 이 외로운 풍경을 이루는 존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시원 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낯익은 실루엣이 다율 앞에 서 있었다.
“…!”
너무 놀라면 믿기지가 않는가 보다. 다율은 눈앞에 서서 자신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권지하가 환상인 줄 알았다. 포스터에서, 캔 커피에서, 또 꿈속에서 하도 많이 봐서 헛것을 만들어 낸 줄 알았다.
“다율아.”
하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 권지하의 것이었다. 다율의 귓가를 항상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 가슴을 울리던 그윽한 목소리.
“배, 배우님….”
다율은 두려웠다.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무작정 도망친 자신에게 권지하가 실망했을까 봐 무서웠다. 날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 애정이 식었으면 어떡하지. 무책임하게 매니저 자리를 관뒀다고 화를 내면 어떡하지.
자신의 잠자리를 덥혀 주지 않고 도망친 죄가 크다고 나에게 책임을 물으면 어떡해?
다율이 소극적으로 눈을 피하며 주춤거렸다. 하지만 권지하는 아무런 책망도, 분노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다율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 뿐이었다.
“집으로 가자.”
다율을 바라보며 오직 그 한마디만을 남겼다. 다율은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배우님….”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돌아와 줘.”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다율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율아.”
다시 한번 부드럽고 애절한 부름이 들려왔다. 다율은 더 이상 끓어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타들어 가고 감정이 용솟음친다. 이 사람이 없이 살아가려고 생각했다니,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흑.”
“울지 마.”
권지하가 팔을 뻗어 다율을 끌어안았다. 다율은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안기며 입술을 깨물고, 숨을 헐떡였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죄송… 죄송해요.”
권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율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며 그의 울음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 다율의 호흡이 진정되었을 때, 한마디를 했다.
“집으로 가자.”
다율은 그 말을 곱씹었다. 집으로. 우리의 집으로.
“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다율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권지하와 집이 간절했다.
***
차는 밤늦은 도로를 달려 나갔다. 운전을 하는 동안도 권지하는 가끔씩 다율이 앉은 조수석 쪽을 쳐다봤다.
사실 권지하는 다율을 만나면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덮어두는 게 나을 듯했다. 왜 나를 떠났는지는 나중에라도 충분히 물을 수 있다. 지금은 우선 다율을 자신의 영역 안에 다시 돌려놓는 것이 중요했고, 다율이 다시는 집을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이따금 훌쩍이는 다율에게 권지하가 말했다.
“다율아, 괜찮아.”
“…정말요?”
“네가 무슨 사정이 있어서 나를 떠났든 간에, 돌아왔으니까 그걸로 됐어.”
다율은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무런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달아났음에도 지하는 자신을 받아들여 줬다. 그동안 지하를 보지 못했던 설움과 합쳐져서, 결국 다율은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차는 곧 숙소 앞에 도착했다. 권지하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집은 다율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온도, 습도,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빛조차도 예전과 하나 다를 게 없었다. 익숙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다율은 자연스럽게 낯설고 삭막했던 고시원이 떠올랐다. 몸이 힘든 것보다도 사실 마음이 더 퍽퍽하고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오려 했다. 빨개진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아 다율은 자꾸만 권지하의 시선을 피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의 뒤통수를 한번 쓰다듬어 준 다음, 두 사람이 함께 지내던 안방 문을 열어 주었다.
“일단 쉬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누워 있어.”
권지하가 다율을 방안으로 들여보내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다율이 쪼르르 달려가 권지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율아…….”
“배우님, 배우님.”
다율은 권지하의 넓고 탄탄한 등에 대고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습기 어린 목소리를 눈치챈 권지하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떨구고 훌쩍이는 다율을 감싸 안았다. 단단하고 힘 있는 팔 안에 갇히자 다율은 마음이 탁, 놓이는 심정이었다. 이 사람의 품 안은 안전해. 기대도 좋아.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 다율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이런 사람을 놔두고 내가 도망가다니 어리석고 또 바보 같았네. 다율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울지 마.”
“죄송, 잘못…….”
“그런 말도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있어.”
“흐……윽, 배우님.”
그런데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소리의 출처는 다율의 배였다. 울다 말고 배 주린 티를 낸 다율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배고파?”
권지하가 하하 웃으며 다율을 더 꽉 끌어안았다.
“……사실 좀 배고파요. 아무것도 못 먹은 지 좀 돼서…….”
“이런. 빨리 먹여야겠다. 뭐라도 배달시켜 줄까?”
권지하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다율을 내려다봤다. 다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배우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도토리묵 무침 먹고 싶어요.”
다율이 머쓱하게 굴며 뺨을 긁었다. 권지하는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알았으니까 쉬고 있어. 내가 만들게.”
“진짜요?”
“응. 얼른 가서 쉬어.”
다율은 그제야 안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이 방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연보랏빛 예쁜 커튼, 깨끗한 침구가 덮인 포근한 침대. 어디선가 나는 향긋하고 좋은 냄새.
……너무나 그리웠어.
다율은 침대를 손으로 쓸어 보다가 몸을 눕혔다. 구름 위에 누운 것처럼 몸이 너무 편안했다.
조금만 자야지. 아주 조금만.
다율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율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긴 눈을 떴다.
“다율아. 밥 먹고 자야지.”
“으음…….”
“도토리묵 해 놨어. 얼른 일어나.”
“저 조금만 더 잘게요…… 조금만…….”
다율이 비몽사몽간에 눈을 감고 말했다. 권지하가 침대맡에 앉아 다율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자 다율은 더욱 몽롱해졌다.
“다시는 안 놓쳐. 절대로.”
멀리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다율은 이미 의식이 흐려졌기에 뜻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고도 한 시간을 더 잔 다율은 벌떡 일어났다.
“헉.”
창문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기에 다율은 주변 가구나 침구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여기…… 고시원 방인가? 그래. 그런 것 같아. 햇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손바닥만 한 고시원 방.
배우님을 우연히 만나서 집으로 돌아오고 또 나를 끌어안아 주신 것.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재워 주신 것. 다 꿈이었나 봐.
“아…….”
너무나 허탈해서 탄식이 나왔다. 혼곤한 의식은 지금 이곳이 권지하의 집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옆에 서늘하게 닿아오는 게 있었다.
뭐지?
쳐다보니 놀랍게도 권지하가 누워 있었다. 그는 한 팔로 다율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진짜였어. 꿈이 아니었어…….
비로소 현실 파악을 한 다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일어나야지.
다율이 슬쩍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권지하가 다율의 손목을 탁 낚아챘다.
"어딜 가려고."
권지하의 목소리는 하나도 잠겨 있지 않았고 졸음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사람처럼 생생한 목소리였다.
“저 물 좀 마시려고요.”
“여기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
“제가 가져다 마시면 되는데.”
“아냐. 넌 여기 있어.”
그렇게 말하더니 권지하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