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한편 다율은 낮 동안 고시원에 머물렀다. 수인 헌터가 무섭기 때문이기도 했고, 굳이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배가 고파진 그는 고시원 총무의 눈치를 보며 라면을 끓였다. 계란을 두 개 넣고 싶었으나 잘못 걸렸다가는 혼이 날 것 같아 딱 한 개만 넣었다.
라면은 맛이 없었다. 분명 따끈한데도 퍽퍽했고, 쓸모없이 짰다.
…배우님하고는 계란 한 쪽을 나눠 먹어도 맛있었는데. 집을 나온 이후로는 전부 맛이 없어.
다율은 라면을 채 반도 먹지 못하고 그만뒀다.
어차피 다 못 먹을 거 같으니까 일단 치워야겠다.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던 중 그는 가벼운 두통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입맛만 없는 게 아니라 몸까지 아픈 건가. 최근에 기운이 많이 허해지긴 했지. 그래도 이건 너무한데.
다율은 머리가 지끈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급격히 나빠지는 컨디션에 그는 방으로 가서 눕기로 했다.
손바닥만 한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여러 차례 한 다음 다율은 똑바로 누워 천장을 봤다.
아프고 배고프고 서럽고. 아주 종합세트였다.
그래도 내일은 권지하의 팬 사인회 날. 그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이 다율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열이 나서 다율은 밤새 뒤척거렸다. 그는 끙끙 앓으며 하루를 보낸 다음,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만져 보니 안 그래도 높은 체온이 더 높아진 듯 아주 뜨끈뜨끈했다.
여름 감기라도 걸렸나. 컨디션이 너무 나쁘네.
그래도 배우님 보러 가려면 정신 차리고 일어나야지.
다율은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한 통증 속에서도 정신력을 발휘했다. 그는 좁아터진 공용 욕실에서 공을 들여 씻은 다음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었다. 권지하가 알아보지 못할 법한 옷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새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기본 흰 티셔츠를 입고, 무늬 없는 반바지를 입었다. 얼굴을 철저히 가리기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성의 있게 착용했다. 아무리 그렇게 해 봤자 늘씬한 체형과 조그마한 머리통, 모자 바깥으로 삐져나온 밝은 갈색 머리가 튄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저 대충 가리기만 하면 남들과 비슷한 모습이 될 줄로만 알고 그는 열심히 모자를 고쳐 썼다.
준비를 마친 다율은 고시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 고시원에 입실한 이후로 낮에 외출을 하는 건 처음이다. 며칠간 어둠 속에서 숨죽여 쓸쓸히 살았더니 밝은 낮의 풍경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어린아이들도, 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외근을 나왔는지 바쁘게 통화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샐러리맨들도 다율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다율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 팬 사인회 행사가 열리는 백화점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오빠 언제 오지?”
“아까 출근했어. 프리뷰 떴던데?”
다율이 살금살금 팬 사인회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무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아직 권지하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로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겠다고 난리 법석을 떨고 있었다.
다율은 사방을 둘러보며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다. 가만 보니 백화점이라 구조가 꽤 복잡했다. 분수광장 중앙에 권지하가 설 단상이 있었는데, 그 뒤쪽에 화려한 장식물과 기둥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저기 숨어서 보면 배우님 뒷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바로 저거다.
다율은 구경꾼들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향해 기둥 하나를 붙잡았다. 빼꼼 고개를 내미니 권지하가 앉을 의자가 아주 잘 보였다. 권지하가 뒤돌아보지만 않는다면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언제 시작해. 나 긴장돼 미치겠다.”
“나도. 오빠 팬 사인회 너무 오랜만이라서 할 말이 너무 많아. 잘할 수 있을까?”
“이번 영화 대박 나라는 말은 꼭 해야지. 명작 나올 삘이던데.”
사인회에 당첨된 열성 팬들은 줄을 지어 대기하면서도 끝없이 권지하 이야기를 했다. 다율은 그녀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권지하는 한 폭의 명화처럼 근사했으니까.
다율이 또다시 콧물을 훌쩍이려던 순간이었다. 꺄악, 소리와 함께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앗. 배우님이다.
백장훈과 안전 요원을 대동하고 권지하가 단상 위로 나타났다. 그는 며칠 사이에 조금 더 인상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요즘은 전화도 안 하시니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씁쓸했지만 다율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반갑네. 다율은 그가 볼 수 없는 뒤편에 있었지만 소심하게 손을 흔들어 보았다.
“오빠!”
“지하 오빠!”
“배우님! 여기 좀 봐 주세요.”
팬들의 분위기가 더 뜨거워졌다. 열광적인 분위기에 맞춰 권지하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더 큰 난리가 났다. 진행 요원들은 당첨자들에게 조금만 진정해 달라며, 미리 안내받은 순서대로 줄을 제대로 서달라고 부탁했다.
“1번 당첨자분부터 단상으로 올라오실게요.”
“오빠!”
1번 당첨자는 권지하와 테이블 하나를 마주 보고 앉아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다율은 광대가 튀어나오고 입이 활짝 벌어지게 웃는 그녀가 이해됐다. 저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권지하와 눈을 맞추고 대화하면 저절로 저렇게 된다.
“오빠 저 손잡아 주세요.”
“물론이죠.”
권지하가 팬과 손깍지를 꼈다. 환상적인 팬 서비스에 장내에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율은 멍해졌다. 저 손의 느낌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으로서, 지금 당첨자가 느끼고 있을 감각이 부러웠다.
“이번에는 2번 올라오실게요.”
다음 팬이 올라왔다. 그녀가 권지하의 머리에 예쁜 화관을 씌워 주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미모에 팬들이 감탄을 했다. 다율 역시 절로 감탄이 나왔다. 지금 모습은 팬들이 많이 찍겠지. 나중에 SNS로 사진 찾아봐야겠다.
안전 요원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권지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살짝 몸을 내밀었다.
그런데 몸을 너무 많이 내밀었던 모양이다. 팬들에게 웃어 주고 있던 권지하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헉. 다율과 권지하의 눈이 마주쳤다. 다율은 너무 놀라 숨 쉬는 것도 잊고 황급하게 기둥 뒤로 숨었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날 알아봤을까? 눈이 마주쳤는데.
아냐. 거리가 이렇게 먼데 날 알아봤을 리 없어. 난 지금 마스크도 썼고, 모자도 썼으니까 얼굴이 안 보였을 거야.
다율은 애써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했다. 자신의 분장이 얼마나 어색한지도 모르고 다율은 자신감을 얻었다.
딱 한 번만 더 보자. 얼굴만 한 번 더 보고 정말 미련 없이 튀는 거야.
다율은 다시 일어나 기둥을 잡고 몸을 내밀었다. 권지하는 다행히 다율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고, 옆에 서 있는 백장훈과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휴. 잘 봤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렇게 멀리서 지켜본 옆모습이라는 게 좀 슬프지만… 그래도 봤으니 됐어. 이젠 정말 안녕이야.
하지만 다율은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미련이 뚝뚝 남아 그를 붙들었다. 가야 한다는 이성과, 그를 두고 차마 갈 수 없다는 감정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율의 건너편 인파 속. 모자를 눌러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인상 나쁜 남자가 있었다. 잘 꾸민 여자들 사이에서 혼자 덩치 큰 남자라 눈에 띄었다. 그를 알아본 다율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남자는 다름 아닌 바닷가 촬영장에서 마주쳤던 수인 헌터였다.
“어… 어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동물의 본능이 발동해 다율에게 경보를 알렸다. 순간 남자가 고개를 다율 쪽으로 돌리려 했다. 다율은 바로 기둥 뒤로 몸을 날려 숨은 다음 뛰기 시작했다.
탁탁. 미친 듯이 달리는 다율과 맞은편에서 오던 쇼핑객들이 어깨를 부딪쳤다. 다율은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잊은 채 최대한의 속도로 도망갔다. 수인 헌터가 쫓아오진 않을까 너무나 두려워 뒤쪽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
고시원으로 돌아온 다율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손바닥만 한 창문도 꽉 닫고 커튼을 친 채로 그저 벌벌 떨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 베갯잇을 흠뻑 적셨다.
배우님, 전 그냥 배우님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냥 멀리서 그리워만 할게요.
다율이 허접하고 낡은 문에 붙은 권지하의 캔 커피 포스터를 바라봤다. 사진 속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서러움이 몰려왔다.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웃고 있는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튿날 다율은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했다. 전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그런 다율을 보고 놀란 티를 냈으나 다율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식품과 음료 상자를 나르고, 재고 정리에 몰두했다. 일에 전념해 어떻게든 권지하의 생각을 멀리하고 싶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권지하에 대한 미련, 애틋함,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덜어 낼 수 없으니 몸이라도 혹사시키는 게 답이다 싶었다.
계산을 평소보다 더 빠르게 하고, 재고 정리를 수시로 했다. 점주에게 괜스레 전화를 해 지시 사항이 없냐고 물으며 다율은 유난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