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63화 (63/95)

63화

그의 육촌 형 권우석은 서울 시내에서 사설탐정 일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셜록 홈즈를 동경하더니 결국에는 명문대를 졸업한 후 내로라하는 직장을 다 마다하고 탐정사무소를 차렸다. 그의 부모님과 친척 어르신들은 크게 화를 냈지만 정작 권우석은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평소에 친하게 지냈으니 권지하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뚜. 뚜- 신호화 함께 곧 전화가 연결되었다.

“형. 나야.”

-지하야. 무슨 일이야.

“나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 네가 부탁을 다 하다니. 어떤 건이야?

“사람 좀 찾아 줘.”

***

다율은 울다 지쳐 잠들었다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용기 내 핸드폰을 켜 보니 부재중 전화는 더 이상 와 있지 않았다. 묘한 아쉬움과 씁쓸함이 느껴졌다.

배우님은 벌써 날 포기하신 걸까. 다율은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다가 바로 정신을 차렸다.

아냐. 배우님한테서 연락이 없는 편이 낫지. 배우님은 배우님의 길을 가야 해. 난 방해물일 뿐인걸.

생각하니 또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다. 아까 그렇게 울었는데도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나 보다. 다시 훌쩍이려는 찰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 배고파.”

아침에 뛰쳐나와서 방을 얻고 짐을 옮길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다율은 텅 빈 배를 문지르다가 슬쩍 일어났다. 이별의 슬픔은 슬픔이고, 먹고살려면 식사는 해야 했다.

마스크를 쓰고 다시 모자를 쓴 다음, 다율은 건물 1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도 건물 바로 옆에 편의점이 위치하고 있었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다율은 빵 코너로 갔다. 땅콩크림샌드가 보여 하나를 집고, 흰 우유도 하나 골랐다. 그다음으로 그가 간 곳은 캐러멜 코너였다.

습관처럼 땅콩 캐러멜을 집어 드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권지하가 때때로 챙겨 주던 간식이었다. 다율이 운전할 때마다 권지하는 옆에서 캐러멜을 까 주었고, 입에 쏙 넣어 주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 불꽃놀이를 보러 갈 때도 이 캐러멜을 먹었다. 그때 자신을 보고 웃던 권지하의 모습, 들떠서 신나 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못 먹을 것 같아. 단맛이 아니라 쓴맛만 날 테니까.

다율은 끝내 캐러멜을 내려놓았다. 계산대로 향하는 동안 그는 맥주 포장지에서, 커피 캔에서 권지하의 얼굴을 봐야 했다.

곧 계산할 차례가 되었지만 점주가 누군가와 소리 높여 통화하느라 계산이 지체되었다.

“나 정말 급하다. 대타 어떻게 안 되겠냐? 아르바이트생이 도저히 안 구해져 미치겠다.”

점주는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그만두었다며 지인에게 하소연 중인 듯했다. 시급도 높고 경력 따위 안 따진대도 급하게 구하려니까 도저히 사람이 안 모인다는 말에 다율의 귀가 쫑긋 섰다.

아르바이트를 할까?

모아둔 돈을 고스란히 쓰면서 지내긴 성격상 안 맞고, 뭐라도 일을 해야할 텐데 여기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권지하의 집과도 떨어져 있고, 딱히 그의 동선과도 겹치지 않는 곳에 있는 데다가 수인 헌터가 여길 알아낼 재간이 없다는 게 다율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야간 아르바이트하면서 낮에는 고시원에서 지내면 괜찮겠는데?

다율은 점주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저… 사장님. 혹시 알바생 필요하세요?”

다율의 말에 사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이고. 혹시 일자리 관심 있어요?”

“네. 저 여기 옆에 고시원 사는데… 야간 아르바이트생 필요하신 거면 저 하고 싶어요.”

“오, 잘 됐네. 우리 야간이 갑자기 비어서 급하게 구하고 있는데 부탁 좀 합시다.”

“네! 저 할게요.”

점주의 마음이 많이 급했는지, 그는 다율과 서둘러 계약서를 작성했다. 주민등록증상으로는 딱히 수인임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다율은 무사히 서류를 꾸밀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일해 줘요. 부탁하네.”

“네, 사장님.”

다율은 바로 그날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예전에 물류 창고 아르바이트도 해 본 적 있고 공장에서 일해 본 적도 있어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은 익숙했다. 다만 신선식품을 관리하고 유통 기한이 지난 것을 폐기 처분 하고, 온갖 담배 종류를 외우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생활력 강한 다율답게, 그는 빠르게 요령을 숙지했다. 앞뒤 타임 알바생들 일을 도와주면서 포스기 다루는 법도 더 능숙하게 가르침 받았고, 신선식품 폐기 요령도 꿰뚫었다.

“다율 씨 일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아르바이트 교대를 온 뒤 타임 알바생이 다율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입고 도와드릴게요. 오늘 새벽에 음료수가 많이 들어오네.”

“아 정말요? 고마워요, 다율 씨.”

두 사람은 배송 트럭에서 물건을 받아 가게 안으로 옮겼다. 내용물은 주로 캔 커피였다.

“아휴. 점장님은 발주를 대체 얼마나 많이 넣으신 거야. 옮겨도 옮겨도 끝이 없다.”

아르바이트생이 툴툴거렸다.

“잘 팔리니까 많이 들여놓으시나 봐요. 근데 무슨 커피길래….”

“권지하가 CF 모델로 나오는 커피요. 아시죠? 내 사랑의 맛은 이 커피를 닮았다. 그 멘트 나오는 CF요.”

다율이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박스에 익숙한 상표명이 적혀 있었다.

“…네. 저도 알아요 그 CF.”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려왔지만 다율은 어색한 웃음으로 감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점주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편의점 손님들은 캔 커피를 엄청나게 찾았다. 두 명에 한 명은 꼭 커피를 구입했기에 다율은 지겨울 정도로 권지하의 얼굴을 자주 봐야 했다. 어떻게 된 게 매번 봐도 새롭게 마음이 미어졌다.

커피가 또다시 대량으로 입고된 저녁 타임. 다율은 판촉물로 나온 권지하의 포스터를 편의점 출입문에 붙였다.

<권지하 팬 사인회>

-커피를 사시면 응모권을 드립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응모하면 즉시 당첨 확인 가능.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 보세요!

“휴….”

다율도 익히 아는 스케줄이었다. 팬 사인회는 이번 서울 출장의 목적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그 스케줄에 함께했을 테지만, 지금은 얼굴조차 볼 수 없다. 팬 사인회장 근처에도 얼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율은 아주 슬픈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처럼 기분이 저조해졌다. 나도 배우님 보고 싶어. 너무… 많이 보고 싶어.

손길이 권지하의 얼굴을 향했다. 비록 차갑고 얄팍한 종이 한 장이었지만, 권지하의 모습을 담고 있었으니 절로 눈물이 고였다.

“이 사진이라도 가질까?”

다율은 잠깐 고민하다가 포스터를 살살 떼었다. 포스터 한 장 가져간다고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다율은 그것이 보물 지도라도 되는 양 소중히 품에 감싸 안았다. 마치 권지하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다율은 종이를 소리 없이 꽉 끌어안았다. 그러면서도 주름이 지거나 구겨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살살 힘 조절을 했다.

퇴근하고 고시원 방 안으로 돌아온 다율은 빵과 우유를 뜯었다. 그다지 입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배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빵을 삼키고 우유를 마셨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다율은 둘둘 말린 포스터를 살짝 폈다. 종이 속 권지하는 너무나 멋있었다. 하지만 그의 실물을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그의 눈빛이 얼마나 꿈결같은지, 품이 어찌나 넓고 아늑한지는 직접 겪어봐야지만 알 수 있으니까.

“…모레 저녁 일곱 시 K백화점 분수광장.”

다율은 팬 사인회 장소가 쓰여진 부분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번 팬 사인회는 공개 행사였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브랜드 측에서 최대한 많은 구경꾼을 유인해 홍보를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다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멀리서라도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내가 아주 멀리서 변장을 하고 서 있다면 누구도 날 못 알아볼 텐데 괜찮지 않을까?

이번 팬 사인회가 끝나면 권지하는 다시 영화촬영장으로 복귀한다. 동해에서 촬영을 마무리짓고 서울로 배경을 바꾸어 또다시 장기 촬영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건 인생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권지하를 맨눈에 담는 일이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아주 먼 발치에서 조금만 보고 오자.

이튿날, 권지하는 육촌 형의 문자를 받았다.

[찾았어. 멀리 안 있던데? XX동 OO고시원에 있더라.]

어이없게도 옆 동네 주소가 날아왔다. 권지하는 그 소식에 당장 신발을 신고 뛰쳐나가려 했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나가려던 순간, 권지하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지금 다율은 권지하와 멀어지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다. 이대로 들이닥쳤다가는 지레 겁을 먹고 또 도망칠 수도 있다.

일단은 있는 곳을 파악했으니 안심해도 좋다. 육촌 형의 말로는 밤에 편의점에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율의 소재에 그렇게까지 애를 태우지는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자, 그렇다면 이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달려가 잡아오고 묶어놔 봤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다율은 상처 입을 것이고, 또다시 도망치려 할 수도 있다. 마음 같아서야 감금을 해 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겁 많은 다율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알았어, 형. 일단은 지켜보고 있어 줘.]

[그래.]

권지하는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화면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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