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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62화 (62/95)

62화

그러고 보니 목적지도 없이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곳 따위 없었다. 다율을 포근하게 안아 줄 장소는 이 지구상에 단 한 곳, 권지하의 집뿐이었는데 거기서 나와 버렸기에 다율은 혼란스러웠다.

혹시 수인 헌터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썼다. 눈만 빼꼼 내놓은 다율은 경계심 많은 초식동물처럼 주변을 살살 살피며 캐리어를 끌었다.

아직은 권지하의 동네를 많이 벗어나지는 못한 상황. 멀리 갈 여력도,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릴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다율은 숙소에서 아주 많이 떨어진 곳까지는 가지 못했다. 기껏해야 같은 구의 가장 끄트머리였다.

너무 멀리 가면 배우님과 영영 이별하는 기분이 드니까 여기 정도는 괜찮겠지. 꽁꽁 싸매고 다니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다율의 눈에 부동산이 들어왔다.

어. 저기 가 볼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유리창에 A4 용지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매매와 전세는 엄두도 못 내고, 다율은 월세 게시물을 쳐다보았다.

“보증금 3000에 월세 45… 이게 제일 싸네.”

다율은 새삼 이 동네 집값이 얼마나 비싼지 깨달았다. 저장 본능으로 월급의 절반을 그러모은 다율이었지만, 높은 보증금은 부담스러웠다. 예전에 매니저 예능 프로그램에서 상금으로 오천만 원을 타서 돈은 제법 있었지만 보증금은 어디까지나 묶이는 돈. 언제 거처를 옮길지 모르는데 큰돈을 깔고 앉을 순 없다.

그러니 위험이 닥쳤을 때 바로 버리고 나갈 수 있을, 보증금이 가벼운 집을 찾아야 했다. 다율이 골똘하게 게시물들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부동산 문이 딸랑, 소리와 함께 열렸다.

“뭐 보시게. 매매? 전세? 요새 이 동네 많이 올라서 투자 목적으로 살 거면 아주 좋아요.”

“아… 그런 건 아니고요. 월세방 알아보고 있어요.”

“월세? 월세는 매물이 아주 귀한데. 일단 들어와 봐요.”

다율은 부동산 주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다율을 테이블 앞에 앉히고 믹스커피 한 잔을 타 주었다.

“감사합니다.”

“월세라면 어떤 구조로 알아보시나? 아파트? 빌라?”

“구조 상관없이 최대한 보증금이 작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 젊은 사람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흠. 알겠어. 내가 원룸 쪽으로 매물을 좀 찾아보지.”

아저씨가 컴퓨터로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잠깐 부동산 안에 침묵이 흘렀다. 다율은 씁쓸한 커피를 마시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새 방을 구하다니. 배우님하고 정말 멀어지는 기분이다. 오늘 밤부터 떨어져서 잘 생각을 하니 너무 낯설어.

“아, 이 동네 원룸은 다 보증금이 이삼천부터 시작해. 이건 무리죠?”

“네. 저는 그렇게까지는 지불을 못 해요. 혹시… 아주 간단하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방은 없을까요…?”

다율이 묻자 아저씨는 쓰읍, 소리와 함께 종이 한 장을 갖고 테이블에 앉았다.

“고시원밖에 못 들어가겠어.”

“네?”

“보증금 50에 50. 지금 손님이 말하는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방은 고시원뿐이야.”

“아….”

다율은 고시원이 비좁고 불편한 공간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여차하면 튈 수 있게 보증금이 작은 곳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 있는지만 좀 알려 주시겠어요?”

“저기 역 앞으로 가서 4번 출구로 가 봐요. 거기에 두어 개 있어.”

“감사합니다.”

다율은 꾸벅 인사를 하고 부동산을 빠져나왔다.

하아. 허탈한 한숨을 내쉬고, 지도 앱을 켜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그런데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도착해 있었다. 대체로 권지하로부터 발신된 것, 이따금 백장훈으로부터 온 것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전화를 걸어 왔을 지하의 마음이 그려졌다. 아무 말도 않고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얼마나 놀라고 화가 났을까. 황당하기도 할 테다.

이건 다 내 잘못이야. 모두 다 내가… 내가 수인이라서.

다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메시지 창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타자를 쳤다.

[배우님, 죄송해요.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어요.]

훌쩍. 다율은 여기가 길가만 아니었으면 목 놓아 울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코를 훔쳤다. 그리고 다시 마스크를 올려 쓴 다음 역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619호 쓰면 되십니다.”

“감사합니다.”

고시원 총무에게서 다율이 키를 받아 들었다. 캐리어를 들고 좁다란 복도를 가로지르기가 힘들 것 같아 몸을 옆으로 트는데, 총무가 다율을 다시 불렀다.

“저기, 근데요.”

“네.”

“공용 김치랑 라면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계란은 하루에 하나 이상 먹지 마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조용히 지내 주시기 바랍니다.”

무뚝뚝한 인상의 총무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면서 다율에게 어서 방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다율은 분명 인스턴트 쌀밥, 김치, 라면, 계란 무제한 제공이라는 광고 문구에 낚여 이 고시원에 들어온 것이었으나 현실은 냉혹하고 치사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 몸 하나 누일 공간이 있다는 게 어디야.

다율은 비좁은 복도를 통과하느라 용을 쓰며 캐리어를 끌었다. 619호 앞에 도착한 그는 조잡한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숨이 턱 막힐 만큼 작은 공간이 나왔다.

“어… 사진하고 좀 다른데?”

아까 총무가 보여 준 사진에서는 길가로 난 창문이 직사각형으로 제법 크게 나 있었으나, 실제로는 정사각형 액자만큼 작았다. 말 그대로 숨구멍 수준이었다.

사진을 늘려서 찍었구나. 속았어.

사람으로 따지면 다리가 길어 보이게끔 찍은 사진이었나 보다. 다율은 잠시 허탈했으나 지금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어차피 임시로 머물 곳이니 그냥 여기에 짐을 푸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짐 가방이 손바닥만 해 정리랄 것도 없었다. 옷가지 몇 벌이 전부고 자신이 소유한 개인적 물건은 그 어떤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뭐라도 해야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야 권지하 생각이 덜 나지 않을까. 가만히 침대에 앉아만 있어 봤자 소용없다 싶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사이렌 소리가 거슬려 진동으로 바꿔 놓은 터라 침대가 부르르 떨렸다. 침대가 하도 허접해서 진동 소리를 삼키지 못한 것이다.

“또 전화하시네.”

아침 10시에 집을 나서 지금이 늦은 오후이니 다율은 거의 반나절 동안 전화를 무시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번 전화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진동을 견뎌내는 핸드폰이 불쌍할 정도로 전화벨은 울리고 또 울렸다. 다율은 죄책감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됐다.

배우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어디 있는지 알면 저와 함께하려고 하실 거잖아요. 그러면 배우님까지 위험해져요.

결국 다율이 선택한 것은 전원 차단이었다. 다율은 과감하게 핸드폰을 끄고 핸드폰을 침대맡으로 던졌다.

“휴우….”

마음이 답답해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다율은 자그마한 창문이라도 열고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삐걱삐걱. 낡은 창틀이 우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6층이라 그런지 창을 열고 침대에 눕자 하늘이 잘 올려다보였다. 아까는 엘리베이터 없는 6층 건물이라고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높은 곳이라 좋았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있는 하늘은 다율의 심경과는 정반대로 아주 맑고 쾌청했다. 언젠가 권지하와 같이 피크닉을 가던 날의 하늘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행복이 길게만 이어질 줄 알았는데, 이제는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인연이 끊겨 버렸다.

훌쩍. 다율은 코를 훌쩍이며 눈을 비볐다. 눈시울이 뜨끈해지며 축축한 눈물이 배어 나왔다.

“보고 싶어요.”

끝내 입에서 진심이 튀어나왔다. 다율은 침대에 엎드린 채 꺼이꺼이 울었다.

***

어둠이 내린 창밖을 보며 권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의 분노와 불안을 지나쳐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초조와 걱정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전화를 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이라고는 집안에 일이 생겼다. 미안하다는 문자뿐이었다. 그것도 구체적인 이유는 말해 주지 않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말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문자였다.

권지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또다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권지하는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얌전히 떠나보낼 생각 따위는 없다. 일단은 찾아야겠지. 찾아서 데려와서, 뭐가 문제였는지 알아보는 게 급선무다. 아니, 이유는 사실 상관없다.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되니까. 행복하게 만들어 줄 자신은 무조건 있으니까.

권지하는 잠깐 생각에 잠긴 끝에 핸드폰을 열었다. 이번에는 다율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 요량이었다. 바로 그의 육촌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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